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게, 얼마면 닫겠나."
발토스의 반지들이 카운터를 톡톡 두드렸다. 루나의 손이 지운의 소매를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카운터 밑에서 마른 붉은 숫자 하나가 노트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지운은 물었다. "왜 닫아야 하죠."
"솔직한 편이 서로 낫겠지." 발토스가 손깍지를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무가 삐걱였다. "나는 무기를 판다네. 용병을 중개하고, 예언을 팔지. 전쟁예언자들이 '내년에도 피가 흐른다'고 말하면, 그 말 한 줄에 창끝 만 개가 팔려. 알겠나?"
"압니다."
"그럼 이 계산도 하겠군." 그가 창밖을 턱짓했다. 회색 골짜기 너머로 양 진영의 봉화 연기가 가늘게 올라오고 있었다. "저 두 진영이 서로를 미워하는 한, 나는 부자야. 그런데 자네 가게에선 어떻지? 오크 용병이 인간 기사 옆에 앉아 같은 걸 마셔. 마족이 창밖을 보고, 용사가 그 옆에서 갑옷을 벗지." 그가 혀를 찼다. "위험한 광경이야. 저들이 서로를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휴전이 나거든. 그리고 휴전은."
말이 잠시 끊겼다. 반지가 다시 나무를 두드렸다.
"휴전은 파산이다. 나에게는."
루나가 지운 앞으로 반 발짝 나섰다. "우린 안 팔아요."
"아이야." 발토스가 통통한 손을 저었다. "어른 얘기 중이란다." 그러곤 지운에게로 눈을 돌렸다. 웃음은 여전히 눈까지 닿지 않았다. "값은 부르는 대로 주지. 게다가—자네가 원하는 그 종이도 있잖나. '상한을 되돌리는 법.' 자네 명치에 고인 그 무게, 알아. 손끝 저림도. 이대로 가면 전 주인처럼 카운터 뒤에서 심장이 멈출 거야. 나는 그걸 되돌려줄 수 있어."
지운의 손끝이 저릿했다. 발토스는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
*
지운은 대답 대신 잔을 하나 꺼냈다.
원두를 갈았다. 손이 떨려 가루가 카운터에 조금 흩어졌다. 루나가 옆에서 물을 데웠다. 뜨거운 김이 두 사람 사이로 올라왔고, 발토스는 그 광경을 구경거리 보듯 지켜봤다.
지운이 잔을 내밀었다. "값 얘긴 나중에 하죠. 손님이시니까,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첫 잔은 값을 안 받습니다."
발토스가 잔을 내려다봤다. 검은 물이 김을 피워 올렸다. 그의 눈매가 아주 잠깐 좁아졌다.
"난 마시지 않는다네."
"쓴 게 싫으시면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고 했지." 발토스가 잔을 손끝으로 밀어냈다. 반지가 잔 테두리에 부딪혀 짧게 울렸다. "자네 재주는 나도 들었어, 마스터. 손님이 첫 모금을 삼키면, 그 속을 읽는다지. 무엇을 감추는지, 무엇에 굶주렸는지. 그리고 정확한 한 잔을 지어 그 굶주림을 풀어준다. 아주 무서운 재주야."
지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규칙이 있더군. 손님이 스스로 마셔야 한다. 강제로는 안 되고." 발토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하나, 둘, 셋. "그래서 나는 마시지 않아. 나를 읽고 싶으면 내가 마셔야 하는데—나는 마시지 않을 테니까. 자네는 나를 못 읽어."
지운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금껏 카운터 앞에 앉은 누구든, 첫 모금 뒤엔 무너진 속을 보였다. 세리아도, 카이겐도, 사십 년을 싸운 늙은 병사도. 그런데 이 남자는 잔을 밀어내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것을 봉쇄했다.
"자네 재주는 상대가 목마를 때만 통해." 발토스가 잔을 톡, 하고 옆으로 더 밀었다. 김이 흔들렸다. "나는 목마르지 않아. 그게 나와 자네 손님들의 차이지."
*
문에 걸린 종이 거칠게 울렸다.
오스카가 들어왔다. 어깨에 회색 먼지가 앉아 있었다. 며칠 골짜기 밖을 돌다 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카운터의 발토스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발토스." 오스카가 낮게 말했다. 인사가 아니었다.
"오, 오스카." 발토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웃음 비슷한 것이 스쳤다. "옛 고객 아닌가. 광휘연맹 계약도 심연회 계약도 자네 손을 거쳤지. 양쪽에서 돈을 받아본 사내. 이런 데서 손님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이야."
오스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카운터 끝의 늘 앉던 자리로 갔다. 발토스와 세 자리 떨어진 곳. 그리고 지운을 봤다.
