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무사의 검집 위로 미끄러졌다.
"그날 밤 낙검곡에 있었다."
그 한마디가 하연서의 손끝을 얼렸다. 목검을 쥔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중년 무사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도 눈만은 젖은 칼날처럼 번들거렸다. 취기는 가면이었다. 그 눈은 오 년 전, 불타는 협곡을 정확히 기억하는 자의 것이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군요."
하연서는 목검을 거두며 등을 돌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이자를 살려 보내면 안 된다. 머릿속에서 익숙한 계산이 돌아갔다. 적. 이자는 적이다. 정체를 아는 자는 죽여야 한다. 그것이 지난 오 년을 살아남게 한 유일한 규칙이었다.
"패검문의 낙일검(落日劍)이었지. 방금 그 하단베기."
무사가 술병을 흙바닥에 내려놓았다.
"셋째 사형이 즐겨 쓰던 초식이야. 오른발을 반 보 끌면서 검을 아래에서 위로 뒤집는 그 버릇까지 똑같군. 죽은 사람 흉내를 내는 애송이 치고는."
하연서의 발이 멈췄다. 셋째 사형.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이제 세상에 없어야 했다.
"당신, 뭐지."
돌아서는 순간 그는 이미 망자검을 뽑고 있었다.
검신이 달빛을 삼키자 검 안에서 웅웅거리는 울림이 올라왔다. 하연서는 이를 악물고 검혼을 불렀다. 셋째 사형, 힘을 빌려주십시오. 순간 손목이 저릿하게 뜨거워지며 낯선 감각이 팔뚝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손놀림이었다.
검이 저 혼자 궤적을 그렸다. 무사의 목을 향해 사선으로 떨어지는 낙일검. 하지만 그 검을 휘두르는 동안 하연서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문제였다.
"막내야,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면 안 돼. 검은 목을 조르듯 쥐는 게 아니라 새를 감싸듯 쥐는 거다."
그 목소리는 하연서의 것이 아니었다. 낮고 느긋한, 셋째 사형의 말버릇 그대로였다.
무사가 술병을 걷어차 검을 흘려냈다. 흙먼지가 튀었다. 그는 물러서면서 하연서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곤 얼어붙었다.
"눈."
하연서의 두 눈동자가 은빛으로 번들거렸다. 물웅덩이에 달이 뜬 것처럼. 그 자신은 알지 못했다. 손에 쥔 검이 자신을 대신해 싸우는 이 감각을, 입에서 남의 말이 흘러나오는 이 순간을.
"셋째야."
무사가 뒷걸음질 쳤다. 검을 뽑아 반격하는 대신,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로.
"넌 죽었잖아. 그 밤에, 내 눈앞에서."
무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균열이 하연서를 현실로 끌어냈다. 은빛이 스러지고 눈동자가 제 색을 되찾았다. 갑자기 폐부가 텅 빈 것처럼 숨이 막혔다. 무릎이 꺾일 뻔한 것을 검을 지팡이 삼아 버텼다. 검혼을 부른 대가였다. 목숨이 한 줌 타 없어진 자리에 재만 남은 듯했다.
"방금 나는… 뭐라고 했지."
"네가 아니었어."
무사가 낮게 말했다.
"방금 검을 휘두른 건 죽은 셋째 사형이었다. 말투도, 눈빛도. 넌 그 검에 잡아먹히고 있는 거야, 애송이."
하연서는 검을 고쳐 쥐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려 손잡이를 짓눌렀다.
"당신이 뭘 안다고."
"안다. 아니까 이러는 거다."
무사는 흙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주워 들었다. 다시 취객의 얼굴로 돌아가고 있었다. 등이 굽고 걸음이 흐트러졌다.
"내 이름은 설강이다. 잡역 무사 나부랭이지. 넌 나를 몰라도 돼.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라."
그가 걸음을 멈추고 어깨 너머로 하연서를 보았다.
"검에 잡아먹히지 마라. 죽은 자의 손을 빌릴 때마다, 넌 하연서가 아니라 죽은 놈들이 돼 간다. 원한을 갚기도 전에 네가 사라진다. 그건… 그놈들도 원하지 않을 거다."
"그날 밤 왜 살아 있었지. 당신, 정파 쪽이었나."
하연서가 검 끝을 겨눴다. 물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 손목에 문양을 새긴 자가 누구인지, 스승을 벤 자가 누구인지.
설강은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난 아무것도 못 봤다. 아무것도."
그 말이 거짓임을 하연서는 알았다. 물어라, 이자를 붙잡아라.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검혼을 부른 후유증이 온몸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설강은 그 틈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담벼락을 넘는 발소리마저 취객처럼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 방향만은 흔들림 없이 정확했다.
하연서는 차가운 흙바닥에 주저앉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이 방금 남의 말을 뱉었다. 죽은 사형의 목소리로.
"내가… 사라진다고."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검혼은 그를 살렸고, 동시에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
사흘 뒤, 외당 연무장에 북소리가 울렸다.
서열전. 외당 제자 삼백여 명이 매달 서로의 목검을 겨눠 순위를 다투는 자리였다. 상위 서열은 내당 진입의 기회를 얻었고, 하위는 잡역으로 밀려났다. 제자들의 눈이 굶주려 있었다.
"저기 저놈이 하연이래. 입문 시험에서 모용성 도련님을 물 먹였다는."
"에이, 소문이 부풀었겠지. 삼류 티가 줄줄 흐르는데."
수군거림이 하연서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일부러 어깨를 움츠렸다. 검을 쥔 손도 어색하게 비틀었다. 삼류로 보여야 한다. 눈에 띄면 죽는다. 지난 오 년간 몸에 새긴 원칙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눈에 띄어야 했다.
