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5층 포탈 앞에서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거의 투명해진 손가락이 공중을 헤맸다. 화면 속 채팅창은 폭주했다.
[빨리 들어가!!!] [뭐 기다려!!! 진입해!!!!] [847만 명이 기다리고 있어!!!!]
준호의 입가에 웃음이 떴다. 그 순간, 누군가 손을 잡았다.
"들어가지 마."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스튜디오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얼굴. 검은 안경, 회색 후드티.
"너 누구야?" 준호가 물었다.
"스트리밍 끝내."
남자는 준호의 투명한 팔을 가리켰다.
"그거 봤어? 저게 너의 끝이야. 매번 들어갈 때마다 널 갉아먹고 있어. 아직 되돌릴 수 있어. 지금 스트리밍을 끄면."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채팅은 멈추지 않았다.
[누구야 저 사람???] [스트리밍 방해하냐!!!] [경찰이야??]
"누가 왔어?" 준호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 전에 이거 먼저 봐."
남자가 준호의 손에 작은 USB를 밀어줬다.
"뭐야 이거?"
"너 전에 있던 사람들이야. 너처럼 던전을 봤던 놈들."
준호는 USB를 들었다. 손가락이 거의 투명해서 제대로 잡기가 힘들었다. 그 순간, 채팅이 다시 폭주했다.
[뭐 든 거야!!!] [스트리밍 보여줘!!!] [USB 뭐가 들어있어!!!]
준호는 휴대폰 카메라를 USB에 향했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카메라 앞에서 USB가 회전했다. 화면에 얼굴들이 떠올랐다. 태희, 준호, 이준영, 박준호. 그들의 이름 옆에는 마지막 스트리밍 기록이 표시되었다. 모두 '종료'라고 되어 있었다.
"저건 넌 봐선 안 돼."
남자가 다시 움직였다. 준호는 이미 뒤로 물러났다. 스튜디오 구석으로.
"너 누구야? 진짜로."
준호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저 사람이 뭐하는 거야!!!] [준호 조심해!!!] [싸움 붙어!!!]
"이름은 도현. 넥서스 추적 담당."
도현이 안경을 벗었다.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이 남자는 던전 안에서 자신을 만났던 사람이다. 강남역 지하 4층에서. 그때는 목소리만 들었는데.
"너 그때..."
"그래. 널 경고했어. 계속하면 죽는다고."
도현이 한 발 더 다가왔다.
"근데 넌 계속했지. 넌 뭐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 태희?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어. 준호? 아니, 그것도 그렇게. 다들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준호, 이준영, 박준호... 다들 자기가 다르다고 했어. 근데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다 사라졌어."
도현은 USB의 화면을 켰다. 모니터에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태희, 준호, 이준영, 박준호. 그들의 이름과 함께 마지막 스트리밍 기록이 표시되었다. 모두 '종료'라고 되어 있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저 사람들은 진짜로 사라진 거다.
"스트리밍 끝내. 진짜로. 아직 살 수 있어."
도현이 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준호!"
채은이 들어왔다. 그 뒤로 수십 대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보였다. 기자들이었다.
"이 사람이 누구예요?"
채은이 도현을 가리켰다.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어딘가 어색했다. 도현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이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현이 떠나기 전에, 채팅의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준호는 USB를 들었고, 카메라에 비췄다. 자신이 의도한 것이 맞나?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건 아닌가?
[빨리 보여줘!!!] [저게 뭐야!!!] [준호 뭐하는 거야!!!]
준호는 카메라를 들고 도현 쪽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도현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도현을 향해 마이크를 들이댔다.
"이 분이 누구신가요?"
"저희 촬영 중이니까 나가 주세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도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준호는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채은이 팔을 잡았다.
"준호, 뭐 하는 거야?"
준호는 채은의 손을 뿌리쳤다.
[준호 멋있어!!!] [저 남자를 쫓아내 줬어!!!] [우리 준호 최고!!!]
채팅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제야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뭘 한 건지. 도현을 쫓아낸 게 아니라, 채팅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채은은 자신을 도와준 게 아니라, 도현을 막은 것이다. 채은의 표정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그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대박... 이게 뭐야..."
기자 중 한 명이 준호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이준호 님, 정말 던전을 보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초능력이 있으신 건가요?"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채팅은 여전히 폭주하고 있었다.
[기자들이 왔어!!!] [뉴스에 나올 거야!!!] [준호 대박이야!!!]
그 밤, 준호는 스튜디오 사장에게 끌려갔다. 강남역 지하 1층의 카페로.
