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죽음의 냄새는 자신도 모르게 배어든다.
이준호는 진료소 문을 열며 그것을 느꼈다. 아침 햇빛이 남촌 골목을 비추자, 어제 밤사이 누적된 것들이 떠올랐다. 오물, 썩은 음식, 그리고 인간의 배설물.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더 깊은 것이었다. 조직이 부패하는 냄새. 장기가 녹아내리는 냄새.
콜레라는 그렇게 온다.
진료소 안은 이미 환자들로 가득했다. 토사물로 범벅된 옷을 입은 노인이 벽에 기댄 채 호흡이 끊어지는 중이었고, 젊은 여인은 몸을 웅크린 채 끈기 있는 액체를 계속 흘리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들어온 그들을 이준호는 하나씩 살펴봤다. 한약을 끓였다. 황기, 감초, 인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처방이었다. 서까래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그는 맥을 짚었고, 혀의 색을 봤고, 소변의 냄새를 맡았다. 모든 것이 같은 신호를 보냈다. 수액 손실. 전해질 붕괴. 3시간 내 사망 가능성 80퍼센트.
아침이 되었을 때 다섯 명이 죽어 있었다.
첫 번째는 밤 열두 시쯤이었다. 노인의 호흡이 얕아지다가 멈췄다. 이준호는 가슴을 눌렀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시간 후 옆에 누워 있던 중년 남자가 경련을 시작했다가 눈동자가 고정됐다. 새벽 세 시, 젊은 여인이 "물이 필요해요"라고 중얼거리다 숨을 거두었다.
그 옆에 있던 아이—아마도 여섯 살 정도—는 어머니의 얼굴을 계속 만지다가 자신도 경련 속에 빠져들었다. 아이의 손이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이준호는 그 손들을 분리할 수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갔다. 새벽 네 시 반, 마지막 환자의 손가락이 시퍼렇게 변했다. 이준호는 자신의 맥박을 확인했다.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 후 더 많은 환자들이 들어왔고, 그들도 같은 방식으로 떠났다.
이제 시신들을 거리로 옮겨야 했다.
이준호는 손수레를 밀고 나갔다. 첫 번째 시신을 싣고, 두 번째를 싣고, 세 번째를 실었다. 수레바퀴가 자갈을 깎는 소리. 남촌 골목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물을 긷는 여인들, 장을 보러 나가는 노인들, 그들의 발길이 멈췄다. 이준호는 그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주칠 자격이 없었다.
"약사님!"
목이 찢어질 듯 울음이 들렸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제 콜레라에 걸린 여인의 딸이 그의 수레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홉 살쯤 되는 소녀였다. 얼굴에는 어제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제 엄마를..."
소녀의 목소리는 끊겼다.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엄마를 살려주세요."
이준호는 수레를 멈췄다. 하지만 멈출 이유가 없었다. 여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수레 위에서. 남촌의 아침 햇빛 아래서.
"약이 없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의 약은 여인의 몸이 필요로 한 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한약은 천천히 작용한다. 하지만 콜레라는 빠르다. 몸 속의 물이 쏟아져나가는 속도보다 어떤 약도 빠를 수 없다.
"다른 약은요?"
소녀가 물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약. 그런 것이 있는가?
골목 어딘가에서 포스터가 펄럭였다. 이준호는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서울 곳곳에 붙어 있었다. 큰 글씨로 적힌 문구를 소녀도 읽을 수 있었다.
"독일 바이엘 신약 - 콜레라 특효약, 조선 정부 공식 인정."
가격은 쌀 한 가마 값이었다. 남촌의 대부분 가정이 한 달에 벌어들이는 액수.
소녀의 목이 떨렸다.
"그 약은요?"
"비싸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넌 엄마를 위해 그걸 살 수 없었을 거야."
"그럼 약사님은?"
소녀의 눈이 그를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작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약사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약사는 약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준호는 입을 열려 했다가 다시 닫았다. 자신이 가진 약은 무엇인가? 2000년 전 의학 경전에 기록된 처방. 경험과 직관의 축적. 하지만 과학이 아니었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이엘의 약처럼 공식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수레를 다시 밀기 시작했다.
