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품속의 방문은 사흘 만에 낡은 천처럼 흐물흐물해졌다. 하연서는 그것을 태산 기슭의 관문 앞에서 다시 꺼냈다. 붉은 인주의 매화 문양은 이제 땀에 번져 흐릿했지만, 정문 위에 걸린 거대한 편액의 문양과 정확히 같았다.

동쪽으로 걷기를 석 달. 그 사이 하연서는 살을 깎았다. 하루 한 끼로 볼을 파이게 하고, 어깨의 나선 흉터가 옷깃 밖으로 비어져 나오지 않도록 무명천을 겹겹이 둘렀다. 걸음걸이에서 무게중심을 지웠다. 검을 등에 진 소년이 아니라, 검을 겨우 짊어진 유랑 검객으로 보이도록.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이름 하나를 되뇌었다.

임서. 임씨 성을 가진, 서른 냥짜리 검 한 자루가 전 재산인 삼류 검객.

관문을 넘자 시험장이 펼쳐졌다. 흙을 다져 만든 연무장이 열 개, 붉은 깃발이 늘어섰고, 출신도 나이도 제각각인 지원자 수백 명이 웅성거렸다. 저마다 검을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씹었다. 하연서는 그 무리 끝에 소리 없이 섰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어깨를 웅크리고, 숨을 얕게 쉬었다.

'적, 아군, 도구.'

머릿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얼굴들을 분류했다. 대부분 아무것도 아니다. 시험관들 — 저들 위에 있는 누군가가 적이다. 정보를 쥔 누군가는 도구가 될 것이다. 계산이 끝나자 마음은 다시 조용해졌다. 봉인한 상자 속에서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웅성거렸으나, 하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징이 울렸다.

"입문 지원자들은 위령비 앞으로 정렬하라!"

무리가 밀려 움직였다. 연무장을 지나 문파 심처로 이어지는 넓은 돌마당에, 사람 키의 세 배는 됨직한 흰 비석이 서 있었다. 정사대전 위령비. 검게 갈아낸 화강암에 금박으로 새긴 글씨가 아침 햇살을 튕겨냈다.

『의로써 사(邪)를 멸하고, 협으로써 난세를 다스리다.』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늘어선 이름들. 하연서의 시선이 한 줄에 멎었다.

천공진인. 장무극.

가슴의 나선 흉터가 옷 안에서 미세하게 뜨거워졌다. 하연서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흉터가 우는 것을 얼굴로 새어 나오게 두지 않았다. 심장 박동을 세 번 늦추고, 뜨거움을 뱃속 깊이 눌러 넣었다. 저 이름들을 그들의 검으로 벤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계획이었다. 계획은 뜨겁지 않다.

비석 앞으로 백발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무명 도포는 소박했으나 옷깃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고, 걸음마다 마당의 공기가 그를 향해 고요해졌다. 지원자들이 저절로 무릎을 굽혔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공진인이시다……."

하연서의 손끝이 아주 잠깐 굳었다.

이름을 보았을 때보다, 그 이름이 사람의 얼굴을 갖고 눈앞에 선 지금이 더 서늘했다. 상상 속의 악귀가 아니었다. 자애로운 눈매, 온화한 주름, 손자를 바라보는 노인의 미소. 무림 전체가 우러르는 정의의 화신은, 정확히 우러를 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라, 아이들아."

목소리는 낮고 따뜻했다.

"출신을 묻지 않는다는 말, 방문에서 읽었느냐. 그 말은 진심이다. 이 문은 가난한 자에게도, 천한 자에게도 열려 있다. 우리가 묻는 것은 오직 하나."

노인이 위령비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뜻이다. 삼십 년 전, 이 무림은 사악한 무리로 인해 피로 물들었다. 패검이라는 이름의 검문이 있었다. 그들은 힘을 탐했고, 무고한 이들을 짓밟았으며, 난세를 불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었다. 정의는 언제나 무겁고, 언제나 마지막 선택이니라."

하연서는 무릎 위에 얹은 손을 폈다가 다시 쥐었다.

무고한 이들을 짓밟았다. 셋째 사형은 마을 아이의 이가 아플 때 침을 놓아주던 사람이었다. 대사형은 굶주린 유랑민에게 문파의 곳간을 열었다는 이유로 사부에게 꾸중을 들었었다. 그 사람들이, 지금 저 노인의 입에서 사악한 무리가 되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것이 무서웠다. 노인은 자신이 하는 말을 완벽하게 믿고 있었다. 눈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이야기를 장악하느냐.'

