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새벽, 문틈으로 재 냄새가 먼저 밀려들었다.
지운은 손에 든 원두 자루를 놓칠 뻔했다. 창밖 골짜기 초입에서 검은 연기가 기둥처럼 솟았다. 카페로 올라오는 유일한 길, 남방에서 넘어오는 대상(隊商)들이 지나는 그 오솔길에서.
"마스터!" 루나가 이층 창에서 소리쳤다. "짐마차가— 짐마차가 타고 있어요!"
지운은 앞치마 끈을 조이며 뛰어나갔다. 무릎 높이까지 자란 골짜기 안개 사이로, 용병 예닐곱이 짐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차 위에 실린 것은 마대 자루들. 남방 밀림에서 올라온 '검은 열매'—이 세계 사람들이 독초라 부르며 태워 없애던 바로 그 원두였다.
"불 붙여."
가면을 쓴 용병 하나가 짧게 명령했다. 다른 하나가 기름을 부었다.
"멈춰!"
지운의 외침은 안개에 삼켜졌다. 불길이 자루를 핥았다. 볶기도 전의 생두가 타들어가는 냄새—풋내와 매캐함이 뒤섞인 그 냄새를 지운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한 달 치 목숨값이 잿더미로 변하는 중이었다.
"태우는 게 익숙한 모양이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지운이 돌아보자, 흰 마차에 기대선 그림 발토스가 장갑 낀 손으로 박수를 세 번 쳤다.
"원래 이건 독초였잖나, 마스터. 남방 촌부들도 태워 없애던 열매. 자네가 오기 전까지 아르카디온의 모든 이가 그렇게 다뤄왔지. 나는 그저—전통을 되살린 것뿐이야."
"그 전통, 당신이 뒤에서 값을 열 배로 올려 만들었죠."
지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끝이 떨렸다. 어제보다 심했다.
"오스카가 다 말했습니다. 남방 상단을 매수해 공급을 끊고, 남은 원두를 사재기하고, 그마저 태워버리는 거. 카페를 굶겨 죽이려고."
"굶겨 죽이다니, 표현이 격하군." 그림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서 옅은 설탕 단내가 났다. 발토스의 표식. "나는 폭력을 쓰지 않아. 나는 거래를 하지. 자, 봐라—"
그가 손을 들자 용병들이 카페를 반원으로 에워쌌다. 열두 명. 무기 반입 금지 규칙 따위, 문밖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건 습격이 아니야. 이건 청산이지. 사흘을 줬고, 자넨 비우지 않았어. 계약 위반의 대가는 회수뿐이다."
루나가 지운의 등 뒤로 달려와 팔을 붙들었다. 손이 얼음장이었다.
"마스터, 안 돼요. 지금 능력 쓰면— 어제 손떨림 아직 안 가셨잖아요. 저 사람 감정 마셨다간—"
"루나."
지운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물 끓여줄래. 딱 한 잔."
카페 안. 그림 발토스가 낡은 목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용병 둘이 그의 양옆에 섰지만, 지운은 벽을 가리켰다.
"문을 넘는 순간 계급과 진영을 문밖에 두어라. 검도. 그게 규칙입니다."
"규칙." 그림이 코웃음 쳤다. "죽은 노인이 붙인 낙서를 규칙이라 부르나."
그 순간 오스카가 카운터 옆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그가 용병 하나의 손목을 잡아 비틀자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리도 없이. 다른 하나가 반응하기 전에, 오스카는 그 목덜미를 문쪽으로 밀어붙였다.
"손님이 아니면 나가."
"오스카." 그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옛 정보상이 카페 문지기로 늙는군. 얼마면 다시 살 수 있지?"
"당신 돈으론 못 사는 자리가 여기 딱 하나 있어서 말이야."
지운은 그 사이 커피를 내렸다. 손이 떨려 드리퍼가 달그락거렸다. 그는 숨을 고르고, 물줄기를 원두 위에 원을 그리며 부었다. 잿내가 아니라—볶은 원두의 단내가 피어올랐다. 마지막 한 봉지. 카운터 밑, 전대 마스터의 노트 곁에 감춰뒀던 것.
그는 잔을 그림 앞에 놓았다.
"마셔보세요. 내 능력은 강제로는 발동 안 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마셔야만 하죠. 안 마시면— 그냥 쓴 물이에요. 겁먹을 이유 없잖습니까."
"내가 겁을." 그림이 잔을 들었다. 도발에 넘어가주는 척, 여유롭게. "좋아. 병균의 정체가 뭔지 나도 궁금했으니."
그가 한 모금 삼켰다.
