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담벼락에서 몸을 뗀 하연서는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명단의 붉은 글자보다 등이 더 문제였다. 무명천으로 겹겹이 감은 나선 흉터가, 낮에 수련장 상석에 선 남색 깃 장로의 검 파동에 반응하던 순간의 열기를 아직 붙들고 있었다. 흉터만이 아니었다. 등에 감아둔 망자검이 자정 무렵부터 얇게 울었다. 소리라기보다 방향이었다. 검신이 정청 쪽을, 정확히는 낮에 장로가 서 있던 상석 방향을 향해 미약하게 진동했다.

하연서는 어둠 속에서 검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네가 아는 검이냐.'

죽은 자의 검이 산 자의 방향을 가리킨다. 사부가 남긴 이 검이 정파 검객의 검격에 공명한다는 건, 그 검이 언젠가 패검문의 피를 마셨다는 뜻이었다. 낮의 장로.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그자의 검이 멸문의 밤과 이어져 있을지 몰랐다. 하연서는 그 방향을 기억에 새기고, 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날이 밝자 재조사가 시작됐다.

*

외당 서기청은 향내 대신 먹내가 났다. 문서 담당 노무사가 명부를 펼치고 지원자를 하나씩 불러 세웠다.

"임서. 하동 임가촌 출신, 사문 없음, 유랑 검객. 검법은 저잣거리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다……. 맞나."

"예."

"하동 임가촌은 재작년 홍수로 절반이 떠내려간 마을이다. 호적이 남은 자가 몇 없어."

"그래서 유랑을 시작했습니다."

하연서는 시선을 무사의 손끝에 두었다. 붓끝이 명부 위에서 멈춰 있었다. 이 대답을 위해 석 달 동안 하동을 걸었다. 실제로 물에 잠긴 마을을 밟았고, 살아남은 노인의 사투리를 훔쳤고, 임가라는 흔한 성을 골랐다. 검증할 수 없는 진실 위에 거짓을 얹는 것이 가장 안전한 위장이었다.

"검을 봐도 되겠나."

하연서는 등의 검을 풀었다. 무명천을 벗기지 않은 채, 진짜 검 대신 미리 준비해둔 서른 냥짜리 조악한 검을 내밀었다. 망자검은 어젯밤 축사 볏짚 아래 묻어두었다.

무사가 검신을 살폈다. 이가 나가고 녹이 슨, 삼류가 쓸 법한 물건이었다.

"됐다. 다음."

하연서가 물러서려는데 노무사가 붓을 내려놓았다.

"임서. 앞으로 넉 달간 외출 금지다. 외당 지원자 전원이 그렇다. 낙검곡 근방엔 얼씬도 말고. 밤에 담을 넘는 자는 사문 조사와 무관하게 축출한다."

정보였다. 감시가 강화됐다는 신호. 낙검곡이라는 단어를 재조사와 묶어 말했다는 것도. 하연서는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서기청을 나오는 발걸음은 여전히 삼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돌아갔다. 첫 위기는 넘겼다. 다음이 문제였다. 갇힌 새는 날개를 접고 있어야 하는데, 접고 있으면 굶는다.

굶지 않으려면 서열이 필요했다.

*

서열전은 사흘 뒤였다.

외당 제자 이백 명이 연무장 흙바닥에 모였다. 상위 서른 명에게만 이류 심법 구결과 별채 배정, 그리고 장서각 하급 열람권이 주어졌다. 하연서에게 필요한 건 심법도 별채도 아니었다. 장서각. 낙검곡 첩보가 오간 곳이자, 정사대전의 기록이 잠든 곳이었다. 하급 열람권은 금서고까지 닿지 못하지만, 첫 발판은 됐다.

문제는 방식이었다. 상위 서른에 들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만큼만.

"임서!"

진유하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왔다. 손에 주먹밥 두 개를 쥐고 있었다.

"먹어. 빈속으로 검 쥐면 손이 떨려. 우리 아버지가 밭 나갈 때 늘 그러셨어."

하연서는 주먹밥을 받았다. 진유하의 손등에 박힌 굳은살이 셋째 사형의 손을 스치듯 지나갔다. 하연서는 그 감각을 눌러 넣었다.

"고맙다."

"긴장돼? 나는 좀 무섭다. 저기 저 사람, 위지운이래. 작년에 상위 다섯 안에 들었대."

