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마차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지운은 카운터 뒤에서 손을 멈췄다. 방금 내리려던 드립포트의 물줄기가 필터 위에서 흔들렸다. 문지방을 넘어 들어온 남자는 검을 차지 않았고, 갑옷도 걸치지 않았으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페 안의 공기가 겨울 유리창처럼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세상에. 소문보다 아담하군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지운은 오히려 뒷목이 서늘해졌다. 남자는 벽에 붙은 세 줄 규칙을 천천히 읽더니, 마치 오래된 시를 감상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급을 문밖에 두어라, 옆자리 잔을 넘보지 마라,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걸 지키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니."
루나가 지운의 소매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지운은 그 아이의 어깨를 슬쩍 뒤로 밀어 카운터 안쪽에 세웠다.
"손님이시면 앉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림 발토스입니다."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설탕에 절인 과일 같은, 달고 끈적한 냄새가 그와 함께 흘러들었다. 지운은 2화의 편지에서 맡았던 그 단내를 곧바로 알아봤다. "당신 원두를 열 배 값에 사들이는 큰손이 접니다. 인사가 늦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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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옆 구석 자리에서 오스카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나무 바닥이 길게 긁혔다.
"마스터. 저 사람 커피 내주지 마."
"오스카 씨."
"저놈이 첫 모금 삼키는 순간 마스터 능력 발동해. 저 인간 속을 읽으면—" 오스카의 턱이 굳었다. "너 죽어."
그림이 손뼉을 짝, 쳤다. 즐거워하는 소리였다.
"오스카! 이게 얼마 만인가. 광휘연맹 병참 명부도 팔고, 심연회 보급로도 팔던 그 손 빠른 정보상이 앞치마 두른 카페 지킴이가 됐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가 지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 사람, 마스터께 다 말 안 했죠? 이 골짜기 반경 백 리 안의 상단 지도를 저 머릿속에 다 넣고 있는 사람입니다. 3년 전엔 나한테도 팔았고."
지운은 오스카를 봤다. 오스카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팔았지. 팔았다." 오스카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이 자식 수법을 알아. 마스터, 잘 들어. 지난 닷새 동안 남방에서 올라오던 검은 열매 짐마차가 골짜기 초입에서 전부 돌아섰어. 하나같이 '이 물건은 독초라 국경에서 압류당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소문, 저 인간이 뿌렸어."
"검은 열매는 원래 독초 아니었나?" 그림이 눈썹을 올렸다. "남방 사람들이 백 년 동안 그렇게 알고 폐기해온 걸. 나는 그저… 잊혀가던 진실을 다시 상기시켜줬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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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의 손끝이 저릿했다. 5화 이후 가시지 않은 저림이었다. 그는 포트를 조용히 내려놓고 카운터에 두 손을 짚었다.
"원두를 열 배로 사들이는 이유가 뭡니까."
"좋은 질문." 그림이 손가락을 세웠다. "당신이 못 사게 하려고요. 세상에 검은 열매는 유한하고, 값을 올려 쓸어담으면 당신 창고는 곧 바닥납니다. 이미 바닥났죠? 어제 오스카가 목숨값 원두를 들고 왔을 테니. 그걸로 며칠이나 버티려나."
루나의 숨이 멎었다. 지운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는 것을 느꼈다. 창고의 마지막 원두는 열흘 치도 되지 않았다.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그림이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안에서 금화가 묵직하게 흘러내렸다. "이 가게, 제가 사겠습니다. 이 건물, 이 자리, 그리고 여기서 벌어지는 '화해'라는 이름의 실험 전부를. 값은 부르세요. 대신 조건은 하나. 문을 닫는 것."
"왜 이 자리를 그렇게까지."
"전쟁이 밥줄이니까요." 그림은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하듯 말했다. "무기가 팔리고, 용병이 고용되고, 예언자가 불려 다니려면 사람들이 계속 서로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크와 기사가 같은 탁자에 앉아 같은 물을 마신다? 마족 지휘관이 검을 내려놓고 눈물을 훔친다? …마스터. 당신은 지금 내 시장에 병을 퍼뜨리는 세균입니다. 나는 세균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냥 닦아낼 뿐이지."
