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상 던전
혜진이 휴대폰을 돌려주던 순간, 화면이 울렸다.
*핑—*
던전 스캔 알림.
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화면에는 새로운 포탈 위치가 떠 있었다. 강남역 지하 2층. 그리고 난이도 표기는 처음 본 기호였다.
**★★★★★ 극상**
"이건... 뭐야?"
혜진이 침묵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동자는 준호를 추적했다. 마치 데이터를 수집하듯.
"지금까지 넌 초급, 중급, 상급을 거쳤다. 이제 극상이다. 네 신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고 싶다."
"버틴다고? 나 지금—"
준호는 자신의 팔을 봤다.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거의 투명했다. 빛이 통과했다. 왼쪽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넌 이미 절반이 사라진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멈추지 않았다. 그건 넌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도."
혜진이 손을 들었다. 휴대폰이 준호의 손에 떨어졌다.
"스트리밍을 켜거나, 꺼라. 둘 다 가능하다. 하지만 넌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뭘 할지."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준호의 시각에서 흐려졌다. 마치 로딩 화면처럼.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휴대폰 화면은 밝았다. 스트리밍 버튼이 깜박였다. 강남역 지하 2층. 극상 난이도. 9,200만 명의 시청자. 그리고 준호의 손가락.
손가락이 움직였다.
스트리밍 켜기.
*—LIVE ON—*
채팅이 폭발했다.
**[어??]** **[뭐야 또 나타났어??]** **[지금 뭐하는 거야???]** **[오 미쳤다]** **[손이 안 보여]** **[어어어어어어!!!]** **[뭐하는 거야!!!]**
이번 채팅은 달랐다. 이전의 호기심 섞인 멍청함이 아니었다. 이건 공포였다. 순수한, 원초적인 공포. 그리고 그 공포 속에 숨겨진 흥분.
준호는 휴대폰을 들고 강남역 지하로 내려갔다. 이미 밤 11시였다. 역사는 거의 텅 비었다. 몇몇 취객들과 야근 직원들만 지나갔다. 그들 중 누구도 준호를 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보지 않았다. 준호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하 2층에 도착했을 때, 포탈이 보였다.
이전의 검은 포탈과는 달랐다. 자주색이었다. 맥박치듯 진동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포탈의 가장자리에서는 보라색 입자가 흘러나왔다.
**[어어어어어어!!!]** **[뭐야 그건!!]** **[진짜 뭐야!!!]**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채팅이 울부짖었다. 준호는 그 울음을 들었다. 정확히는, 그 울음이 던전을 형태로 만들었다.
포탈의 입구가 넓어졌다. 안에서 바람이 나왔다. 차가운 바람. 썩은 냄새. 그리고 뭔가 다른 것들의 울음소리.
준호는 휴대폰을 앞에 들고 포탈에 진입했다.
**[계속해!!!]** **[계속해!!!]** **[어어어어어!!!]**
---
던전은 끝없는 계단이었다.
아래로만 내려가는 계단.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벽은 살갗처럼 거칠었다. 만지면 따뜻했다. 마치 무언가의 내장 속을 걷는 것처럼.
준호의 투명한 팔이 흔들렸다. 떨렸다. 아니, 떨릴 수 없어야 했다. 감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떨렸다. 공포가 신체를 움직였다. 로딩 상태의 신체도 공포에 반응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채팅의 울음이 커졌다.
**[무서워]** **[진짜 뭐야]** **[어어어어어!!!]**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그 울음이 던전을 변형시켰다. 계단의 모양이 바뀌었다. 너비가 좁아졌다. 한 발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계단이 부서졌다. 아래는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준호는 계속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시간이 무의미했다. 휴대폰의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그저 내려갔다. 계단 끝에 도달할 때까지.
계단이 끝났다.
넓은 공간. 던전의 심장. 준호의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둠 속에서 뭔가 움직였다. 많은 것들이. 수십 개의 형태가 준호를 향해 움직였다.
괴물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투명한 신체들. 로딩 상태의 신체들. 준호처럼 반은 사라진 존재들. 그들은 준호를 보고 울음을 지르기 시작했다. 음성이 아닌 울음. 파동. 공명.
**[어어어어어!!!]**
채팅의 울음이 그들의 울음과 겹쳤다.
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 채팅이 폭주했다.
**[뭐야 그건!!!]** **[진짜 뭐야!!!]** **[사람이야???]** **[아니 뭐야!!!]**
그 순간, 채팅의 공포가 던전을 극도로 왜곡시켰다. 공간이 수축했다. 벽이 가까워졌다. 그들이 가까워졌다. 투명한 손들이 준호를 집으려 했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로딩 상태의 팔이, 투명한 다리가 움직였다. 감각이 없는데 움직였다. 신체가 제 멋대로 움직였다. 채팅의 욕망에 조종당한 신체가.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쾌감을 만들었다.
