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마지막 기억은 스팀 노즐에서 뿜어져 나오던 흰 김이었다. 주문표가 카운터 위로 스물세 장, 아니 스물네 장. 손목이 감각을 잃었고, 눈앞이 흑백으로 변했고, 누군가 "사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아주 먼 우물 밑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지금, 하지운의 뺨에 닿는 건 차가운 나무 바닥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진동음도, 매장 스피커의 재즈도 없었다. 대신 낡은 목재가 삐걱대는 소리, 어디선가 스며드는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문틈을 훑고 지나가는 휘파람 같은 소리.

지운은 몸을 일으켰다.

"……여기 어디야."

천장이 낮았다. 서까래에 마른 허브 다발이 매달려 있고, 벽난로 위 선반에는 처음 보는 모양의 놋쇠 주전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무엇보다 카운터.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진 원목 카운터 위에, 그가 십 년을 만져온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손으로 돌리는 원두 그라인더. 융 드립용 플란넬 천. 목이 긴 드립 포트. 낯익은데, 죄다 낡았다. 백 년쯤 누군가 쓰다 물려준 것처럼.

벽에 종이 한 장이 압정으로 박혀 있었다. 갈색으로 바랜 종이 위, 각진 글씨.

*하나, 문을 넘는 순간 계급과 진영을 문 밖에 두어라.* *둘, 옆자리의 잔을 넘보지 마라—각자의 위로는 각자의 것이다.* *셋,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오늘의 손님 수는 마스터가 정한다.*

지운은 세 번째 줄에서 눈을 오래 멈췄다. 마스터. 손님 수. 한계.

"……내가 마스터라고?"

읽지 못하는 문자여야 했다. 이 방 어느 것도 한국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글자는 또렷하게 읽혔고, 그 사실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그는 카운터 안쪽으로 손을 뻗어 그라인더 손잡이를 잡았다. 손바닥이 그 무게를 정확히 기억했다. 몸이 먼저 안심했다. 머리는 아직 아니었다.

문 위에 매달린 종이 흔들렸다.

*딸랑—*

찬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문틀을 채운 실루엣은 사람 두 명을 겹쳐 놓은 것처럼 컸다. 가죽 갑주 위로 마른 피가 검게 눌어붙어 있고, 왼쪽 눈썹을 가로지른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아 붉었다. 등에는 사람 키만 한 대검, 허리엔 손도끼 두 자루.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지운의 심장이 뛰었다. 도망칠 문은 저 남자가 막고 있었다.

"……전대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남자의 시선이 지운을 위아래로 훑었다. "네가 새 마스터냐. 애송이가."

"저는……" 목이 말랐다. 그러나 십 년 몸에 밴 것이 입을 대신 열었다. "네. 여기 마스터입니다. 어서 오세요."

남자가 콧방귀를 뀌며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손님." 지운이 카운터를 나섰다. 다리가 떨렸지만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그는 벽에 붙은 종이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무기는 문 밖에요. 여기 규칙이라서."

정적. 남자의 손이 손도끼 자루로 향했다. 지운은 침을 삼켰다. 물러서면 안 된다는 감이 왔다. 여기서 물러서면, 이 낯선 방이 그를 손님 하나 못 다루는 겁쟁이로 기록할 것 같았다.

"규칙." 남자가 웃었다. 웃음에 온기가 없었다. "그래. 그 미친 영감이 항상 그 소릴 했지."

의외였다. 그는 순순히 대검을 벗어 문 옆 벽에 세웠다. 손도끼도, 허리춤의 단검까지 전부. 무기 없이 선 그는 여전히 컸지만, 어깨가 조금 내려앉아 보였다. 갑옷 아래 어딘가가 지쳐 있었다.

"오스카다." 그가 창가 구석 자리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뭐가 되든 따뜻한 거. 술은 됐고. 오늘은."

지운은 카운터로 돌아왔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라인더를 돌리자 나무 서랍에서 익숙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검은 열매—원두였다.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향은 정직했다. 물을 데우고, 포트의 물줄기를 가늘게 세워 원두를 적셨다. 뜸을 들이자 갈색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오스카가 그 광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 물이잖아."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거 남쪽 밀림에서 나는 독초 아냐? 마시면 뒈진다던데."

"안 죽어요." 지운은 드립을 멈추지 않았다. "십 년 마셨는데 멀쩡하잖아요."

"십 년? 애송이 주제에."

"……마스터한테 애송이는 좀."

잔에 검은 액체가 차올랐다. 지운은 그것을 오스카 앞에 내려놓았다. 김이 피어올라 창밖의 회색 하늘을 흐렸다.

"뭐야, 이 냄새는." 오스카가 코를 킁킁댔다. 경계하면서도, 이미 몸이 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달지도 않고 고약하네."

"한 모금만요. 마음에 안 들면 안 받을게요."

오스카는 잔을 들었다. 큼직한 손이 작은 잔을 완전히 감쌌다. 잠시 그것을 노려보다가, 될 대로 되라는 듯 목을 젖혔다.

그가 삼키는 순간—

지운의 혀끝이 저릿했다.