지운의 혀끝에 맛이 번졌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세리아의 마른 소금도, 카이겐의 탄내 나는 자부심도, 오스카의 텅 빈 물맛도 아니었다. 그저—끝이 없었다. 삼켜도 삼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아무리 부어도 새는 항아리. 지운의 위장이 실제로 뒤틀렸다. 그는 카운터를 짚었다.
"당신…"
목소리가 떨렸다. 상대의 감정이 역류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게 아니었어요. 전부 다 원하는데— 뭘 채워도 하나도 남지 않는 거였어. 돈도, 전쟁도, 무기도— 다 새어나가서, 그래서 계속 더 크게 벌여야 하는 거죠. 멈추면 그 구멍이 당신을 삼키니까."
그림의 미소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 닫아."
"이 맛, 전에도 느낀 적 있어요."
지운은 카운터 밑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전대 마스터의 유품. 갈색으로 바랜 종이. 그는 표시해둔 장을 펼쳐 테이블 위에 던졌다.
"전대 마스터가 마지막으로 적은 페이지입니다. '오늘 손님, 설탕 단내를 두른 자. 그가 사흘째 원두 상단을 막았다. 물이 떨어지면 나는 끓일 수 없다. 이건 병이 아니다. 이건—'"
지운은 목소리를 낮췄다.
"'—살해다.'"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용병들도, 루나도 숨을 죽였다.
"당신은 노인을 칼로 죽이지 않았죠. 원두를 끊고, 소문을 퍼뜨리고, 손님을 겁줘서 발길을 끊고— 그렇게 천천히 굶겨 죽였어요. 그가 쓰러진 뒤에도 사흘을 더 지켜봤겠죠. 이 자리를 노렸으니까. 그런데."
지운이 노트를 톡 두드렸다.
"그 노인, 죽기 전에 당신 마차 문양을 여기 그려놨습니다. 균열교단 세 갈래 균열. 당신이 카이겐 주머니에 심은 그 동전이랑 똑같은 문양이죠. 그리고 이 잉크—" 그는 페이지 구석의 검붉은 얼룩을 가리켰다. "선대의 피예요. 마지막 손이 여기 얹혀 있었던 겁니다. 증거를 남기려고."
"헛소리를."
"광휘연맹 재무관이 당신 무기 대금 장부를 찾고 있다는 거, 알아요? 오스카가 사본을 벌써 넘겼습니다. 이 노트가 그 위에 얹히면— 당신은 전쟁상이 아니라 두 진영 마스터를 살해한 살인자가 됩니다. 양쪽 모두의 적이 되는 거죠."
"마스터!"
루나의 비명이었다. 그림이 눈짓하자, 뒤쪽 용병이 창을 던져 넣으려던 참이었다. 오스카가 몸을 날려 창대를 쳐냈다. 유리가 깨졌다. 안개 낀 아침 공기가 밀려들었다.
"태워!" 그림이 벌떡 일어섰다. 여유가 벗겨졌다. "이 판잣집을 지금 당장 태워!"
용병들이 기름통을 들었다. 지운은 카운터를 넘어 문 앞에 섰다. 두 팔을 벌리고.
"규칙 셋째." 숨이 찼다. 심장이 그림의 공허를 대신 앓느라 쥐어짜였다. "'옆자리 잔을 넘보지 마라.' 이 자리는— 병사들 거예요. 인간 기사가 오크랑 나란히 앉던 자리. 그 잔을 당신이 뺏을 순 없어."
"비켜, 이 미친놈아!"
"태우면요," 지운이 벽을 짚고 버텼다. 무릎이 꺾이려 했다. "여기서 커피 마셨던 병사들 전부가 알게 됩니다. 자기들 유일한 쉼터를 태운 게 누군지. 당신이 파는 무기, 당신이 고용하는 용병— 다 그 병사들이에요, 발토스. 그 마음까지 사재기할 순 없어요."
그림의 손이 멈췄다.
용병 하나가—오크 혼혈이었다—기름통을 든 채 지운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무언가가 스쳤다. 지운은 알아봤다. 지난달, 인간 병사 옆에서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그 얼굴을.
"…자네." 지운이 헐떡이며 그를 봤다. "삼 번 테이블. 창가. 설탕 반 스푼."
오크 용병의 손이 떨렸다. 그가 기름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 하는 거야!" 그림이 소리쳤다. "명령이다, 붓지 못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 용병이 통을 내려놓았다. 세 번째도. 그들 대부분이 이 카페에서 한 번쯤 앉아본 자들이었다. 진영도 종족도 없이, 그냥 한 명의 손님으로.
