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닷새를 걸어 화성에 닿는 동안, 왕의 마지막 말은 잠결에도 채유선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단, 이 일이 새어나가면 짐도 너를 지키지 못한다. 화성으로 가되, 네 손으로 증기의 힘을 세워라.'

자개함은 봇짐 깊숙이 넣고 무명천으로 두 번 싸맸다. 물시계 유리관 안에서 어른거리던 붉은 기운은 다시 보이지 않았으나, 손이 가슴께로 자꾸 올라가 함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왕의 이름은 이 일 어디에도 없다. 뒤를 봐줄 이는 없고, 옳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낭떠러지뿐이라는 것을 그는 걸음마다 곱씹었다.

늦봄의 화성 축조 현장은 사람과 흙먼지가 뒤엉킨 거대한 짐승 같았다.

거중기가 도르래의 삼밧줄을 팽팽히 당기며 돌덩이를 허공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도르래가 삐걱이는 소리, 부역꾼 수백이 내지르는 목도소리, 감독관의 호통, 대장간 쪽에서 쇠를 두드리는 쨍쨍한 쇳소리가 한데 뒤섞여 귀를 먹먹하게 했다. 흙벽돌을 이고 진 사내들이 개미처럼 성벽을 오르내렸다.

"거기 잡직, 어디로 들어와!"

패랭이를 눌러쓴 감독관이 채유선의 앞을 막아섰다. 채유선이 규장각에서 받은 첩지를 내밀자, 감독관은 그것을 한 손으로 낚아채 훑더니 코웃음을 쳤다.

"도화서 잡직 화원이라. 그림쟁이가 여긴 뭐하러. 성벽 그림이라도 그리러 왔나?"

"규례에 따라 현장 공역을 살피라는 명을 받았소."

"명이야 위에서 내리는 거고." 감독관은 첩지를 도로 던지듯 돌려주었다. "여긴 돌 나르고 쇠 두드리는 데야. 종이 들고 서 있을 자리 없으니 걸리적거리지나 마."

채유선은 첩지를 주워 옷섶에 넣었다.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으나, 여기서 왕의 밀명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성벽 그늘로 비켜서서, 그는 눈을 감았다.

물시계. 청국을 거쳐 들어온 서양의 물시계. 어전을 떠나기 전 자개함 안에서 딱 한 번 뚜껑을 열어 그 정교한 톱니들을 응시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심상의 도면이 펼쳐졌다. 물의 무게로 부표가 오르내리며 톱니를 밀고, 그 톱니가 작은 톱니를 물어 회전을 늦추는 감속의 이치. 그것을 거꾸로 되짚으면, 힘을 만드는 길이 보였다. 물을 끓여 김을 가두고, 그 김이 밀어내는 힘을 톱니로 받아 무거운 것을 드는 기관.

머릿속에는 도면이 있었다.

문제는, 그 도면을 무쇠와 놋쇠와 사람의 손으로 옮길 길이 눈앞에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톱니 하나부터.'

물시계의 그 잇니를 조선의 무쇠로 다시 깎아내려면, 우선 그것을 두들겨줄 손이 있어야 했다. 규장각의 도면은 규장각에 있을 때나 도면이지, 이 흙먼지 속에서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채유선은 그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어미의 야문 손이 없었다면 아씨의 노리개는 영영 깨진 채였을 것이다. 재주는 손끝에서 완성된다.

그는 쇳소리가 가장 요란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임시 대장간은 성벽 북쪽, 화덕 세 개가 나란히 불을 뿜는 넓은 헛간이었다. 열기가 문턱을 넘어 확 끼쳐왔다. 웃통을 벗은 장정들이 벌겋게 단 쇠를 모루에 올려놓고 번갈아 메질을 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쉰은 넘어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팔뚝은 통나무 같고, 눈썹이 짙어 인상이 우락부락했다. 그가 집게로 쇳조각을 집어 불빛에 비춰 보며 무어라 낮게 지시하자, 젊은 장인 하나가 곧바로 망치를 바꿔 들었다. 손짓 하나에 대장간 전체가 움직였다.

저이가 우두머리다. 채유선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영감님이 이곳 대장을 맡은 분이오?"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흘긋 채유선의 아래위를 훑더니, 다시 쇳조각으로 눈길을 돌렸다.

"홍만춘이오. 무슨 일이신가, 나리."

'나리'라는 말끝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채유선의 무명 두루마기와 매끈한 손을 보고, 이미 부려먹기만 하고 공은 챙겨가는 양반붙이로 가늠한 눈치였다.