"마스터. 이 자한테 무슨 소릴 들었나."
"가게를 사겠다고." 지운이 말했다. "그리고—나를 읽을 수 없다고."
오스카의 눈이 발토스에게 돌아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낡은 가죽 장갑을 벗어 카운터에 놓았다.
"발토스." 오스카가 말했다. "왜 굳이 사려는 척을 하나. 어차피 살 생각 없잖아."
발토스의 손가락이 멈췄다.
"자네가 뭘 안다는 건가, 용병."
"내가 뭘 아느냐고." 오스카가 코웃음을 쳤다. 짧고 건조했다. "골짜기 남쪽 길목에 균열교단 짐마차가 사흘째 서 있어. 통행세 걷는 척하면서 상인들을 돌려보내지. 북쪽 길도 다음 열흘 안에 막힌다고, 자네 밑에서 마차 모는 놈이 술에 취해 떠들더군." 그가 손가락을 하나 펴 지운을 가리켰다. "이 가게로 오는 손님을 다 끊어버리려는 거야. 원두도, 설탕도, 사람도 못 들어오게. 굶겨 죽이려는 거지. 값을 부른 건—거절당하는 걸 손님들 앞에서 보여주려고. '봐라, 저 고집불통이 큰돈도 마다한다'고."
카운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데워지던 물이 삐, 하고 끓어 넘칠 뻔했다. 루나가 얼른 불에서 내렸다.
발토스가 천천히 손깍지를 다시 꼈다. 웃음이 얼굴에 그대로 걸려 있었지만, 어딘가 굳어 있었다.
"소문이 많은 사내로군."
"소문이 아니야." 오스카가 말했다. "나는 양쪽 명단을 다 봤던 놈이야. 누가 어느 길로 뭘 나르는지, 십 년을 외워 먹고살았어. 그 눈이 어디 가겠나."
*
"오스카." 지운이 조용히 불렀다.
용병은 지운을 봤다. 그 무뚝뚝한 얼굴에, 지운은 처음으로 다른 것을 봤다. 골든핑거를 쓰지 않아도 보이는 것. 오스카는 아까부터 발토스가 아니라 지운을, 그리고 카운터 뒤 벽에 붙은 세 줄 규칙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문을 넘는 순간 계급과 진영을 문 밖에 두어라.
"왜 나한테 이걸 말하는 거예요." 지운이 물었다. "돈 되는 정보잖아요. 발토스한테 팔면 더 받을 텐데."
오스카가 오래 말이 없었다. 창밖 봉화 연기를 봤다가, 카운터 위에 벗어둔 자기 장갑을 봤다.
"나는," 그가 말을 골랐다. 이 남자에게 드문 일이었다. "평생 양쪽에서 돈을 받았어. 인간한테 마족을 베라고 고용되고, 마족한테 인간을 베라고 고용됐지. 어느 쪽 편도 아니야. 그냥 칼이었어. 값이 매겨진 칼."
지운은 잔을 내려놓지 않고 들었다.
"그런데 여기선." 오스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기선 아무도 나한테 값을 안 매겼어. 처음 왔을 때 자네가 내 앞에 잔을 놓고,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지. 오크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이 골짜기에서 나는 여기서만 '그냥 한 명의 손님'이었어." 그가 발토스를 돌아봤다. 이번엔 눈에 서릿발이 서 있었다. "다른 건 다 팔았어도, 이건 안 팔아. 이 가게는 안 팔아."
루나가 앞치마 자락을 꽉 쥐었다. 아이의 눈이 붉어졌다. 그러곤 카운터를 돌아 나와, 오스카 옆으로 갔다. 아이는 늘 손님 수를 세던 그 작은 손으로, 오스카의 커다란 손등을 톡 두드렸다.
"아저씨." 루나가 말했다. "이제 아저씨는 우리 단골이에요. 첫 손님이었잖아요. 근데 이제부터는 그냥 손님 말고, 진짜 단골. 내가 노트에 이름 적을게요. 지워지지 않게."
오스카가 아이를 내려다봤다. 뭔가 말하려다 목이 걸린 사람처럼, 그는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발토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었다. 그는 밀어냈던 잔을 다시 지운 쪽으로 툭 밀었다. 검은 물이 잔 안에서 찰랑였다. 끝내 그의 입에는 닿지 않은 채였다.
"정 없는 골짜기야." 발토스가 반지 낀 손으로 후드를 끌어올렸다. "돈이 안 통하는 손님이 셋이나 있으니. 하지만 마스터, 하나만 기억해두게." 그가 문 쪽으로 두어 걸음 걷다 멈췄다. "자네 재주는 손님이 목마를 때만 통해. 그리고—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언제든 목마른 사람을 굶길 수 있어."
