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손가락이 톰슨의 팔목을 눌렀다. 맥박이 거의 만져지지 않았다.
이건 내 손이 맞나?
거울을 찾았다. 여인숙 벽에 붙은 낡은 거울이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보자 호흡이 멈췄다.
눈동자가 낯설었다. 색깔은 같지만 안에 담긴 것이 달랐다. 이전 이준호의 눈에는 환자를 잃은 절망감,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지금 거울 속의 눈은 냉담했다. 계산적이었다.
입가에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웃음이 아닌 듯했다.
"이건 내 얼굴이 맞나?"
손가락이 거울을 긁었다. 유리가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자신의 얼굴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
공포가 밀려들었다. 진짜 공포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공포. 자신이 자신이기를 멈추는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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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의 어두운 방. 오후 네 시 삼십분. 톰슨이 고열로 쓰러진 지 아홉 시간이 지났다.
이준호는 침낭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지난번과는 다를 것이다. 지난번엔 슈미트였다. 식민지 관리자. 약탈자. 이번엔 톰슨이다.
톰슨은 무엇인가?
침을 톰슨의 팔에 꽂았다.
기억이 밀려들었다.
먼저는 어린 시절 런던의 거리 풍경이었다. 회색 석조 건물,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굴뚝, 콜레라로 죽어가는 빈민들. 톰슨의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빈민가 환자들을 치료하지 않았다. 톰슨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약학을 공부했다. 저렴한 약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런던 약학회는 거부했다. '약학은 부자들의 학문'이라고.
글래스고우 제약에 들어간 톰슨은 저가 의약품 개발을 주장했다. 회사는 가격을 올렸다. 더 많은 이익을 원했기 때문이다.
톰슨은 반발했다. 윤리를 말했다. 인도주의를 말했다.
그들은 톰슨을 해고했다.
바이엘에서 도마스 윌슨 밑에 일했다. 윌슨은 톰슨의 이상주의를 이용했다. '조선의 의료를 개선하자'고 말하며. 하지만 조선의 약값은 계속 올랐다. 빈민들은 계속 죽었다.
톰슨은 다시 반발했다.
그리고 장티푸스에 걸렸다.
왜 조선에 왔는가? 톰슨의 기억은 명확했다. 양심의 가책이었다. 자신이 만든 약으로 조선 빈민들이 죽어가는데, 자신만 런던의 안락함 속에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이준호는 침을 빼었다. 톰슨의 호흡이 멈춰 있었다.
그 다음은 기술이었다.
페니실린 추출 공정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균 배양 방법. 대량 생산을 위한 화학 반응식. 임상 시험 데이터. 톰슨이 20년 동안 축적한 모든 지식이 이준호의 뇌를 채웠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화학식을 그렸다. 분자 구조식이 눈 앞에 떠올랐다. 광범위 항생제를 만드는 원리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알고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뇌 속에서 분자들이 재배열되는 감각. 톰슨의 손가락 기억이 자신의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효율성이 중요하다. 감정은 방해물이다. 약값을 올려라. 공급을 조절하라. 그것이 권력이다.'
슈미트의 목소리였다.
이준호는 손을 멈췄다. 두 목소리가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톰슨의 이상주의와 슈미트의 냉정함. 빈민을 살리려는 마음과 조선을 장악하려는 욕망.
누가 이기는가?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이 떨렸다. 자신이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박의령을 만나 진실을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이소영을 피할 것인가. 톰슨의 양심인가, 슈미트의 야욕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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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령은 약방 뒤 작은 방에서 한약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인삼, 황기, 감초. 수십 년 동안 다루어온 약재들이었다.
이준호가 돌아왔다.
박의령은 즉시 알아챘다. 그 걸음걸이, 그 호흡, 그 눈빛. 이전과 달랐다.
"톰슨이었나?"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약재 더미 위에 앉았다. 마치 그곳이 이미 자신의 공간이라는 듯이.
"너는 이제 이준호가 아니다."
박의령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스승, 저는—"
"너는 슈미트가 되어가고 있다. 톰슨도 섞여 있다. 그 다음은? 또 누가 들어올 것인가?"
박의령은 이준호의 얼굴을 직시했다. 제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자신이 알던 이준호를 찾을 수 없었다.
"넌 어릴 때 어머니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하는가?"
이준호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들이 일렁거렸다.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빠르게.
목소리가 나왔지만 떨렸다.
"기억... 합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톰슨의 목소리와 슈미트의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박의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넌 이미 절반이 죽은 것이다."
박의령은 약재 더미 아래서 낡은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끝부분이 찢겨 있었다.
"내가 이걸 주면, 넌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박의령의 손이 떨렸다.
"또 다른 기술자가 있다. 런던에 있다. 하지만 그를 찾으면 돌아올 수 없다."
박의령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 자의 기억까지 담으면, 넌 완전히 사라진다."
이준호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찢긴 부분을 더듬었다. 뭔가 중요한 것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스승, 이 편지는—"
"넌 읽지 말아야 한다. 아직은."
박의령은 이준호의 손에서 편지를 도로 빼앗았다. 그리고 다시 약재 더미 아래 숨겼다.
박의령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소영이가 너를 찾고 있다. 가서 그 아이의 얼굴을 보아라. 그리고 자문해 보아라. 넌 그 아이의 어머니를 기억하는가?"
박의령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 아이의 첫 웃음은? 그 아이가 처음 '아버지'라고 부를 때의 목소리는?"
이준호가 일어서려 하자 박의령이 그의 팔을 잡았다.
"만약 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돌아오지 마라. 넌 이미 우리의 이준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의령의 손이 이준호의 팔을 세게 눌렀다. 그것은 경고였다. 동시에 절규였다.
