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맡은 냄새는 나무 썩는 냄새였다.
지운은 오래된 마룻바닥에 뺨을 댄 채 눈을 떴다. 목덜미가 뻣뻣했고, 관자놀이가 심장처럼 뛰었다. 마지막 기억은 사무실 뒤 탕비실이었다. 열여덟 시간째 서 있던 다리가 접히고, 손에 든 스팀피처가 바닥에 떨어지며 우유가 튀던 감각. 그리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 점점 멀어지던 형광등.
여긴 형광등이 없었다.
천장에는 대들보가 가로질러 있고, 그 사이로 먼지가 낮 햇살을 받아 금가루처럼 떠 있었다. 벽에는 마른 허브 다발이 못에 걸려 있고, 카운터 위엔 이 빠진 도기 잔들이 줄지어 있었다. 손잡이가 닳도록 만져진 목제 카운터. 그 뒤로 낯선 형태의 화로와, 검게 그을린 주전자.
"……꿈인가."
몸을 일으키자 무릎이 후들거렸다. 카운터를 짚고 서니 눈높이에 종이 한 장이 압정으로 박혀 있었다. 잉크가 번진 글씨. 그런데 읽혔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구불구불한 문자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뜻으로 풀렸다.
『이 글을 읽는 자에게. 나는 이 가게의 주인이었다. 이제 죽었으니, 이곳은 너의 것이다. 도망치지 마라. 그리고 —』
문장은 거기서 잉크가 말라 끊겨 있었다. 지운은 종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죽은 주인, 나의 것. 헛웃음이 나왔다.
"과로로 쓰러졌더니 이세계 카페 상속이라니. 산재 처리는 되나 이거."
그때 문이 두드려졌다.
쿵, 쿵. 주먹이 아니라 작은 손바닥이 나무를 때리는 소리. 이어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불이…… 불빛이 새어나와서."
지운은 문고리를 당겼다. 문틈으로 찬 공기가 밀려들고,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뺨은 홀쭉했고, 옷은 무릎 아래가 흙투성이였다. 아이는 지운을 올려다보다가 카운터 뒤 화로를 발견하고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작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마스터…… 아니에요? 여기 마스터, 늘 국물 같은 거 한 그릇 주셨는데."
"나는 여기 온 지 삼 분쯤 됐어."
"삼 분……?"
아이의 눈이 물기를 머금었다. 실망이 아니라 겁이었다. 문 앞에서 물러날 곳을 찾는 짐승의 눈. 지운은 그 눈을 알았다. 마감을 앞두고 손이 떨리던 알바생이, 자를까 봐 아프다는 말을 못 하던 그 눈.
지운은 문을 더 열었다.
"들어와. 뭐라도 해줄게. 이름은?"
"……루나."
루나는 문지방을 넘으며 신발을 벗지 않았다. 벗을 신발이 온전하지 않아서였다. 지운은 못 본 척 카운터로 돌아갔다. 냄비를 찾았지만 국물 재료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대신 카운터 밑 서랍을 열었을 때, 삼베 자루 하나가 손에 걸렸다. 안에는 검고 반들거리는 열매가 가득했다. 딱딱하게 볶인 것도 있고, 생것도 섞여 있었다.
집어서 코에 대는 순간, 지운의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었다.
원두였다.
볶은 향, 기름이 배어 나온 표면, 손끝에 남는 미세한 가루. 십 년을 매일 만졌던 냄새였다. 이세계에 떨어져 처음으로, 무릎의 힘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심장이 뛰었다.
"이거 어디서 났대……."
옆에 놓인 낡은 절구와 손 그라인더 비슷한 물건. 화로 위 주전자. 도구는 조악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지운은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걸 느꼈다. 열매를 절구에 붓고 빻았다. 균일하지 않은 굵기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주전자에 물을 붓고 화로에 얹었다. 부글거리는 소리가 나기 직전, 불에서 내렸다.
"뭐 하는 거예요?"
루나가 카운터에 턱을 걸치고 지켜보고 있었다.
"물 끓여."
"검은 열매 그거…… 독인데. 마스터가 그거 밀림에서 주워 왔다가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먹으면 배 아파서 죽는대요."
"안 죽어. 이건 이런 데 쓰는 거야."