소녀의 울음소리는 골목을 따라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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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령은 이준호를 보자 한숨을 쉬었다.
스승의 약국은 남촌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었다. 서까래는 검게 그을려 있었고, 약장의 나무는 손때로 반들거렸다. 반세기를 이 자리에서 약을 달여온 노인은 제자의 얼굴을 읽는 데 능했다.
"또 잃었나?"
"다섯 명입니다."
이준호는 박의령 앞의 낮은 상 위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은 말을 하지 않고 찻잔만 내밀었다. 따뜻한 보리차였다. 이준호는 마실 수 없었다. 손이 떨렸다.
"한약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처방을 아무리 정교하게 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박의령은 창밖을 바라봤다. 남촌의 골목이 보였다.
"그렇지."
노인이 중얼거렸다. "우리의 약은 예방의 약이다. 이미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약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준호가 물었다. "무너진 것을 세울 수 있는 약이 있습니까?"
박의령은 자신의 약장으로 걸어갔다. 나무로 만든 서랍이 백 개는 넘었다. 각각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인삼, 황기, 감초. 같은 이름도 여러 개였다. 같은 약초라도 산지에 따라, 수확 시기에 따라, 보관 방식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박의령은 그 중 가장 위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종이 묶음이 들어 있었다. 낡은 종이였다. 글씨는 손으로 직접 쓴 것이었고, 세로로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보거라."
박의령이 종이를 펼쳤다. 처방전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한약 처방이 아니었다. 약초의 이름 옆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무게. 비율. 그리고 그 아래에는 낯선 글씨가 있었다. 한글이 아니었다. 라틴 문자. 아니면 그리스 문자. 그 옆에는 화학식으로 보이는 기호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H₂O. NaCl. 그리고 더 복잡한 분자식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준호가 물었다.
"백 년 전 어느 의관이 남긴 기록이다."
박의령이 대답했다. "그는 서학(西學)에 빠져 있었고, 한약을 서양의 화학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미친 짓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했다."
박의령은 종이의 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것을 완성시킬 자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노인의 손가락이 그 다음 글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박의령은 그것을 읽지 않았다. 마치 그 글귀를 발설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처럼.
이준호는 그 숨겨진 문장을 읽으려 했다. 종이에 가까이 다가갔다. 글자들이 보였다. '그는 미쳤다'인가, '그는 죽었다'인가. 손가락이 그 글귀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박의령이 종이를 접었다.
"더 좋은 약이 있다면?"
이준호가 물었다.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동양의 약초에 서양의 방법을 더한다면?"
박의령은 웃음을 흘렸다. 슬픈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약을 만들겠는가? 조정은 서학을 금지했고, 한의들은 보수에 갇혀 있다. 서양 의사들은 우리의 약초를 무시한다. 그 사이에..."
박의령의 눈이 창밖을 향했다. 남촌의 골목. 그곳에서 오늘도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환자들은 계속 죽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구할 수 없다."
박의령은 제자를 바라봤다. 이준호의 눈을 직접 마주쳤다.
"하지만 넌 달라야 한다. 넌 더 멀리 봐야 한다. 이 책들이 말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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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는 진료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골목을 더 깊이 걸어갔다. 콜레라 환자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죽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이미 늦었다. 하지만 계속 걸었다. 의무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멈출 수 없었다.
골목 안쪽. 음지진 곳.
이준호는 누군가의 신음을 들었다.
그것은 조선인의 신음이 아니었다. 악센트가 다르게 섞여 있었다. 이준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웅크린 인물을 발견했다. 서양 옷을 입은 남자였다. 피부는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고열.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콜레라였다.
이준호는 그 남자에게 가까이 갔다. 서양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오십 정도.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임사 상태. 아마도 3시간 이내에 사망할 것이다.
"누구십니까?"
이준호가 물었다. 서양인은 입술을 움직였다. 독일어가 흘러나왔다.
