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욕실 거울 앞에서 준호는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윤곽만 보였다. 정은태의 기억에서 본 그 얼굴—피해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자신과 거의 같은 얼굴.

손을 들어 거울에 닿았다. 유리는 차가웠다. 현실였다. 그런데 손가락 끝의 감각과 정은태의 기억 속 차가운 바닥의 감각이 겹쳐졌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그 순간 시야 가장자리가 일렁거렸다. 마치 물 위의 상이 흔들리듯이.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증상. 능력을 쓸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였다. 준호는 한참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다섯 번째 울림에 화면을 눌렀다.

"누세요."

침묵. 5초, 10초. 준호가 끊으려 하자 음성이 나왔다. 여성의 목소리. 낮고 차분했다.

"정은태를 더 이상 건드리지 마."

준호의 손가락이 경직됐다.

"누구예요?"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너가 알아야 할 것과 알면 안 될 것의 차이다. 그 차이가 생명과 죽음의 차이가 될 수 있다."

"정은태의 의뢰를 받았는데—"

"의뢰는 끝났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그 기억 데이터를 모두 삭제하고, 정은태와는 더 이상 연락하지 마. 네가 본 것들을 기억에서도 지워야 한다."

통화가 끊겼다.

준호는 한참을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전화 기록을 확인했다. 발신자 정보는 여전히 없었다. 통화 시간은 정확히 1분 37초. 그 여성이 말한 시간과는 맞지 않았다. 녹음되었거나 암호화된 신호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떨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뇌에 직접 신경을 자극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손끝이 저렸다. 제니시스의 추적 신호일 수도 있었다.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거래소에 다시 가야 했다. 서민준에게 물어봐야 했다.

---

거래소는 자정을 넘어서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준호는 폐선 터널 입구에서 서민준의 신호를 기다렸다. 핸드폰으로 암호 메시지를 보냈다.

10분 뒤 서민준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은 읽힐 수 없었다.

"이 시간에 온 이유?"

"정은태의 기억 데이터. 다시 봐야 한다."

서민준이 가만히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불가능하다."

"왜?"

"그 데이터는 벌써 회수됐다."

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누가?"

"정은태의 사람들. 의뢰 완료 후 24시간 내에 모든 기억 데이터를 회수하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다."

"계약서는 없었다."

"있었다. 너는 기억했을 뿐 읽지 않았다."

그 말이 준호의 뇌를 관통했다. 기억했을 뿐, 읽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이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밀려왔다. 서민준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이 남자와 말하는 것은 모래사막에서 길을 찾는 것과 같았다.

"그 기억 속에서 본 피해자. 그게 누구인지 알아?"

서민준이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어둠 속으로 피어올랐다.

"너처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기억을 추출당한 능력자는 자동으로 우리 목록에 올라간다. 그 사람도 목록에 있었다. 이름은 이준호."

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뭐라고?"

"이준호. 너와 같은 이름이다."

서민준은 담배를 깊게 빨고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그 사람은 사망했나?"

"우리가 알기로는 그렇다. 2년 전. 신원 확인이 안 되는 시신이었다."

"2년 전?"

"정확히는 2년 3개월 전이다. 서울역 인근 폐건물에서 발견됐다. 신원 확인 불가능. 경찰청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다."

준호는 서민준에게서 눈을 돌렸다. 폐선 터널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서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하나. 정은태가 말했다. 그 기억이 진짜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위조된 기억일 수도 있다고."

준호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

강도현을 만난 것은 새벽 3시였다. 24시간 편의점 주차장이었다. 강도현은 이미 커피를 들고 있었다. 준호의 모습을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너 얼굴 봐라. 또 기억 능력 썼다?"

"강도현."

"뭐?"

"2년 전에... 내가 경찰을 그만둔 그 사건. 뭐가 있었어?"

강도현이 커피를 내려놨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컵을 누르고 있었다.

"왜 묻지?"

"그냥."

"거짓말하지 마. 너는 거짓을 못 쓴다."

준호는 강도현 앞에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삑삑거렸다.

"기억이 없어.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강도현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오래된 상처를 가진 사람의 눈이었다.

"기억이 없다고?"

"구멍이 있어. 그 부분만. 마치... 누군가 그 부분을 깎아낸 것처럼."

강도현이 일어나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준호도 따라갔다. 강도현은 커피를 다시 사고 나왔다. 두 사람은 주차장 가장자리에 섰다. 강도현의 표정은 복잡했다. 돕고 싶으면서도 뭔가 더 큰 것에 얽혀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사건은... 시신이 나왔다."

"시신?"

"너와 같은 얼굴의. 신원 불명이었어. 정확히는 너와 거의 같은 얼굴이었다."