진유하가 턱짓한 곳에 어깨가 넓은 청년이 서 있었다. 하연서는 그 이름을 알았다. 입문 시험 때 그의 청산세 세 초식을 패검안으로 훔쳐 근골에 새겨두었으니까. 지금 하연서의 몸속에는 위지운의 검로가 잠들어 있었다. 정파의 검이라 저항 없이 스며든 것.

'저자를 쓰면 안 된다.'

같은 검법을 되받으면 눈치챈다. 하연서는 위지운을 명단에서 지웠다.

대진표가 붙었다. 하연서의 첫 상대는 삼류였다. 어설프게, 지저분하게 이겼다. 두 번째도 그랬다. 발끝으로 실력이 새지 않게, 밀리다 운으로 급소를 짚는 척했다. 모용성이 연무장 가장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게 시야에 걸렸다. 그 시선을 위해서라도 어설퍼야 했다.

세 번째 상대가 문제였다.

곽대라는 자였다. 상위 열 안을 노리는 이류. 검이 무거웠고 힘이 실렸다. 어설프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여기서 지면 서열은 물 건너간다. 하연서는 흙바닥에 서서 상대의 목검을 보았다.

"운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재수 없는 새끼."

곽대가 침을 뱉었다. 첫 초식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진짜 목검이 아니라 죽이려는 검이었다.

하연서는 피했다. 두 번, 세 번. 밀렸다. 등이 연무장 경계선에 닿았다.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왔다. "임서 저놈 또 도망만 치네." 하연서는 그 야유를 들으며 결정했다.

여기서 죽은 자를 부른다.

곽대의 검이 다시 떨어지는 순간, 하연서는 등 뒤 무명천 아래 감아둔 검흔을 열었다. 오른어깨의 상흔이 뜨거워졌다. 멸문의 밤, 그를 감싸다 등이 갈린 넷째 사형의 마지막 검로가 근골을 타고 올라왔다. 사형의 검명은 낙영(落影). 떨어지는 그림자처럼 상대의 시야 아래로 파고들어 발목을 끊는 하단검이었다.

그리고 감정이 딸려왔다.

'연서야, 뒤로 가.'

넷째 사형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터졌다. 피 냄새, 밤의 불길, 등이 갈리던 그 순간의 통증까지. 봉인해둔 것이 갈라졌다. 하연서의 손끝이 아주 잠깐 떨렸다. 그 떨림을 이 악물어 눌렀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첫 초식, 하연서의 검이 곽대의 시야 아래로 사라졌다. 곽대의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둘째 초식, 그림자가 곽대의 왼 발목을 쳤다. 균형이 무너졌다. 셋째 초식, 무너지는 상대의 목젖 아래에 하연서의 검끝이 멈췄다.

세 번의 호흡. 그것뿐이었다.

곽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야유하던 자들의 입이 닫혔다. 방금 전까지 도망만 치던 삼류가, 이류 곽대를 세 초식에 흙바닥에 눕혔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연서는 검을 거뒀다. 손이 여전히 미세하게 떨렸다. 넷째 사형의 목소리 잔향이 귀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 잔향을 삼키며 표정을 지웠다.

'과했다.'

세 초식은 삼류의 승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곽대의 검을 되받은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검로였으니, 훔쳤다고 의심받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계산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연무장 가장자리, 교관석에서 한 사내가 술병을 쥔 채 일어서 있었다.

잡역 무사 설강이었다. 늘 취해 있던 자. 그 사내가 술병을 쥔 손을 멈추고, 방금 하연서가 그린 검로를 응시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다른 손이 자기 손목의 오래된 흉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마치 그 검로를 예전에 어디선가 보았다는 듯이.

하연서는 그 시선을 감지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취객의 눈이 아니었다.

*

승리는 상위권을 열어주었다. 남은 대진을 하연서는 딱 서열 이십칠 위에 맞춰 조율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상위 서른, 장서각 하급 열람권.

서열전이 파하자 진유하가 달려왔다.

"봤어! 임서, 나 봤어! 세 번에! 세 번에 곽대를 눕혔잖아!"

진유하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기가 이긴 것처럼. 하연서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청년은 계산이 없었다. 하연서가 상위에 들면 진유하에게 이득 될 게 없는데도, 진유하는 순전히 하연서가 잘돼서 기뻐하고 있었다.