"이제 넌 유명해졌어. 근데 조심해야 할 것도 많아. 이런 일이 또 있으면 미리 연락해."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강남역 지하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입구에 검은 포탈이 보였다.
휴대폰을 들었다. 던전 스캔 시스템이 울렸다.
[새로운 던전 감지: 강남역 지하 4층] [난이도: ★★★★★]
그 아래, 또 다른 메시지가 떴다.
[시스템 메시지: 이전 사용자 최재욱을 만나시겠습니까?]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전 사용자? 도현이 말했던 그 사라진 사람들 중 한 명?
[만난다] [거절한다]
준호는 [만난다]를 눌렀다. 그 순간, 강남역 지하 2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파란색 포탈이 나타났다. 일반 포탈과는 다른 색깔이었다.
"너 어디 가?"
스튜디오 사장이 물었다.
"화장실."
준호가 일어났다. 투명해진 팔로 가방을 들었다. 팔이 완전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장은 그걸 보고 눈을 떴다.
"너... 손가락이..."
"괜찮아요. 그냥 피곤한 것 같아."
준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란색 포탈 앞에서 멈췄다. 채팅은 여전히 폭주했지만, 이번엔 다른 메시지도 섞여 있었다.
[저 포탈 뭐야?] [준호 어디 가는 거야?] [스트리밍 켜!!!]
준호는 스트리밍을 켜지 않았다. 이번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를 꺼두고, 포탈에 손을 댔다.
손가락이 먼저 포탈에 닿았다. 투명한 손가락이 더 투명해지는 느낌. 마치 손가락이 녹아드는 듯했다. 준호는 팔 전체를 포탈에 집어넣었다. 중력이 이상해졌다. 위아래가 뒤바뀌는 듯한 느낌. 준호는 깊게 숨을 쉬고 몸 전체를 포탈에 밀어넣었다.
그 순간, 세상이 검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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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어두운 지하실 같은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형광등이 몇 개 있었고, 벽에는 수백 개의 모니터가 붙어 있었다. 그 모니터들에는 모두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준호는 가까이 가서 봤다. 각각의 모니터에는 다른 사람들이 던전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거대한 괴물과 맞서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준호처럼 신체의 일부가 투명해져 있었다.
한 모니터의 영상이 끝났다. 검은 화면으로 변했다.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저 사람이 방금 사라진 거다.
"저건 뭐야..."
"이전 사용자들이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돌아봤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는 준호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지만 신체는 거의 완전히 투명했다. 목소리도 기계음처럼 울렸다. 마치 로딩 중인 음성 합성기처럼.
"너... 최재욱?"
"응. 난 이제 직접 던전에 들어갈 수 없어. 능력이 거의 다 사라졌거든. 그래서 여기서 이전 사용자들을 봐. 모니터로.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최재욱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 순간 또 다른 모니터의 영상이 끝났다. 검은 화면. 준호는 그 검은 화면을 바라봤다.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이 저기에 있다는 뜻이었다.
"저 사람들 다 어디서 왔어?"
"너처럼 여기 들어온 거야. 던전을 봤고, 스트리밍했고, 채팅의 지시를 받았어. 그리고 다 사라졌어. 이제 저 영상들만 남았어. 저건... 그들이 존재했다는 증명일 뿐이야."
최재욱의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마치 로봇처럼 담담했다.
"너도 될 거야. 저렇게. 계속 던전에 들어가면."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근데 넌... 왜 여기서 이걸 보고 있어?"
"관찰자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거든. 불완전한 상태로.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고, 완전히 살아있지도 않은. 그리고 날 시켜. 새로운 사용자들을 관찰하라고. 그게 내 역할이야. 넌 그 중에 가장 유망한 사용자야. 채팅 수가 가장 많거든."
최재욱이 가까이 왔다. 그의 투명한 손이 준호의 투명한 손을 잡았다. 손을 맞댈 때 뭔가 전기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그 순간 준호는 느꼈다. 최재욱이 느껴온 모든 것을. 채팅의 압박, 자신의 신체가 사라져 가는 공포, 그리고 그것도 거부할 수 없는 쾌감. 손이 떨렸다.
"너한테 조언해 줄게. 스트리밍을 끝내. 지금이라도. 그럼 이 모든 게 끝날 거야."
"근데 채팅이..."
"채팅은 너를 도와주는 게 아니야. 조종하는 거야. 처음엔 난 그 줄 몰랐어. 나도 넌 같았어. 채팅이 날 도와준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계속했어. 더 많은 던전에 들어갔어. 더 큰 스트리밍을 했어. 그리고..."