그가 웃었다. 3화의 카이겐이 검을 내려놓던 순간, 그 온기와는 정반대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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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은 곧 파산입니다." 그림이 금화 주머니를 지운 쪽으로 밀었다. "당신 전임자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위험한 자리에 굳이 위로의 가게를 열겠다던 그 고집 센 노인. 나는 그에게도 이 주머니를 내밀었죠."
지운의 손이 카운터 아래 서랍으로 갔다. 전대 마스터의 유품 편지가 든 서랍이었다. 6화에서 그는 이미 알아버렸다. 선대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었다. 소문으로, 원두 봉쇄로, 서서히 목이 졸려 죽었다.
"그가 거절했더니 어떻게 됐죠?" 지운이 물었다.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글쎄요." 그림이 어깨를 으쓱였다. "노인은 어느 날 카운터 뒤에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과로사였죠. 요즘 마스터는 어떤가요? 얼굴이 좀… 창백한데."
빈틈이었다. 그림은 지운이 쓰러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지운은 이빨을 물었다. 이건 능력으로 풀 문제가 아니었다. 저 남자에게 커피를 내리는 순간, 저 안에 든 탐욕과 살의가 지운의 심장으로 역류할 것이다. 하루 감당량이고 뭐고, 저것 하나로 그는 카운터 뒤로 무너질 것이다. 그림은 그걸 노리고 앉아 있었다.
능력을 쓰면 진다. 손을 놓으면 진다.
그러면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입을 여는 것.
"주문은 안 하시는군요."
"안 합니다. 당신 재주는 익히 들어서요." 그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커피는 됐고, 대답을 주세요. 얼마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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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씨." 지운이 조용히 불렀다. "이 사람, 진짜 얼마든 낸다고 봐요?"
오스카가 코웃음을 쳤다. "낸다. 이 자식 금고엔 이런 주머니가 수레로 있어. 대륙 무기의 절반이 이 손을 거쳐."
"그럼 오스카 씨한테도 값을 부를 수 있겠네요."
카페가 조용해졌다. 그림이 처음으로 웃음을 거뒀다.
"…무슨 뜻입니까."
"오스카 씨가 이 골짜기 백 리 상단 지도를 머릿속에 다 넣고 있다면서요." 지운이 어깨를 폈다. "당신도 그걸 원할 텐데. 원두 짐마차가 어느 길로 우회하는지, 어느 상단이 아직 소문을 안 믿는지. 그 정보가 있으면 봉쇄가 훨씬 쉬워지겠죠."
그림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다시 웃으며 오스카에게 몸을 틀었다.
"영리한 마스터군요. 오스카, 어떤가. 옛정을 봐서 후하게 쳐주지. 이 상단 지도, 그리고 저 가게 창고 사정. 네 부르는 값의 두 배."
오스카가 성큼 걸어와 그림 앞에 섰다. 덩치가 탁자를 그늘로 덮었다.
"세 배."
그림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현명하—"
"세 배를 준대도 안 팔아." 오스카가 그의 손목을 탁, 눌러 탁자에 붙였다. 금화 몇 닢이 튀어 바닥을 굴렀다. "옛날의 나였으면 네 발이라도 불렀겠지. 근데 그림.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아무한테도 안 팔리는 사람이 돼봤어. 진영도 안 묻고, 값도 안 매기고, 그냥 앉으면 손님이라 불러주는 자리. 이딴 걸 어디서 또 사겠냐. 그러니까—"
오스카가 그림의 얼굴 가까이 몸을 숙였다.
"내 단골은 못 팔아.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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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한동안 눌린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빼고, 흐트러진 금화를 하나하나 주워 주머니에 담았다. 손짓이 소름 끼치게 침착했다.