강도현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사진이 떠올랐다. 시신의 사진이었다. 준호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그것은 자신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피부가 창백했고, 눈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게 너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너를 찾았을 정도다. 하지만 넌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강도현이 사진을 내려놨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신체 증상이 악화되고 있었다. 눈앞이 일렁거렸다. 마치 시신의 얼굴이 살아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넌... 달라졌다."

"어떻게?"

"기억이 흐릿해졌어. 넌 계속 물었어. '내가 그 현장에 있었나?'라고. 마치 너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 이후로 넌 경찰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준호가 강도현을 바라봤다. 강도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의 눈 어딘가에 복수심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복수심과 준호를 돕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뭔가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 없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 시신이 누구였어?"

"모른다. 그게 문제야. 신원 확인이 안 됐다. 경찰청에서는 신원 미상 시신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강도현이 담배를 피웠다. 그의 손가락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나는 그게 이상했다. 너와 같은 얼굴인데 신원이 없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조사했다."

"뭘 찾았어?"

"박충준이라는 과학자. 신경과학 박사. 정부 연구소에 근무 중이다."

강도현이 준호를 마주봤다. 그 순간 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깊은 물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것이 떠오르려는 느낌이었다. 준호의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경 신호의 간섭이었다.

"그리고..."

강도현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 박충준의 아들이 너다."

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세상이 느려졌다. 아니, 정지했다. 강도현의 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의 목소리.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준호야. 준호야."

"내 아버지?"

"넌 아버지가 없다고 했어. 어릴 때 사망했다고."

"맞아. 그렇게 기억하는데—"

"기억이 위조됐을 수도 있다."

강도현의 말이 준호의 뇌를 찢어놓았다. 준호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오한이 밀려왔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신경계를 직접 건드리는 것처럼.

"내가 조사한 박충준은 10년 전부터 아무 공식 활동도 없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지만 정부 연구소 인사 기록에는 여전히 그의 이름이 있다. 현직 근무 중이라고 표시돼 있다."

준호가 담배 연기를 마시고 있었다. 강도현의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였다. 그것도 현실였다. 하지만 현실이 점점 얇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종이처럼.

"그리고 하나 더. 2년 전 그 시신이 발견되기 직전, 박충준이 어딘가로 간 기록이 있다. 정부 연구소에서. 그 이후로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로?"

"백두 연구소. 강원도 산골에 있는 정부 시설. 공식적으로는 신경과학 연구센터다. 하지만 그곳의 위성 사진을 보면... 매우 이상한 구조를 하고 있다. 지하가 깊다. 매우 깊다."

준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뇌에서는 기억이 자동으로 정렬되고 있었다. 기억이 아니라 단편들이었다. 퍼즐 조각들. 하나하나가 맞춰지지 않았다. 대신 더 큰 공백을 드러냈다. 그 공백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실패했어."

강도현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낮았다.

"넌 뭔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너를 지우려고 한다."

"왜?"

강도현은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밤하늘로 피어올랐다. 그의 눈이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모른다. 하지만 내가 확실한 것은 하나다. 너는 위험하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너는 위험하다. 그리고..."

그는 준호의 눈을 마주봤다.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강도현이 잠깐 멈췄다. 그의 얼굴에 갈등이 드러났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풀어야 할 것도 있다. 그 사건에 얽힌 누군가에 대한 복수. 그리고 그게 너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도현은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준호를 구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분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

거리를 배회했다. 준호는 새벽 4시부터 5시, 6시까지 서울의 거리를 걸었다. 강도현의 말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박충준. 아버지. 2년 전의 시신.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수렴하려 했다.

태양이 뜨기 시작했다. 하늘이 붉어졌다. 준호는 한강변에 앉았다. 물이 흘렀다. 계속 같은 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물은 항상 다른 물이었다. 마치 자신처럼.

거리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다. 준호는 그들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이 자신과 겹쳐 보였다. 강도현이 말한 시신의 얼굴. 자신의 얼굴. 그 얼굴이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시야가 흔들렸다. 눈앞의 상들이 중첩되었다. 현실감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이 낯설었던 것처럼, 이제 세상 전체가 낯설어지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가 아니었다. 거래소의 번호였다. 서민준이었다.

"지금 어디야?"

"밖에."

"거래소로 와. 누군가가 너를 찾고 있다."

"누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말했다. 너와 같은 얼굴의 여자가 있다고. 그리고 그 여자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준호의 손가락이 경직됐다.

"여자?"

"응. 그 여자는 지금 거래소에 있다. 그리고..."

서민준이 잠깐 멈췄다.

"...그 여자도 기억 능력이 있다고 했다."

통화가 끊겼다.