지운은 빻은 가루를 천에 올리고, 그 위로 뜨거운 물을 원을 그리며 부었다. 천 아래로 검은 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향이 피어올랐다. 낡은 목조 카페 안에, 나무 썩는 냄새를 밀어내고 진하고 고소한, 그러나 어딘가 서늘한 커피 향이 퍼졌다.
루나가 코를 킁킁거렸다. 눈을 크게 떴다.
"이 냄새 뭐예요……. 처음 맡아."
당연하지. 이 세계엔 커피가 없으니까. 지운은 그렇게 생각하다 손을 멈췄다. 없다. 냄새도, 이름도, 이걸 마시고 위로받는다는 발상 자체가. 그는 도기 잔에 검은 물을 따랐다. 설탕도 우유도 없어서, 대신 카운터 구석 항아리에서 발견한 꿀을 반 스푼 저었다. 김이 올랐다.
"마셔봐.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진짜 안 죽어요?"
"내가 먼저 마실게."
지운은 한 모금 삼켰다. 쓰고, 거칠고, 균일하지 않은 추출. 하지만 커피였다. 목이 메었다. 루나가 그걸 보더니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손이 차가운지 잔에 뺨을 붙였다가, 조심스레 입을 댔다.
첫 모금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지운의 혀 안쪽에서 무언가 터졌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입 안에 맛이 번졌다. 지독하게 쓴맛. 커피의 쓴맛과는 다른, 오래 묵어 굳은 쓴맛이었다. 그 밑에 짜디짠 것이 깔려 있었다. 눈물을 삼키고 또 삼켜서 몸에 절여진 소금의 맛. 그리고 텅 빈 단맛의 자리. 누군가 손을 잡아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아이의 맛.
버려짐. 혼자 남겨진 밤들의 맛.
머릿속에 명료하게 떠올랐다. 이 쓴맛을 감싸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지운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방금 내린 커피에 꿀을 조금 더, 그리고 화로 옆 마른 대추 비슷한 열매를 으깨 넣었다. 뜨거운 우유는 없었지만, 항아리 속 짐승 젖 한 국자를 데워 부었다. 표면에 부드러운 막이 앉았다.
"이거 새로 마셔봐. 그거 말고 이거."
루나가 새 잔을 받았다. 김에 얼굴을 묻고, 한 모금.
아이의 눈이 멈췄다.
두 번째 모금에서 어깨가 떨렸다. 세 번째에서, 잔을 든 채 눈물이 뚝 떨어져 커피 표면에 파문을 만들었다. 루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아이 특유의 울음이었다. 삼키고, 어깨를 움츠리고, 또 삼키고.
"왜…… 왜 이렇게……."
"뜨거워서 그래. 천천히 마셔."
"아니에요."
루나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가슴 앞에 꼭 끌어당겼다.
"이거…… 마시는 게 아니에요. 이거, 안기는 거예요. 누가…… 누가 등 뒤에서 안아주는 거 같아요. 나 이런 거 처음이에요."
지운은 카운터를 짚었다. 무릎이 다시 후들거렸다. 이번엔 과로가 아니었다. 아이의 쓴맛이 여전히 혀에 남아 있었다. 목구멍이 뜨겁고, 눈이 시렸다. 남의 슬픔인데 내 것처럼 무거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마에 열이 오르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뭐지, 이거.'
그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는 사이, 루나는 잔을 다 비우고 처음으로 웃었다. 눈물범벅인 채로.
"마스터, 저 배고픈 것도 잊었어요."
"……마스터 아니라니까."
"근데 마스터잖아요. 여기 주인. 저 아까 봤어요, 벽에 붙은 종이. 마스터한테 넘긴다고."
지운은 벽을 돌아봤다. 압정에 박힌 그 종이 옆에, 그가 처음엔 못 봤던 작은 나무판이 걸려 있었다. 세 줄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 문을 넘는 순간, 계급과 진영을 문밖에 두어라. 둘. 옆자리의 잔을 넘보지 마라. 각자의 위로는 각자의 것이다. 셋.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오늘의 손님 수는 마스터가 정한다.』
세 번째 줄에서 지운의 시선이 멎었다.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오늘의 손님 수는 마스터가 정한다.
웃음이 나왔다. 씁쓸하게. 자기 한계를 존중해본 적이 없어서 여기까지 굴러온 인간에게, 죽은 선대는 하필 그 문장을 남겨두었다. 오늘의 손님 수는 마스터가 정한다. 정할 줄 알았으면 탕비실에서 스팀피처를 떨어뜨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문장, 무슨 뜻이에요?"