그림 발토스의 얼굴에서 설탕 단내마저 사라졌다. 지운은 그 텅 빈 눈을 마주 보았다.
"채울 수 없는 사람은 태워서라도 남을 비우려 하죠." 지운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근데 여긴— 당신이 태워도 다시 세워질 겁니다. 손님들이 세울 테니까. 그게 노인이 이 자리에 가게를 지은 이유예요."
그림이 노트를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지운이 먼저 집어 가슴에 품었다.
"이건 두 진영에 다 보낼 겁니다. 사본은 이미 여러 장이고요."
침묵. 긴 침묵.
그림은 오래도록 지운을 노려보다, 마침내 등을 돌렸다.
"오늘은…"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이걸로 끝이 아니야, 마스터."
문이 닫혔다. 흰 마차 바퀴 소리가 멀어졌다. 용병들도 하나둘 무기를 두고 물러났다. 오크 혼혈이 마지막으로 지운을 돌아보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지운의 무릎이 그제야 꺾였다. 오스카가 붙잡았다.
"마스터!"
"괜찮아요." 지운이 웃었다. 입술이 하얬다. "한 잔… 감당 범위 안이었어요. 한 잔만 받았으니까."
"거짓말." 루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이 미친 듯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떨면서."
지운은 대답 대신 벽에 붙은 세 줄 규칙을 올려다봤다. 세 번째 줄.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노인이 남긴 마지막 문장. 그는 그 글씨를 오래 바라봤다. 처음으로, 자기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루나야."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문 닫자."
루나가 놀라 그를 봤다. 지운이 스스로 멈추자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때, 골짜기 아래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군화가 안개를 밟는 소리.
오스카가 창가로 뛰어갔다.
"…이런."
"뭐예요?" 루나가 물었다.
오스카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동쪽 능선을 가리켰다. 광휘연맹의 은빛 깃발. 선두에 선 것은 갑옷을 벗지 않은 세리아였다. 그리고 서쪽 능선—심연회의 검은 깃발이 동시에 넘어오고 있었다. 앞장선 것은 카이겐.
습격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이, 서로가 온다는 걸 모른 채, 같은 시각 카페로 달려오고 있었다.
여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용사와 마족 지휘관이, 지금—이 좁은 골짜기 한복판에서.
지운의 손에서 노트가 떨어졌다.
"안 돼."
두 진영이 카페 앞에서 정면으로 부딪히기까지, 남은 거리는 채 백 걸음도 되지 않았다.
백 걸음.
지운은 창틀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떨리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마스터, 지금 나가면—" 루나가 팔을 잡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가야 해."
동쪽에서 세리아의 목소리가 안개를 갈랐다.
"심연회 병력! 이 좁은 골짜기에 매복을 심었군!"
"매복?" 서쪽에서 카이겐이 코웃음 쳤다. 그의 검이 이미 반쯤 뽑혀 있었다. "광휘연맹이야말로 카페를 미끼로 유인한 거겠지. 아니면 이 우연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용사."
두 진영이 골짜기 양쪽 사면에서 서로를 향해 활을 겨눴다. 화살촉이 안개 속에서 젖은 빛을 냈다. 카페는 그 정중앙, 두 화살비가 교차할 딱 그 지점에 서 있었다.
지운은 그 사실을 깨닫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여기서 한쪽이 시위를 놓으면, 두 진영이 뒤엉키는 것과 동시에—카페는 첫 발에 벌집이 된다. 그림 발토스가 태우지 못한 것을, 이 오해가 대신 태워버릴 참이었다.
'소문·동전으로 무너뜨린다.' 오스카의 경고가 귓가에 울렸다. 그림은 물러나면서도 마지막 패를 심어놓고 갔다. 두 진영이 같은 시각 여기 도착하도록. 서로를 매복으로 오해하도록.
"오스카." 지운이 헐떡였다. "저 사람들 활, 저거 놓기 전까지 몇 초 남았어요?"
"세리아 쪽은 명령 안 떨어졌어. 카이겐 쪽은…" 오스카가 눈을 좁혔다. "이미 손가락이 시위에 걸렸군."
먼저 손 내미는 자가 지는 게임. 카이겐이 그렇게 여긴다는 걸 지운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카이겐은 절대 검을 먼저 거두지 않을 것이다. 세리아 역시 '용사가 화해를 말하면 배신'이라는 논리에 갇혀 있었다.
둘 다 멈추고 싶어 하면서, 둘 다 멈추는 법을 몰랐다.
지운은 문을 밀고 나갔다.
안개 속으로, 무장하지 않은 몸 하나가 두 진영 사이 골짜기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치마를 두른 채. 손엔 아무것도 없이.
