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어제 일이 없었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준호는 그것을 깨달았다. 일어난 지 3초, 카톡 타임라인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어제가 뭐였지? 월요일인가 화요일인가? 휴대폰 화면은 수요일 오전 7시 23분을 표시했다. 그 사이의 36시간이 검은 종이처럼 펼쳐져 있었다.
손이 떨렸다. 미세한 진동이 아니라 눈에 띄는 떨림이었다. 준호는 손가락을 펴 봤다. 자기 손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호흡이 가빠졌다. 어제가 없다. 36시간이 사라졌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이 뭘 했는지, 누굴 봤는지, 뭘 말했는지 아무것도 없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것. 어제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모르는 것. 그 공포가 숨을 막았다.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은 여전히 자신의 얼굴이었다. 눈은 혈관이 터질 듯 빨갛고, 광대뼈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3주 전 MRI 진단 이후 체중이 5킬로 줄었다. 의사는 뭐라고 했더라? 해마가... 축소되고 있다고. 회복 불가능하다고. 그런데 기억이 안 난다. 의사의 표정만 떠올랐다.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타임트레이드 앱을 켰다.
**[남은 수명: 23년 1개월 14일 06시간 32분]**
빨간색 숫자가 깜빡였다. 통장 잔액 난에 손가락이 멈췄다.
**72,340,000원**
3주 전 1억 원을 돌파했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기분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기쁨? 안도? 어딘가 다른 감정? 그 기억도 없었다. 남은 건 숫자뿐이었다.
목표까지 2,800만 원이 더 필요했다.
공식 거래소의 월 한도는 이미 소진됐다. 20시간을 모두 팔았다. 3주에 걸쳐 조금씩, 그리고 마지막 1주일은 하루에 3시간씩. 통장에는 그 대가로 3,600만 원이 들어왔고, 부모의 빚은 여전히 2,8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준호는 은행 앱을 다시 열었다. 새로고침을 눌렀다. 여전히 72,340,000원. 한 달이 남았지만 공식 거래소는 더 이상 시간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거래 버튼이 회색으로 변할 것이다. 한 달.
손가락이 떨렸다. 공식 거래소 앱을 닫았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열었다. 타임트레이드 거래자 커뮤니티 '시간 매매자'. 회원 수 47만 명. 준호는 검색창에 '시간 골목'을 입력했다.
**[글] 월 한도 끝났는데 어디서 거래해야 함? / 글쓴이: 새로운 멤버**
답글들이 촘촘했다.
**댓글 1번:** 공식 거래소가 기본. 다른 데서 하면 추적 안 됨 ㅇㅇ 위험.
**댓글 2번:** 위험 = 고수익. 초당 1,500~2,000원. 공식 거래소는 1,200원대인데, 2배 이상.
**댓글 3번:** 송민재 형 찾아. 강남역 카페 '크로노스'에 매일 있어. 진짜 개꿀.
준호는 댓글 3번을 다시 읽었다. 송민재. 강남역 카페 '크로노스'. 매일.
지하철 2호선 강남역행 승차권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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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크로노스'의 인테리어는 놀랍도록 일반적이었다. 검은색 테이블, 흰색 의자, 벽면의 추상화. 커피 향기가 가득했다. 준호는 입구에 서서 주변을 훑었다. 오전 10시. 손님은 5명뿐이었다. 노트북을 열고 있는 사람들. 그 중 한 명이 시선을 들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였지만, 더 자세히 보니 50대에 가까웠다. 까만 셔츠를 입은 남자. 준호를 보자마자 웃음이 지어졌다. 그 웃음이 너무 정확했다. 마치 준호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처음이지?"
준호가 다가가자 남자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는 저음이었고, 말투는 친근했지만, 눈빛은 차갑다.
"네."
"월 한도 때문에 왔나?"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준호가 앉자,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매우 미묘한 진동이 아니라 눈에 띄는 떨림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 손을 계속 움직이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처럼.
"송민재."
"이준호."
악수를 나눈 후 송민재는 한 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신용카드 크기의 검은 카드. 표면에는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이 코드를 타임트레이드 앱에 입력해. 포탈이 열려."
"포탈?"
"시간 골목이야. 공식 거래소는 한 달에 20시간이 한도지. 하지만 여기선 제한이 없어. 신분증도 필요 없고. 초당 1,800원 정도면 거래해줘."
