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세리아가 갑옷을 다시 두르고 문지방을 넘어간 뒤에도, 창가 자리에는 아직 그녀가 앉았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지운은 빈 잔을 거두다 말고 손을 멈췄다. 명치가 묵직했다. 그녀의 잔에서 읽은 것—셀 수 없는 이름과, 그 이름들을 짊어진 어깨의 무게가 아직 그의 안에 고여 있었다.

"마스터." 루나가 문틈을 향해 턱짓했다. "저기, 또 있어."

지운도 봤다. 문틈으로 카페 안을 들여다보던 후드의 그림자. 사내는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낮게 중얼거렸다.

"독초로 손님을 홀리는 가게라… 재미있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는 물러났다. 매끈한 신발 소리. 밤마다 문 앞을 서성이던 그 소리와 똑 닮은 걸음이었다. 지운은 행주를 쥔 채 문 쪽으로 두어 발 나섰다가 멈췄다. 골짜기 능선 너머로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독초라니." 루나가 코를 찡그렸다. "검은 열매가 독초인 줄 아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긴 하지만…"

"소문 내려는 말투였어." 지운은 문을 닫고 빗장은 걸지 않았다. "홀린다, 라는 단어를 골라 썼거든."

말을 뱉으면서도 지운은 그 소문이 얼마나 위험한 씨앗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검은 열매는 남방 밀림의 독초로 폐기되던 것. 누군가 작정하고 '카페 커피는 독'이라 퍼뜨린다면—지운은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명치의 무게가 먼저였다. 세리아 한 잔에, 오늘 감당량 둘 중 하나가 이미 저물었다.

*

해가 능선을 반쯤 넘어갈 무렵이었다.

문이 열렸다. 이번엔 노크도 망설임도 없었다. 검은 코트 자락이 마룻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로 남자가 들어섰다. 키가 컸다.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흐르는 잿빛 결이 사람의 피부가 아니었다. 뿔은 짧게 잘려 있었지만 그 자리가 남아 있었다. 마족.

루나의 손이 카운터 아래로 내려가 지운의 소매를 다시 잡았다. 이번엔 세게.

"무기는." 지운이 물었다.

"두고 왔다." 남자가 벽의 나무판을 흘긋 보았다. "규칙이라며. 문 앞에 꽂아뒀지. 누가 훔쳐가면 골짜기 전체가 재가 될 물건이니, 알아서들 조심하고."

목소리에 습기가 없었다. 물기 하나 없이 마른 칼날 같은 말투. 그는 카페 안을 천천히 훑었다. 손님을 보는 눈이 아니라, 지형을 보는 눈이었다. 출입구, 창의 위치, 카운터 뒤 통로. 정찰이었다.

"적의 단골집이라기에." 남자가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직접 봐야 잠이 오겠더군."

그가 앉은 곳은—세리아가 방금 일어난 그 자리였다. 우연이 아니었다. 온기가 남은 의자를 알아보고 골라 앉는 얼굴이었다.

"이름은요." 지운이 물었다.

"카이겐." 남자는 탁자에 팔꿈치를 얹고 손깍지를 꼈다. "심연회의 대리. 그 이상은 알 것 없고. 여기 뭘 파나. 소문엔 홀린다던데."

지운은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후드의 사내가 흘린 것과 같은 말. 이미 골짜기에 도는 소문이었다.

"홀리진 않아요." 지운이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드르륵, 낡은 그라인더가 마른 소리를 냈다. "그냥 뜨겁고 쓴 물입니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아니면 그냥 앉아 계셔도 돼요."

"마족한테 파는 값은 두 배인가."

"진영은 문밖에 두고 오신다면서요." 지운은 뜨거운 물을 얇게 부었다. 원두가 부풀어 올랐다. "그럼 값도 문밖에 있죠. 여기선 다 한 잔."

카이겐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얼굴. 그는 대꾸 대신 창밖 능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리아가 밤새 바라봤던 그 방향이었다.

*

잔이 카이겐 앞에 놓였다. 검은 수면 위로 김이 곧게 올라갔다.

카이겐은 한참 잔을 내려다봤다. 마시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았다.

"독인지 아닌지, 네가 먼저 마셔봐라."