"두들겨줄 물건이 하나 있소. 서양 물시계의 톱니를 본떠 무쇠로 깎아야 하는데—"

채유선이 봇짐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밤을 새워 그린 톱니 도면이었다. 잇니의 각도와 간격, 축의 지름까지 촘촘히 적혀 있었다.

홍만춘은 그 종이를 보지도 않았다.

"댁 같은 분들이 종이쪼가리 들고 와서 이대로 만들어라 하는 게 하루에도 몇인 줄 아시오?" 그가 집게를 내려놓았다. "그 도면대로 쇠가 나와줍디까? 무쇠는 종이가 아니오. 여기 이 잇니 각도, 이거 이대로 깎으면 물리는 자리에서 이가 나가. 종이엔 안 보이지."

채유선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홍만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도면은 이상이고, 무쇠는 현실이었다.

"그럼 어찌 만드시오?"

"그건 손이 아는 거지." 홍만춘이 코웃음을 쳤다. "말로 못 하오."

그때 젊은 장인이 물이 새는 놋쇠 통 하나를 들고 왔다. 물을 담아 나르는 데 쓰는 통인데 이음새에서 물이 배어나오는 모양이었다. 홍만춘은 통을 받아들더니, 삼밧줄 뭉치를 끌어당겼다. 옻칠을 먹여 새까맣게 굳은 밧줄이었다.

"가죽으로 감으면 물에 삭아 금세 터져. 옻 먹인 삼밧줄로 이렇게 감아 매고, 그 위에 다시 옻을 발라 굳히면—"

굵은 손가락이 이음새를 밧줄로 서너 겹 감아 조이더니, 붓으로 옻을 덧발랐다.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이러면 물이 아무리 눌러도 안 새. 가죽보다 오래가고."

채유선의 눈이 그 손끝에 못 박혔다.

물이 새지 않게 이음새를 막는 것. 그것은 김을 가두는 기관에서 가장 큰 벽이었다. 서양 도면대로라면 밀폐에 가죽을 쓰지만, 조선의 가죽은 김에 삭아버릴 것이 뻔했다. 그런데 옻 먹인 삼밧줄이라면—

'저것을 김을 가두는 데에도 쓸 수 있다면.'

머릿속에서 도면 한 귀퉁이가 붉게 어른거리던 자리에, 처음으로 옅은 실마리가 걸렸다.

"영감님." 채유선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다가섰다. "지금 그 밧줄 토법, 그것을—"

말을 잇던 그의 눈길이 홍만춘이 방금 내려놓은 이음쇠 하나에 닿았다. 조금 전 두들겨 식혀둔, 거중기 도르래에 걸 갈고리쇠였다.

순간, 그 이음쇠의 목덜미께에 붉은 금이 그어졌다.

가느다란 실선 같은 균열이, 갈고리와 자루가 만나는 안쪽 곡면을 따라 선명하게 번졌다. 채유선의 눈에만 보이는 그 붉은 선은, 저 쇠가 언젠가 갈라질 자리를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이 갈고리, 못 쓰겠소."

대장간이 조용해졌다. 메질하던 장정들의 손이 멈췄다.

"뭐라?" 홍만춘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이 안쪽 곡면, 여기." 채유선이 손가락으로 갈고리 목을 짚었다. "쇠를 접어 두들길 때 여기에 김이 갇혔소.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에 결이 죽었소. 돌 무게를 며칠 받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부러지오. 다시 두들겨야 하오."

말을 뱉고 나서야, 그는 홍만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보시오, 나리." 홍만춘이 천천히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때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내가 이 모루 앞에서 쇠를 두드린 게 서른 해요. 그림쟁이 나리가 손 한 번 안 대보고 눈으로 쓱 보고, 내 쇠가 부러진다? 여기 있는 애들 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요, 지금?"

젊은 장인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채유선에게 꽂혔다. 조금 전까지 그들의 우두머리가 물통 하나를 야무지게 고치는 것을 보고 감탄했던 사내가, 이제 그들의 스승 얼굴에 침을 뱉은 꼴이 되어 있었다.

채유선은 멈추지 못했다. 붉은 금이 보이는 이상, 그것을 그냥 넘기는 것은 그에게 살을 도려내는 일이었다.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오. 저기 화덕에 다시 넣고 목덜미를 갈라보시오. 속에 실금이 갔을 것이오."

"이 사람이!"

홍만춘이 갈고리쇠를 집어들었다. 순간 채유선은 그것으로 얻어맞을 줄 알았다. 그러나 노장인은 그것을 화덕 옆 도끼받침에 대고, 손도끼로 목덜미를 힘껏 내리쳤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갈고리가 두 동강 났다.

정확히, 채유선이 짚었던 안쪽 곡면에서.

잘린 단면 안쪽에, 머리카락 같은 실금이 회색으로 죽은 결을 드러내며 갈라져 있었다.