이준호는 박의령의 손에서 팔을 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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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은 약방의 앞 계산대에서 환자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글씨로 쓰인 각 환자의 증상, 처방, 치료 결과. 수백 장의 종이 더미 속에서 패턴을 찾으려 했다.
신약이 나온 이후 콜레라 사망률은 15%로 떨어졌다. 이전의 70%에서. 수천 명의 목숨이 살아났다.
하지만 이소영은 불안했다.
그것은 수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준호의 눈이었다.
예전에 이준호는 환자를 볼 때, 그 환자를 '사람'으로 봤다. 이름이 있는 사람. 가족이 있는 사람.
지금 이준호는 환자를 무엇으로 보는가?
데이터로? 수치로?
이소영은 기록장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준호가 들어왔다.
이소영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그것은 이준호가 아니었다.
"당신 손이 낯설다."
이소영이 말했다.
"손이?"
이준호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그것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확인하려는 듯이.
이소영이 재빨리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과 맞춰보았다.
"기억하세요? 작년 겨울, 당신이 제 손에 침을 놨어요. 이렇게 잡고. 여기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고."
이준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당신이 말했어요. '이소영, 넌 너무 차갑다. 좀 더 따뜻해져야 한다'고. 그리고 제 손을 데워줬어요."
이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당신의 손이 따뜻하지 않아요."
이준호는 이소영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어냈다.
이소영은 이준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무엇이 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제 아버지예요. 당신은 제가 아는 사람이어야 해요."
이소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 손을 기억하세요. 제 목소리를 기억하세요. 제 이름을 기억하세요."
이준호는 이소영의 눈을 직시했다. 하지만 그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깊은 물 속을 보는 것처럼.
"이소영."
이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낯설었다.
"내 어머니의 이름이 뭐라고 생각해?"
이소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이... 당신이 지난주에 말했잖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제 아버지 진료소에서 콜레라로—"
이준호는 그 말을 들었지만, 감정이 없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이름이 뭐였지?"
이준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이소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준호가 그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준호는 항상 '어머니'라고만 말했다.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목이 메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준호는 그 감정을 잃어버렸다.
"모르겠어요."
이소영이 약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모르면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소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당신을 어떻게 놓아줘요?"
이준호는 이소영의 손을 천천히 풀었다. 손가락 하나씩. 그 순간 자신이 왜 이렇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슈미트의 본능인가, 톰슨의 습관인가, 아니면 여전히 남아 있는 이준호의 마지막 의지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가, 이소영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놓아줘야 한다."
이준호가 말했다.
"이소영, 놓아줘야 한다."
손가락이 이소영의 손금에서 떨어졌다. 이소영은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치 물을 쥐려는 것처럼.
그 순간, 이소영은 깨달았다. 이것이 아버지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아버지를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
이소영이 외쳤다.
"아버지, 돌아와요!"
하지만 이준호는 약방 문을 나갔다. 이소영의 울음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그것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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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내렸다.
이준호는 한강 둔치에 서 있었다. 물의 냄새, 부패하는 나뭇가지의 냄새, 그리고 도시의 배설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왜 자신이 여기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기억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던가?
발소리가 들렸다.
도마스 윌슨이 나타났다. 검은 양복, 은색 지팡이, 그리고 냉정한 표정.
"이준호 씨. 밤 늦게 출타하시다니."
윌슨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육식동물의 입 모양일 뿐이었다.
"당신의 신약은 정말 훌륭합니다. 콜레라 사망률을 70%에서 15%로 낮추다니. 정말 놀라운 성과입니다."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우리의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윌슨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슈미트의 기억, 톰슨의 기억. 그들이 당신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거지요."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윌슨이 이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마지막 기술자를 찾아 한 번 더 빙의하면, 당신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윌슨이 사진을 펼쳤다.
사진 속에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에는 지혜와 광기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윌슨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세균학자. 현재 런던의 세인트 메리 병원에 있습니다."
윌슨이 사진을 이준호의 눈앞에 들었다.
"그 사람을 빙의하면, 페니실린의 모든 비밀이 당신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당신을 통해 페니실린 독점 생산 체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윌슨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
"당신이 만든 항생제로 조선의 의료를 장악하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약의 공급을 조절함으로써, 조선의 모든 의료 체계를 우리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말입니다."
이준호는 사진을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윌슨이 다시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될 것이냐, 아니면 아무도 아닐 것이냐. 또는 제국의 도구가 될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이냐."
윌슨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 속에는 위협이 있었다. 명시되지 않은 위협. 그것이 더 무서웠다.
"박의령이 당신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그 노인은 여전히 당신 안에 이준호가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윌슨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소영은? 그 아이는 이미 당신을 포기했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손을 놓아버렸으니까요."
이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 아이는 지금 약방에서 혼자입니다."
윌슨은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이준호는 사진을 들고 있었다. 플레밍의 얼굴. 그 얼굴 속에 뭔가 또 다른 것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처럼.
손가락이 사진을 구겼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것을 펼쳤다. 다시.
한강의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물 속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슈미트의 얼굴도, 톰슨의 얼굴도 아닌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또 한 번 더 빙의하면 나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준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박의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 돌아와라!"
그 뒤로 다른 발소리들이 들렸다. 빠르고, 절박하고, 분노에 찬 발소리들.
손에 들린 사진이 무거워졌다. 플레밍의 얼굴이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졌다.
이준호는 사진을 움켜쥐었다.
런던으로 가면, 자신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자살인가? 아니면 완전한 타자화인가? 아니면 조선을 위한 또 다른 배신인가?
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의령의 호흡이 들렸다. 그리고 그 뒤로 이소영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이준호는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