"제가 마시면 손님 걸 넘보는 거예요." 지운이 고개를 저었다. "규칙 둘째. 옆자리 잔을 넘보지 마라. 제 것도 아닌 걸 제가 마실 순 없죠."

"교묘하군." 카이겐이 옅게 웃었다. 웃음에 온도가 없었다. "안 마시게 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고."

"안 드셔도 돼요." 지운은 카운터로 물러섰다. "여기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손님이니까."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루나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이윽고 카이겐이 잔을 들었다. 반은 오기, 반은 호기심이었다. 그가 한 모금을 삼켰다.

그 순간, 지운의 혀끝에 맛이 번졌다.

쇠맛이 아니었다. 로브 여자에게서 읽었던 계산의 쇳내와는 달랐다. 이건 얼음이었다. 아주 오래 혼자 얼어붙은 것의 맛. 손을 내밀고 싶어도 내밀면 지는 게임. 먼저 무너지면 종족 전체가 학살당한다는 확신에 갇혀, 아무에게도 등을 보이지 못하고 홀로 굳어버린 자의 맛. 고립이 어찌나 깊은지, 지운의 명치가 얼어붙는 듯 조여왔다.

지운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카운터에 섰다.

"…한 잔 더 드릴게요. 이번엔 다른 걸로."

"난 한 잔만 시켰는데."

"이건 안 파는 거예요." 지운이 우유를 데우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선 귀한 것. 거기에 설탕 단지 바닥을 긁어 마지막 한 숟갈을 털어넣었다. "그냥, 드리고 싶어서요."

두 번째 잔은 아까와 달랐다. 검지 않고 부드러운 갈색. 김에서 단내가 났다. 카이겐 앞에 놓였을 때, 남자의 손끝이 처음으로 아주 잠깐 떨렸다.

"…뭐냐, 이건."

"따뜻한 거요." 지운이 말했다. "차가운 걸 오래 쥐고 있으면 손이 굳어요. 가끔은 녹여야 다시 쥘 수 있어요."

카이겐은 그 잔을 마시지 않고 오래 바라봤다. 잔 표면에 자기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마른 칼날 같던 얼굴이 잠깐 다른 것이 됐다. 지친, 그냥 지친 남자의 얼굴.

그가 두 번째 모금을 삼켰다. 이번엔 지운이 읽지 않았다—읽을 필요가 없었다. 카이겐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으니까.

*

"이 의자." 카이겐이 나뭇결을 손끝으로 훑으며 물었다. 목소리에 다시 가시가 돋았다. "아까 그 여자가 앉았던 자리지. 갑옷 소리가 났으니 광휘연맹. 용사쯤 되나. 나더러 용사가 데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란 거냐, 이 집은."

루나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지운이 말릴 틈도 없었다.

"의자는 진영 안 가려요." 아이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앉는 사람이 사람인지만 가리죠. 아저씨가 사람이면 앉아도 되고, 사람 아니면 못 앉는 거예요. 근데 아까부터 계속 앉아 계시잖아요."

카이겐이 아이를 내려다봤다. 열두 살짜리를 처음 보는 것처럼.

"…버릇없는 애를 두는군."

"똑똑한 애예요." 지운이 정정했다.

카이겐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이번 웃음엔 아까 없던 온도가 조금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잔을 마저 비웠다. 잔을 내려놓는 손이 처음보다 느슨했다.

바로 그때였다. 카이겐의 시선이 창가 구석에 멈췄다. 세리아가 두고 간 것—아니, 두고 간 게 아니라 잠시 세워뒀다 잊은 물건이 벽에 기대 있었다. 목검. 손잡이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낡은 검이었다.

카이겐이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지운이 뭐라 하기 전에, 남자의 눈이 손잡이에 붙박였다.

손잡이에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칼끝으로 하나하나 파낸 글자들. 삐뚤빼뚤한 것도 있고 반듯한 것도 있었다. 수십 개. 손잡이를 다 덮고도 모자라 자루 아래까지 이어진 이름들.

카이겐의 얼굴에서 마지막 가면이 떨어졌다.