대장간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젊은 장인 하나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홍만춘은 두 동강 난 쇠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 단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그가 낮게 뇌었다. "겉만 보고 알았다?"

"보였소." 채유선이 대답했다.

홍만춘은 두 동강을 서로 맞대어 보고, 다시 채유선을 보았다. 조금 전의 분노 대신, 낯선 짐승을 살피는 듯한 눈빛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서른 해를 두드려도 나는 화덕에 넣어 갈라봐야 아는 걸." 그가 쇳조각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뭐요, 대체."

젊은 장인들도 등을 돌렸던 자세를 슬며시 풀었다. 채유선은 그제야 자기 손끝이 떨리는 것을 알았다. 옳음을 증명했다는 안도가 먼저였고, 그다음에야 자기가 방금 한 노인의 서른 해를 여럿 앞에서 짓밟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가슴을 눌렀다.

"미안하오." 그가 뒤늦게 말했다. "여럿 앞에서 영감님 얼굴을 상하게 할 뜻은—"

"됐소." 홍만춘이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그 손끝에는 아직 무언가 삭이지 못한 것이 남아 있었다. 그는 부러진 갈고리를 발끝으로 밀어놓고, 화덕불을 응시하며 낮게 말을 뱉었다.

"어차피 이 갈고리 스무 개, 내 이름으로 안 올라가오. 여기 화성 대장간에서 나온 쇠는 다 감독관 나리 공이지. 성 다 쌓고 나면 상은 위에서 받고, 나는 이 화덕 앞에서 또 딴 놈 밑에 들어가 쇠나 두드리고." 그가 침을 뱉었다. "부러지는 쇠 하나 안 부러지는 쇠 하나, 그거 갈라보는 손이 누구 것인지, 위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안 하지. 우리 같은 상것 손재주야, 아무리 좋아본들 다 위로 흘러가버리는 물 아니오."

그 말이 채유선의 명치를 정통으로 쳤다.

재주는 아래에 있고 공은 위로 흐른다. 어미가 그랬다. 밤새 노리개를 붙여놓고도 매만 맞았던 어미가. 채유선은 홍만춘의 옆얼굴을, 서른 해 쇠를 두드려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그 손을 보았다.

"영감님."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내가 하려는 일이 잘되면, 이 손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는 물건이 나오. 돌을 지금보다 열 배는 쉽게 드는 기관이오."

홍만춘이 콧방귀를 뀌었다. "또 종이쪼가리 얘기요?"

"그 물건에는 영감님 손이 반드시 있어야 하오. 옻 먹인 삼밧줄, 그 토법도. 그리고—" 채유선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함부로 약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말만은 뱉어야 했다. "그 물건이 완성되면, 나는 영감님 이름을 공역 장부에 올리겠소. 감독관 공이 아니라, 홍만춘, 그 이름 석 자로."

대장간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홍만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래도록 채유선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믿지 않는 기색과, 믿고 싶어하는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상것의 이름을 장부에 올린다는 말은, 이 나라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나와도 지켜지지 않는 말이었다.

"…말은 쉽지." 그가 뇌까렸다. 그러나 목소리에서 아까의 가시는 빠져 있었다.

젊은 장인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부러진 갈고리를 주워 화덕 옆에 챙겨두었다. 다시 두들기려는 것이었다. 채유선의 말이 옳았음을, 그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홍만춘은 모루 옆에 걸터앉더니, 통나무 같은 팔을 가슴 앞에 척 얹어 팔짱을 꼈다. 화덕불이 그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붉은 빛을 드리웠다. 그가 턱을 채유선 쪽으로 까딱였다.

"좋소. 상것 이름 장부에 올린다는 헛소리는 그렇다 치고."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돌을 열 배 쉽게 든다는 그 물건, 당신 눈에 보인다는 그 물건 말이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게요? 화덕이 달렸소, 물이 들었소? 톱니가 몇 개나 물리는 거요?"

채유선의 손이 봇짐으로 갔다.

그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유득경에게도, 왕에게조차 이 도면을 통째로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머릿속에만 있던 그 심상의 형체를.

그가 무명천에 싼 자개함을 조심스레 옆에 내려놓고, 새 종이를 모루 위에 펼쳤다. 먹을 갈 새도 없어, 화덕 옆 숯 조각을 집어들었다.

숯 끝이 종이에 닿았다.

첫 선이 그어지는 순간, 채유선의 눈앞으로 물시계의 톱니가, 김을 가둔 무쇠 통이, 부표와 밸브와 피스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심상의 도면 위에, 벌써부터 몇 군데가 희미하게 붉은 빛으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숯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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