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의 무릎이 먼저 꺾였다.
바닥의 사기 조각을 짚으려던 손이 검은 물 웅덩이 속으로 미끄러졌고, 코 밑에서 떨어진 붉은 것이 그 위에 번졌다. 그는 웃으려던 입 모양 그대로, 카운터 앞에 무너졌다.
"마스터!"
루나가 앞치마를 밟고 넘어질 뻔하며 달려들었다. 아이의 손이 지운의 어깨를 붙들었다. 무거웠다. 열두 살의 팔로는 감당이 안 되는 무게였다. 세리아가 두 걸음 만에 다가와 지운의 몸을 받쳤다.
"방. 어디야." 세리아가 물었다.
"뒤—뒤쪽, 계단 밑에." 루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스카가 벽에서 몸을 뗐다. 낮게 손님들을 향해 던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마스터가 쓰러졌어. 잔값은 안 받는다. 조용히들 나가."
의자 끄는 소리가 뒤엉켰다. 겁먹었던 얼굴들이 다시 겁먹은 채, 그러나 이번엔 커피가 아니라 사람 때문에 문을 나섰다. 오크가 나가면서 슬쩍 은화를 카운터에 놓고 갔다.
세리아가 지운을 좁은 침상에 눕혔다. 이마가 이미 불덩이였다. 코피는 멎었지만 콧방울 아래 마른 자국이 검붉게 남았다. 지운의 입술이 열에 달떠 무언가 중얼거렸다.
"…조금만…더…"
"입 다물어." 루나가 젖은 수건으로 그 입가를 닦았다. 손이 떨렸다. "지금 그 소리 하지 마."
세리아가 잠시 지운을 내려다보다가, 문가에 세워둔 목검으로 눈을 돌렸다. 손잡이에 새겨진 이름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고, 대신 루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오늘 밤 골짜기 입구를 지킬게. 발토스의 개들이 어슬렁댈지 몰라." 세리아가 말했다. "아이야. 이 사람 곁에 누가 있어야 한다면, 그건 너다. 나는 갑옷 냄새만 나."
세리아가 나가고, 오스카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빗장 거는 소리.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루나 혼자 남았다.
*
아이는 카운터 밑에서 노트를 꺼냈다.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는 그 낡은 물건. 오늘 자 칸에 손님 수가 세로로 적혀 있었다. 하나, 둘… 여덟, 아홉. 루나가 직접 연필로 그은 작대기들이었다. 상한을 나타내는 위쪽 숫자를 보려고 아이는 등불을 가까이 댔다.
숫자가 움직였다.
'2'라고 적혀 있던 자리가, 잉크가 스스로 번지듯 지워지더니, 그 아래에 붉은 획으로 '1'이 새겨졌다. 마치 노트가 오늘 밤의 무리를 계산해 벌금을 매기듯이.
루나의 손에서 등불이 흔들렸다.
"…또 깎였어."
전대 마스터의 다섯이 둘이 되었다고 했다. 그 둘이 이제 하나가 되었다. 아이는 그 붉은 획을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지워지지 않았다. 다음번, 딱 한 번 더 무리하면—.
침상에서 지운이 돌아누우며 신음했다. 루나가 노트를 덮고 달려갔다.
"마스터. 눈 떠 봐. 응?"
지운의 눈꺼풀이 겨우 열렸다. 초점이 흐렸다. 그래도 아이를 보자 그는 또 웃으려 했다.
웃지 말라고, 그 웃음이 제일 밉다고 아이는 소리치고 싶었다.
"봤어." 루나가 말했다. 목소리가 젖었다. "노트. 하나 됐어. 하나. 이제 한 번만 더 넘으면 마스터 죽는다고 노트가 그러잖아. 왜 그래. 대체 왜 그래!"
지운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손님이 아직…"
"손님이 뭔데!" 루나가 폭발했다.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터졌다. "마스터는 남 얼굴은 그렇게 잘 보면서! 오스카 아저씨가 외로운 것도, 그 용사 언니가 무너지기 직전인 것도, 뿔 잘린 마족 아저씨가 얼어붙은 것도 다 알아채면서! 왜 자기 몸 경고만 못 읽어! 왜 마스터 얼굴만 안 봐!"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지운의 손등에 닿았다. 아까 코피가 떨어졌던 그 손등이었다.
"나 또 혼자 되는 거 싫어." 루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스터까지 여기서 죽으면… 나 진짜… 이 집에 나 혼자야."
지운의 흐린 눈이 아이의 얼굴에 겨우 초점을 맞췄다. 그는 한참 숨을 골랐다. 열에 잠긴 목소리로, 한 마디씩 끊어서 뱉었다.
"밖에… 밤이 오면… 갈 데 없는 사람들이 있어. 골짜기엔… 여관도 없고… 어느 진영도… 걔들을 안 받아 줘."
