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빙의의 순간

진료소의 방 한구석에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이준호는 슈미트의 손목을 잡고 맥을 재었다. 약한 떨림만 남아 있었다. 3시간. 콜레라 환자는 이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남자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슈미트의 피부는 회색빛을 띠었고, 입술은 검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호흡은 이미 한 번에 몇 초씩 끊어졌다.

"물을 데워라. 황기와 인삼을 섞어서."

옆방에서 상복이 대답했다. 상복은 이준호의 제자격인 젊은이였다. 그의 발걸음이 급했다.

이준호는 슈미트의 가슴팍을 살펴보았다. 폐렴음이 가득했다. 장기가 서서히 기능을 멈추고 있었다. 서양 의학으로는 이미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의학은 다르게 본다. 기(氣)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 혈(血)의 순환을 회복하는 것.

침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슈미트의 팔에 혈자리를 찾았다. 곡지혈(曲池穴). 팔의 안쪽, 팔꿈치를 굽혔을 때 나타나는 주름의 끝. 한 번에 찌르듯 넣었다.

슈미트의 몸이 경련했다. 눈이 떴다. 하지만 초점이 없었다.

"살아있군."

이준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슈미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폭발했다.

이준호의 뇌 전체가 불타올랐다. 불이 아니었다. 정보의 홍수였다.

화학식이 떠올랐다. C₆H₁₂O₆. 포도당의 구조식이다. 왜 이것이 떠올랐는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정확히 알았다. 그 분자의 성질, 용해도, 반응성까지 모두. 이준호는 이것들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데 자신의 것처럼.

"아, 아아—"

이준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다음은 이미지였다. 유리 시험관들이 줄지어 있고, 투명한 액체가 흐르고, 액체 아래로 미세한 입자들이 침전된다. 크로마토그래피다. 이준호는 이 단어를 알았다. 방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지금은 그것을 정의할 수 있었다. 혼합물을 성분별로 분리하는 기술. 각 성분의 분자 크기에 따라 이동 속도가 다르다는 원리. 그런데 왜 이런 것이 떠오르는가? 이것은 의술이 아니라 화학이었다. 이준호는 화학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누군가 나를 보여주고 있다."

이준호의 입에서 독일어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언어가 아닌데,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 거부감이 치솟았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다음은 냄새였다. 포르말린의 냄새. 부패하는 시신의 냄새. 해부실의 냄새. 이준호는 해부실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해부실에 있었다. 손에는 메스가 들려 있고, 앞에는 시신이 있고, 그 시신의 내장기관을 절개해서 조직 샘플을 채취한다. 세균 배양을 위해서다. 콜레라 비브리오 균을 배양하기 위해. 그 기억은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이준호는 깨달았다. 이것들은 모두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지금 자신의 뇌 속에 흐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슈미트의 손이 더 차가워졌다. 펄스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준호는 그 손을 놓으려 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손은 슈미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정보의 흐름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수도꼭지를 잠글 수 없는 것처럼.

이번에는 언어였다. 독일어 문법이 뇌에 각인되었다. 이준호는 독일어를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독일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슈미트의 수첩에 적힌 글귀들이 해석되었다. 'Bayer ist nicht nur ein Unternehmen. Bayer ist ein Staat(바이엘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다. 바이엘은 국가다).' 그 문장의 의미를 이준호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극도로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이미지였다. 동아시아 지도. 조선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 숫자: 95%. 점유율. 시장 점유율. 바이엘의 조선 의료 시장 점유율 목표치였다. 95%를 달성하면, 조선의 모든 약은 바이엘이 통제한다. 가격도, 유통도, 심지어 어떤 약을 공급할지도.

그리고 또 다른 이미지. 정부 관료들의 얼굴. 그들 옆에 적힌 숫자들. 매수 가격이었다. 조선의 고위 관리들이 이미 바이엘의 손에 있었다.

그 이미지가 사라졌다.

슈미트의 손이 이준호의 손에서 떨어져 내려갔다.

호흡이 멈췄다.

이준호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슈미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깊은 수면에 빠진 것처럼.

"죽었나?"

상복이 방문에서 물었다.

"응."

이준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어 봤다.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단순한 떨림이 아니었다. 손 전체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의 길이가 달라 보였다. 손톱의 모양이 달라 보였다.

이준호는 거울을 찾았다. 진료소의 구석에 깨진 거울이 있었다. 그는 그것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준호의 얼굴. 눈, 코, 입. 모두 맞다. 하지만 눈동자가 낯설었다. 그 안에 누군가 다른 것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공포가 목을 조였다. 이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공포. 그것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누구인가?"