"실망입니다, 오스카. 감상에 젖어 몸값을 스스로 깎다니." 그가 모자를 다시 썼다. "마스터. 당신은 착한 사람이라 이렇게 생각하겠죠. '대화로 풀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대화하러 온 게 아닙니다. 통보하러 왔죠. 원두는 끊길 겁니다. 소문은 퍼질 겁니다. 손님은 겁을 먹고 발길을 끊을 거고요. 당신은 재주로 손님 하나 붙잡을 때마다 조금씩 죽어갈 테고. …전임자처럼."
지운은 카운터를 돌아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지운이 말했다. 그림이 돌아봤다. "나는 손님 속을 읽고 딱 맞는 한 잔을 내려요. 그때마다 그 사람 슬픔이 내 몸으로 들어와요. 그래서 쓰러졌고, 또 쓰러질 거예요. 능력으로는 당신을 못 이겨요.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방금 알았어요." 지운이 문 옆 규칙 팻말을 손으로 짚었다. 셋째 줄,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그가 가장 못 지키던 조항이었다. "당신은 내 능력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능력을 쓰다 죽길 바라는 거였네요. 그럼 나는 능력을 안 쓰면 돼요. 당신 커피도 안 내리고요. 대신—"
지운이 가게 안을 둘러봤다. 오스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인간 병사와 오크 용병이 같은 탁자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루나가 카운터 모서리를 꼭 쥔 채 그를 지켜봤다.
"—말로 하겠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당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소문은 당신만 뿌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발토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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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미소가 처음으로, 아주 잠깐 굳었다. 그러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흰 마차 문이 다시 소리 없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 오스카가 긴 숨을 뱉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마스터. 미친 거 아냐. 저 인간한테 소문으로 맞불을 놓겠다고?"
"놀랐어요?"
"…놀랐지. 근데 나쁘지 않아." 오스카가 이마를 문질렀다. "저 자식이 무서워하는 게 딱 그거거든. 자기 얘기가 밖으로 도는 거. 무기상은 그림자에서 살아야 하니까."
루나가 달려와 지운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스터, 능력 안 쓸 거지? 진짜지? 오늘은 손님 세 명만 받기로 했잖아. 방금 그 사람이 네 번째 될 뻔했어."
지운이 무릎을 굽혀 루나와 눈을 맞췄다. 손이 아직 떨렸지만, 그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헝클였다.
"셋째 규칙.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이거, 선대가 나 들으라고 남긴 거 같아. 오늘부터 좀 지켜볼게."
루나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이는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밖이 저물고, 가게에 마지막 손님까지 떠난 밤이었다. 지운은 창고 문을 열어 남은 원두 자루를 셌다. 여섯 자루. 열흘. 그는 자루에 손을 얹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
바로 그때였다.
퍽— 하고 문이 통째로 울렸다.
루나가 비명을 지르며 카운터 뒤로 숨었다. 오스카가 반사적으로 지운을 등 뒤로 밀치고 문 앞을 막아섰다. 문틈으로 붉은 빛이 새어들었다. 지운이 오스카의 어깨 너머로 문을 열자, 찬 밤공기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쳤다.
문짝 정중앙에 불화살 한 발이 박혀 있었다. 화살대를 타고 불꽃이 나무를 핥아 오르고 있었다. 오스카가 앞치마를 벗어 후려쳐 불을 껐다. 연기가 걷힌 자리, 화살에 묶인 양피지 한 장이 검게 그을린 채 달려 있었다.
지운이 그것을 떼어 폈다. 설탕에 절인 단내가 코를 찔렀다. 그림 발토스의 표식이었다. 그 위에 균열 문양이 붉게 찍혀 있고, 아래로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사흘 안에 비워라. 아니면, 전임자처럼.』
오스카가 그 글씨를 읽더니 낮게 욕을 뱉었다.
"대화로 풀 생각이었다고 했지, 마스터."
지운은 그을린 양피지를 쥔 손을 내려다봤다. 떨림이 멎어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처음으로 무언가를 분명하게 결정한 손이었다.
"사흘."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안에, 이 가게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 해요."
문밖 어둠 저편에서, 흰 마차의 바퀴 소리가 골짜기를 따라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