---

거래소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폐선 터널이 점점 좁아졌다. 아니, 자신의 시야가 좁아졌다. 터널의 끝에서 불이 보였다.

서민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여자였다.

준호는 멈춰 섰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세상이 다시 멈췄다.

그 여자는 자신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이 아니라, 실제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준호가 아니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의 초점이 달랐다. 움직임이 달랐다. 호흡이 달랐다. 마치 다른 영혼이 그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그 여자가 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그 웃음은 혐오로 가득했다.

"드디어 만났네."

그 목소리는 준호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음정이 달랐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후, 약간 높게 재생하는 것처럼.

준호가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그 여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 움직임은 매끄러웠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준호는 자신이 그렇게 움직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너의 기억 속에 있었어. 그리고 너는 내 기억 속에 있었어. 우리는 같은 것에서 나왔지만,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어."

"뭐라는 거야?"

"프로젝트 제니시스. 넌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이야. 하지만 곧 기억할 거야."

그 여자가 또 다시 웃었다. 이번엔 분명했다. 그것은 준호가 절대 낼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 속에는 준호에 대한 분명한 혐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우리가 같은 얼굴인 이유는... 우리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야. 아니, 정확히는 같은 사람이어야 했는데, 뭔가 잘못됐어."

준호가 물었다.

"뭐가 잘못됐어?"

그 여자의 웃음이 멈췄다. 그 순간 그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냉정한 판단뿐이었다.

"너. 넌 실패작이야. 처음 버전. 불완전한 개체. 프로젝트 제니시스의 초기 시험 대상이었지. 하지만 너는 예상을 벗어났어.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됐어. 그래서 너는 폐기 대상이 됐다. 나는 그 다음 버전이야. 완벽한 버전."

그 여자가 준호에게 더 가까워졌다. 서민준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엔 준호의 팔을 잡은 게 아니었다. 그의 손이 준호의 목 뒤쪽에 닿았고, 무언가 작은 기계 장치가 활성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준호는 저항하려 했다. 몸을 비틀고,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자신의 신경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신경계를 직접 차단하는 것처럼. 제니시스. 그 이름이 자신의 뇌에 울렸다.

서민준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무감정했다. 그는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명령을. 아마도 그 여자의 명령을.

그 여자는 준호에게 더 가까워졌다.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그 여자의 얼굴 위에 투사해볼 수 있었다. 완벽하게 겹쳤다. 눈, 코, 입. 모든 것이. 하지만 그 여자의 눈은 준호의 눈이 아니었다. 그 눈 속에는 다른 의지가 살아 있었다. 냉정하고 절대적인 의지.

"프로젝트 제니시스는 하나의 기억에서 여러 개의 개체를 만들려고 했어. 우리처럼. 같은 기억을 가지고, 하지만 다른 명령을 받는. 완벽한 통제의 시스템이야."

준호의 입이 떨렸다. 몸도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신경 신호가 자신의 몸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럼... 난 누구야?"

그 여자가 준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차가웠다. 현실의 손이었다. 하지만 감각은 기억 속의 손처럼 느껴졌다. 피해자의 손. 정은태의 기억 속에서 느꼈던 그 손. 아니, 정은태도 이 손을 느꼈던 것인가. 정은태도 같은 프로젝트의 일부였던 것인가.

"넌 실패한 버전이야. 아니, 정확히는 처음 버전이야. 그리고 나는... 개선된 버전이야. 완벽한 버전."

그 여자가 준호의 얼굴에 손가락을 올렸다. 준호의 이마에. 마치 낙인을 찍듯이.

"너의 기억이 이상한 이유는 넌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야. 넌 처음부터 부서진 개체였어. 그래서 너를 지워야 해. 너 때문에 모든 계획이 흐트러지고 있어."

준호는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서민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다리를 걷어올렸다. 몸을 굴렸다. 하지만 자신의 신경이 점점 더 경직되고 있었다. 신체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제니시스의 신경 신호가 자신의 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준호의 저항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발버둥치지 마. 넌 이미 끝났어."

그 여자가 준호의 눈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준호의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강도현의 얼굴이 보였다. 아파트의 거울이 보였다. 정은태의 기억 속 피해자의 얼굴이 보였다.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을 지워줄게. 그럼 넌 자유로워질 거야."

준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몸을 틀었다. 그 순간, 자신의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리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신경 신호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폐선 터널의 불이 깜빡였다.

그 여자의 얼굴이 변했다. 아니, 그 여자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로 변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얼굴이 그 여자의 얼굴로 변했다. 준호는 더 이상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의식 속에서 준호는 한 가지만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자신의 이름도, 자신의 기억도, 자신의 정체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어둠 속에 떠 있는 한 점의 의식. 그것도 곧 사라질 것 같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

"이제 시작이야."

어둠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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