"그게 마스터 죽을 이유가 돼?"
"이 집 불이… 꺼져 있으면." 지운이 눈을 감았다. "그 사람들… 문 앞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 나… 전에 그런 사람이었거든. 문 닫힌 가게 앞에서… 돌아서던 사람."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운의 손이 아이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가… 자꾸… 나와."
그 말을 끝으로 지운은 다시 열에 빠져들었다. 루나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오래 울었다.
*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아이가 깼다.
등불이 반쯤 탔다. 지운은 여전히 열에 잠겨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급하고, 지친 소리였다. 밤손님의 매끈한 신발 소리가 아니었다. 무겁고 절뚝이는 발.
루나는 빗장 앞에서 망설였다. 오스카가 조용히들 내보냈는데. 마스터는 못 일어나는데.
문틈으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불이… 켜져 있어서."
낡은 창을 통해 등불 빛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아이가 켜 둔 그 불이었다.
루나는 빗장을 풀었다.
문 앞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광휘연맹도 심연회도 아닌, 진영 표식 없는 낡은 외투. 어깨에 붕대를 감았고, 발을 절었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눈 밑이 검게 꺼져 있었다.
"마스터… 있어요?" 여자가 물었다. "며칠을 걸어왔어요. 이 골짜기에 마시면… 마음이 좀 놓이는 게 있다고 들어서."
루나의 입이 말라붙었다. 마스터는 저 안에 누워 있다. 손님 수를 세는 게 자기 일이었다. 마스터가 못 내리면, 오늘의 손님은 영이어야 했다.
돌려보내면 됐다. 그게 규칙을 지키는 거였다.
그런데 여자의 얼굴이 루나의 눈에 걸렸다.
붕대 감은 쪽 손을, 여자는 성한 손으로 자꾸 감쌌다. 다친 게 어깨가 아니라 그 손인 것처럼. 눈은 자꾸 루나의 뒤쪽, 카페 안쪽 어딘가를 향했다. 사람을 찾는 눈이 아니었다. 없어진 사람을 찾는 눈이었다.
'…이 사람, 누굴 잃었어.'
루나는 자기 입에서 그 생각이 소리로 나오려는 걸 삼켰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통행세 뺏긴 상인이 왔을 때, 마스터가 묻기도 전에 아이는 "저 아저씨 딸 시집 밑천 뺏겼죠"라고 알아맞혀 마스터를 놀라게 했었다.
그때 마스터가 말했다. 너는 커피 없이도 사람을 읽는구나, 라고.
"…들어와요." 루나가 옆으로 비켰다. "마스터는… 지금 못 일어나요. 근데 커피는… 내가 배웠어요."
*
여자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루나는 카운터 뒤에 섰다. 마스터가 늘 서던 자리였다. 아이에겐 카운터가 턱까지 왔다.
손이 떨렸다. 능력 같은 건 없었다. 첫 모금을 마셔도 아이의 혀엔 아무 맛도 얹히지 않을 것이다. 명치에 무게도 고이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가진 건 눈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마스터가 하던 걸 떠올렸다. 마스터는 잔을 내리기 전에 늘 손님을 봤다. 오래, 조용히. 아이는 여자를 봤다.
붕대 감은 손을 감싸는 성한 손. 그 손엔 손가락이 하나 없었다. 새로 잃은 상처였다. 그리고 여자는 자꾸 그 없는 손가락 자리를, 반대 손 엄지로 문질렀다. 거기에 뭔가 있었던 것처럼. 반지, 아니면—.
"…약혼했었어요?" 아이가 물었다.
여자의 어깨가 굳었다. 성한 손이 멈췄다.
"…어떻게."
"손가락 없는 자리, 자꾸 만져서." 아이가 말했다. "거기 뭐 껴 있었죠. 근데 이제 없어서 자꾸 만지는 거잖아요."
여자의 눈에 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루나는 원두를 갈았다. 마스터가 가르쳐 준 만큼. 잃은 사람에겐 뜨겁고 쓴 것만으론 안 된다고 했다. 목이 메는 사람은 삼킬 수 있는 걸 줘야 한다고. 아이는 설탕 단지를 열었다. 왕족만 맛본다는 그 귀한 것을, 마스터는 이런 손님에게만 아끼지 않았다.
데운 우유를 부었다. 카이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였다던 그 우유. 그 위에 진하게 내린 검은 것을 조금. 설탕을 한 숟갈 더. 아이는 잔을 저으며 손끝의 떨림을 참았다.
완벽한 배합인지 알 수 없었다. 맛이 어떨지 혀로 읽을 수도 없었다. 아이가 아는 건, 이 사람이 혼자 삼킬 수 있는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뿐이었다.