"…저쪽도." 그가 낮게 말했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우리처럼 사람을 묻는군."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겐이 그 이름들을 손끝으로 훑는 걸 지켜봤다. 마족 진영에도 저런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이름을 새길 곳을 찾지 못해 마음에 새긴 이름들이. 두 개의 손잡이, 두 개의 진영, 같은 무게.

"…이 여자, 화해를 원하겠군." 카이겐이 목검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세웠다. "손잡이에 이만큼 새겼으면. 더 새기고 싶지 않은 거야."

"그쪽은요." 지운이 물었다.

카이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

카이겐이 코트를 여미며 문으로 향할 때, 지운은 잠깐 어지러웠다. 카운터 모서리를 짚었다. 명치의 얼음이 아직 녹지 않고 얹혀 있었다. 세리아의 무게와 카이겐의 고립이 겹쳐 쌓인 탓이었다.

노트가 저 혼자 카운터 위에서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의 감당량 옆에 새 숫자가 떠올랐다.

영.

이틀 사이 세리아 한 잔, 카이겐 두 잔. 두 진영의 수장을 하루 걸러 감당했다. 상한이 둘로 깎여 있으니, 소모가 전보다 가팔랐다. 루나가 그 숫자를 봤다. 아이의 낯빛이 굳었다.

"마스터." 루나가 소매를 잡았다. 이번엔 신호가 아니라 붙드는 손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더는 안 돼. 진짜로."

"알아." 지운이 웃어 보였다. 웃는 게 힘겨웠다. "안 받아. 문 닫자."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지운은 자기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루나만큼 정확히 읽지 못했다. 타인의 떨림은 그리도 잘 읽으면서.

문가에서 카이겐이 멈춰 섰다. 나가려다 돌아보는 얼굴에, 아까 데워진 온기와 함께 낯선 것이 섞여 있었다. 경고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것.

"마스터." 그가 불렀다. 처음으로 그 호칭을 썼다. "값은 다음에 치르지. 어차피 또 올 테니."

그러곤 잠시 문틀에 손을 얹은 채, 골짜기 능선을 내다봤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가지 알려두마. 요즘 골짜기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 심연회 척후병들이 물어 왔지. 이 가게 커피가 사람 정신을 홀리는 독이라고. 마시면 마족이든 인간이든 넋이 빠져 진영을 배신하게 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퍼뜨리는지—"

카이겐의 눈이 지운을 정면으로 봤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소문, 우리 쪽에서 시작된 게 아니야. 너희 쪽도 아니지. 제3의 손이 있어. 그자가 이 가게를 없애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문이 닫혔다. 검은 코트 자락이 사라지고, 매끈한 신발이 아닌 마족의 무거운 발소리가 능선 너머로 멀어졌다.

카운터 위에서 노트가 저 혼자 한 장을 더 넘겼다. 지운은 그 페이지를 보지 못했다. 손끝이 카운터를 짚은 채, 명치의 얼음이 온몸으로 번지는 걸 견디느라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마스터?" 루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마스터, 얼굴이—"

문밖 어딘가에서, 매끈한 신발 소리가 다시 카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루나가 지운의 팔을 붙들었다. 아이의 손이 지운의 손목에서 뛰는 맥을 짚었다. 너무 빨랐다. 어제 열병에서 회복했다던 사람의 맥이 아니었다.

"앉아. 지금." 루나가 의자를 끌어당겼다. 카이겐이 방금 데워놓은 그 자리였다. "여기, 앉아."

지운은 순순히 앉았다. 순순히 앉았다는 게 이미 나쁜 신호였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한 잔만 더 닦고 앉겠다고 미뤘을 사람이었다.

"물." 그가 겨우 말했다. "물 한 잔만."

루나가 물을 떠 와 손에 쥐여줬다. 지운은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카이겐에게 데운 우유를 건네며 했던 말이 스스로에게 되돌아왔다. 차가운 걸 오래 쥐고 있으면 손이 굳는다고. 지금 그의 손 안에서 굳어가는 건 얼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짊어진 죽은 이름들의 무게였다.

명치에 고인 것이 흩어지지 않았다. 오스카의 외로움은 하룻밤 자고 나면 옅어졌다. 세리아의 이름들은 더 무거웠다. 카이겐의 고립은—녹지 않는 얼음처럼 그 위에 얹혀 굳었다. 세 개의 무게가 층층이 쌓여, 오늘은 물을 마셔도 흘러가지 않았다.