루나가 옆에 와 나무판을 올려다봤다.
"손님 그만 받고 싶을 때, 그만 받아도 된다는 뜻."
"에이. 마스터가 그럴 리가. 마스터는 손님 오면 무조건 뭐라도 줬어요. 밤에 다 쓰러져가면서도. 그러다……."
루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죽었다는 말을 삼킨 얼굴이었다. 지운은 그 아이의 표정을 읽었다. 선대 마스터도, 어쩌면 나 같은 인간이었나. 거절이 서툰 인간. 조금만 더, 를 반복하다 손을 놓지 못한 인간.
혀에 남은 쓴맛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지운은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열이 좀 내렸다.
그는 카운터를 천천히 둘러봤다. 이 빠진 잔들, 삼베 자루의 검은 열매, 화로와 절구. 이 세계에는 커피가 없다고 했다. 마시며 위로받는다는 발상 자체가 없다고. 독초로 알고 버리던 열매를, 선대는 밀림에서 목숨 걸고 주워 왔다. 이 위험한 휴전선 한복판에 왜 하필 가게를 열었는지, 지운은 아직 몰랐다. 하지만 방금 우는 아이 하나가 잔을 끌어안는 걸 봤다.
'멈추는 법을 배우고 싶었어.'
전생의 소원이 떠올랐다. 쫓기지 않고, 실적에 시달리지 않고, 내 손님을 내 속도로 대접하는 나만의 가게. 그게 이런 데서 이런 식으로 굴러올 줄은 몰랐지만.
"루나."
"네?"
"여기, 내가 할게. 손님 오면 커피 내려주는 거."
"커피가 뭐예요?"
"방금 네가 안겼다던 그거."
루나가 잔을 다시 끌어안았다. 이번엔 빈 잔인데도. 그 모습에 지운은 처음으로, 뺨 근육을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움직여 웃었다. 열은 남아 있고 손끝은 여전히 미미하게 떨렸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개운했다.
"근데 마스터."
"아직 마스터 아니…… 아니다, 그냥 그렇게 불러."
"저 여기서 살아도 돼요? 갈 데가 없어서."
지운이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나무 벽에 부딪혔다. 밀려든 바깥바람이 화로의 불꽃을 눕혔고, 커피 향이 흩어졌다. 문틀을 가득 채운 그림자가 있었다. 역광 속에서 은발이 서릿발처럼 빛났고, 허리에 찬 검집의 금속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루나가 지운의 뒤로 숨었다. 지운은 카운터를 짚은 채 그대로 굳었다. 혀에 남은 아이의 쓴맛 위로, 새로운 무언가가 문을 넘어 밀려들었다. 쇠 냄새 같은, 억눌린 감정의 예감.
여자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카페 안을 훑었다. 낡은 잔들, 화로, 그리고 카운터 뒤의 낯선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목소리가 칼처럼 내려앉았다.
"이 중립지대의 새 주인이 너냐."
지운은 대답하기 전에 여자의 얼굴을 먼저 읽었다.
역광이 물러나고 화롯불이 다시 서자,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스물 대여섯쯤. 흠 하나 없는 갑옷,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런데 눈 밑이 검었다. 며칠을 못 잔 자의 그늘. 검 손잡이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어 있었다. 위협이 아니라, 손을 놓으면 무너질까 봐 붙들고 있는 손이었다.
"새 주인 맞아. 삼십 분쯤 됐지만."
"삼십 분."
여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이없어하는 건지, 경계를 늦춘 건지 알 수 없었다.
"전대 주인은 죽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웬 낯선 인간이 카운터에 서 있고, 마족 아이를 뒤에 숨기고 있군."
"마족……?"
지운이 돌아보자 루나가 몸을 더 웅크렸다. 그제야 보였다. 아이의 흙 묻은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귀 끝과 이마 언저리에 돋은 자잘한 뿔의 흔적. 처음 봤을 땐 굶주림과 추위만 눈에 들어와 놓쳤던 것들.
"이 애가 마족이든 아니든." 지운은 카운터 앞으로 나섰다. "여긴 그런 거 안 따지는 데 같은데. 저기 벽에 그렇게 쓰여 있어."