"한스... 슈미트..."
이준호는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했다.
이준호는 그 남자를 진료소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무거웠다. 이준호는 한스 슈미트를 업었다. 남자의 팔이 이준호의 목 주위로 감겼다. 피부 온도가 높았다. 고열이 얼마나 심한지 이준호도 느낄 수 있었다. 슈미트의 입에서 계속 말이 흘러나왔다. 독일어. 이준호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구절은 계속 반복되었다.
"바이엘... 바이엘은..."
슈미트가 중얼거렸다.
"...단순한 회사가 아니다. 그곳은 국가다. 우리의 국가다. 그들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절박함과 두려움만은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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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소 침상에 슈미트를 누였다.
콜레라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슈미트의 몸은 이미 수액을 잃고 있었고, 피부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의료 용어로는 '건포도 손가락'이라고 부르는 증상이었다. 임사 상태의 가장 명확한 신호.
이준호는 한약을 끓였다. 황기, 감초, 인삼. 같은 처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할 것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약이 없었다.
슈미트의 눈이 떠졌다. 초점 없는 눈이었다.
"당신은?"
슈미트가 한글로 물었다. 억양이 어색했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한의사입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당신을 도우려고 합니다."
슈미트는 웃음을 흘렸다. 건조한 웃음이었다.
"한의사? 한약?"
슈미트가 중얼거렸다. "그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시도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슈미트는 다시 침상에 누웠다. 이준호는 한약을 천천히 입에 흘려보냈다. 슈미트는 삼켰다. 그리고 경련을 시작했다.
경련 속에서 슈미트는 계속 말을 했다. 독일어. 라틴어. 숫자. 화학식. 이준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귀로는 들었다. 모든 것을 들었다.
슈미트의 입술이 파래졌다. 손가락도. 발도. 콜레라는 혈관을 수축시킨다. 산소가 말단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조직이 죽는다.
"물이..."
슈미트가 중얼거렸다.
이준호는 물을 주었다. 슈미트는 마신 후 다시 경련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이준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슈미트의 호흡이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맥박도 약해지고 있었다. 임사 상태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준호는 슈미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누가... 누군가 이것을 완성해야 한다."
슈미트가 중얼거렸다. 한글이 아니었다. 독일어였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 톤에서 절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은... 조선인이다."
슈미트의 눈이 이준호를 찾았다. 초점을 잃은 눈이 순간 선명해졌다.
"우리는 이 땅을 정복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너희들은 이 땅을 사랑한다."
슈미트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그래서 너희들이 해야 한다."
"무엇을?"
이준호가 물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한 것을... 역으로 한다."
슈미트가 말했다. 눈빛이 다시 흐려졌다.
"우리의 것을... 너희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를... 이 땅에서... 제거한다."
슈미트의 손이 이준호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제국의 카르텔을... 부수어라. 바이엘을... 그들의 진짜 정체를 알아라. 그것만이... 너희가 살 길이다."
슈미트의 눈이 감겼다. 호흡이 더욱 얕아졌다.
이준호는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슈미트의 손이 이준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강하게 잡혔다. 마지막 힘으로.
그 순간이 왔다.
이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침상 천장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손가락이 펼쳐졌다가 오므려졌다. 다시 펼쳐졌다. 45도 각도. 0.1밀리리터. 마치 무언가를 정확히 계량하는 것처럼.
피펫. 유리 피펫.
이준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은 알고 있었다. 손가락은 정확한 각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각도. 정확히 45도. 정확히 0.1밀리리터.
"아니다."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아니었다.
"이것이 일어나고 있다."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슈미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슈미트는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손이 여전히 이준호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죽음의 색이었다. 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슈미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반쯤 감긴 눈. 그 눈이 갑자기 떠졌다.
"이제 시작이다."
슈미트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하지만 슈미트는 죽어 있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은 이준호의 귀에 직접 들리는 것이었다. 뇌에 직접 전달되는 것이었다.
"너는 이제 나다."
