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운이 눈을 뜬 건 정오의 햇빛이 카운터 나무결을 데우고 있을 때였다.

이마 위에 젖은 수건이 얹혀 있었고, 팔에는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침대 옆 걸상에 앉은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나면 안 돼."

루나가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꾹 눌렀다. 작은 손인데도 힘이 실려 있었다.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던 것뿐이야."

"어지러운 사람이 사흘을 누워?"

지운의 입이 멈췄다.

사흘. 기억이 뚝 끊긴 자리에 세리아의 흐릿한 얼굴과, 손님을 돌려보내던 갑옷 소리가 조각조각 걸려 있었다.

루나는 무릎 위에 두꺼운 노트를 올려놓고 있었다. 전대 마스터의 레시피 노트. 표지 모서리가 손때로 반질반질했다. 그 애의 손가락이 노트 위에서 딱, 딱, 초조하게 두드렸다.

"마스터. 나 다 봤어."

"…뭘."

"여기." 루나가 노트를 펼쳐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낡은 잉크로 눌러 쓴 한 줄. *감지한 것은 네게 머문다. 하루의 총량을 넘기면, 마스터가 손님을 대접하는 게 아니라 손님이 마스터를 먹는다.*

지운의 목젖이 움직였다.

"루나, 그건—"

"그날 세리아 언니가 커피 만들 때 마스터 손 떨렸어. 그다음 날 아저씨 오크한테는 왼손으로 잔 못 들었고. 오스카 아저씨 갔을 땐 계단에서 벽 짚었잖아. 나 다 봤어. 눈치 없는 애 아니야, 나."

말이 빨라졌다. 밝은 척하던 목소리 밑에서 무언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마스터는 손님 감정을 맛으로 읽어. 그리고 그거… 마스터 몸으로 들어와. 슬픔 마시면 슬퍼지고, 화나는 거 마시면 심장 아프고. 그렇게 아홉 잔을 하루에 다 받아서, 그래서 쓰러진 거잖아."

지운은 부정하려고 입술을 뗐다가, 그 애의 눈을 보고 그만두었다.

거짓말은 이 아이에게 통하지 않는다. 전쟁고아로 굴러다니며 어른들의 헛말을 뼈로 배운 눈이었다.

"…맞아."

한 마디에 루나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래서 죽는 거야? 전대 마스터도 그래서 죽은 거고?"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창밖에서 무인의 골짜기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 낮게 깔렸다.

지운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이번엔 루나가 막지 않았다.

"솔직히 말할게. 이 능력엔 대가가 있어. 계속 무리하면… 위험해. 나도 알아."

"아는데 왜 계속 해!"

루나가 벌떡 일어섰다. 걸상이 뒤로 넘어가 바닥에 부딪혔다.

"손님이 슬프면 그냥 슬픈 채로 보내면 되잖아! 왜 마스터가 다 뒤집어써! 그러다 진짜 죽으면, 그러면 나는—"

말이 뚝 끊겼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애는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더니, 넘어진 걸상을 도로 세웠다. 그리고 노트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울 시간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콧물을 훌쩍 들이켜고, 루나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오늘부터 손님은 내가 관리해."

"뭐?"

"규칙 세 번째. 마스터의 한계를 존중하라. 벽에 그렇게 써 있잖아." 루나가 카운터 뒤 낡은 목판을 턱으로 가리켰다. "근데 정작 마스터가 그 규칙을 안 지켜. 그럼 지키게 만드는 게 견습생 일이지."

지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루나, 손님은 오는 대로 받아야—"

"안 돼. 마스터는 거절을 못 하니까. 그래서 내가 문 앞에 설 거야." 그 애가 팔짱을 꼈다. 아직 코끝이 빨간데도 목소리는 단단했다. "하루 몇 잔까지 괜찮은지 마스터가 정해. 그거 넘으면 나머지는 내가 돌려보낼 거야. 슬픈 얼굴로 오는 사람 몇 명, 화난 사람 몇 명, 내가 세어서 감정 무게 계산할 거야."

"…계산을 어떻게 해."

"오스카 아저씨가 사람 표정 읽는 법 알려줬어. 눈썹이랑 어깨 보면 대충 안대. 나 그런 거 잘해."

그 애는 어느새 노트 뒷장에 조막만 한 글씨로 표를 그려 놓았다. *슬픔 3점, 분노 5점, 죄책감 4점, 하루 한계… 마스터가 채워.* 칸까지 나뉜 표였다.

지운은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거절이 서툴러서 매번 손을 놓지 못했다. 전생에도 그랬다. 조금만 더, 한 잔만 더, 하다가 사무실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도 그를 멈춰 세워 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열두 살짜리 마족 아이가 넘어진 걸상까지 도로 세워 가며 그를 멈추려 하고 있었다.