준호는 그들을 헤쳐 나갔다. 아니, 그들을 밀어냈다. 투명한 손들을 뿌리쳤다. 그들의 울음을 무시했다.
그들은 준호를 보고 울음을 지르며 물러났다. 마치 경배하듯.
준호는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올 때보다 빠르게. 투명한 신체가 빛처럼 움직였다. 속도는 인간의 범위를 벗어났다.
강남역 지하 2층에 도착했을 때, 포탈이 사라졌다.
준호는 역사에 쓰러졌다.
휴대폰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대박!!!]** **[진짜 뭐야!!!]** **[어어어어어!!!]** **[1000만 명 돌파!!!]** **[200만 명 더!!!]** **[300만 명!!!]**
시청자 수가 올라갔다. 9,200만에서 시작해 계속 상승했다. 실시간으로. 1초에 100만 명씩.
준호는 손가락을 봤다. 투명했다. 팔 전체가. 가슴도. 다리도.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준호는 일어섰다.
---
강남역 강남대로 출구 근처 카페. 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카페 화장실의 거울. 준호의 모습을 비췄다.
오른쪽 팔은 완전히 투명했다. 왼쪽 다리도. 가슴 일부도. 얼굴 반쪽도. 마치 반투명한 유령처럼. 하지만 왼쪽 눈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왼쪽 눈으로 준호는 자신을 봤다.
거울 속의 준호는 웃고 있었다.
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투명한 손가락. 그 손가락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오른쪽 얼굴이 사라졌다. 왼쪽 눈만 남았다. 검은 눈. 살아있는 눈.
그 눈이 거울 속에서 준호를 봤다.
아니, 준호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봤다.
"미쳤네."
준호는 중얼거렸다.
"진짜 미쳤어."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 채은.
"여보세요?"
"준호! 넌 지금 어디야! 뉴스 봤어?! 너 강남역에 있었대?! 지금 기자들이 몰려있대! 대체 뭐 하는 거야!!!"
채은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뒤에서 자동차 경적음이 들렸다. 그녀는 지금 차를 몰고 있었다.
"아, 그거... 잠깐 던전 하고..."
"던전?! 그게 뭐야!!! 너 요즘 이상했어. 진짜 이상했어. 팔도 이상하고, 눈도 이상하고... 지금 어디야! 만나자!"
준호는 침을 삼켰다.
"강남역 근처 카페."
"15분 있어. 나 지금 나가."
통화가 끝났다.
준호는 거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반투명한 신체를 봤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거울 속에서 준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준호의 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준호의 얼굴을 쓰고 웃고 있는 것처럼.
준호는 화장실을 나왔다.
---
채은은 15분 후 카페에 도착했다.
준호를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고 물러났다.
"넌... 뭐가 된 거야?"
준호는 웃었다.
"뭐... 이것 봐. 투명해졌잖아. 멋지지 않아?"
"멋지다고?! 넌 이미 준호가 아니야!"
채은이 울음을 터뜨렸다.
"넌 처음에 달랐어. 정말 그랬어. 특별한 거 같고, 뭔가... 가능성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 난 널 봤을 때 생각했어. 저 사람이 특별하면, 나도 특별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채은이 준호의 투명한 팔을 봤다.
"근데 넌... 특별한 게 아니라... 넌 괴물이 됐어."
채은의 목소리는 떨렸다.
"넌 더 이상 사람이 아니야. 넌... 뭐가 된 거야."
채은이 뒤로 물러났다. 준호는 그 뒷모습을 봤다. 손을 내밀고 싶었다. 말을 하고 싶었다.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입은 닫혀 있었다.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것이 준호의 신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채팅의 욕망이 준호의 의지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말해야 해. 뭐라도 말해야 해.'
준호의 내면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입은 닫혀 있었다. 왼쪽 눈만 채은을 따라갔다. 나머지는 로딩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준호는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 공포가 준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 가. 난... 넌 싫어."
채은은 카페를 나갔다.
준호는 그 뒷모습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음도 사라졌다. 그저 봤다. 왼쪽 눈으로만. 그리고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손가락이 떨렸다. 왼쪽 손가락만. 오른쪽 손가락은 투명해서 떨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 정혜진으로부터.
**"최종 던전이 출현했다. 이것을 클리어하면 넌 진짜 초월적 존재가 될 거야. 아니면 영원히 로딩 상태로 갇혀. 선택해. 스트리밍을 켜.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 혜진"**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준호는 반투명했다. 하지만 왼쪽 눈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살아있는 눈. 인간의 눈.