"쏘지 마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골짜기는 조용했고, 안개는 소리를 물처럼 실어 날랐다.
"세리아 씨. 이 사람들, 매복 아니에요. 저 태우러 온 그림 발토스 용병들이었고, 방금 물러났습니다. 카이겐 씨. 광휘연맹도 매복 아니에요. 두 분 다— 습격 소식 듣고 달려온 거잖아요."
두 능선의 병사들이 서로를 흘긋거렸다. 세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카페 마스터. 물러서라. 지금 여긴—"
"제 가게예요." 지운은 두 팔을 벌렸다. 심장이 그림의 공허를 아직 앓고 있어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그는 버텼다. "당신들이 서로 모르게, 시간대까지 어긋내가며 찾아오던 곳이요."
카이겐의 손가락이 시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뭐라고?"
"세리아 씨는 늘 해질 무렵에 오죠. 창가 왼쪽. 마른 소금 맛이 나는 사람. 카이겐 씨는 해 뜨기 전에 와요. 창가 오른쪽. 탄내 나는 자부심." 지운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두 분, 같은 커피를 시켜요. 설탕 없이, 진하게. 서로 모르게 같은 잔을 마시고 있었던 거예요. 몇 달째."
세리아의 활이 아래로 처졌다. 그 얼굴에서 영웅의 가면이 벗겨지는 게 지운의 눈에 보였다.
카이겐의 검은 여전히 반쯤 뽑힌 채였다. 그러나 그 눈은 세리아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카이겐이 낮게 말했다. "네가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오른쪽 어깨." 지운이 그의 말을 잘랐다. "카이겐 씨, 오른쪽 어깨 다치셨죠. 잔 들 때 왼손 쓰시니까. 세리아 씨는 왼쪽 무릎. 앉을 때 오른 다리 먼저 접고요. 두 분 다 부상 감추고 여기 오셨어요. 갑옷 벗고, 무기 놓고, 그냥— 지친 손님으로."
지운의 무릎이 다시 꺾이려 했다. 그는 이 악물고 버텼다. 지금 쓰러지면, 이 오해가 그를 대신해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림 발토스가 노린 게 이거예요." 그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두 분이 여기서 서로 죽이는 거. 그럼 카페도, 휴전도, 다 끝나니까. 지금 시위 놓으면— 그자가 이깁니다."
긴 침묵. 안개만 골짜기를 흘렀다.
세리아가 천천히 활을 등에 걸었다. 그녀가 검을 뽑는 대신, 갑옷의 흉갑 걸쇠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풀었다. 무거운 강철판이 그녀의 발치에 쿵, 떨어졌다.
"용사가 먼저 무장을 풀면 배신이라 했지." 세리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저기 서 있는 무장 안 한 카페 주인이 나보다 훨씬 용감하군."
병사들이 술렁였다. 카이겐의 검이 아직 허공에 걸려 있었다.
지운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그림의 밑 빠진 공허가 심장을 한 번 더 쥐어짰다.
"마스터!" 루나가 문에서 뛰쳐나왔다.
지운이 무릎을 꿇으며 골짜기 흙바닥에 손을 짚었다. 카이겐의 시선이 그 떨리는 손끝으로 내려갔다.
그때, 카이겐의 검을 쥔 손이 아니라—뽑히다 만 그 검이, 스스로 미끄러지듯 칼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성큼 골짜기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세리아도 동시에.
두 진영의 지휘관이, 쓰러지는 카페 마스터를 향해 각자의 능선을 내려왔다. 서로를 향해서가 아니라. 같은 한 사람을 향해서.
그러나 세리아가 반쯤 내려왔을 때, 그녀의 발이 멈췄다. 지운이 짚은 흙바닥 옆, 안개 사이로 무언가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을린 은화 한 닢. 세 갈래 균열 문양. 카이겐의 주머니에서 나왔던 것과 똑같은—.
그리고 그 옆에, 방금 물러난 그림의 용병이 흘리고 간 듯한 광휘연맹 문장의 배지 하나가 나란히 떨어져 있었다.
세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우리 연맹 정예대 배지다. 왜 이게 여기…"
카이겐이 그 은화를 집어 들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림이 남긴 게 아니야." 그가 낮게 말했다. "이건— 우리 둘 중 누군가의 진영에, 이미 그자의 사람이 심어져 있다는 뜻이다."
지운의 흐려지던 의식 사이로, 그 말이 얼음처럼 박혔다.
물러난 게 끝이 아니라던 그림의 마지막 말. 그건 협박이 아니라, 예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