지운의 손끝이 저릿하게 울렸다. 발토스는 그것까지 읽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 몸도 알아. 하루에 한 명. 그 이상 읽으면 무너지지. 노트에 붉은 숫자 하나만 남았더군." 그가 카운터 밑을 흘끗 봤다. 마치 노트가 거기 있는 걸 아는 사람처럼. 지운의 등이 서늘해졌다. "자네 손님이 백 명 몰려와도, 자네가 구할 수 있는 건 하루 한 명이야. 나머지 아흔아홉은 그냥 목마른 채로 돌아가겠지. 나는 딱 그 백 명을 이 가게 앞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그건 협박인가요." 지운이 물었다.
"산수야." 발토스가 문에 손을 얹었다. 종이 미리 흔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자네들, 저 벽에 붙은 규칙을 참 좋아하더군. '무기 반입 금지.' '자리에 앉으면 그저 한 명의 손님.'"
그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후드 그늘 아래로 기름진 웃음만이 남아 있었다.
"사흘 뒤. 이 골짜기에서, 그 무장 반입 금지 규칙 따위는—종잇조각이 될 거다."
종이 울렸다. 문이 닫혔다. 매끈한 신발 소리가 회색 골짜기 쪽으로 멀어졌다.
카페 안에 남은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운은 밀려 돌아온 잔을 내려다봤다. 아직 온기가 남은, 아무도 마시지 않은 검은 물. 그의 명치에 고인 무게가 맥박에 맞춰 조용히 뛰었다. 카운터 밑, 붉게 마른 숫자 하나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에, 한 명.
루나가 노트를 꺼내 오스카의 이름을 적으려던 손을 멈췄다. 아이의 눈이 그 숫자에 가 닿았다.
"마스터." 루나가 물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사흘 뒤에… 사람들이 무기 들고 몰려오면. 손님들이 다치면. 마스터는 어떡할 거야. 하루에 한 명밖에 못 읽는데."
지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카운터 위에서 떨렸다. 잔을 놓칠 만큼은 아니었지만, 붙잡을 힘도 남지 않은 손이었다.
오스카가 장갑을 다시 끼며 카운터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흘." 그가 말했다. "짧지 않아. 준비할 시간은 돼."
"준비를 뭘로 해요." 루나가 노트를 가슴에 안았다. "여긴 무기도 못 들이는데. 오스카 아저씨 혼자 백 명을 막을 수도 없고."
"막는 게 아니야." 오스카가 지운을 봤다. "저 자는 규칙을 종잇조각으로 만들겠다고 했어. 무장한 놈들을 골짜기에 풀어서, 이 가게가 '중립지대'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 셈이지. 여기서 피가 흐르면—그다음엔 아무도 안 와. 용사도, 마족도. 화해의 상징이 학살터가 되는 거야. 그게 저자한테는 가게를 태우는 것보다 깨끗한 방법이지."
지운의 손이 잔을 감쌌다. 온기가 손바닥에 스몄다.
"그럼 규칙을 지키게 만들면 돼요." 지운이 낮게 말했다.
"뭐?"
"저 벽의 세 줄." 지운이 규칙을 올려다봤다. "저건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전 마스터가 붙였고, 여기서 위로받은 손님들이 스스로 지켜온 거예요. 발토스가 무장한 놈들을 데려와도—이 골짜기에서 무기를 내려놓게 만드는 건 나 혼자가 아니라, 여기 앉아본 사람들이잖아요."
오스카가 눈을 좁혔다. "세리아와 카이겐 말인가."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 지운이 말했다. "양쪽 병사들도 다 여기 손님이었어요. 통행세 뺏긴 상인도, 손가락 잃은 여자도, 사십 년 싸운 늙은 병사도." 그의 목소리가 잠깐 흔들렸다. "발토스는 산수를 했죠. 하루에 한 명. 나머지 아흔아홉은 굶는다고. 근데—그 아흔아홉이 스스로 서로를 지키면요? 내가 다 안 읽어도. 그럼 그 산수, 틀리는 거잖아요."
루나가 노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아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다른 것이 스쳤다. 겁이 아니라, 무언가 붙잡을 데를 찾은 사람의 눈이었다.
"손님들한테… 도와달라고?" 아이가 물었다. "마스터가?"
지운은 그 말에 멈췄다. 거절이 서툰 손. 도움을 청하는 게 더 서툰 입. 지금껏 그는 늘 잔을 내리는 쪽이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얹어본 적이 없었다. 명치의 무게를 혼자 삼켰고, 상한을 혼자 깎았고, 카운터 뒤에서 혼자 쓰러졌다.