최재욱이 자신의 투명한 팔을 들어올렸다.
"이 지경이 됐어. 넥서스는 세상이 던전의 존재를 알면 안 된다고 믿어.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제거해. 그들은 이미 널 알고 있어. 유명한 스트리머니까. 곧 올 거야. 그리고 그때쯤이면 넌..."
최재욱의 손이 더 투명해졌다. 마치 녹아드는 듯.
"채팅이 많을수록, 감정이 강할수록, 넌 더 깊이 들어가. 그리고 끝이야. 완전히 사라져."
준호는 그 팔을 봤다. 마치 유령의 팔처럼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게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투명해진 팔, 사라지는 신체, 그리고 결국 검은 화면.
"그럼 넌... 왜 아직..."
"살아있어? 몰라. 관찰자들의 취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유용하니까일 수도 있고. 어쨌든 난 이미 끝났어. 넌 아직 선택할 수 있어. 스트리밍을 그만 해. 그럼 능력도 사라질 거야. 그리고 넌 다시 평범해질 거야."
"평범함은 싫어."
준호가 말했다. 자신도 놀라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최재욱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 투명한 눈에서 뭔가가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그럼 죽어. 그게 끝이야."
최재욱이 뒤로 물러났다.
"근데 너한테 한 가지 더 말해 줄게. 넥서스라는 조직이 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제거하는 조직. 관찰자들을 알고 있고, 시스템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그들은 세상이 이 모든 게 존재한다는 걸 알면 안 된다고 믿어. 던전이, 능력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래서 우리를 제거해. 넌 이미 유명해졌어. 스트리밍으로. 그래서 그들이 곧 올 거야."
최재욱의 휴대폰에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시간 다 됐어."
최재욱이 일어섰다. 그리고 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넌... 날 좋아해 주던 사람들도 이제 넌 봐야겠지. 채은이. 그 아이."
"채은이가?"
"그 아이도 점점 이상해질 거야. 넌 그 아이를 계속 끌어들일 테니까. 채팅이 원하니까. 처음엔 그 아이가 넌 도와주려고 할 거야. 그 다음엔 넌 이용하려고 할 거야. 그리고 마지막엔..."
최재욱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투명해져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마치 로딩이 완료되어 게임에서 사라진 캐릭터처럼.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모니터 앞에서. 수백 개의 모니터에는 여전히 다른 사용자들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모니터의 영상이 끝났다. 검은 화면으로 변했다.
최재욱의 말이 떠올랐다. 채은이도 이상해질 거야. 자신이 끌어들일 거야. 준호는 그 검은 화면을 바라봤다. 누군가의 마지막이 저기에 있다. 그리고 곧 자신의 마지막도 저기에 있을 거다. 아니, 채은이의 마지막도?
준호는 자신의 선택을 응시했다. 평범함을 거부한 그 순간을.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뭔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손가락뿐 아니라,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을.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그건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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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깨어났을 때, 그곳은 강남역 지하 1층 카페였다. 스튜디오 사장이 옆에 앉아 있었다.
"야, 너 괜찮아? 한 30분을 자고만 있었어."
"어? 30분?"
준호가 휴대폰을 들었다. 시간이 1시간 30분 지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각으로는 훨씬 짧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채팅이 폭주하고 있었다. 스트리밍이 켜진 상태였다. 언제 켜진 거지? 준호는 분명 스트리밍을 껐는데.
[준호 어디 간 거야!!!] [빨리 돌아와!!!] [다음 던전 언제 들어가!!!] [3,500만 명이 기다리고 있어!!!]
수가 늘었다. 3,500만 명. 그리고 채팅은 점점 더 빨라졌다.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포탈 안에 있던 시간이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포탈 안에서는 5분이었는데, 현실에서는 1시간 30분이 지나갔다.
[빨리 빨리 빨리!!!] [우리가 다음 던전을 열어 줄게!!!] [넌 우리의 영웅이야!!!]
그 순간, 준호의 눈 앞에 새로운 포탈이 나타났다. 강남역 지하 2층의 계단 입구에. 하지만 이번엔 다른 곳도 보였다.
자신의 원룸.
집 한구석에 새로운 포탈이. 거기 있는 포탈은 색깔이 다했다. 자주색이었다. 그리고 던전 스캔 시스템에는 메시지가 떴다.
[최종 던전 감지: 지하 5층] [난이도: ?????]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머니에게서.
[준호야, 너 요즘 뭐하는 거야? 병원 가야 할 것 같은데. 엄마가 봐도 뭔가 이상해.]
준호는 화면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