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균열
지하철 폐선 터널의 습한 공기가 폐를 조인다. 이준호는 상담실의 검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대상자의 이마에 손을 올렸을 때, 세상이 반으로 쪼개진다.
검은 터널 같은 의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다른 누군가의 감각이 물밀듯 밀려온다.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뚫고 흐르는 감정—심장을 조르는 공포.
'제발... 하지 말아...'
그것은 대상자의 목소리였다. 아니, 준호의 목소리였다. 기억 속에서. 준호는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산다. 자신의 몸은 검은 의자에 있지만, 의식은 어둡고 좁은 방에 갇혀 있다.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인다. 산소가 끊긴다. 망막이 충혈된다. 그리고—
깨어난다.
검은 의자로 돌아온다. 손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호흡이 가쁘다. 의뢰인은 건너편 소파에서 담배를 피웠다.
"끝났나?"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수 없었다. 그 감각이 아직 피부에 붙어 있다.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이는 감각. 산소 부족으로 인한 두뇌의 화끈거림. 죽음 직전의 그 검은 감각이—
떠나지 않는다.
보통은 5분 안에 기억에서 깨어나면 신체는 현재로 돌아온다. 하지만 오늘 따라 그 감각이 남아 있다.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있다. 자신의 손가락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확인했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손이 그 손가락을 조르는 감각이 계속된다.
"기억 추출 결과는?"
의뢰인이 물었다. 준호는 포켓에서 메모리 칩을 꺼냈다. 엄지손가락만한 은색 칩. 이것이 모든 것을 담는다. 그 사람의 형에게 살해당하는 기억. 그 절망. 그 고통.
"완벽하게 추출됐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기침을 했다.
의뢰인이 돈 다발을 내밀었다. 오백만 원. 기억 한 건의 표준 가격이다. 준호는 받았다. 손이 떨렸다. 의뢰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일은?"
"없습니다."
준호는 일어섰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그 목조르는 감각이 자신의 목에 진짜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거울을 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목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느낀다. 그 감각.
'이상한데.'
거래소의 통로를 나간다. 폐선 터널 깊숙이 파고든 지하실. 벽에 붙은 형광등이 깜박인다. 이 터널은 한때 도시의 동맥이었다. 이제는 다른 혈액을 흐르게 한다. 기억의 혈액. 타인의 정체성이 거래되는 이곳.
거래소의 중앙 홀에는 여러 상담실이 있다. 각각의 방음 처리된 방 안에서 능력자들이 의뢰인의 기억을 훔친다. 아니, 판다. 법적으로는 '추출 서비스'라고 부른다. 기억을 강제로 빼앗으면 사형이지만, 대상이 동의하고 기억을 '추출'해서 팔면 법의 사각지대다. 이것이 제니시스가 만든 세상이다.
"준호, 여기."
소파에 앉은 여자가 손을 들었다. 미라. 이 거래소에서 만난 또 다른 능력자다. 준호는 앉았다.
"너도 구멍 있지?"
미라의 눈이 준호를 뚫어본다. 옅은 회색 눈. 마치 기억이 빠져나가서 남은 빈 공간처럼 보인다.
"무슨 말이야?"
"기억 구멍. 넌 있잖아."
준호의 심장이 철썩 내려앉았다. 자신이 숨기려던 것.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려던 것. 미라가 말했다.
"나도 있어. 작년 4월부터 3개월이 통째로 없어."
미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팔뚝에 선명한 주사 자국들이 보였다. 여러 번 반복된 흔적이었다.
"의사는 '트라우마 기억 억압'이라고 했지만, 이게 뭐냐고 물어봤어. 그 3개월 동안 내 몸에 뭐가 있었는지 설명이 안 돼. 팔뚝에 이 자국들, 목 뒤의 수술 흔적, 그리고..."
미라는 목 뒤를 드러냈다. 작은 흉터가 있었다.
"이건 뭐라고 생각해? 넌 알지? 그게 아니야."
"난 그런 거 없는데."
준호는 일어나려 했다. 미라가 손목을 잡았다.
"제니시스가 우리를 감시해. 기억 능력자들. 특히 구멍이 있는 애들."
미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절망적인 톤이었다.
"넌 다른 케이스야. 넌 신원 확인도 못 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그들이 우리를 찾으면..."
미라는 말을 멈췄다. 그 뒤에 뭔가 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찾으면?"
"기억이 없어서 모르지."
미라의 손가락이 준호의 손목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우리 같은 애들은 살아갈 수 없어. 그들이 우리를 만들고 있어. 뭔가로."