하연서는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죽인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상자 안으로 가라앉았다.

"악을 정화한 그 자리에, 이제 정의가 자란다. 너희가 그 정의다."

노인이 두 팔을 벌렸다. 지원자들이 감격에 겨워 함성을 질렀다. 하연서도 입을 벌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다만 남들처럼 벌린 입 모양으로, 이 무리의 하나가 되었다.

*

시험은 실전 비무였다. 시험관이 이름을 부르면 두 사람이 연무장에 올라 목검으로 겨루고, 세 사람의 심사관이 자질을 매겼다.

"임서!"

하연서는 어깨를 웅크린 채 올라갔다. 상대는 덩치가 두 배쯤 되는 청년이었다. 힘이 넘쳐 목검 끝이 흔들렸다.

"이봐, 다치기 싫으면 살살 봐줄까?"

하연서는 대답하지 않고 검을 어정쩡하게 들었다. 무게중심을 뒤꿈치에 실어, 초보 티가 나도록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청년이 짓쳐들어왔다. 하연서는 두어 합을 물러났다. 일부러 검을 놓칠 뻔한 척 손목을 떨었고, 옆구리를 스치게 두어 관중석에서 아, 하는 소리가 나오게 했다. 심사관 하나가 붓을 내려놓으며 흥미를 잃은 표정을 지었다. 하급. 그 판정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바로 그거였다.

하지만 완전히 지면 명단에서 떨어진다. 잠입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연서는 밀리는 척하는 속도를 아주 미세하게 조절했다. 청년의 목검이 크게 올라가는 순간 — 힘 있는 자의 습관, 큰 동작 뒤의 짧은 빈틈 — 하연서의 발끝이 반 뼘 미끄러졌다.

목검 끝이 청년의 팔꿈치 안쪽, 곡지혈을 스치듯 눌렀다.

청년의 팔이 저릿하게 떨리며 검을 놓쳤다. 소리도 크지 않았다.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흔들리던 초보 검객이 어쩌다 급소 하나를 건드린 것처럼 보였다. 청년이 어리둥절하게 손목을 문질렀다.

"승, 임서."

관중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하연서가 검을 내리고 어깨를 웅크리며 내려오려는데, 심사관석 가운데 앉은 노 무사의 눈이 붓 너머에서 반짝했다. 잠깐이었다. 그는 임서라는 이름 옆에 무언가를 적고, 그 옆에 점 하나를 더 찍었다.

'봤나.'

하연서는 표정을 지우고 물러났다.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은 딱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이면 의심이 된다.

*

시험이 끝난 뒤 지원자들은 임시 숙소로 안내되었다. 짚을 깐 통나무 방에 스무 명이 함께 들었다. 하연서는 구석 자리를 잡고, 등의 검을 무릎 사이에 세운 채 벽에 기댔다. 눈은 감았으나 귀는 열어두었다. 누가 어떤 지연으로 들어왔는지, 누구의 아비가 무림맹과 연이 닿는지 — 정보는 어디에나 흘렀다.

"여기 앉아도 돼?"

그늘이 졌다. 하연서가 눈을 떴다. 새까맣게 그을린 청년 하나가 짚단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농부의 손이었다. 손바닥에 낫자루 굳은살이 박였고, 손톱 밑에 흙이 남아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까 봤어. 그 큰 놈 팔꿈치 딱 누른 거. 나는 그런 거 못 해. 힘으로만 겨우 붙었거든."

하연서는 그를 저울에 올렸다. 무공은 삼류, 순수, 눈치 없음. 위협 없음. 그러나 —

"고향이 어디예요."

하연서가 물었다. 목소리를 일부러 무디게 냈다.

"산동 진가촌. 넌?"

"떠돌아서, 없어요."

"이름은?"

"진유하. 넌?"

"임서."

진유하가 짚단을 놓고 털썩 앉았다. 무릎을 감싸안는 자세가 아이 같았다.

"우리 마을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열엿새 걸렸어. 협객이 되고 싶어서. 우리 마을 옆에 산적이 있는데, 관은 안 오고 문파는 멀고. 우리 아버지 다리가 그때 부러졌거든. 나 같은 놈이라도 검 배워서 마을 지키면……."

말이 길었다. 하연서는 절반만 들었다. 진가촌, 산동, 아버지, 다리. 쓸모없는 정보.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쓸모 있는 것이 섞였다. 진유하는 오는 길에 태산검문 순찰대를 만났고, 그들이 어느 관도를 지키는지 안다. 문파 내부의 심부름을 하다 보면 이런 것들이 필요해질 것이다.