준호는 카드를 들었다. 무게는 없었다. 또는 준호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대신 이 카드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송민재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톤은 여전히 친근했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왜?"
"카드가 없으면 포탈도 없고, 포탈이 없으면 거래도 없어. 그리고 거래가 없으면..."
송민재의 떨리는 손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손을 봤을 때, 준호는 이해했다. 그리고 거래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걸.
"카드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어?"
"많아. 그들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아냐? 아무도 모르지."
송민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충심에서 나오는 웃음처럼 들렸지만, 준호는 그것이 무언가를 숨기는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근데 돈은 진짜 번다."
송민재가 커피잔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려 커피가 흔들렸다. 그는 한 모금을 마셨다. 입가에 묻은 커피를 닦지 않았다.
"월 3억."
"3억?"
"공식 거래소로는 불가능해. 월 20시간이니까 최대 360만 원. 세금 떼면 144만 원. 먹고살 수 없지.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여기선 제한이 없으니까."
준호는 송민재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피부는 처진 곳이 많았고, 눈 주변에는 검은 자국이 깊었다. 눈 흰자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엔 빚 때문에 시작했어. 부모 빚, 학자금, 신용카드. 다 합쳐서 5,000만 원 정도였나. 그걸 갚기 위해 공식 거래소에서 거래를 시작했어. 1시간에 180만 원이니까, 한 달이면 360만 원. 한 해면 4,000만 원. 1년이면 빚을 다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1년이 지났어. 빚은 없어졌어. 근데 거래는 멈출 수가 없었어. 처음엔 돈을 모으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거래 자체가 필요했어. 손가락이 자동으로 버튼으로 움직여. 의식적으로 누르는 게 아니야."
송민재의 떨리는 손을 다시 봤을 때, 준호는 이해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누구의 미래인지.
"지금도 거래하세요?"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자는 시간 빼고 모두."
"그럼 남은 수명은?"
송민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더 길게, 더 크게.
"3년 2개월. 계산해봤어. 월 3억씩 버는데, 3년이면 충분해. 그 다음은..."
송민재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대신 커피를 다시 마셨다. 손가락이 떨려 커피가 입가에 흘렀다.
"당신은?"
송민재가 준호를 봤다.
"목표가 뭐야?"
"부모 빚 3억."
"3억? 그럼 3주면 충분한데?"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송민재의 말이 맞았다. 3주면 충분했다. 3억을 벌고, 부모의 빚을 갚고, 거기서 멈추면 된다. 간단했다.
그런데 왜 손가락이 자꾸만 더 큰 숫자를 입력하고 싶어 했을까? 왜 3억이 아니라 5억, 10억을 생각했을까? 그 욕망이 자신에게서 나온 건지, 아니면 손상된 뇌가 만들어낸 거짓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알았다. 3억 이상을 원하는 거구나. 다들 그래. 처음엔 빚을 갚으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 숫자가 커져. 5억, 10억, 50억. 끝이 없어."
송민재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떨리는 손. 그 손을 준호가 봤다.
"이 손, 봤지? 이건 내 손이 아니야. 거래의 손이야. 거래를 하라고 나한테 계속 말하는 손."
준호는 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신도 이렇게 될 거야. 3주 후에. 아니, 2주 후에. 당신은 나보다 빨리 중독될 거야.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36시간을 잃어버렸으니까. 해마가 이미 손상됐으니까."
준호의 목이 마르고 있었다. 송민재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뇌가 이미 손상되고 있다는 걸. 그런데도 손가락은 그 카드를 놓지 않고 있었다.
"카드를 받아. 그리고 거래해. 돈을 벌어. 그리고 3년 뒤에 만나자. 이 카페에서. 우리 둘 다 같은 손을 가지고."
송민재가 카드를 밀어냈다. 검은 카드. 준호의 손이 그것을 집었다.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카드를 들고, 앱을 켜려는 손.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신체의 자동 반응.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부모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죄책감과 거래하고 싶은 욕구가 뒤섞여 있었다. 어느 것이 더 강한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손가락은 계속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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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지하 3층 화장실 옆. 준호가 찾아간 곳은 일반적인 공간이었다. 벽면에 붙은 수도관, 형광등이 깜빡이는 천장, 타일이 떨어진 바닥.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
카드의 코드를 입력했다.