"루나." 지운이 잔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노트에 뭐라고 떠올랐어."

루나가 카운터로 달려가 노트를 집어 왔다. 아이의 눈이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읽어 줘." 지운이 말했다.

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상한 초과 아님. 그러나 잔류 미해소. 어제의 무게가 남은 채 오늘의 무게를 얹으면, 몸은 하루가 아니라 이틀 치를 견딘다.'" 아이가 잠깐 멈췄다가 이었다. "'전대 마스터는 이 방식으로 무너졌다. 하루하루는 한계 안이었으나, 녹여내지 못한 무게가 쌓여 어느 날 심장이 멈췄다.'"

지운이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상한을 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는 거였다. 하루 감당량을 지켜도, 어제의 슬픔을 다 흘려보내지 못한 채 오늘의 슬픔을 얹으면—무게는 사라지지 않고 몸 안에 고여 쌓인다. 전대 마스터가 그렇게 죽었다.

"그럼," 루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럼 어제 세리아 아줌마 걸 아직도 몸에 담고 있으면서, 오늘 카이겐 아저씨 걸 두 잔이나—"

"몰랐어." 지운이 눈을 떴다.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몰랐다기보다… 세리아 씨 무게가 아직 안 빠진 걸 알면서, 안 뺐어. 그 이름들을. 그냥 두고 싶었어."

"왜!"

"두고 가라고 말하기가 미안해서." 지운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 물이 조금 넘쳤다. "그 사람이 그 이름들을 하나도 못 버리는데, 내가 그걸 하룻밤 만에 흘려보내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루나가 지운을 노려봤다. 열두 살짜리가 어른을 야단칠 때의 눈이었다.

"그건 마스터가 정할 게 아니잖아." 아이의 목소리가 젖었다. "그 무게 마스터 거 아니잖아. 세리아 아줌마 거잖아. 마스터가 대신 짊어진다고 그 아줌마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고, 마스터만 죽는 거잖아. 전 마스터처럼."

말이 정확히 명치에 박혔다. 지운은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아이가 자기 몸의 경고를 자기보다 정확히 읽고 있었다.

*

바로 그때, 다가오던 매끈한 신발 소리가 문 앞에서 멎었다.

똑, 똑. 노크였다. 정중한, 지나치게 정중한 노크.

루나가 반사적으로 지운 앞을 막아섰다. 지운은 카운터를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후드를 벗은 사내가 서 있었다. 낮에 문틈으로 '독초'를 중얼거리던 그 그림자였다. 얼굴은 온화했다. 상인의 얼굴, 웃는 주름이 눈가에 자리 잡은 중년 남자. 하지만 눈만은 웃지 않았다. 값을 매기는 눈이었다.

"영업이 끝났나 봅니다."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마시러 온 게 아니라서요."

"…누구세요." 루나가 물었다.

"장사꾼입니다. 소소하게 이것저것 파는." 사내가 카페 안을 둘러봤다. 카이겐이 그랬듯, 손님의 눈이 아니라 지형을 보는 눈으로. "그림 발토스라고 합니다. 이 골짜기에서 제 물건 안 거쳐 간 게 없죠. 무기든, 소식이든."

지운은 그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명치의 무게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이자가 위험하다는 것. 소문의 손이 여기 서 있다는 것.

"마스터께." 발토스가 지운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긴히 드릴 제안이 있어 왔습니다. 좋은 거래를요."

"거래라뇨." 지운이 카운터를 짚은 채 겨우 말했다.

발토스가 웃었다. 이번엔 눈도 함께 웃었다. 그게 더 서늘했다.

"이 가게 문을 닫아 주시면—"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카운터에 올렸다. 낡은 종이 한 장. 지운의 눈이 그 위에 박혔다. 전대 마스터의 필체였다. 뜯겨나간 노트의 마지막 장, '상한을 되—'로 시작하던 바로 그 페이지의 뒷면 자국까지 똑같은 종이. "이걸 돌려드리죠. 마스터께서 그토록 찾으시는, 상한을 되돌리는 법이 적힌 종이입니다."

지운의 손끝에서 물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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