'정보원으로 둘 만하다.'

계산이 끝났다. 하연서는 진유하를 도구 칸에 넣었다. 호의는 이용하기 좋은 문이다. 문은 열어두는 게 낫다.

"임서, 우리 여기 붙으면 동기잖아. 친구 하자."

진유하가 흙 묻은 손을 쑥 내밀었다.

하연서는 그 손을 보았다. 낫자루 굳은살. 셋째 사형에게도 저런 손이 있었다. 검을 잡기 전에는 밭을 갈았다던.

가슴의 흉터가 또 한 번 미열을 냈다. 하연서는 그것을 눌렀다. 순간, 봉인한 상자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런 손을 가진 아이는 나쁜 놈이 아니야. 셋째 사형의 목소리였는지, 자기 생각이었는지 경계가 흐렸다.

하연서는 손을 잡았다. 필요해서.

"……그래요."

진유하가 활짝 웃었다. 하연서는 웃지 않았다. 웃음은 계산에 없었다. 잡은 손이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계획에 없어서, 하연서는 손을 조금 빨리 놓았다.

*

저녁 무렵, 숙소 앞 마당을 지나던 하연서는 걸음을 멈췄다.

흰 무복에 은실로 매화를 수놓은 청년 하나가 시험 연무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직계 제자였다. 걸음 하나에 자부심이 실렸고, 지원자들이 저절로 길을 비켰다. 청년은 하연서 앞에서 잠깐 멈췄다. 시선이 하연서의 낡은 검과 웅크린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외당 물이 해마다 옅어지는군."

혼잣말 같았다. 그가 지나치려다, 문득 하연서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너, 아까 곡지혈 짚은 놈이지."

하연서는 고개를 숙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

청년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았다. 그는 하연서의 발끝, 뒤꿈치에 실린 무게중심을 잠깐 더 보았다. 검객만이 알아채는 종류의 위화감. 초보의 자세인데, 밀리는 방향이 지나치게 안전했다.

"운으로 급소를 짚나. 발은 초짜가 아닌데."

청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이름."

"임서입니다."

"모용성이다. 기억해두지. 운으로 몇 번이나 이기는지 보게."

모용성은 매화 수놓인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하연서는 숙인 고개 아래에서 그 뒷모습을 눈에 새겼다. 직계, 자존심 강함, 관찰력 예리. 위협 등급 — 상향 조정. 첫날부터 발을 읽은 자는 위험하다.

'실수했다.'

밀리는 방향을 계산할 때, 몸이 습관대로 가장 안전한 각도를 택했다. 감춘 실력이 발끝으로 새어 나갔다. 하연서는 마당 흙바닥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각인했다. 다음부턴 안전하지 않게 진다. 어설프게, 지저분하게, 진짜 삼류처럼.

*

명단은 그날 밤 붙었다.

횃불 아래 지원자들이 몰려들어 벽보를 훑었다. 진유하가 하연서의 팔을 잡아끌었다.

"임서! 여기, 우리 둘 다 있어! 붙었어!"

하연서는 자기 이름을 찾았다. 임서. 그 두 글자를 확인하고,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이름 옆에, 태산검문의 반듯한 서체와는 다른 필체로 작은 글자 하나가 덧적혀 있었다.

패(覇).

붉은 먹으로, 명단을 회람한 누군가의 손으로. 다른 이름에는 없었다. 오직 임서 옆에만.

하연서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우연일 리 없었다. 패검의 패. 누군가 그 글자를 임서라는 이름 옆에 남겼다. 시험을 본 첫날에, 살을 깎고 무게중심을 지운 위장 위에.

진유하가 뭔가 떠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하연서는 그 붉은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로 그때, 명단이 붙은 담장 너머 정청(政廳)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연서는 소리를 낮추고 담벼락에 붙었다.

"진인께서 심려가 크십니다."

기름진 저음. 나이 든 자였다.

"삼십 년 전 그 일이, 완전히 묻히지 않았다는 첩보가 올라왔습니다. 낙검곡에서 시신 하나가 사라졌다는 얘기가……. 패검문의 잔당이 살아 있을지 모릅니다."

침묵. 그리고 서늘한 명령.

"올해 외당 지원자 전원의 신원을 다시 조사하라. 출신, 사문, 검법의 내력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발소리가 문을 향해 다가왔다. 하연서는 담벼락에서 몸을 뗐다. 손끝이 등의 검으로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명단 위의 붉은 글자가, 횃불 빛 속에서 그를 향해 조용히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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