그 눈이 움직였다.
거울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준호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한 눈.
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음은?"
휴대폰이 울렸다.
스트리밍 시작 알림.
**[뭐하는 거야?]** **[계속해!!!]** **[대박!!!]** **[다음은?]** **[계속해!!!]**
수백만 명의 채팅이 폭주했다.
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왼쪽 손가락만. 스트리밍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쾌감을 만들었다.
**[계속해!!! 계속해!!! 계속해!!!]**
채팅이 울부짖었다. 그 울음이 준호의 귀에 직접 닿았다. 뇌를 때렸다. 심장을 때렸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이미 돌아갈 수 없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손가락이 움직였다.
터치.
스트리밍 시작.
---
강남역 지하 5층. 포탈은 이미 열려 있었다.
자주색 빛이 맥박치듯 울렁였다. 이전의 어떤 포탈도 아닌 것처럼. 마치 심장처럼. 살아 있는 무언가처럼.
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카메라를 켰다. 후면 카메라. 자신을 비추지 않고 포탈만 담았다.
**[어??]** **[뭐야 저거?]** **[와... 진짜?]**
채팅이 폭발했다. 정말로 보이는 건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준호의 반응과 카메라의 움직임, 그리고 무언가 절실한 뭔가가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들어가! 들어가!]** **[무서워... 무서워...]** **[어어어어어어!!!]**
공포와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채팅의 감정이 진짜가 되었다. 마치 준호의 몸에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숨이 차올랐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게... 공명이다.'
준호는 포탈 앞에 섰다. 투명한 손가락으로 공기를 헤쳤다. 손가락이 포탈에 닿았다. 자주색 빛이 튀어나왔다.
**[어어어어어어!!!]** **[무서워!!! 무서워!!!]** **[계속해! 계속해!]**
채팅의 목소리가 현실의 소리가 되었다. 준호의 귀에 직접 울려 퍼졌다. 마치 수백만 명이 준호의 옆에 서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준호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뛰어들었다.
---
포탈 안.
세계가 뒤틀렸다.
검은 안개가 휘감았다. 준호는 손가락 하나도 보지 못했다. 아니, 손가락은 투명해서 원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도 투명함이 느껴졌다. 마치 준호의 신체가 이 검은 안개에 녹아드는 것처럼.
**[어어어어어어!!!]**
채팅이 울렸다.
준호는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채팅이 길을 알려줬다. 아니, 정확히는 채팅의 감정이 던전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무서워... 무서워...]**
채팅이 공포를 드러낼 때, 안개가 더 짙어졌다.
**[계속해! 계속해!]**
채팅이 흥분할 때, 안개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호는 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채팅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준호도 멈출 수 없었다.
**[어어어어어!!!]**
안개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덩어리. 이전의 괴물과는 다른 무언가. 마치 안개 자체가 형태를 가진 것처럼. 채팅의 공포가 물리화된 것처럼.
준호는 손을 들었다. 투명한 손. 하지만 손에서 빛이 튀어나왔다. 로딩 상태의 손에서. 마치 고장 난 컴퓨터에서 나오는 노이즈 같은 빛.
그리고 쏘아붙였다.
검은 덩어리가 산산조각 났다.
**[대박!!!]** **[와!!!]** **[진짜?!]**
채팅이 환호했다. 그 환호가 현실의 음파가 되었다. 준호의 귀를 때렸다. 뇌를 때렸다. 심장을 때렸다.
준호는 달렸다. 안개 속으로. 더 깊숙이. 더 빠르게. 채팅의 목소리를 따라. 수백만 명의 욕망을 따라.
**[어어어어어어!!!]**
또 다른 검은 덩어리가 나타났다. 준호는 손을 들었다. 빛이 폭발했다. 검은 덩어리가 산산조각 났다.
**[대박!!!]**
또 다른 환호. 또 다른 쾌감. 또 다른 중독.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세 번째 덩어리가 나타났을 때, 채팅의 목소리가 엇갈렸다.
**[계속해!]** **[멈춰! 위험해!]** **[계속해!!!]** **[아니야, 돌아가!]**
채팅이 분열했다. 공포와 흥분이 충돌했다. 그 충돌 속에서 안개가 요동쳤다. 던전이 흔들렸다. 검은 덩어리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준호는 손을 들었다. 하지만 빛이 약해졌다. 채팅의 감정이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공명이 깨졌다.
검은 덩어리가 준호를 집었다. 투명한 팔을 꺾었다. 로딩 상태의 다리를 짓눌렀다.