이준호가 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름을 생각해 봤다. 이준호. 이준호라는 이름. 하지만 그 이름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수면에 빠져들면서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부르던 목소리도 희미해졌다. 그 얼굴도 선명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가까워졌다. 베를린의 거리. 대학 강의실. 그리고 실험실. 누군가의 삶이 자신의 삶을 덮어씌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지금 이 몸 속에 있는가?

이준호는 손을 머리에 갖다 댔다. 뇌 속이 뜨거웠다. 마치 뜨거운 물이 두개골 안을 흐르는 것처럼. 그 뜨거운 물 속에는 두 개의 의식이 섞여 있었다. 이준호의 의식과 슈미트의 의식. 둘이 분리되지 않았다. 섞여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은 낯선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슈미트의 의지인지, 자신의 의지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명확했다. 조선의 빈민층을 죽음에서 구하겠다는 의지.

혼란 속에서 분노가 피어올랐다. 슈미트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95% 점유율. 약값 인상. 빈민층의 죽음. 그것들이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공포는 분노로 변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공포도, 누군가 다른 것이 자신 속에 자리 잡는 공포도 여전했지만, 그것을 압도하는 분노가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려는 분노.

"안 돼. 이건 안 돼."

이준호는 거울을 때렸다. 거울은 산산조각 났다.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의 손에서 피가 났다. 하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통증보다 분노가 더 컸다.

"상복!"

이준호가 외쳤다.

상복이 달려 들어왔다. "선생님!"

"들어와. 그리고 문을 닫아."

상복이 문을 닫았다. 이준호는 상복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눈이 진지했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누구에게도."

"선생님, 뭐가..."

"약속해. 이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상복은 이준호의 눈을 봤다. 그 눈은 이미 다른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 안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상복이 대답했다.

슈미트의 시신을 정리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준호는 그 시신을 만지는 것이 두려웠다. 만지면 또 다른 기억이 흐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이준호는 슈미트의 옷을 벗겼다. 그 과정에서 여러 물건들이 나왔다. 지갑. 시계. 그리고 수첩.

지갑 속에는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Hans Schmitt, Regional Director, East Asia, Bayer Pharmaceuticals.' 바이엘 동아시아 지역 이사.

이준호는 수첩을 폈다. 그 속에는 글들과 그림들이 빼곡했다. 화학식, 도표, 그리고 메모들.

'Cholera vibrio, culture medium, temperature control—' 콜레라 균 배양에 대한 메모였다.

'Chosun market, 95% target, government officials corrupted, 3-year plan—' 조선 시장 점유 95% 목표, 정부 관료 매수, 3년 계획.

'New formula, German patent, 50% higher efficacy than competitors, price 300% markup—' 새로운 약 처방, 독일 특허, 경쟁사보다 50% 높은 효능, 가격 300% 인상.

이준호는 수첩의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한 장이 슈미트의 계획을 드러냈다. 정부 관료 매수 명단이 있었다. 이름과 금액이 적혀 있었다. 조선의 고위 관리들이 얼마에 팔렸는지 명기되어 있었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약국 네트워크 구축 계획. 서울에서 시작해 인천, 부산, 대구로 확대한다는 일정표. 그리고 각 지역의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는 액수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이준호는 천천히 이해했다. 슈미트가 누구였는가를. 바이엘이 무엇이었는가를. 그리고 조선의 의료 시장이 어떻게 조종당하고 있었는가를.

가격을 인상한다고 했다. 이미 높은 가격을 300% 더 올린다는 의미였다. 빈민층은 절대 그 약을 살 수 없다. 그들은 계속 죽을 것이다. 그리고 바이엘은 계속 돈을 번다.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른 내용이 있었다. 'Choson government officials: Minister of Finance (50,000 yen), Minister of Commerce (40,000 yen), Chief of Police (30,000 yen)...'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이미 매수되었다는 기록. 그리고 그 옆에 체크 표시. 거래가 완료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 떨림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슈미트의 분노인지, 자신의 분노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명확했다. 이것은 단순한 상업 활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행위였다.

이준호는 수첩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이번에는 더 자세히. 화학식, 배양 기술, 약물 투여 방법. 모든 것이 명확했다.

수첩의 뒷장에서 새로운 내용을 발견했다. 'Vaccination method, mass production, distribution network—' 예방 접종 방법, 대량 생산, 유통 네트워크. 슈미트는 콜레라 백신을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선에 독점 공급하려고 했다.

이준호의 머리가 맑아졌다. 슈미트의 기억 속에 있던 정보들이 정렬되기 시작했다. 바이엘의 진짜 목표는 콜레라 백신의 독점이었다. 조선에서 콜레라가 유행하면, 모든 사람들이 바이엘의 백신을 사야 한다. 그리고 바이엘은 가격을 300% 올려서 팔 것이다. 정부 관료들이 이미 매수되었으니, 정부는 바이엘의 백신을 강제로 공급할 것이다. 빈민층은 백신을 살 돈이 없으니 죽을 것이고, 중산층과 양반들은 비싼 가격을 내고 백신을 살 것이다.