준호는 그 손을 털어냈다.
"난 거기 관심 없어. 그냥 일하고 살아가면 돼."
거래소를 나간다. 폐선 터널을 통해 지상으로. 준호의 아파트는 도시 변두리 낡은 건물이다. 격자 무늬 창문. 녹슨 에어컨 실외기. 이곳이 준호의 유일한 안전지역이자 감시당하는 감옥이다.
방에 들어간다. 한구석에는 기억 추출 장비가 숨겨져 있다. 의료용 뇌파 측정기. 신경 신호 증폭기. 메모리 칩 리더기. 모두 불법이다.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본다. 천장에 난 물얼룩. 그것을 보면서 준호는 생각한다. 자신이 누구인가. 언제부터 이렇게 살았는가. 경찰 시절은 기억한다. 하지만 그 이후는?
'2년 전. 뭔가 있었어.'
기억이 끊어진다. 마치 필름이 끊긴 영화처럼. 그 이전은 경찰이었고, 그 이후는 기억 거래인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 준호는 받았다.
"이준호?"
남자의 목소리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누구십니까?"
"나는 정은태라고 한다. 서민준에게서 추천받았다. 당신이 최고의 기억 능력자라고."
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일반인은 거래소의 존재를 모른다. 거래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능력자이거나, 조직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뭔가 도와드릴까요?"
"살인 사건의 기억을 추출해야 한다. 피해자의 기억. 그 사람이 죽기 직전의 감각까지 포함해서."
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이건 일반적인 의뢰가 아니다. 살인 사건의 기억을 추출한다는 것은, 그 사건이 공식적으로 수사되고 있다는 뜻이다.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비용은?"
"천만 원."
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기억 한 건의 표준 가격이 오백만 원인데, 천만 원은 이중의 가격이다. 그것은 비용이 아니라 협박이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유혹. 그리고 거부하면 위험하다는 신호.
'이건 제니시스인가?'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다.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다. 맞다.
"언제?"
"내일 밤. 같은 거래소."
전화가 끊어진다.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그 목조르는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감각이 더해진다. 위험감. 뭔가 큰 일이 시작되려는 그 느낌.
준호는 눈을 감았다. 의뢰인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형에게 살해당하는 그 기억. 죽음의 감각. 그리고 그 감각 속에서 느꼈던 그것—
'쾌감?'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의 물얼룩을 본다. 그것이 뭔가처럼 보인다. 마치 얼굴처럼.
폐선 터널의 어둠 속에서 미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넌 다른 케이스야.'
준호는 일어났다. 손이 떨렸다. 자신의 손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손을 펼쳐본다.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다. 항상 다섯 개였나?
다음 날 밤. 거래소.
준호는 상담실에 앉았다. 건너편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은태. 기업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기업가의 눈이 아니었다. 뭔가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의 눈이었다.
"피해자의 기억을 원한다. 죽기 직전의 그 순간까지."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목소리는 전화 목소리와 같았다. 그리고 이 사람의 눈은—
준호는 손을 이마에 올렸다. 정은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세상이 반으로 쪼개진다.
어둡다. 매우 어둡다. 이곳은 어디인가. 준호는 기억 속에서 눈을 뜬다. 폐쇄된 공간. 회색 벽.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너는 실패작이 아니었나?"
그 목소리를 아는가? 준호는 알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끊어진다. 마치 누군가 필름을 잘라낸 것처럼.
어둠 속에서 준호는 냄새를 맡는다. 소독약의 날카로운 냄새. 그 아래 뭔가 다른 냄새. 혈비린내. 그리고 기계음. 규칙적인 기계음. 심전도 모니터 같은. 준호의 피부에 식은 기운이 흐른다. 차갑다. 이 방은 매우 차갑다.
"저는... 누구인가요?"
기억 속의 누군가가 묻는다. 더 어린 목소리다. 준호는 그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호는 기억 속에서 책상 위의 사진을 본다. 어린 아이의 사진. 파란 줄무늬 셔츠를 입은 아이. 그 아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 부분을 지우려는 것처럼.
"좋아. 이제 알았지?"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린다. 정은태의 목소리다.
"넌 이미 여기 있었어. 처음부터."
준호는 깨어난다.
상담실의 검은 의자로. 정은태의 얼굴이 준호를 바라보고 있다.
"끝났나?"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 사진 속의 아이. 그것은 준호였다. 하지만—
"뭐가 문제야?"
정은태가 물었다. 준호는 메모리 칩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린다.
