릴로

# 폐선 터널의 각성

폐선 터널의 어둠이 서서히 물러났다. 준호의 눈이 떠졌을 때, 천장은 낡은 콘크리트였고, 침대는 누군가의 응급실 임시 침대 같은 것이었다. 몸이 무거웠다. 목이 졸린 자국이 남아 있었고, 가슴팍에 모니터링 센서가 붙어 있었다.

강도현이 옆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깊게 패여 있었다.

"깼네."

강도현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손에 들린 커피는 식어 있었고, 그는 밤새 준호를 지킨 것처럼 보였다.

"여기가...?"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에서 나온 음성을 듣는 느낌이었다.

"안전한 곳이다. 거래소에서 나올 때 목이 졸렸으니까." 강도현이 말했다. 그의 눈빛은 예리했다. "서민준과 그 여자가 너한테 뭐를 했어?"

준호는 기억하려고 애썼다. 여자.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여자. 그리고 서민준. 하지만 그 이후의 장면은 물처럼 흘러내렸다.

"박충준이 전화했어. 너한테."

강도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준호의 눈이 벌어졌다. 박충준.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는 죽었던 것 아닌가? 아니면 살았던 건가?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한 순간의 아버지는 따뜻했고, 다음 순간의 아버지는 차가웠다.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박충준이 뭐라고 했는데?"

"너를 만들었다고. 복제라고. 그리고..." 준호의 음성이 떨렸다. "자신이 아버지라고."

강도현이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거칠었고, 주먹이 쥐어졌다. 하지만 순간, 그는 숨을 고르고 다시 앉았다.

"박충준에 대해 말해줄 게 있다."

강도현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치 누군가가 듣고 있을까봐 조심하는 톤이었다.

"그 남자는 국립 신경과학 연구소의 수석 과학자다. 겉으로는. 실제로는 프로젝트 제니시스의 핵심 인물이야."

제니시스. 그 이름을 듣는 것이 두 번째였다. 거래소에서 그 여자가 말했던 이름.

"제니시스가 뭐야?"

"국가 정보기관 산하의 은폐된 신경과학 부서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모든 능력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조직이야. 그리고 박충준은..." 강도현이 준호의 눈을 똑바로 봤다.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을 만든 놈이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너는 그의 첫 번째 성공 사례야. 아니, 정확히는 첫 번째 성공한 복제본."

"복제?"

"기억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들 중 하나. 박충준은 너를 여러 번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너 같은 신원을 가진 다른 개체들도."

준호의 머리가 돌았다. 거래소에서 본 여자. 자신과 같은 얼굴. 그 여자가 말한 말—'실패한 원본'이라는 표현.

강도현이 노트북을 꺼냈다. 화면에 한 남자의 사진이 떴다. 50대 중반쯤 보이는 남자. 차가운 표정. 회색 눈동자.

"이 사진 속의 남자가 박충준이야."

준호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뭔가 깨어났다. 뇌 깊숙한 곳에서.

기억이 아니라, 신체 반응이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신경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손이 주먹으로 쥐어졌다가 펼쳐졌다. 펼쳐졌다가 쥐어졌다.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신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준호? 괜찮아?"

강도현이 물었다.

"내 손이...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야."

준호가 중얼거렸다. 손가락들이 더 빠르게 경련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신경계에 전류를 흘리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가 튀어 올랐다. 그 다음 또 다른 손가락.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하지만 그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강도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 옆 거울을 봐. 천천히."

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작은 거울이 있었다.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봤다.

그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 맞는데, 그 얼굴이 하는 표정이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웃고 있었다. 차갑고 기계적인 웃음. 준호가 지은 적 없는 웃음. 그 웃음은 천천히 변했다. 웃음이 사라졌다. 입이 벌어졌다. 마치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침묵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울 속의 자신은 계속 변했다. 표정이 흐릿해졌다. 마치 누군가 거울 위에 손을 댄 것처럼.

"이건... 뭐야?"

준호가 속삭였다.

"기억 조작 초기 증상이야. 신체 통제 불능. 정체성 붕괴의 전조."

강도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이렇게 있었어?"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어. 거래소에서 나온 후로 계속이야."

강도현이 대답했다. 그는 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 팔은 여전히 경련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신경계가 자신을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박충준이 뭘 했는지 기억나? 거래소에서?"

준호는 눈을 감았다. 기억을 더듬어 들어가려고 했다. 거래소. 환기구. 그리고...

"거래소 지하. 금고실 같은 데가 있었어. 거기 벽에 사진들이 붙어 있었어."

준호가 중얼거렸다.

"뭐가 보였어?"

"사람들. 많은 사람들. 그런데 다 같은 얼굴이었어. 내 얼굴."