이것은 계획된 학살이었다. 경제적 학살.

"상복. 불을 가져와."

"선생님?"

"수첩을 태워야 한다."

상복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준호의 명령에 따랐다.

이준호는 수첩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 수첩 안에는 조선을 파괴할 계획이 모두 담겨 있었다. 정부 관료의 이름, 매수 금액, 약값 인상 계획, 유통 네트워크. 모든 증거가 여기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정부에 알리면 어떻게 될까? 이미 정부 관료들이 매수되었다면, 이 증거를 누가 믿을 것인가? 누가 행동할 것인가?

상복이 불을 가져왔다.

이준호는 수첩을 불 위에 올렸다. 종이가 타기 시작했다. 화염이 글자들을 삼켰다. 관료들의 이름이 사라졌다. 매수 금액이 사라졌다. 증거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미 이준호의 뇌 속에 새겨져 있었다. 슈미트의 기억 속에. 정부 관료 매수 명단, 약값 인상 계획, 유통 네트워크. 모든 것이 명확했다. 3년 안에 조선의 의료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계획.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빈민층이 죽을 것이라는 것.

검은 재가 바닥에 흩어졌다. 수첩은 완전히 타버렸다.

그런데 이 선택이 누구의 것인가? 이준호의 선택인가, 아니면 슈미트의 의지인가? 손가락이 불 위에서 움직였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의식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증거를 없애는 것이 맞는 일인가? 그렇다면 누가 이 결정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해가 질 무렵,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박의령이었다. 이준호의 스승. 진료소의 문을 열고 들어온 박의령의 얼굴은 즉시 굳었다.

슈미트의 시신이 여전히 방 안에 있었다.

"누구냐, 이 자는?"

박의령이 물었다.

"독일 사람입니다. 콜레라로 들어왔는데...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박의령은 슈미트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이 슈미트의 맥을 확인했다. 이미 식어 있었다. 3시간 전의 일이었다.

박의령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너... 뭔가 달라졌다."

박의령이 말했다.

"뭐가요?"

"손이다. 네 손이 다르다."

박의령이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맥을 재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이준호의 손목에서 여러 혈관을 차례로 찾아 눌렀다. 약지, 중지, 식지. 세 손가락으로 누르는 삼부맥진(三部脈診).

박의령의 손가락이 이준호의 손목을 따라 움직였다. 첫 번째 위치에서 멈췄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맥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 다음 두 번째 위치. 세 번째 위치. 각 위치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건..."

박의령이 중얼거렸다.

"네 맥이 아니다."

박의령의 얼굴이 변했다. 놀라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나? 이 독일 사람과 무슨 일이?"

박의령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박의령은 이준호의 침묵을 읽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박의령은 이준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다시 한 번 맥을 재었다. 이번에는 더 오래. 더 깊게.

"내가 건네준 처방전. 기억하나?"

박의령이 물었다. 그 목소리에 비통함이 섞여 있었다.

"네."

"그 처방전은... 완성되지 않았다."

박의령이 말했다. 그의 눈이 창밖으로 향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왜 그런 거죠?"

이준호가 물었다.

박의령은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깊었다. 마치 먼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어떤 자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박의령이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말투는 신비로웠다.

"어떤 자요?"

"서양의 지식과 동양의 맥을 함께 가진 자."

박의령은 이준호의 손을 다시 들었다. 손목의 맥을 다시 짚었다.

"넌... 그런 자인 것 같다."

박의령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동시에 의문으로 가득했다. 마치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느끼는 것처럼.

"제가?"

"그 독일 사람에게서 뭔가를 받았나?"

박의령이 물었다.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이준호는 한 번 깊게 숨을 쉬었다.

"기억입니다. 그의 기억."

박의령은 이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눈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으면서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어떤 기억이냐?"

박의령이 물었다.

"바이엘의 계획입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바이엘?"

"그 회사의 이름입니다. 독일 회사."

이준호는 슈미트의 기억 속에서 정보를 끌어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정부 관료들의 이름, 매수 금액, 구체적인 계획들. 그것들을 말하면 위험할 것 같았다. 박의령이 누구인지 아직 완전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의료 시장을 장악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약값을 올리고, 정부를 통제하고..."

이준호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박의령이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그 정보가 모두 정확한가?"

박의령이 물었다.

"네. 그의 기억이니까요."

"그렇다면 넌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박의령이 물었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길을 가도록 유도하는 질문이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 속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그 처방전을 완성시키겠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박의령이 물었다. 그의 눈이 이준호를 깊게 바라봤다.