타임트레이드 앱의 화면이 변했다. 공식 거래소의 파란색과 흰색이 사라졌다. 대신 나타난 건 시뻘건 인터페이스였다. 마치 피처럼 붉은 화면. 상단에 떠오르는 글귀:
**[법적 책임 없음. 모든 거래는 자신의 책임입니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을 넘겼다. 거래 기록 탭은 비어 있었다. 공식 거래소처럼 월별 거래 내역이 쌓이지 않았다. 추적 불가능. 증거 불가능.
거래 버튼을 눌렀다.
**[거래 시간: 1시간]**
**[거래 단가: 초당 1,800원]**
**[예상 수익: 6,480,000원]**
손가락이 '확인' 버튼 위에서 멈췄다. 6,480,000원. 한 번의 거래로 648만 원. 통장에 들어오면 7,800만 원이 된다. 목표까지 2,000만 원. 3일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는 그 손을 봤다. 자신의 손인가? 송민재처럼 이미 거래에 지배당하는 손인가?
송민재의 경고가 떠올랐다. 당신은 나보다 빨리 중독될 거야. 해마가 이미 손상됐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마지막 선택의 순간인가? 이 버튼을 누르면 자신도 송민재처럼 될 것인가?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의 빚이 떠올랐다. 2,000만 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미안해. 이 빚 때문에 너까지..." 그 말을 끝내지 못하고 울던 아버지. 밤새 일했던 어머니. 그 모든 것이 2,000만 원이었다.
3일이면 충분했다. 3일이면 부모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송민재의 손이 자꾸 떠올랐다. 떨리는 손. 그 손이 자신의 손이 될 거라는 경고.
준호는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3,600초]**
**[3,599초]**
**[3,598초]**
빨간색 숫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한 초마다 1,800원씩 현금화되고 있었다. 준호의 수명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통장에는 돈이 쌓이고 있었다.
화면을 내렸다. 다른 앱을 열었다. 은행 앱. 새로고침을 눌렀다.
**72,340,000원**
다시 새로고침을 눌렀다. 아무것도 안 떴다. 카운트다운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거래가 끝날 때까지 입금은 되지 않을 것이다.
준호는 화면을 들었다. 지하 3층 화장실 옆. 형광등이 깜빡이는 공간에서 빨간색 카운트다운을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공포와 쾌감이 섞여 있었다. 이 떨림은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송민재처럼 이미 거래에 중독된 신체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타임트레이드 공식 거래소 앱의 알림이었다.
**[비정상 거래 패턴 감지]**
**[경고: 귀하의 계정이 조사 대상입니다]**
**[추가 거래 전에 신원 인증 필요]**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공식 거래소가 감지했다. 한 달에 20시간을 초과한 거래를. 블랙마켓 거래를. 손가락이 경고 메시지를 눌렀다. 로그인 창으로 넘어갔다. 신원 인증 요구. 본인 인증. 안면 인식. 모든 절차가 뜨고 있었다. 공식 거래소는 더 이상 거래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은행 앱을 다시 열었다. 카운트다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1,847초]**
**[1,846초]**
**[1,845초]**
빨간색 화면에서 숫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한 초마다. 한 초마다 1,800원씩.
준호는 지하 3층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 깜빡임 속에서 준호는 깨달았다.
공식 거래소는 이제 끝이었다.
이제 남은 건 빨간 화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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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후.
통장 잔액: 7,800만 원.
해마 위축도: 12.3ml (정상 범위 26~28ml).
기억 능력: 80% 유지.
준호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어제 먹은 게 뭐였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전화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아들, 이제 됐지? 충분한데 그만해." 준호는 들었다. 명확하게 들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인식했다. 하지만 손은 이미 다음 거래를 입력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의식적이지 않은 움직임. 신체의 독립적인 명령.
2일 후.
통장 잔액: 1억 4,280만 원.
해마 위축도: 11.8ml.
기억 능력: 75% 유지.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을 봤다. 이 얼굴이 누구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르겠다. 어제가 뭐였는지. 어제 자신이 뭘 했는지. 어제 자신이 누구였는지. 공백. 그 공백을 채우려는 욕구가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거래 버튼으로.
강남역 카페 '크로노스'에 갔다. 송민재가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눈 충혈이 더 심해졌고, 말 끝이 흐릿했다. "목표 달성했나?" 준호가 답했다. 하지만 자신이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송민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축하가 아니라 이해였다. 그리고 동지애였다.
3일 후.