준호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사진들 옆에... 번호가 있었어. 1번, 2번, 3번... 그런데 어디서부터 X 표시가 되어 있었어. 마치 누군가 그 사람들을 지워버린 것처럼."

강도현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몇 번까지 X 표시가 있었어?"

"기억 안 나. 하지만... 많았어. 정말 많았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경련했다. 이번엔 더 강하게. 마치 누군가 그의 신경을 더 세게 조이는 것처럼.

강도현이 일어섰다. 창문으로 나갔다. 밖을 봤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너는 프로토타입이 아니야. 너는 생존자야. 박충준이 만든 수백 개의 복제본 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개체."

강도현이 말했다.

"다른 애들은?"

준호가 물었다.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

강도현이 물었다.

"강도현, 나야. 유하은."

강도현이 문을 열었다. 유하은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주변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마치 밤새 울었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보였다.

"준호, 괜찮아?"

유하은이 준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이.

"너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강도현이 물었다.

유하은의 얼굴이 굳었다. 강도현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있었다. 협력이 아닌 다른 것. 목표의 불일치.

"박충준을 알았어. 그는 저항군의 가장 위험한 적이야." 유하은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개인적인 증오심이 섞여 있었다. "내가 온 이유는 준호에게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야."

"이미 말했어."

강도현이 차갑게 대답했다.

"아니. 강도현이 말한 건 정보일 뿐이야. 나는 경험을 말해야 해."

유하은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마치 죽은 손처럼.

"박충준은 단순한 과학자가 아니야. 그는... 신 같은 사람이야. 자신이 만든 것들을 완전히 통제한다고 생각하는 신. 너는 그의 작품이고, 나도 그의 작품이야."

유하은이 준호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 눈에는 깊은 절망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손 안에서 춤을 추고 있어."

"너도?"

준호가 물었다.

유하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만졌다. 그곳에는 아주 작은 흉터가 있었다.

"기억 조작 임플란트. 박충준이 내 머리에 심어줬어. 그 덕분에 나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매일 다른 기억으로 깨어나."

유하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고통이 아니야. 매번 깨어날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뭘 했는지, 내가 누굴 사랑했는지... 아무것도 없어. 그냥 공허함만 있어."

유하은이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박충준은 저항군 내에서 가장 위험한 적이야. 우리 조직의 핵심 인물들도 그의 손에 있거든. 그들이 누구인지, 뭘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고 그게 박충준의 목표야. 모든 사람의 정체성을 통제하는 것."

강도현이 유하은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럼 너는 왜 우리를 도와? 저항군의 목표와 준호를 구하는 게 같은 건가?"

강도현의 질문이 공기를 갈랐다.

유하은이 강도현을 마주봤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팽팽해졌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 목표는 박충준을 제거하는 거야. 준호를 구하는 건 그 과정에 불과해."

유하은이 말했다.

"그리고 준호는?"

강도현이 물었다.

"준호는... 박충준의 약점이야. 아버지가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면, 그건 박충준의 실패를 의미해. 그리고 실패는 죽음으로 이어져."

유하은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정함이 있었다.

준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목표이자 수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죽으면? 박충준을 제거한 후에?"

준호가 물었다.

유하은과 강도현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다시 경련했다. 이번엔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분노도 자신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 조작 증상이 악화되고 있어."

강도현이 준호의 손을 봤다. 경련이 더 심해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신경계에 더 강한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준호, 견뎌. 우리가 박충준을 찾을 거야."

강도현이 말했다.

"박충준의 위치를 알아?"

준호가 물었다.

"아니. 하지만 네 기억 속에 있을 가능성이 있어. 어린 시절 기억 중에."

강도현이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아버지 기억 속 손과는 달리.

준호가 눈을 감았다. 기억을 더듬어 들어가려고 했다. 백두 연구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뭔가 반응이 있었다. 마치 뇌 깊숙한 곳에서 울려 오는 종소리처럼.

그 순간, 갑작스러운 두통이 밀려왔다.

"아!"

준호가 머리를 잡았다. 마치 누군가 두개골을 드릴로 뚫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 준호!"

유하은과 강도현이 준호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준호의 몸은 경련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뒤로 굴렸고, 입에서는 거품이 흘렀다.

"진정제를 줘야 해!"

유하은이 외쳤다.

하지만 그 순간, 준호의 의식이 끊겼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어둠.

그 안에서 준호는 떨어지고 있었다. 끝없는 검은 공간으로.

---

준호의 눈이 떠졌을 때, 천장은 달랐다. 회색 천장. 의료용 조명. 어디선가 기계음이 들렸다. 삑삑삑.

시계를 봤다. 오후 3시 45분.

그런데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시간은 오전 10시 20분이었다.

5시간 25분이 사라졌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에는 통화 기록이 있었다.

정은태. 정은태. 정은태. 정은태. 정은태.

5개의 부재중 전화.