없던 감각이었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입안 가득 맛이 번졌다. 아무 데도 붙지 못하고 겉도는 맛. 어느 진영의 소금기도, 어느 고향의 단맛도 없는, 물에 오래 담가 색이 다 빠진 헝겊 같은 맛. 목구멍 뒤로 넘어가면서 텅 빈 방에 울리는 발소리처럼 아득해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의 외로움.*

문장이 아니라 맛으로 그것이 새겨졌다. 지운의 명치가 죄어들었다. 이 남자는 양쪽 어디에도 집이 없다. 돈을 준 쪽에서 싸웠고, 다음 달엔 그 반대편에서 싸웠다. 누구의 전우도 아니었고, 누구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머리가 알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지운은 새 잔을 꺼냈다. 이번엔 물을 더 부드럽게, 온도를 살짝 낮춰 쓴맛의 각을 죽였다. 선반에서 왕족이나 쓴다는 갈색 설탕 조각을 반의반만 떼어 녹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마른 허브 다발에서 잎 하나를 뜯어 손끝으로 비벼 향을 낸 뒤, 잔 위에 얹었다. 우유가 없어, 데운 물에 꿀 한 방울을 풀어 표면에 옅은 층을 만들었다. 겉도는 맛을 감싸 안는, 가장자리가 둥근 한 잔.

"……한 잔 더 드셔보세요." 지운이 그것을 내밀었다. "아까 건 인사고, 이건 제대로 된 거예요."

"뭐가 다른데."

"마셔보시면 알아요."

오스카가 두 번째 잔을 들었다. 이번엔 노려보지 않았다. 한 모금 삼키고—그의 목울대가 멈췄다.

한참을 그 자세로 굳어 있었다.

"…….이게 뭐냐."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까와 다른 방식으로. "이거 왜…… 왜 이래."

"뭐가요."

"속이." 그가 잔을 내려놓지 못했다. 큼직한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속이 이상하다고. 뜨거운 게 여기로 내려가는데,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흉터 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오스카는 급하게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소용없었다. 굵은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번졌다.

"이런…… 젠장." 그가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건 처음이야."

지운은 카운터에 손을 얹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피 없는 세계의 첫 손님이, 뜨거운 검은 물 한 잔에 무너지고 있었다. 십 년간 수천 잔을 내렸지만 이런 광경은 본 적 없었다. 여기선 아무도 마시는 것으로 위로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방어할 줄을 몰랐다.

"저기……" 지운이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울 정도로 맛없진 않았죠?"

"맛없어서 우는 게 아니잖아, 이 등신아." 오스카가 눈물 젖은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그러곤 자기가 소리친 게 민망한지 또 눈가를 문질렀다. "……뭐야. 커, 커피? 이딴 거 어디서 배웠어."

"'이딴 거'래." 지운이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쪽이 지금 그 '이딴 거' 한 잔에 우시는 중인데요."

"닥쳐."

"손님이 마스터한테 닥치래."

"…….마스터한테 애송이랬다고 아까부터 삐졌냐?"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 오스카가 먼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어깨의 긴장이 그제야 완전히 풀렸다. 그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밖 회색 골짜기를 오래 바라봤다.

"광휘연맹 쪽에서 반년 싸웠어." 그가 낮게 말했다. 지운은 잔을 닦으며 들었다. "돈 떨어지니까 이번엔 심연회 쪽에서 불러. 마족 밑에서 또 반년. 어제까지 내가 베던 놈들이 이번 달 전우고, 지난달 전우가 이번 달 표적이야."

"……."

"인간 진영에선 마족 밑에서 굴렀다고 침 뱉고, 마족 쪽에선 인간이라고 안 믿어." 오스카가 잔을 내려놓았다. "양쪽에 다 고용됐던 나 같은 놈은 말이야. 어느 막사에 누워도 자다 목 따일까 봐 벽 보고 자. 여긴…… 여긴 뭐냐. 나 같은 놈도 그냥 손님이냐?"

지운은 벽에 붙은 첫 번째 줄을 힐끗 봤다. *문을 넘는 순간 계급과 진영을 문 밖에 두어라.*

"손님이시죠." 지운이 말했다. "무기 문 밖에 두셨잖아요. 그럼 여기선 그냥, 따뜻한 거 마시러 온 사람. 그게 다예요."

오스카가 오래 그를 쳐다봤다. 뭔가 말하려다, 대신 잔을 마저 비웠다.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킬 때 그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일 또 온다." 그가 무기를 챙기며 일어섰다.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어색하게 덧붙였다. "……돈은 뭘로 받아. 이딴 세상에 이딴 물맛을 아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고."

"오늘은 개업 첫날이라 그냥 가셔도 돼요."

"흥. 애송이 사장 망하겠네."

*딸랑—* 문이 닫혔다.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지운은 그제야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다리가 후들거려 카운터를 짚었다. 이상했다. 잔 두 개 내렸을 뿐인데, 마감 뒤 스물세 잔을 뽑은 날처럼 진이 빠졌다. 게다가 가슴 한구석에 낯선 무게가 얹혀 있었다. 오스카가 남기고 간 것—어느 벽을 보고 누워도 편치 않은 그 외로움이, 지금 지운의 명치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내가 왜 슬프지."