"…알았어." 지운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부탁한다, 지배인."

"지배인 아니고 견습생." 루나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가, 아차 싶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이제 마스터 함부로 안 쓰러져. 내가 안 놔둬."

작은 손이 뜨거웠다. 아직 미열이 남은 지운의 손보다 더.

---

그날 오후, 지운은 카운터 밑을 정리하다 낯선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먼지가 손가락 한 마디 두께로 쌓여 있었다. 전대 마스터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노트 아래 눌려 있던 것이다. 그동안 카운터 안쪽이 좁아 손이 닿지 않던 구석이었다.

"뭐야 그거?" 컵을 닦던 루나가 목을 뺐다.

"모르겠어. 선대 유품인가 봐."

상자 뚜껑을 열자 마른 나무 냄새가 훅 올라왔다. 안에는 낡은 회중시계, 이 빠진 계량스푼, 그리고 접힌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지운은 편지를 조심스레 폈다. 종이가 바스러질 듯 얇았다. 눈에 익은 필체—레시피 노트를 눌러 쓴 그 손이었다.

*이 편지를 읽는 이에게.*

*네가 다음 마스터라면, 지금쯤 손이 떨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떨림은 게으름이 아니다. 이 능력은 위로를 파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값을 네 몸으로 치르는 일이다.*

지운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나는 그 값을 오래 감당했다. 그러나 요즘 이상한 일이 잦다. 원두를 대던 남방 상인이 셋이나 발길을 끊었다. 검은 열매가 독초라던 옛 소문이 다시 돈다.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는 것이다.*

"마스터, 얼굴이 왜 그래."

루나가 어느새 옆에 붙어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운은 계속 읽었다.

*지난달, 웃으며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설탕 냄새를 풍기는 자였다. 그는 내 카페를 '전쟁 시장을 갉아먹는 병균'이라 불렀다. 그러고는 값을 후하게 부르며 가게를 넘기라 했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마스터, 사람은 오래 서 있으면 넘어지기 마련이지요."*

편지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날 이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혹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것은 사고가 아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컵 닦던 물소리도, 창밖 바람도 멀어졌다. 루나가 무의식적으로 지운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사고가… 아니라고?"

세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전대 마스터가 어느 날 갑자기 카운터 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고. 다들 과로사라 여겼다고. 지운 자신도 사흘 전 똑같은 자리에서 쓰러졌다.

같은 카운터. 같은 떨림. 같은 웃으며 오는 자.

지운은 침을 삼키고 편지의 마지막 문단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 자리는 위험한 자리다. 그러나 위험하기에 필요하다. 검을 내려놓을 곳이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다음 마스터여, 부디 나보다 오래 살아라. 그리고 반드시 명심해라.*

한 줄이 다른 글씨보다 크고 깊게 눌러쓰여 있었다. 펜촉이 종이를 뚫을 뻔한 자국이었다.

*전쟁을 파는 자를 조심하라.*

그 문장 아래.

지운의 숨이 멎었다.

편지지 하단, 마른 잉크로 찍힌 작은 인장. 균열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형상. 세리아에게 온 편지에도, 카이겐 주머니에 심긴 동전에도, 오스카가 경고하던 그 표식에도 있던—

균열교단의 문장이었다.

"이거… 그때 편지에 있던 거랑 똑같아." 루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설탕 냄새 나던 그 편지."

지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편지지를 다시 처음부터 훑었다. 설탕 냄새를 풍기며 웃던 자. 원두 공급을 끊는 소문. 오래 서 있으면 넘어진다던 말.

전대 마스터는 살해당한 것이다. 검이 아니라, 소문과 거래와 끊긴 원두로. 천천히, 웃으며.

그리고 지금 같은 손이 이 카페로 다시 뻗어오고 있었다.

"마스터." 루나가 그의 팔을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방금 전 씩씩하게 손님을 관리하겠다던 아이의 눈에, 이번엔 진짜 겁이 서려 있었다. "그 사람… 지난번에 문 앞까지 왔던 사람이잖아. 설탕 냄새."

바람이 카페 목조 벽을 긁고 지나갔다. 카운터 위, 원두를 담아 두던 항아리가 비어 있었다. 바닥까지 긁어낸 지 며칠째였다. 남방 상인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지운은 텅 빈 항아리를 보았다. 그리고 편지의 그 한 줄을 다시 읽었다.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는 것이다.*

카페 문이 삐걱, 열렸다.

지운과 루나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문틈으로 흘러든 오후 햇빛 사이로, 달콤한 향이 실려 왔다.

설탕 냄새였다.

문지방을 넘어선 것은 그림 발토스가 아니었다.

오스카였다.

한 손에 낡은 자루를 걸머진 채, 무뚝뚝한 얼굴로 문설주에 어깨를 기댔다. 그런데 그의 옷깃과 소매에서 그 달콤한 냄새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긴장 풀어라. 나다."