통장 잔액: 2억 1,480만 원.
해마 위축도: 11.2ml.
기억 능력: 68% 유지.
어절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통화할 때 "아버지, 미안해. 곧 끝낼게"라고 하려다가 "아버지, 미안해. 끝낼게"라고 말했다. 중간이 빠졌다. 의미는 전달되지만, 뭔가 부족했다. 어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손은 이미 거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4일 후.
통장 잔액: 2억 8,760만 원.
해마 위축도: 10.4ml.
기억 능력: 62% 유지.
의료진이 전화했다. 신경과 의사였다. "즉시 거래를 중단하셔야 합니다. 해마 손상이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회복 불가능 단계입니다." 준호는 들었다. 명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의사의 이름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그 의사의 목소리가 어떤 목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거래 버튼으로. 한 번 더. 한 번 더.
5일 후.
통장 잔액: 3억 5,240만 원.
해마 위축도: 9.6ml.
기억 능력: 55% 유지.
반복 언어가 나타났다. "거래, 거래, 거래." 입에서 자동으로 나왔다. 의미 없는 반복. 신체의 자동 음성. 손도 반복했다. 거래 버튼을 누르고, 또 누르고, 또 누르고. 시간 골목의 포탈이 깜빡였다. 추적 강화 신호였다. 공식 거래소가 블랙마켓 거래를 추적하고 있다는 신호. 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손은 이미 준호의 손이 아니었다.
6일 후.
통장 잔액: 4억 1,720만 원.
해마 위축도: 8.9ml.
기억 능력: 48% 유지.
은행 앞에 섰다. 목표를 달성했다. 부모의 3억 원 빚을 갚을 돈이 충분했다. 더 이상 거래할 이유가 없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자동으로.
타임트레이드 앱을 켰다.
시뻘건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거래 버튼. 1시간. 초당 1,800원.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멈췄다.
그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계정 정지됨]**
**[공식 거래소에서 비정상 거래 패턴으로 인해 계정이 차단되었습니다]**
**[시간 골목 포탈도 함께 폐쇄되었습니다]**
준호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공포가 아니었다. 쾌감도 아니었다. 다른 감정이었다. 절망감. 그리고 그 절망감 속에서도 거래하고 싶은 욕구가 몸을 뒤흔들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앱을 다시 켜려고 했다. 꺼졌다. 다시 켜려고 했다. 꺼졌다. 반복. 끝없는 반복.
은행 앞에 서 있는 준호. 통장에는 4억 1,720만 원. 부모의 빚을 갚을 돈이 충분했다. 부모는 이제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어깨가 펴질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올 것이다.
통장을 들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들, 미안해..."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낯선 음성. 하지만 알았다. 그것이 아버지라는 걸. 그런데 기억이 안 난다. 아버지의 얼굴이 뭐였는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떤 톤이었는지.
통장을 놨다.
의사의 경고가 떠올랐다. "회복 불가능 단계입니다." 그 말의 의미가 뭐였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 의사의 얼굴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이름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 말만 남아 있었다. 회복 불가능. 회복 불가능.
통장을 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이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거울을 봤을 때 낯선 사람이 보였다. 누구인가? 이 손이 누구의 손인가? 이 손가락이 누구의 손가락인가?
통장을 놨다.
앱을 켜려고 했다. 손이 멈췄다. 신체적 모순. 뇌는 거래를 원했지만, 거래 수단은 없었다. 그 불가능성이 준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통장을 들었다.
4억 1,720만 원. 충분한 돈. 부모를 구할 수 있는 돈. 하지만 손은 거래하고 싶었다. 더 벌고 싶었다. 손은 알았다. 이 돈이 충분하다는 걸. 하지만 손은 원했다. 거래를. 더 많은 거래를.
통장을 놨다.
그제야 준호는 명확히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무엇인지를. 부모의 빚을 갚을 충분한 돈을 손에 쥐고도 거래하려는 손. 그것이 자신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중독된 신체. 이미 손상된 뇌. 이미 거래에 지배당하는 자신.
은행 앞에서 준호는 통장을 들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낯선 음성. 하지만 알았다. 그것이 아버지라는 걸.
통장을 놨다.
의사의 경고가 들렸다. "회복 불가능..." 그 말의 의미가 뭐였는지 알았다. 하지만 기억이 안 난다.
통장을 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이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통장을 놨다.
손가락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