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지운이 원두 봉지 바닥을 긁어 마지막 한 스푼을 분쇄기에 털어넣는 사이 벌써 여섯 명이 문지방을 넘었다.
"마스터, 안쪽 테이블 다 찼어요." 루나가 접시를 안고 달려왔다. "오늘 왜 이렇게 몰려요?"
"휴전선 순찰 교대날이래. 양쪽 병사들이 교대 틈에 잠깐씩 들르는 거지."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지운의 오른손 검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그 떨림을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 감췄다. 어제 카이겐의 부관 셋을 연달아 받았을 때부터 손끝에 남은 잔여물이었다. 마른 소금기 같은 것, 목구멍 뒤에 눌어붙은 재 같은 것. 잠을 자도 씻겨나가지 않았다.
"물!" 오크 용병 하나가 카운터를 두드렸다. "그 검은 물! 어제 먹은 거! 그거!"
"차례대로 드릴게요." 지운은 미소 지었다. "앉으세요. 다 드릴 테니까."
*다 드린다.* 그 말이 문제였다.
첫 잔은 눈 밑에 흉터가 깊게 팬 인간 창병에게 갔다. 그가 한 모금 삼키는 순간 지운의 혀끝에 쇳물 맛이 번졌다—전우의 피를 닦은 손으로 밥을 먹던 밤의 맛. 지운은 캐러멜과 우유를 두 배로 넣어 그 쇳내를 감쌌다. 창병의 어깨가 툭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쇳내는 고스란히 지운의 명치에 쌓였다.
두 번째는 뿔이 부러진 마족 여자. 세 번째는 다리를 저는 궁수. 네 번째, 다섯 번째.
"마스터, 손 떨려요." 루나가 지운의 손목을 붙잡았다. 작은 손이 뜨거웠다. 아니, 지운의 손목이 차가웠다. "벽에요, 벽에! 세 번째 규칙! 오늘 손님 수는 마스터가 정한다고—"
"루나." 지운은 손목을 부드럽게 빼냈다. "저기 앉은 저 아저씨 봐. 오늘 아침에 형 시체를 묻고 왔대. 저 사람만 돌려보내면 안 될까?"
"그럼 그 다음 사람은요? 그 다음 사람은 형을 둘 묻었으면요?"
지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할 말을 자기도 믿지 못해서였다. 그는 여섯 번째 잔을 내렸다.
"조금만 더." 이 세 글자를 그는 전생에서 몇 번이나 되뇌었던가. 마지막 손님만, 마감 전 한 잔만, 리뷰 하나만 더. 그러다 사무실 바닥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 세계였다.
일곱 번째 손님이 잔을 비웠다. 이번엔 살의였다. 누군가를 반드시 베겠다는, 이름까지 정해둔 살의. 그것이 지운의 심장을 손아귀처럼 쥐었다. 그는 카운터를 짚었다. 나무 결이 손바닥에 배기는 감각이 유난히 또렷했다. 그런 순간이면 몸이 나쁘다는 걸 지운은 이제 알았다. 감각만 예민해지고 힘은 빠져나가는 순간.
"다음 분—"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카페 안의 빛이 물속처럼 일렁였다. 오크 용병의 붉은 얼굴이, 창병의 흉터가, 창밖의 안개가 한꺼번에 뭉개져 흘러내렸다.
*아, 이거였지.*
전생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봤던 바로 그 풍경. 세상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번지는 순간.
"마스터?"
루나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렸다. 지운의 무릎이 접혔다. 카운터 모서리에 이마가 부딪히고, 원두 저울이 바닥으로 굴렀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텅 빈 원두 봉지가 카운터 위에서 하늘하늘 뒤집히는 모습이었다. 바닥났다. 커피도, 그도.
"마스터!"
이번엔 비명이었다.
루나가 접시를 내던지고 카운터를 뛰어넘었다.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손님 전부가 돌아봤다. 지운은 카운터 뒤 좁은 틈에 구겨진 채 늘어져 있었다. 얼굴은 잿빛이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는데 몸은 오한으로 떨었다.
"마스터, 마스터, 눈 떠 봐요." 루나가 그의 뺨을 두드렸다. 손끝에 닿는 열이 이상했다. 열병처럼 뜨거운데 손발은 얼음장이었다. "이거 아니야, 이거 아니야……"
루나는 이 증상을 알았다. 정확히는, 예전에 봤다. 전대 마스터가 마지막 겨울에 이렇게 무너졌었다. 미열과 손떨림으로 시작해서, 어느 날 카운터 뒤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도 루나가 가장 먼저 발견했다.
"똑같아……" 루나의 목소리가 젖었다. "똑같잖아요. 왜 또 똑같아요."
"루나, 누가 좀—"
지운의 입술이 움직였다. 눈은 감긴 채였다.
"멈추는 법을……" 숨과 섞여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정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자조하듯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축 처졌다.
바로 그때 문에 달린 종이 다시 울렸다.
안개를 밀고 들어선 것은 은발의 여자였다. 눈 밑에 그늘이 짙은, 갑옷을 절반쯤 벗다 만 채로 온 사람. 세리아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 창가 구석 자리를 향해 두 걸음 걷다가, 카페 안의 공기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손님들이 전부 카운터 쪽을 보고 서 있었다. 마족 소녀가 카운터 뒤에서 무릎을 꿇고 누군가를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전장에서 다듬어진 목소리가 카페를 가로질렀다. 세리아는 세 걸음 만에 카운터에 도착해 그 안을 들여다봤다. 지운이 있었다. 매번 그녀 앞에 흔들림 없이 잔을 내려놓던 남자가, 지금은 종잇장처럼 접혀 떨고 있었다.