"기억을 추출했습니다."
"그리고?"
준호는 정은태를 직시했다. 그 남자의 눈에 뭔가 불안이 스쳤다. 아주 잠깐, 흔들렸다.
"당신의 기억 속에 제가 있었어요. 어린 아이로."
정은태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소리야?"
"파란 줄무늬 셔츠를 입은 아이. 그런데 저는 그런 옷을 입은 적이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준호는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어둠. 소독약 냄새. 기계음. 그리고 그 차가운 감각.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이준호, 넌 이제 특별한 프로젝트의 일부야."
정은태가 말했다. 목소리가 변했다.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그리고 넌 이미 알고 있어. 다만 잊고 있을 뿐이야."
준호는 정은태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 말이 현실인지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뭔 소리야?"
목소리가 나왔다. 준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들렸다.
정은태는 일어섰다. 천천히,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그의 움직임이 준호의 시야에 선명하게 박혔다. 마치 여전히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서민준 회장은 너를 믿지 말아야겠군."
정은태가 거래소의 주인에게 무언가를 신호했다. 그러자 두 명의 남자가 상담실 문으로 들어왔다. 복장은 평범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군인이나 경호원처럼 정확했다.
"날 데려가?"
준호가 물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기억 추출 후의 피로감이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공포.
"아직 아니야. 너는 너의 일을 계속해. 계속 기억을 파는 거야."
정은태의 목소리가 준호의 뇌에 직접 박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내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 기억은—"
정은태는 메모리 칩을 들었다. 준호가 추출한 칩이었다.
"나한테 맡기지."
정은태가 나갔다. 두 남자도 함께 나갔다. 상담실 문이 닫혔다. 준호는 홀로 남겨졌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검은 테이블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 얼굴이 준호의 얼굴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거래소의 복도를 지나가며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맞다. 그런데 왜 자꾸 모자라는 느낌일까?
서민준의 사무실로 가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준호는 거울을 봤다. 아니다, 엘리베이터 벽이 거울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그 속 자신의 모습이 흐릿했다. 물속처럼. 마치 누군가 그 이미지를 일부러 흐리게 하려는 것처럼.
"이준호."
서민준이 준호를 불렀다.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정은태가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나갔어. 뭐 했어?"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뭘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정은태의 기억 속에서 본 것들. 어두운 방. 소독약 냄새. 차가운 감각. 그리고 그 사진.
"기억을 추출했어. 그게 다야."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민준은 그것을 눈치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 붕괴 증후군이 진행되고 있나?"
"아니야."
"정말?"
서민준이 일어섰다. 준호에게 가까워졌다. 마치 동물을 검사하듯이. 그의 손이 준호의 이마를 터치했다. 따뜻했다. 하지만 불쾌했다.
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색감이 변했다. 서민준의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보였다가 파랗게 변했다. 그의 손이 준호의 이마에 닿아 있는데, 그 손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손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손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처럼.
"최근에 몇 건을 했나?"
"열다섯 건."
"이번달?"
"열다섯 건."
서민준이 손을 떼었다. 준호의 시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간 감각이 이상했다. 서민준이 손을 떼기까지 몇 초가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1초인지 1분인지.
"일주일만 쉬어."
서민준이 소파로 돌아갔다.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준호의 얼굴을 덮었다.
"다음 의뢰는 언제 줄 거야?"
"좀 있다가."
"얼마나?"
"정은태가 뭔가 지시할 때까지."
준호는 서민준을 바라봤다. 이 남자는 누구인가. 정말로 거래소의 주인인가. 아니면 누군가 더 큰 조직에 속한 사람인가.
"정은태가 뭔데?"
준호가 물었다.
서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연기 너머로. 그의 눈에 뭔가 계산이 있었다.
"그건 넌 알 필요 없어."
"근데 내 기억에 나왔거든. 그 기억 속에서."
서민준이 일어섰다. 준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넌 뭘 봤어?"
"잘 모르겠어. 어둡고... 누군가 나한테 뭔가 묻고 있었고... 그리고 사진이 있었어. 어린 아이의 사진. 파란 줄무늬 셔츠를 입은 아이."
준호가 말을 멈췄다. 미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제니시스가 우리를 감시한다.'
"뭔데?"
서민준이 다시 물었다.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기억이 끊겼어."
"기억이 끊겼다고?"
서민준의 목소리가 변했다. 위험한 톤이었다.
"다시 말해봐. 정은태의 기억에서 뭘 봤는지. 정확하게."