이준호는 슈미트의 기억 속을 다시 더듬었다. 화학식, 배양 기술, 약물 공정. 그리고 또 다른 것들. 서울의 명동에 위치한 바이엘의 조선 지사. 그곳의 지하실. 철제 금고. 비밀번호 1895.

"먼저 그 회사의 조선 지사를 조사해야 합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어떻게?"

박의령이 물었다.

"그곳에 기록들이 있을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계획들이."

이준호는 슈미트의 기억을 따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슈미트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박의령은 이준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 시작되는 것을 보는 것처럼.

"그렇다면 시간이 많지 않다."

박의령이 말했다.

"왜요?"

"그 회사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슈미트가 죽었다는 것을."

박의령이 창밖을 바라봤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증거를 없애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다."

박의령의 말이 맞았다. 이준호는 슈미트의 기억 속에서 그런 상황을 본 적이 있었다. 조직 내에서 누군가가 죽으면, 증거를 없애고, 후임자를 보낸다. 그것이 바이엘의 방식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준호가 물었다.

박의령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이준호의 눈을 바라봤다.

"그 처방전을 완성시켜라. 먼저 그것을 해야 한다."

박의령이 말했다.

"왜요?"

"그것이 너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박의령의 말이 모호했다. 이준호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의령의 눈에는 깊은 확신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미 그 길을 가본 사람처럼.

"그 처방전이... 뭔가요?"

이준호가 물었다.

박의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준호의 손을 다시 한 번 들었다. 그리고 맥을 재었다.

"넌 이제 둘이다."

박의령이 중얼거렸다.

"둘이요?"

"이준호이면서, 동시에 누군가 다른 자. 그 둘이 한 몸 안에 있다."

박의령이 말했다.

"그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힘이 될 것이다."

박의령은 이준호의 손을 놓았다.

"그 처방전은 그 고통과 힘을 모두 필요로 한다."

박의령이 말했다.

"그것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자는 너뿐이다."

이준호는 박의령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느꼈다. 박의령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박의령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밤이 더 깊어갔다. 진료소의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야경 속에는 무수한 생명들이 있었다. 콜레라로 죽어가는 빈민층. 바이엘의 약을 기다리는 관료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 속에는 이제 방향이 있었다. 슈미트의 기억 속에 있는 정보들이 조직되고 있었다. 바이엘의 조선 지사. 명동의 사무실. 지하실의 금고. 비밀번호 1895.

그리고 또 다른 것들. 약물 공정의 결함. 정부 관료 명단의 위치. 유통 네트워크의 약점들.

이준호는 깨달았다. 이 정보들을 사용하면, 조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하려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이준호인가, 슈미트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박의령은 이준호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 표정 속에는 혼란과 결연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두 개의 의식이 한 얼굴 위에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넌 아직 선택할 시간이 있다."

박의령이 말했다.

"선택이요?"

"그 기억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박의령이 말했다.

"받아들이면, 넌 더 이상 이준호가 아닐 것이다. 거부하면, 그 기억들이 너를 미치게 할 것이다."

박의령의 말이 진실이었다. 이준호는 이미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뇌 속에서 두 개의 의식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그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나요?"

이준호가 물었다.

"그럼 넌 살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자로서."

박의령이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박의령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비통함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미 그 길을 가본 사람처럼.

이준호는 선택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선택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미 기억들이 자신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이제 거의 떨리지 않았다. 대신 손 전체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이 자신의 팔에 붙어 있는 것처럼.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박의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작하자."

박의령이 말했다.

"그 처방전을 완성시키고, 그 약을 만들어라."

"네."

이준호가 대답했다.

밤은 더 깊어갔다. 진료소 안에는 죽은 독일인과 변해버린 제자, 그리고 그 변화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 스승만 남았다.

슈미트의 시신은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다. 이준호의 뇌 속으로. 그리고 그 기억은 이제 조선을 움직일 무기가 되려 하고 있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 손은 이제 누군가의 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도구였다. 하지만 도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이것이 누구의 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박의령은 이준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마치 자신도 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밤이 더 깊어갔다. 진료소의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야경 속에는 무수한 생명들이 있었다. 콜레라로 죽어가는 빈민층. 바이엘의 약을 기다리는 관료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

그리고 명동의 어느 건물 지하. 철제 금고 안에는 바이엘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었다. 비밀번호 1895. 누군가가 그것을 열 때까지, 그 비밀들은 안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준호는 슈미트의 기억 속에서 그 금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명동. 바이엘 조선 지사. 지하실. 철제 금고. 그 안에는 정부 관료 매수 명단, 약물 공정의 결함, 유통 네트워크의 약점들. 모든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열 수 있는 자가 있었다.

이준호였다. 아니, 이준호가 아니었다. 슈미트였다. 아니, 슈미트도 아니었다.

둘 다였다.

이준호는 그 모순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