"…모르겠어." 지운이 솔직하게 말했다. "부탁하는 거, 나 잘 못 해."
"알아." 루나가 말했다. 아이답지 않게 조용했다. "마스터는 남 속은 다 읽으면서 자기 부탁은 못 해. 근데 마스터." 아이가 카운터를 돌아 지운 앞에 섰다. 노트를 펼쳐, 붉은 숫자 하나가 웅크린 그 페이지를 지운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 숫자로는 사흘 뒤에 백 명 못 구해. 한 명 읽고 쓰러지면, 나머지는 마스터가 쓰러진 카운터 위로 넘어갈 거야. 전 마스터처럼."
지운의 눈이 붉은 숫자에 닿았다. 하루에, 한 명.
"그러니까 이번엔." 루나가 아이의 손으로 지운의 떨리는 손등을 덮었다. 오스카의 손등을 두드렸던 그 손이었다. "혼자 다 태우지 마. 세리아 언니한테 부탁해. 카이겐 아저씨한테도. 오스카 아저씨는 벌써 편이잖아. 발토스가 백 명 데려오면, 우린 백 명한테 부탁하면 돼."
*
문이 다시 열린 건 그때였다.
이번엔 종이 부드럽게 울렸다. 갑옷을 벗은 세리아가 들어섰다. 손엔 목검이 들려 있었다. 얼마 전 되찾으러 왔던 그 목검. 손잡이엔 그녀가 잃은 부하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세리아는 카운터의 공기를 읽었다. 밀려나 있는 검은 잔. 오스카의 굳은 얼굴. 지운의 떨리는 손. 그리고 방금 문밖으로 사라진 매끈한 발소리의 잔향.
"그자가 왔었군." 세리아가 말했다. 물음이 아니었다.
"세리아 언니." 루나가 달려갔다. "발토스가—사흘 뒤에 무기 들고 온대. 골짜기 길도 다 막고. 이 가게를 없애려고."
세리아의 손이 목검 손잡이를 감쌌다. 손가락이 새겨진 이름들 위에 얹혔다. 그녀는 오래 그 이름들을 문질렀다. 지운은 그 손을 봤다. 골든핑거를 쓰지 않아도, 그 손짓 하나에 얼마나 많은 죽음이 눌러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길 지키면." 세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사가 마족의 소굴을 두둔한다'는 말이 돌 거야. 광휘연맹 안에서 나는 배신자가 되겠지. 전쟁 특수로 배 불리는 귀족들이 그걸 놓칠 리 없어." 그녀가 지운을 봤다. "그래도 마스터. 하나만 묻자. 사흘 뒤에, 만약 마족 진영도 여길 지키러 온다면. 나는 카이겐과 같은 편에서 칼을 들 수 있나?"
카운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여태 이 세계 누구도 소리 내어 물은 적 없는 질문이었다. 용사와 마왕 대리가 같은 편에 선다는 것. 진영이 그은 선을 넘는다는 것.
지운은 대답 대신 잔을 하나 더 꺼냈다. 하지만 손이 멈췄다. 카운터 밑, 붉은 숫자 하나. 하루에 한 명. 세리아를 읽으면—오늘의 한 명은 그녀다. 그리고 사흘 뒤, 백 명이 몰려올 그날엔, 그의 몸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지운은 잔을 내려놨다. 갈지 않은 원두 그대로.
"세리아 씨." 그가 말했다. 이번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커피는 안 내릴게요. 오늘은."
세리아의 눈이 커졌다. 이 가게에서 마스터가 잔을 거절한 건 처음이었다.
"대신 부탁을 하나 할게요." 지운이 두 손을 카운터에 얹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지 않고. "나는 사흘 뒤에 백 명을 못 구해요. 하루에 한 명밖에 못 읽거든요. 한 명 읽고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래서—처음으로 부탁할게요. 나 대신, 이 가게를 지켜줄 수 있어요? 당신이 지킨 부하들의 이름으로 말고. 그냥 여기 앉았던 한 명의 손님으로."
세리아의 손이 목검 손잡이에서 멈췄다. 이름들 위에서.
그때, 문밖 골짜기 저편에서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인간 진영의 봉화 방향에서 하나. 그리고—마족 진영의 능선 쪽에서, 그것에 응답하듯 다른 하나.
두 개의 뿔피리가 동시에, 이 골짜기를 향해 울렸다.
세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저건… 소집 신호야. 양쪽 다." 그녀가 창밖을 봤다. "사흘 뒤가 아니야, 마스터."
카운터 밑, 붉은 숫자 하나가 조용히 지운을 올려다봤다.
"놈이 앞당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