이유는 하나. 서열 상위에 오르면 내당 출입 자격이 생기고, 그래야 장로원 근처에 접근할 수 있다. 장무극이라는 이름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려면 이 자리에서 딱 필요한 만큼만 이겨야 했다. 너무 강해도, 너무 약해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저울질.
"제칠십삼위 하연, 제십구위 곽동."
호명된 상대가 성큼 걸어나왔다. 어깨가 문짝처럼 넓은 사내였다. 외당에서 힘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곽동. 그는 하연서를 위아래로 훑고 코웃음을 쳤다.
"운으로 여기까지 온 애송이. 다치지 않게 살살 다뤄주마."
"잘 부탁드립니다."
하연서는 고개를 숙였다. 목검을 쥔 손을 일부러 떨어 보였다.
곽동이 선공을 걸었다. 태산검문 정종 검법, 태산압정세(泰山壓頂勢).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육중한 일격이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구경하던 제자들이 숨을 삼켰다. 저건 삼류가 막을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하연서는 그 검을 흘려낼 수도 있었다. 자기 실력만으로도.
하지만 그는 눈에 띄기로 마음먹었다.
'둘째 사형.'
속으로 이름을 부르자 검신이 미열을 뿜었다. 곽동의 태산압정세가 정수리에 닿기 직전, 하연서의 발이 반 보 옆으로 흘렀다. 검이 회오리처럼 돌았다. 패검문 비전, 선풍삼십육검(旋風三十六劍)의 첫 초식. 죽은 둘째 사형이 가장 아끼던 검법이었다.
곽동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하연서의 목검이 곽동의 손목, 옆구리, 무릎을 연달아 세 번 스쳤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였다.
곽동이 비틀거렸다. 검을 놓쳤다.
"뭐, 뭐야 이게—"
말이 끝나기 전에 하연서의 목검 끝이 그의 목젖에 멈췄다. 연무장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살살 다뤄주신다더니."
하연서가 목검을 거두며 나직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이질감이 섞여 있었다. 은빛이 눈동자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켜보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 자신은 팔뚝이 저릿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또 목숨을 태웠다.
"삼류가 아니야. 저건… 절정에 가까운 신법이었어."
"패검문? 아니, 저런 검법을 어디서…"
수군거림이 폭풍처럼 번졌다. 하연서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필요한 만큼만 이겼다. 딱 그만큼. 이제 그의 이름은 외당 삼백 명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원했던 결과였다.
그런데 연무장 위쪽 회랑, 그늘진 난간에 기댄 그림자 하나가 그를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용성이었다. 그 눈빛은 견제를 넘어 확신에 가까웠다.
'역시 감추고 있었군, 저 새끼.'
하연서는 그 시선을 등으로 느끼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
밤이 깊어 낙검곡에 이르렀다.
무너진 전각의 잔해 사이로 이름 없는 봉분들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 무림맹이 '악의 소굴이 정화된 자리'라 선전하는 이 폐허가, 하연서에게는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가장 안쪽, 손수 쌓은 봉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돌비석도 없는 흙무덤이었다. 여기 산 자에게 닫아건 마음이 죽은 자 앞에서만 열렸다.
"오늘 검혼을 두 번 불렀습니다. 둘째 사형의 선풍검을 썼어요. 그리고… 사흘 전엔 셋째 사형이 제 입을 빌려 말했습니다. 어떤 무사가 그러더군요. 검에 잡아먹히고 있다고."
바람이 무덤 위 마른 풀을 흔들었다.
"그자가 그날 밤 이곳에 있었답니다. 설강이라는 이름을 댔어요. 정파일 겁니다. 하지만 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스승님."
대답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하연서는 봉분의 흙을 손으로 쓸었다. 손끝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걸렸다. 무덤을 쌓을 때는 없던 감각이었다. 그는 흙을 조금 파냈다. 봉분 아래, 판판한 돌 하나가 다른 것들과 각도가 어긋나 있었다.
"이건…"
돌을 젖히자 그 아래 좁은 공동(空洞)이 드러났다. 기름 먹인 유포로 겹겹이 싼 작은 나무 상자가 흙 속에 박혀 있었다. 스승이 직접 묻은 것이다. 유포의 매듭에 패검문 특유의 봉인술이 걸려 있었다. 함부로 열면 안의 것이 재가 되어 흩어지는 봉인.
심장이 뛰었다. 스승이 목숨을 걸고 감춘 것. 멸문의 밤에도 지키려 했던 무언가.
하연서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꺼냈다. 유포 틈으로 붉게 물든 종이 끄트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혈서(血書)였다. 누군가 제 피로 써 내려간 글자들.
"스승님이 무엇을 남기셨습니까."
봉인을 풀려 손을 대는 순간, 검신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망자검이 경고하듯 울었다. 지금은 안 된다는 듯이. 봉인술은 정확한 구결을 외지 않으면 내용물째 불타 사라진다. 그 구결을 하연서는 알지 못했다. 스승만이 알았다.
"열 수가… 없어."
손안에 진실이 있는데 열지 못한다. 오 년을 헤맨 답이 이 안에 있을지 모르는데. 하연서는 상자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스승의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거기 누구냐."
차가운 목소리. 이어 서너 개의 검이 뽑히는 마찰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이곳은 무림맹령으로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다. 손을 들고 천천히 돌아서라."
하연서는 상자를 재빨리 품 안 옷섶에 감췄다. 어깨 너머로 순찰 무사 넷이 검을 겨눈 채 반원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등불이 그의 뒷목을 비췄다.
"손목을 보여봐라. 수색령이 내린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앞장선 무사가 검 끝으로 하연서의 소매를 가리켰다.
하연서의 소매 안에서, 검혼을 두 번 불러 아직 은빛이 다 가시지 않은 눈동자가 서서히 그들을 향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