그리고 한 개의 문자.

"우리는 이미 너를 찾았다. 박충준과의 만남은 그만둬. 아니면 너뿐만 아니라 너 주변의 모든 사람이 사라질 거야. —정은태"

준호의 손가락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자신이 5시간 동안 뭘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준호는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은태의 문자가 픽셀 단위로 분해되어 보였다. 그것이 현실인지, 기억 오염인지, 아니면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환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5시간.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자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도려낸 공백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뇌에서 메스로 파편을 제거한 것처럼.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신경계에 보안장치를 설치해 놓은 것처럼. 손가락도 반응하지 않았다. 발도. 오직 눈과 머리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여 보기로 결심했다. 작은 움직임. 검지손가락 하나만. 의도적으로.

준호는 집중했다. 자신의 신경에 명령을 내렸다. 손가락을 움직여. 지금. 이 순간.

검지손가락이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히 움직였다.

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것은 작은 승리였다. 자신의 신체를 다시 통제했다는 증거였다. 무력감 속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신호였다.

준호는 다른 손가락들을 하나씩 움직여 봤다. 중지. 약지. 소지. 엄지. 하나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모두 움직였다.

준호는 손 전체를 움직여 봤다.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자신의 의지로. 누군가의 조종이 아니라.

그 느낌은 마약 같았다. 자신의 신체를 다시 소유하는 쾌감.

하지만 그 쾌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거울이 보였다. 침대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작은 거울.

준호는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웠다. 이번엔 웃음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거울 속의 자신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말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음성이 여러 겹으로 들렸다. 마치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준호... 이준호... 이준호..."

그 음성들이 준호의 이름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음성들은 왜곡되어 있었다. 어떤 음성은 높았고, 어떤 음성은 낮았다. 어떤 음성은 천천히 들렸고, 어떤 음성은 빨랐다.

"이준호... 이준호... 이준호..."

음성들이 점점 커졌다.

"유하은!"

준호가 외쳤다.

문이 열렸다. 유하은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주변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준호? 깼어?"

유하은이 준호에게 다가갔다.

"내 손이...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웠다. 이번엔 준호는 자신의 손이 자신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유하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얼마나 오래 있었어?"

준호가 물었다.

"6시간 18분. 강도현이 119에 신고했어."

유하은이 대답했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내가 뭘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있었어. 눈을 뜨고 있었는데 반응이 없었어. 마치..."

유하은이 말을 멈췄다.

"마치?"

"마치 시체처럼."

유하은이 완성했다.

준호의 심장이 멈춘 듯했다. 자신이 죽었던 건가? 아니면 자신의 또 다른 버전이 죽었던 건가?

"강도현은?"

"밖에 있어.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있어. 저항군이라고 하는 사람들."

유하은이 말했다.

준호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정은태. 정은태. 정은태. 정은태. 정은태. 다섯 번. 첫 번째 전화는 오전 10시 32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는 오후 3시 38분이었다. 5시간 6분의 간격.

누군가 정확하게 시간을 계산한 것 같았다.

"유하은, 정은태가 누구야?"

준호가 물었다.

유하은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은태가 누구냐고 물었어."

준호가 다시 물었다.

"박충준의 부하야. 아니, 정확히는 박충준의 또 다른 피조물이야. 너처럼."

유하은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정은태가 나한테 뭘 했어?"

"모르겠어. 하지만 강도현은 그 시간 동안 뭔가 데이터가 전송됐다고 말했어. 너의 신경 임플란트 관련 정보들이."

유하은이 말했다.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번엔 몸이 움직였다. 마비 상태가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누군가의 계획일 수도 있었다.

"강도현한테 연락해."

"뭐라고?"

"박충준의 위치. 강도현이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정은태가 누구인지도."

준호가 말했다.

유하은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뭔가를 타이핑했다. 몇 초 후, 휴대폰이 울렸다.

"강도현이야."

유하은이 말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준호에게 건넸다.

준호는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준호?"

강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있었다.

"내 기억이 5시간 사라졌어."

준호가 말했다.

침묵. 강도현의 숨소리만 들렸다.

"정은태가 자신을 찾았대. 그리고... 내 뇌에 뭔가 했어."

"기억 조작?"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본 것 같은 게 있어. 어떤 기계... 바늘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박충준이 내 신원을 정했다고. 마치 나를 실험 대상처럼."

준호가 말했다.

"백두 연구소를 찾았어."

강도현이 말했다.

"어디?"

"강원도 강릉 근처. 산 속 깊숙한 곳에 있어. 공식 기록으로는 '국립 신경과학 연구소'인데, 실제로는 제니시스의 본부야. 그리고 정은태는..."

강도현이 말을 멈췄다.

"정은태가 뭐야?"