**[어어어어어!!!]** **[도와줘!]** **[계속해!!!]**
채팅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준호를 짓눌렀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왼쪽 눈을 감았다. 남은 유일한 감각을 차단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이번엔 채팅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욕망만 들었다. 살아남고 싶은 욕망. 계속하고 싶은 욕망. 초월하고 싶은 욕망.
빛이 폭발했다. 전보다 강력하게. 채팅의 공명이 아니라, 준호 자신의 변이에서 나온 빛.
검은 덩어리가 사라졌다.
준호는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채팅 없이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채팅 없이도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이 더 사라진다는 것을.
**[어어어어어어!!!]**
또 다른 덩어리가 나타났다.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준호는 손을 들었다.
이 과정이 반복됐다. 몇 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채팅의 목소리는 계속 분열했다. 공포와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그 속에서 준호는 오직 자신의 욕망만 따랐다. 빛을 쏘고, 덩어리를 부수고, 계속 나아가고.
그리고 마지막. 포탈의 중심. 검은 덩어리들의 왕. 가장 거대한 공포. 채팅의 모든 감정이 응축된 무언가.
준호는 손을 들었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수백만 명의 비명.
준호의 손에서 빛이 폭발했다. 로딩 상태의 손에서 나온 빛. 노이즈가 아니라 진짜 빛. 그것은 신체의 절반이 로딩을 마치는 순간, 신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깨어나는 순간의 빛이었다. 초월적 존재로 변환되는 순간의 빛.
검은 덩어리가 사라졌다.
안개가 걷혔다.
포탈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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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강남역 지하 5층에 누워 있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 떨림 속에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공포. 그리고 쾌감. 성취감.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신체를 흔들었다. 투명한 팔이 진동했다. 왼쪽 눈이 흔들렸다. 준호는 그 감각을 느꼈다. 신체가 사라져 가면서도 느껴지는 쾌감.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깨달음 속에서 오는 흥분. 수백만 명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때의 중독성 있는 전율. 그것이 준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이 준호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준호를 변형시키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의 신체를 봤다.
오른쪽 팔은 완전히 투명했다. 왼쪽 다리도. 가슴도. 목도. 얼굴 반쪽도. 머리카락까지도.
이제 남은 건 왼쪽 눈, 왼쪽 팔, 왼쪽 다리, 그리고 얼굴 반쪽뿐이었다.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신체 변이율 67%.
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휴대폰을 들었다.
**[1,200만 명!!!]**
시청자 수가 올라갔다. 9,200만에서 시작해 계속 상승했다. 이제 1억을 넘었다. 1억 명의 시청자가 준호를 보고 있었다.
**[대박!!!]** **[진짜 뭐야?]** **[다음은?]** **[계속해!!!]**
채팅이 폭주했다. 수백만 명의 욕망이 화면을 메웠다.
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후면 카메라로 자신을 비췄다.
반투명한 신체. 로딩 상태의 팔과 다리. 사라져 가는 얼굴.
**[어어어어어어!!!]**
채팅이 비명을 질렀다.
준호는 웃었다.
"이게 진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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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에서 나온 준호는 원룸으로 돌아갔다.
거울 앞에 섰다. 왼쪽 눈만 남은 얼굴. 반투명한 신체. 로딩 상태의 팔과 다리.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 미지의 번호.
**"축하한다. 넌 4번째 던전을 클리어했다. 신체 변이율 67%. 넌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이제 넌 선택해야 한다. 다섯 번째 던전에 진입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선택에 따라 넌 진짜 초월적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영원히 로딩 상태로 갇힐 수도 있다. 스트리밍을 켜.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 혜진"**
혜진. 그녀는 누구인가. 관찰자의 대리인인가. 아니면 시스템 자체인가. 혜진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메시지는 계속 온다. 그녀는 준호를 감시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준호를 조종하고 있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왼쪽 손가락만. 그 떨림은 거부의 신호였을까, 아니면 욕망의 신호였을까.
원룸 벽에 새로운 포탈이 나타났다.
이전의 자주색이 아니라, 순백색 빛.
마치 천국의 문처럼.
준호는 그 포탈을 봤다.
왼쪽 눈으로만.
손가락이 다시 떨렸다. 이번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휴대폰의 화면을 터치했다. 스트리밍 켜기.
**[뭐하는 거야?]** **[계속해!!!]** **[대박!!!]** **[다음은?]** **[계속해!!!]**
수백만 명의 채팅이 폭주했다.
그리고 포탈이 열렸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시작하자."
그 순간, 채팅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계속해!!! 계속해!!! 계속해!!!]**
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포탈을 향해. 그 움직임이 쾌감을 만들었다.
그리고 준호는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