여자의 시선이 나무판으로 옮겨갔다. 세 줄을 읽는 동안, 검 손잡이를 쥔 손에서 힘이 아주 조금 빠졌다. 첫째 줄. 문을 넘는 순간 계급과 진영을 문밖에 두어라. 그녀는 그 문장을 오래 응시했다. 뭔가를 기억해내는 얼굴이었다.
"……전대 주인이 늘 하던 말이지."
목소리의 온도가 반음 내려갔다. 지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앉아서 얘기해. 서서 하면 다리 아프잖아. 눈 밑도 그렇고, 며칠 못 잤지?"
여자의 눈이 순간 커졌다. 도발당한 짐승처럼 어깨가 곤두섰다.
"내 몰골이 그렇게 우습나."
"우습다는 게 아니야. 안돼 보인다는 거지."
지운은 대답하며 이미 잔을 꺼내고 있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 여자가 앉든 안 앉든, 마시든 안 마시든, 내려놓을 잔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삼베 자루로 손을 뻗는 순간, 혀 안쪽이 다시 저릿했다. 루나 때와 달랐다. 아직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는데, 이 여자가 뿜어내는 예감만으로 맛이 번지기 시작했다.
쇠. 피. 그리고 이름들. 수없이 많은 이름들.
지운은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관자놀이가 다시 뛰었다. 루나의 쓴맛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몸에, 새로운 무게가 얹히는 감각. 그는 카운터 모서리를 짚어 몸을 지탱했다.
"괜찮아요, 마스터?" 루나가 뒤에서 소매를 붙잡았다.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습관처럼 그 말이 먼저 나왔다.
여자는 지운의 창백해진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결국 카운터 앞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검을 풀지는 않았다. 대신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 무릎에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어깨선이 조금 낮아졌다.
"주인이 정말 죽었다면." 그녀가 말했다. "이 가게는 사라져야 정상이다. 완충지대 한복판에 세워진 이 미친 건물이,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아나? 양쪽 다 이곳만은 건드리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전대 주인 개인에 대한 것이었어. 그가 없으면, 이곳은 그냥…… 두 진영 사이에 낀 무방비한 목표물이야."
지운은 물을 다시 끓이며 그 말을 들었다. 절구에 열매를 붓고,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곱게 빻았다.
"그럼 당신은 왜 왔는데. 사라져야 할 데를."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화롯불 타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 지운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마감 앞에서 무너지던 알바생에게 그랬듯, 침묵이 스스로 말을 밀어낼 때까지 기다렸다.
"확인하러 왔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정말 없어졌는지. …여기 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창밖만 봐도 되는 자리가 있었으니까."
목소리 끝이 아주 살짝 갈라졌다. 그녀 자신도 놀란 듯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인의 골짜기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지운은 천 위로 물을 부었다. 검은 물이 잔에 고였다. 이번에는 꿀도 젖도 넣지 않았다. 혀에 감지된 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건 감싸는 단맛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고 마주 앉아주는 쓴맛이라고. 그는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김이 그녀와 자기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마셔봐. 이름은 아직 없는 거고."
"독초 아닌가. 검은 열매는 폐기 대상이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말하더라. 근데 안 죽어. 내가 증인이야."
여자가 잔을 내려다봤다. 오래도록. 지운은 그녀의 손가락이 잔을 향해 움직였다가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 걸 봤다. 강제로는 발동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스스로 마셔야 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리를 지켰다.
문밖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한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여럿이. 여자의 어깨가 순식간에 굳었다. 무릎에 올렸던 손이 다시 검 손잡이로 돌아갔다. 잔을 향하던 다른 손도 멈췄다.
"물러서." 그녀가 낮게 내뱉으며 일어섰다. "내가 이곳에 온 걸 미행한 자들이 있다."
"미행?"
"광휘연맹은 용사가 중립지대에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화해를 말하는 순간 배신이 되는 곳이니까." 그녀는 이미 카운터와 문 사이에 몸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연맹의 발소리가 아니다. 훈련된 걸음이지만, 진영의 것이 아니야."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멎었다. 커피 향이 다시 한번 흩어지고, 문틈으로 낯선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위협적이지 않아서 더 서늘한, 장사꾼처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실례합니다. 이 가게, 새 주인이 오셨다고 들어서요."
지운의 혀끝에서, 아이의 쓴맛도 여자의 쇳내도 아닌, 전혀 다른 맛이 스쳤다.
달았다. 지독하게, 인공적으로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