이준호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신체가 더 이상 자신의 신체가 아니었다.
"아니다. 너는 여전히 너다."
슈미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더 명확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너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우리는... 둘이다."
이준호의 뇌에 이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라인 강. 독일의 약국. 젊은 슈미트가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다. 페트리 접시 위의 박테리아. 노란색의 콜로니. 그것을 죽이는 화학식. 황산. 질산. 염화나트륨. 그리고 그 조합이 만드는 새로운 분자. 새로운 화학물.
한 방울.
정확한 한 방울.
그리고 박테리아가 죽는다.
이준호는 그것을 본다. 마치 자신이 그것을 본 것처럼. 자신이 그 실험을 수행한 것처럼. 하지만 손은 조선인의 손이었다. 얼굴은 조선인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기억은 독일인의 기억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힘이다."
슈미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너의 힘이다. 우리의 힘이다."
이준호는 저항하려 했다. 자신의 이름을 생각했다. 이준호.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다.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슈미트의 어머니. 라인 강 옆의 집. 슈미트가 어린 시절 그곳에서 화학 실험을 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허락했다. 미래의 약사를 위해.
이준호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자신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만해."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손이 약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손이 약병을 집으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손가락이 그것을 누른다. 이준호의 손가락인가, 슈미트의 손가락인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멈출 수 없다."
슈미트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너는 이미 변하고 있다. 너의 손은 이미 알고 있다. 너의 눈은 이미 본다. 너의 뇌는 이미 이해한다. 3분 30초. 정확히 그 시간이 지나면 너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
이준호는 침상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신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손이 슈미트의 손을 놓았다. 그 손이 이제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아니, 자신의 손이 맞는데,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그것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호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이준호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슈미트가 이준호의 신체를 통해 일어난 것이었다.
이준호는 거울을 찾았다. 진료소 한구석에 있는 낡은 거울. 그것을 보려고 했다.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것은 누구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이 달랐다. 그 눈은 이준호의 눈이 아니었다.
그 눈은 슈미트의 눈이었다.
"내가 누구지?"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의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다."
슈미트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준호의 입에서 나왔다.
진료소의 문이 열렸다. 소녀가 들어왔다. 어제의 소녀였다. 자신의 어머니의 시신을 거리에서 본 그 소녀였다.
"약사님!"
소녀가 불렀다.
이준호의 몸이 움직였다. 손이 약장을 향해 움직인다. 발이 소녀를 향해 간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것이 그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이 약병을 집으려고 한다. 정확하게. 마치 피펫을 잡는 것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소녀가 물었다.
이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소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준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슈미트의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소녀의 신체. 소녀의 맥박. 소녀의 혈관 속 혈액의 유속. 소녀의 피부에 침투할 수 있는 약물의 농도. 그 모든 것이 계산되고 있었다.
손이 약장으로 향했다. 약병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약이 아니었다. 화학 약물이었다. 슈미트가 알고 있는 약물이었다. 이준호도 이제 알고 있는 약물이었다. 손가락이 약병을 집었다. 정확하게.
"약을 가져왔습니까?"
이준호의 입에서 슈미트의 목소리가 물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손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약장을 열고, 약병을 집고, 소녀를 향해 내밀고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이준호의 손이 약병을 더 높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준호의 손인가, 슈미트의 손인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한 손가락이 약병을 놓으려고 하지만, 다른 손가락이 그것을 누른다. 내적 투쟁. 신체 내부의 전쟁.
"당신은?"
소녀가 다시 물었다.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두 개의 이름이 충돌했다. 이준호와 슈미트. 이준호와 한스. 이준호와 누군가. 누군가 다른 것.
약병이 소녀를 향해 들려졌다. 손이 떨렸다. 한 손가락이 약병을 놓으려고 하지만, 다른 손가락이 그것을 누른다. 계속 누른다.
"약사입니다."
마침내 입에서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대답인지, 누가 말하는 것인지, 이준호는 알 수 없었다.
약병이 소녀를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손가락이 약병을 놓으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손가락이 그것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