"박충준의 직접 피조물이야. 너처럼. 하지만 너와 달리 정은태는 완전히 통제되고 있어. 박충준의 원격 조종 프로토콜의 완성형. 너는 그의 실패작이고, 정은태는 그의 성공작이야."

강도현이 말했다.

"그럼 정은태가 나한테 뭘 했어?"

"지난 6시간 동안 대규모 데이터 전송이 감지됐어. 너의 신경 임플란트 관련 정보들이야. 그리고..."

강도현이 다시 말을 멈췄다.

"뭐가?"

"타이밍이 너무 정확해. 너의 의식 상실 시간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박충준이 너를 통해 뭔가를 실험하고 있는 것 같아. 정은태를 통해."

강도현이 말했다.

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진 5시간 동안, 자신이 실험 대상이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뭘 했는지 알아낼 수 있어?"

준호가 물었다.

"아니. 그 시간대의 영상은 모두 삭제됐어. 그리고 네 휴대폰 위치 정보도.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시간을 지워버린 것처럼."

강도현이 말했다.

준호는 정은태의 문자를 다시 읽었다. 우리는 이미 너를 찾았다. 박충준과의 만남은 그만둬. 아니면 너뿐만 아니라 너 주변의 모든 사람이 사라질 거야.

"강도현, 백두 연구소로 가자."

준호가 말했다.

"미쳤어?"

강도현이 외쳤다.

"박충준이 나한테 뭘 했는지 알아야 돼. 그리고 정은태가 뭘 원하는지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준호가 말을 멈췄다.

"뭐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돼. 정말로."

준호가 말했다.

침묵. 강도현의 호흡만 들렸다.

"내일 아침 6시. 지하철 역 앞. 거기서 만나자."

강도현이 말했다.

"알겠어."

준호가 말했다.

통화가 끝났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공포인지 기대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자신의 신경계에 심은 반응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유하은이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정신 차렸어?"

유하은이 물었다.

"정신? 내가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박충준이 너한테 뭘 했는지... 혹시 기억나?"

유하은이 물었다.

준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은 완전한 공백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 부분을 정교하게 도려낸 것처럼.

"아니. 완전히 없어."

준호가 말했다.

그 순간,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준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 아들."

목소리는 기계음을 통해 왜곡되어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 속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무서운 기억 속 목소리.

"아버지?"

준호가 물었다.

"맞아. 난 박충준이야. 그리고 넌 내 가장 완벽한 작품이야."

박충준이 말했다.

유하은이 준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왜냐하면 넌 알아야 돼. 지난 6시간 동안 내가 뭘 했는지. 넌 지금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것이 환각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너의 뇌에 심어놓은 것이거든."

박충준이 말했다.

"뭘... 심어놨어?"

준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의 정체성. 아니, 정확히는 정체성의 파편들. 너는 하나가 아니야, 준호. 너는 여러 개의 너야. 그리고 그 중 어느 것이 진짜 너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박충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섞여 있었다. "지난 6시간 동안 나는 너의 신경계에 새로운 프로토콜을 심었어. 정은태를 통해. 그것은 너의 모든 행동을 내가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게 해줄 거야. 너는 내 손가락 끝에서 춤을 추게 될 거야. 마치 인형처럼."

박충준이 말했다.

"그건... 거짓이야."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자신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거짓? 지금 너의 손을 봐. 움직이고 있지 않아?"

박충준이 말했다.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신경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준호. 넌 나의 완벽한 도구가 되어야 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넌 사라져야 돼. 너의 정체성, 너의 기억, 너의 의지. 모두."

박충준이 말했다.

"넌 나의 기억일 뿐이야. 그리고 기억은 사라져야 돼."

박충준이 말했다.

통화가 끝났다.

준호의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두통이 밀려왔다. 이번엔 더 강했다. 마치 자신의 뇌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준호는 비명을 질렀다.

유하은이 준호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준호의 몸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그의 의식은 또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준호는 자신이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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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눈이 떠졌을 때, 천장은 또 달랐다. 이번엔 검은색이었다. 아니, 검은색이 아니라 어두웠다. 마치 밤하늘처럼.

시계를 봤다. 오전 11시 47분.

그런데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시간은 오후 3시 45분이었다.

시간이 역행했다.

준호는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있었다. 영상 파일. 제목은 '이준호_어린시절_영상_001'.

준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어린 아이가 나타났다. 자신의 어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하는 행동은 낯설었다. 그 아이는 웃고 있었다. 차갑고 기계적인 웃음. 준호가 어릴 때 지은 적 없는 웃음.

그리고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 낯설었다.

"나는 이준호가 아니야. 나는 박충준의 기억이야. 그리고 기억은 사라져야 돼."

영상이 끝났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공포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자신의 신경계에 심은 반응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침대 옆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웃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웃음인지, 아니면 박충준의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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