세리아의 손이 검자루로 갔다. 습관이었다. 하지만 벨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굳었다.
"이 사람 왜 이래."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리아 라인하르트가, 백 번의 전투에서 부하가 죽어나가도 표정 하나 무너뜨리지 않던 용사가.
"마스터가……" 루나가 눈물을 훔쳤다. "손님들 감정을 받아서요. 다 자기가 앓아요. 커피 한 잔 낼 때마다 그 사람 슬픔이 마스터한테 옮겨와요. 오늘 아홉 잔이나 냈어요. 아홉 잔이나요!"
세리아는 그 말의 무게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 카페에서 마셨던 그 한 잔을 떠올렸다. 마른 소금 같던 마음이, 마시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졌던 그날. 그 가벼움이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내 짐을, 이 사람이.*
세리아는 검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중립지대의 규칙이었고, 지금은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지운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안쪽 방으로 옮겼다.
"물수건." 그녀가 명령했다. "찬물. 그리고 담요."
"저, 저기 있어요." 루나가 달려갔다.
지운을 눕히고 나자 세리아는 자기 손이 어색하게 남는 걸 느꼈다. 검을 쥘 줄은 알아도, 아픈 사람 이마를 짚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서툴게 젖은 수건을 지운의 이마에 얹었다. 각도가 어긋나 수건이 미끄러졌다. 다시 얹었다. 또 미끄러졌다.
"이렇게요." 루나가 손을 보탰다.
그동안 카페 홀에는 아직 손님이 열 명 넘게 남아 있었다. 오크 용병이 카운터를 두드렸다.
"검은 물! 나 아직 안 마셨어!"
세리아가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못을 박아둔 벽걸이에서 지운의 앞치마—여벌—를 낚아채 목에 걸었다. 끈을 뒤로 묶으려다 매듭을 세 번 놓쳤다. 결국 앞에서 대충 묶은 우스꽝스러운 매듭이 됐다. 은발의 용사가 커피 얼룩이 밴 앞치마를 두르고 카운터에 섰다.
"오늘 장사 끝이다."
카페가 조용해졌다.
"마스터는 쉰다." 세리아가 팔짱을 꼈다. 검을 휘두를 때보다 훨씬 굳은 자세였다. "전원 잔 반납하고 나가라. 이건 명령—" 그녀가 말을 멈췄다. 여기선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부탁이다. 나가 줘."
오크 용병이 눈을 껌뻑였다.
"용사님이 왜 앞치마를……"
"보면 모르나!" 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부터 내가 임시 마스터다! 검은 물 마시고 싶으면 마스터가 나은 다음에 와! 그때 내가 직접—" 또 말이 막혔다. 그녀는 커피를 만들 줄 몰랐다. "……아니, 마스터가 직접 내려준다!"
창병이 픽 웃음을 흘렸다. 다리를 저는 궁수가 잔을 카운터에 올렸다.
"용사님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어쩌겠어."
"마스터한테 전해줘요." 마족 여자가 뿔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잘 마셨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한 명씩, 두 명씩 손님들이 잔을 반납하고 문을 나섰다. 종이 울릴 때마다 카페가 조금씩 비었다. 오크 용병만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세리아가 앞치마 자락을 걷어붙이고 노려보자 두 손을 들고 물러났다.
"무섭다, 임시 마스터."
문이 닫혔다. 안개 낀 골짜기에 카페 '경계선'만 덩그러니 남았다. 세리아는 앞치마 매듭을 그제야 풀며 긴 숨을 뱉었다. 전투 후보다 지쳐 있었다.
"용사님." 루나가 방문 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마스터가 저 사람들 다 상대했으면…… 진짜 큰일 났을 거예요."
"이 사람은." 세리아가 방으로 돌아와 지운을 내려다봤다. 그의 숨은 아직 얕고 빨랐다. "왜 멈추질 못하지. 힘든 걸 알면서."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루나가 무릎을 안고 앉았다. "거절을 못 하는 거예요. 슬픈 사람 앞에서 잔을 못 놓는 거예요. 그게 마스터라서요."
세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부하들 앞에서 후퇴를 명하지 못해 얼마나 많은 이를 잃었던가. 멈추지 못하는 건, 남 얘기가 아니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카운터 밑 어딘가에서 낡은 노트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엔 텅 빈 원두 봉지가 나뒹굴었다. 세리아는 그 빈 봉지를 흘긋 보고, 이 남자가 내일 무엇으로 커피를 내릴지 처음으로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지운의 의식은 물밑에 있었다.
빛도 소리도 뭉개진 그곳에서, 지운은 오랜만에 편안했다. 아무도 잔을 청하지 않는 곳. 아무 슬픔도 옮겨오지 않는 곳. 여기서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 조금만 더.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온화한, 처음 듣는데도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 카운터 밑 노트의 필체가 소리를 낸다면 이런 음성일 것 같은.
"손을 놓지 못하는구나."
지운은 그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몸이 없었다.
"나도 그랬다." 목소리가 말했다. 슬픔도 원망도 없이, 다만 오래 지켜본 자의 피로가 배어 있었다. "한 잔만 더, 한 사람만 더. 그러다 어느 겨울 아침에 카운터 뒤로 쓰러졌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고."
전대 마스터.
"너도 나처럼 될 셈이냐."
물밑의 편안함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운은 발버둥 쳤다. 대답하려 했다. 아니라고, 나는 다르다고, 나는 멈출 수 있다고. 하지만 오늘 아홉 잔을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니, 지운이 위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물 위로. 빛 쪽으로.
"멈추는 법을 정하지 못하면……" 마지막 말이 아득하게 흩어졌다. "이곳도, 저 아이도, 전부 잃는다."
지운은 물 밖으로 튕겨 올라왔다.
숨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