"넌 서른 안에 들었어?"

"난 서른둘. 두 끗 차이로 떨어졌어. 근데 괜찮아! 너 붙었잖아!"

하연서의 안에서 계산이 어긋났다. 자기가 떨어졌는데 남의 합격을 기뻐한다. 도구는 이렇게 굴지 않는다. 도구는 대가를 먼저 센다.

"……왜 좋아하는데."

"어?"

"넌 떨어졌잖아."

진유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곤 웃었다.

"친구가 잘되면 좋은 거 아냐? 이상한 걸 묻네."

하연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봉인해둔 어딘가에서 실금이 갔다. 넷째 사형의 검로를 부른 여파로 이미 갈라진 자리에, 이 순박한 웃음이 손톱을 밀어넣었다. 그는 진유하를 '도구'로 분류해두었다. 그 분류표의 잉크가 번지는 감각이 낯설고 불쾌했다. 하연서는 시선을 돌렸다.

"주먹밥 잘 먹었다."

"그거면 됐어."

돌아서는 하연서의 등 뒤로 진유하가 손을 흔들었다. 하연서는 흔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이 한 박자 느려진 걸, 그 자신도 알아챘다.

*

연무장을 나서려는데 매화 수놓인 무복이 앞을 막았다.

모용성이었다. 아까 하연서의 세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눈이었다.

"곽대를 세 초식에 눕혔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 모용성이 코웃음을 쳤다. "낙영세였지. 시야 아래로 파고드는 하단검. 저잣거리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검이 아니야. 그건 계보가 있는 검이다. 어느 문파냐."

하연서는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나는 걸 느꼈다. 이자는 검을 안다. 검명까지 짚어냈다. 다만 낙영세라는 이름은 모용성이 붙인 것일 뿐, 넷째 사형의 검로 자체를 아는 건 아니었다. 아직은.

"이름 없는 유랑검입니다. 스승도 없습니다."

"그렇게 우겨라." 모용성이 한 발 다가섰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난 직계다. 태산검문의 이름을 등에 지고 산다. 직계는 지는 게 허락되지 않아. 이류든 삼류든 유랑검이든, 내가 이겨야 해. 그런데 너처럼 정체를 감춘 놈이 서른 안에 기어들어오면, 내 이름값에 흠집이 난다."

그건 오만이 아니라 짐이었다. 이겨야만 하는 자의 압박이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다음 대비 때, 나와 겨뤄라. 임서. 운으로 이기는지, 감춘 검이 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모용성이 돌아섰다. 매화가 등에서 흔들렸다.

"도망치면, 그날 네 정체가 무엇이든 파헤쳐서 문주 앞에 끌고 가겠다."

하연서는 그 등을 눈에 새겼다. 위협이자 선전포고. 그리고 감시자가 하나 더 늘었다는 뜻이었다. 발을 읽은 자가, 이제 검로까지 읽기 시작했다.

*

해가 기울었다. 하연서는 축사로 향했다. 볏짚 아래 묻어둔 망자검을 되찾아 등에 감아야 했다. 사람 없는 뒤뜰, 마구간 그림자를 밟는데 흙 밟는 소리가 등 뒤에서 멈췄다.

하연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검흔의 여파로 아직 손끝이 저릿했다. 지금 누군가와 부딪치면 위험했다.

"거기."

낮은 목소리였다. 취기가 걷힌, 낮의 야유와도 다른, 뼛속으로 가라앉는 소리.

설강이 마구간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술병은 없었다. 손목의 흉터를 문지르던 손이 이번엔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 눈이 하연서를 붙들었다. 취객의 흐린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견디다 못해 터지기 직전의 눈이었다.

"낮에 네가 쓴 그 검로."

설강이 한 걸음 다가왔다. 목소리가 더 낮게 깔렸다.

"떨어지는 그림자처럼 발목을 끊고, 무너지는 목을 짚는 그 하단검. 삼십 년 넘게 못 봤다. 봐선 안 되는 거였고."

하연서의 손이 등으로 갔다. 검은 볏짚 아래 있었다. 손에 잡히는 건 조악한 서른 냥짜리뿐이었다.

설강의 눈이 그 손을 보고, 다시 하연서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 검로… 어디서 배웠지."

바람이 마구간을 훑고 지나갔다. 하연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볏짚 아래에서 망자검이, 아주 얇게,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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