루나가 붙잡고 있던 지운의 팔을 놓았다. 그러나 지운은 오스카의 자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냄새… 아저씨한테서 나."

오스카가 자기 소맷자락을 코에 대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오는 길에 설탕 실은 마차와 마주쳤다. 균열교단 문양을 단 호위가 붙어 있더군. 남쪽 상단으로 가는 짐이었어." 그가 자루를 카운터에 툭 내려놓았다. "그자들, 설탕만 나르는 게 아니야."

지운은 자루의 매듭을 풀었다. 안에서 마른 나뭇가지 한 다발과, 검게 익은 열매 몇 알이 굴러 나왔다. 검은 열매. 원두였다.

"밀림 어귀 상인 하나가 값도 안 받고 넘겨줬다. 목숨 걸고 가져온 거라더군." 오스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남방 원두밭이 사흘 전부터 봉쇄됐어. '독초 정화'라는 명목으로. 균열교단이 왕실 사제단을 매수해 검은 열매를 금수품으로 지정하게 만들었다."

지운의 손안에서 검은 열매가 미끄러졌다. 항아리를 긁어낸 지 며칠. 남방 상인이 발길을 끊은 이유. 전대 마스터가 편지에 적었던 '다시 도는 소문'.

"그러니까," 루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원두를 아예 못 구하게 막는다는 거야? 그럼 마스터가 커피를 못 만들고, 커피를 못 만들면 이 가게는—"

"굶어 죽지." 오스카가 편지를 힐끗 보았다. 균열 문장에 시선이 닿자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편지, 어디서 났나."

"선대 유품이에요." 지운이 편지를 내밀었다. "전대 마스터도 같은 수법에 당했어요. 소문으로 원두를 끊고, 웃으며 가게를 조여서."

오스카는 편지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정보상으로 굴러먹던 눈이, 잉크의 마름 상태와 인장의 각도까지 훑는 게 보였다.

"이 인장… 그림이 직접 찍은 거다. 그자는 하수인 편지엔 인장을 안 써. 아까워하거든." 그가 편지를 도로 내려놓았다. "선대에게 직접 손을 댔다는 뜻이야. 그리고 인장을 남긴 이유는 하나. 다음 마스터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나는 이걸 했고, 너도 똑같이 될 것이다.' 경고이자 협박이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지운은 텅 빈 원두 항아리와, 오스카가 목숨값으로 가져온 한 줌의 검은 열매를 번갈아 보았다. 이걸로 몇 잔이나 낼 수 있을까. 열 잔? 스무 잔?

"마스터." 루나가 노트 뒷장의 표를 다시 펼쳤다. 슬픔 3점, 분노 5점… 아까 그 애가 그린 표였다. "이제 이거, 두 가지 이유로 필요해졌어. 마스터 몸 지키려고, 그리고 원두 아끼려고. 손님을 더 골라 받아야 해."

지운은 열두 살짜리가 그린 삐뚤빼뚤한 표를 내려다보았다. 우습게도, 그건 바리스타 시절 그가 한 번도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하루 몇 잔까지가 나의 한계인가. 어느 손님을 오늘 받고, 어느 손님을 내일로 미룰 것인가.

거절하는 법. 멈추는 법.

"그래. 골라 받자." 지운이 검은 열매 한 알을 집어 코에 댔다. 익숙한 쓴 향이 손떨림을 조금 가라앉혔다. "대신 규칙은 내가 정한다. 진짜 무너지기 직전인 사람만 받아. 나머지는 내일, 그다음 날로. 원두가 한 알이라도 남는 한, 문은 안 닫아."

오스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멈출 줄도 아는 마스터라. 선대보다 낫군."

그때 루나가 창밖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애의 귀가 쫑긋 섰다.

"…마차 소리."

세 사람이 동시에 창가로 붙었다. 무인의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흙길 위로, 흰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바퀴에도, 지붕에도 어떤 진영의 깃발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저 새하얗기만 한 마차. 중립을 가장한 무색(無色).

마차 옆면에 그려진 문양만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균열.

지운의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었다.

마차가 멈추자 마부가 문을 열었다. 안에서 지팡이 짚은 손이 먼저 나왔다. 이어 부드러운 미소가, 그리고 설탕처럼 하얀 머리칼이 오후 햇살 속에 드러났다.

그자가 카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마치 오래 기다린 재회를 반기듯.

"마스터, 저 사람—" 루나가 지운의 소매를 다시 붙들었다.

오스카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규칙상 이 골짜기에 무기는 없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쥐었다.

"그림 발토스다."

문 밖에서, 그자가 지팡이로 흙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카운터 뒤에 굳어 선 지운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사람을 오래 서 있게 만든다는 그 카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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