준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서민준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정은태가 서민준에게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피해자의 기억을 봤어. 죽기 직전까지. 그리고... 사진을 봤어. 어린 아이의 사진. 파란 줄무늬 셔츠를 입은 아이."
"누구?"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아니었어. 확실해. 나는 그런 옷을 입은 적이 없거든."
서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담배 연기가 계속 나왔지만,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가."
"뭐?"
"가. 지금."
준호가 일어났다. 서민준은 준호를 보지 않았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도시의 야경. 불빛들. 그 불빛 사이의 어둠.
거래소를 나가는 길. 폐선 터널의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며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가 맞다. 그런데 왜 자꾸 모자라는 느낌일까?
지하철역으로 나왔다. 밤 열한 시. 역은 거의 비어 있었다. 준호는 벤치에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 추출 후의 일반적인 피로와는 다른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뇌를 흔들고 있는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강도현이었다.
"요즘 뭐해?"
"일."
"뭐 하는 일?"
"넌 알잖아."
강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조심해. 최근에 이상한 움직임이 있어. 제니시스 쪽에서."
준호는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강도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준호? 들려?"
준호는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뭐가 이상해?"
"기억 능력자들이 사라지고 있어. 지난 한 달간 세 명. 모두 구멍이 있던 애들이야."
"죽었다고?"
"그렇게 보여.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사건이 없어. 마치 그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강도현이 말을 멈췄다.
"뭔데?"
"넌 최근에 기억에서 이상한 게 없어? 구멍 같은 거?"
준호는 역의 기둥에 붙은 광고판을 봤다. 그것이 거울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그 안의 준호는 흐릿했다.
"없어."
준호가 거짓말을 했다.
"정말?"
"응."
"그럼 다행이야. 조심해. 그리고..."
강도현이 다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너의 기억... 정말 네 기억이 맞나? 넌 2년 전 경찰을 그만두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 그때 넌 이런 일을 하지 않았어. 절대로."
그 순간 준호의 뇌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마치 누군가 내부에서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처럼.
"응, 내 기억이야."
"그럼 난 왜 자꾸 낯선 거야? 너의 말투도, 너의 선택도. 넌 그때 정의감 있던 경찰이었어. 그런데 지금의 넌..."
강도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지금의 넌 그 사람이 아니야."
준호는 강도현과의 통화를 끝냈다. 휴대폰을 내렸다. 손이 떨렸다.
아파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준호는 창밖을 봤다. 밤의 도시. 불빛들. 그리고 그 불빛 사이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
아파트 305호. 준호의 방.
격자 무늬 창문. 낡은 냉장고. 책장. 그리고 침대 아래 숨겨진 기억 추출 장비.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물얼룩을 본다. 그것이 얼굴처럼 보인다. 누구의 얼굴일까.
그 순간, 준호는 기억해낸다. 정은태의 기억 속에서 본 그 사진. 어린 아이. 파란 줄무늬 셔츠. 하지만 그 아이의 얼굴은—
준호는 일어났다. 옷장을 열었다. 옷들을 헤쳤다. 그 속에서 파란 줄무늬 셔츠를 찾을 수 있을까?
없었다.
준호는 침대로 돌아갔다. 눈을 감았다. 정은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넌 이미 알고 있어. 다만 잊고 있을 뿐이야.'
준호의 눈이 떨렸다. 마치 누군가 내부에서 자신의 신경을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준호는 또 다른 기억을 본다. 아니다, 기억이 아니다. 환상이다. 아니면 꿈이다. 아니면—
어두운 방. 흰 의자.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
"너는 누구인가?"
그 목소리가 준호의 뇌에 직접 들렸다.
"나는... 이준호야."
"정말? 그럼 이준호는 누구인가?"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날이 밝았다. 아침이 왔다. 하지만 준호는 여전히 같은 곳에 누워 있었다. 눈을 뜨고. 천장을 보며.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서민준이었다.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어. 중요한 거야."
"뭐?"
"정은태가 보낸 거. 그의 기억을 다시 들어가야 해. 더 깊게. 이번엔 더 완벽하게."
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그 기억 속에서 정말로 뭘 봤어?"
서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기억이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준호?"
"응..."
"그 사진 속의 아이가 누구야? 정말로."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그 이미지를 지우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뇌 내부에서.
'넌 이미 죽었어. 넌 단지 잊고 있을 뿐이야.'
준호의 손이 거울 위에 올라갔다.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다. 맞다. 항상 다섯 개였다.
그런데 거울 속의 손가락은 네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