그는 오스카가 마신 빈 잔을 집어 천천히 닦았다. 손끝이 떨렸다. 이 세계가, 이 능력이, 무엇을 대가로 요구하는지 그는 아직 몰랐다.

그때였다.

카운터 밑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떠올랐다. 손때 묻은 가죽 표지의 낡은 노트. 압정도 실도 없이, 허공에 저 혼자 펼쳐졌다. 지운은 잔을 닦던 손을 멈췄다.

펼쳐진 페이지 맨 위, 각진 글씨로 이미 이런 줄이 적혀 있었다.

*오늘의 감당량: 3*

지운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잉크를 긋는 것처럼 숫자 위로 선이 그어졌다. 3에 사선이 그이고, 그 옆에 새 숫자가 배어 나왔다.

*오늘의 감당량: 3 → 2*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페이지 아래쪽에 작은 글씨가 스스로 돋아났다. 전대 마스터의 것인지, 노트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한 줄이었다.

*—무리하면, 오늘 밤 대신 무너지는 건 너다.*

지운은 노트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종이에 닿기 직전, 페이지가 저 혼자 사르르 넘어갔다. 마치 아직 읽을 때가 아니라는 듯이.

"……뭐야, 이거."

그는 노트를 붙잡아 앞장부터 펼쳤다. 각진 글씨가 빼곡했다. 레시피였다. 원두를 볶는 온도, 물의 온도, 뜸 들이는 시간. 그가 십 년을 몸으로 익힌 것들이 이 낯선 세계의 언어로, 그러나 또렷하게 읽히는 글자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레시피가 아닌 문장이 끼어 있었다.

*—창가 자리 손님은 대개 등을 보이고 앉는다. 마주 보게 하지 마라.* *—두 잔째를 청하지 않는 손님에게 두 잔째를 권하지 마라. 그건 네 욕심이다.* *—그리고, 하루에 몇 명을 읽을지는 손님이 아니라 네가 정해라.*

지운은 마지막 줄에서 손을 멈췄다. 읽는다. 아까 오스카의 첫 모금에서 혀끝으로 밀려들던 그 맛—외로움. 그게 '읽는' 것이었나. 그럼 지금 명치에 고인 이 무게는, 읽은 대가인가.

그가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노트 맨 뒤쪽이 유독 두툼했다. 마지막 장. 그리고 그 뒤로, 무언가 뜯겨나간 자국이 있었다. 실밥이 삐져나온 채 종이가 거칠게 찢겨 있었다. 남은 밑동에 몇 글자가 잘려 있었다.

*—상한을 되*

그 뒤가 없었다. 지운은 찢긴 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종이가 살짝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그 위에 다른 종이를 대고 눌러쓴 것처럼. 그러나 지운의 눈으로는 무슨 글자인지 읽히지 않았다.

"상한을 되…… 되돌린다? 되찾는다?"

*딸랑—*

지운은 반사적으로 노트를 카운터 아래로 밀어 넣었다. 문이 다시 열려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문틈 아래, 바닥에 웬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누군가 문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다 몸을 숨긴 듯한.

"……오스카 씨?"

대답이 없었다. 바람이 문을 다시 밀었다.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운은 문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회색 골짜기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문 옆, 오스카가 무기를 세워뒀던 그 벽 아래—젖은 흙바닥에 발자국 하나가 찍혀 있었다. 오스카의 것이 아니었다. 밑창이 매끈한, 전투화가 아닌 신발. 발끝이 문 쪽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 서서,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지운이 눈치채기 전에 물러났다.

목덜미가 다시 서늘해졌다. 그는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처음으로 이 낯선 방이 안전한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진영이 그은 휴전선 한복판. 어느 깃발도 걸리지 않은 자리. 그 말은 곧,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자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운은 카운터로 돌아와 오스카의 빈 잔을 마저 닦았다. 손이 아까보다 더 떨렸다. 명치의 무게는 가시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읽은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몸에 고인다면—하루에 손님을 몇이나 받을 수 있을까. 두 명? 세 명? 노트는 방금 3을 2로 깎았다.

그는 잔을 선반에 엎어놓고,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회색 하늘을 봤다.

"조금만 익숙해지면 돼."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생에서 수천 번 했던 말이었다. "한 명 더 정도는…… 괜찮겠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카운터 아래 노트가 스스로 파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운이 몸을 숙여 꺼내 보니, 방금 전 그 페이지가 다시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3 → 2* 아래로, 잉크가 새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번엔 경고가 아니라, 마치 그의 혼잣말을 엿들은 것처럼 대답하는 문장이었다.

*—전대 마스터는 그렇게 시작했다.*

지운의 손끝이 굳었다. 그 아래로 한 줄이 더 돋았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죽었다.*

빗장 걸린 문 밖에서, 매끈한 신발의 발소리가 자갈을 밟고 천천히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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