잔을 여자 앞에 놓았다. 손잡이가 여자 쪽을 향하게. 마스터가 늘 그렇게 놨다.
"…뜨거워요. 천천히 마셔요."
여자가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붕대 감은 손과 손가락 잃은 손으로.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여자는, 잔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뜨거운 잔에 눈물이 떨어져 김 속에 섞였다.
"…같이 마시자고 했었는데." 여자가 겨우 말했다. "돌아오면, 골짜기에 마음 놓이는 집이 생겼다니까 같이 가자고. 근데 그이는… 안 돌아왔어요."
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능력이 있었다면 마스터는 정확한 말을 건넸을 것이다. 아이에겐 그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카운터를 돌아 나와, 여자 곁에 그냥 섰다. 여자가 다 울 때까지, 어깨에 작은 손을 얹고 있었다.
한참 뒤, 여자가 잔을 비웠다. 눈이 부어 있었지만, 처음 들어올 때의 그 텅 빈 눈은 아니었다.
"…맛있어요." 여자가 말했다. "이상하다. 이렇게 쓴데. 목이… 좀 뚫린 거 같아."
여자는 은화 한 닢을 놓고, 절뚝이며 문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한 번 돌아봤다.
"어린 마스터. 고마워요."
문이 닫혔다.
*
루나는 텅 빈 카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심장이 아직 빠르게 뛰었다.
내가 사람을 위로했다.
능력 없이. 혀에 얹히는 맛도 없이. 명치에 고이는 무게도 없이. 그냥 잘 봤을 뿐인데. 잘 보고, 아끼지 않았을 뿐인데.
아이는 침상 쪽을 돌아봤다. 지운이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오늘 밤 저 사람은 한 명도 못 태웠다. 상한은 하나. 다음번 한 번이면 죽는다.
그런데 지금, 손님 하나가 위로받고 돌아갔다. 지운의 몸에는 아무 무게도 고이지 않았다.
아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도 읽을 수 있으면."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카페의 어둠 속으로.
"나도 손님 볼 수 있으면… 마스터가 혼자 다 안 태워도 되잖아. 마스터 몸에 아무것도 안 고여도… 손님은 위로받을 수 있잖아."
아이는 카운터로 돌아가, 아까 잃은 손가락을 만지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통행세 뺏긴 상인을. 외롭던 오스카를. 자기가 무심코 알아맞혔던 사람들을.
마스터는 능력으로 읽는다. 대신 자기를 태운다. 하지만 나는—.
루나는 벽에 붙은 세 줄의 규칙을 올려다봤다. 세 번째 줄.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아이는 앞치마 끈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처음 마스터가 물려준 그 앞치마였다. 견습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진짜로.
"마스터." 아이가 잠든 지운에게 속삭였다. "나 배울 거야. 제대로. 마스터가 못 볼 때, 내가 볼게. 그러니까 이제 혼자 다 태우지 마."
*
이틀이 지났다.
지운은 나흘 만에 열이 내렸다. 죽을 두 그릇 비우고, 사흘 만에 처음으로 카운터 뒤에 섰다. 손 떨림은 아직 남았지만, 아이가 곁에서 잔 수를 세었고, 오늘의 상한은 딱 셋이었다. 루나가 그렇게 정했고, 지운은 처음으로 군말 없이 따랐다.
"세 번째 손님까지야." 아이가 못을 박았다. "한 명 더 하려고 하면 나 진짜 소금 뿌린다."
"소금은 아까워." 지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엔 아이도 그 웃음을 밉게 보지 않았다.
두 잔을 내렸다. 오스카와, 어제 다시 온 붕대 여자. 여자는 이번엔 울지 않았고, 루나에게 작은 들꽃 한 다발을 건넸다.
세 번째 손님을 위해 지운은 잔을 준비했다. 그 순간 문의 종이 울렸다.
발소리. 매끈한, 밤마다 문 앞에 왔다 돌아가던 그 신발 소리였다. 그런데 이번엔 물러가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후드를 쓴 사내가 들어와, 카페 한가운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오스카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가, 여긴 무기 반입이 금지라는 걸 떠올리고 주먹만 쥐었다.
사내가 후드를 벗었다.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 웃는 눈. 그림 발토스였다. 사흘 뒤 재방문하겠다던 그 약속을, 그는 하루 늦게 지켰다.
발토스가 지운을 향해,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웃었다. 그의 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이 삐죽 나와 있었다. 전대 마스터의 필체로 '상한을 되—'라고 적힌, 뜯겨나간 그 페이지였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마스터." 발토스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쓰러졌다며. 소문이 빠르지, 이 골짜기는."
지운의 손에서 잔이 멈췄다.
"자, 그럼 셈을 해 볼까." 발토스가 종이를 손끝으로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 가게, 얼마면 닫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