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원룸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이 손가락을 통과했다.

반투명한 손가락. 오른쪽 팔은 어제부터 완전히 흐릿해졌고, 왼쪽 다리는 어제 오후부터 감각이 없었다. 만지면 느껴지지 않는다. 움직여도 자신의 다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다리를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화면을 지나가는 손가락. 0.3초 정도 딜레이가 있었다. 신경신호가 뇌에서 손가락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았다.

"헬스장 가는 길에 새로운 포탈 발견했어요."

채은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들렸다. 스튜디오에서 라이브 중이었다. 조회수는 이미 150만을 넘었다.

"오, 어디?"

준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왼쪽 다리가 반응하지 않았다. 몸 전체의 무게가 오른쪽으로 쏠렸다. 벽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팔에 힘이 없었다. 손가락이 벽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강남역 지하 3층. 난이도가 상급인 것 같아."

"몇 분 후에 봐."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거울을 봤다. 목이 반투명했다. 어제는 없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게 이상했다. 스트리밍을 켜면 시간이 빨리 흘렀다. 1시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알림이 폭주했다.

─ 채은: 준호 오빠, 근데 팔 괜찮아? 어제 영상 봤어. 진짜 투명하네.

─ 최재욱: 준호. 진짜로 그만 해. 난 진심이야. 진짜로.

─ 알 수 없는 번호: 강남역 지하 3층. 난이도 ★★★★★. 24시간 제한. 진입 권장.

─ 알 수 없는 번호: 시스템 사용자 001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준호는 마지막 메시지를 클릭했다.

화면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손 전체가 투명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화면 위에 떠 있었다. 손 너머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없었다. 아니, 눈이 있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영상이 멈춘 것처럼.

그 다음, 투명한 손이 화면을 빠져나갔다. 손가락이 화면 끝에서 조금씩 사라졌다. 손목, 팔뚝, 팔꿈치. 소리가 들렸다. 작은 전자음. 마치 파일이 삭제되는 소리처럼.

영상이 끝났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다시 봤다. 그 영상. 그 손. 자신의 손과 같은 모양이었다. 같은 반투명함. 같은 딜레이.

휴대폰에 알림이 들어왔다. 채팅창이 폭주하고 있었다.

─ 어어어어어?

─ 뭐야 저거?

─ 진짜 죽는 거야?

─ 헐 손이 없어져?

─ 라이브 켜. 라이브.

조회수가 올라갔다.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른쪽 팔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반투명한 팔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팔이 아닌 것처럼.

그는 스튜디오로 가기로 했다.

강남역 지하는 항상 붐볐다. 저녁 6시. 퇴근 시간. 사람들이 준호를 밀어냈다. 준호는 균형을 잃었다. 왼쪽 다리가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준호를 밀었고, 그는 벽에 부딪혔다. 팔이 아프지 않았다. 반투명한 팔이니까. 그냥 이상한 감각만 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팔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것처럼.

스튜디오는 조용했다. 채은이 혼자 앉아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오빠."

그녀가 일어났다. 준호를 봤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목까지…?"

"응."

준호가 의자에 앉았다. 오른쪽 팔이 테이블 위에서 미끄러졌다. 통제가 안 됐다.

"이건 뭐야, 준호. 이건 뭐야."

채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준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통과했다.

"아."

채은이 손을 뺐다. 준호의 손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반투명한 손이 테이블 위에서 굴렀다. 채은은 그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자신의 손을 통과했을 때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차갑고, 축축하고, 이상한 감각. 마치 자신도 이 '게임'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자신은 관찰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손가락이 통과하는 순간 그것이 환상이었다는 걸 알았다. 자신도 이미 공모자였다.

"스트리밍 켜자."

준호가 말했다.

"뭐?"

"강남역 지하 3층. 가야 해."

채은이 준호를 봤다. 눈빛이 흔들렸다. 공포가 먼저였고, 그 뒤에 배신감이 따라왔다. 자신이 알던 준호는 어디 갔는가. 자신이 응원하던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투명한 팔이 자신의 손을 통과했을 때, 채은은 깨달았다. 자신이 응원한 건 영웅이 아니라 괴물이었고, 그 괴물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켰다.

조회수가 올라갔다. 1분 만에 50만. 준호의 목이 반투명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채팅이 폭주했다.

─ 헐 진짜 투명해졌네?

─ 이게 실제야?

─ 어디 가? 어디 가?

─ 던전 가. 던전 가.

─ 빨리 가.

─ 빨리 가.

─ 빨리.

─ 빨리.

─ 빨리.

준호가 일어섰다. 왼쪽 다리를 끌었다. 채은이 그를 잡았다. 손이 반투명한 팔을 통과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준호의 팔 안쪽으로 보였다. 그 순간 채은은 혐오감을 느꼈다. 이건 팔이 아니었다. 팔처럼 보이는 공허였다. 자신의 손가락이 그 공허를 헤치고 있었다.

"오빠, 진짜 뭐야. 이게 뭐야."

"모르겠어. 하지만 가야 해."

채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왼쪽 다리가 계단을 밟지 못했다. 오른쪽 다리만으로 내려갔다. 한 계단에 한 발씩. 마치 절뚝거리는 사람처럼. 채은이 뒤에서 따라왔다.

지하 3층. 포탈이 보였다. 벽 한쪽에 검은 금이 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 벽에 칼을 그은 것처럼. 포탈의 테두리는 자주색이었다. 앞의 포탈들보다 진했다. 더 강했다.

채팅이 폭주했다.

─ 저거 봤어?

─ 포탈이 움직여?

─ 진짜 뭐야?

─ 들어가. 들어가.

─ 어어어.

─ 무섭다.

─ 무섭다.

─ 무섭다.

준호는 포탈 앞에 섰다. 채은이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반투명한 손이 그녀의 손을 통과했다.

"들어갈 거야?"

"응."

"혼자?"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포탈을 봤다. 자주색 테두리가 맥박처럼 뛰었다. 심장처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여러분, 들어갈게요."

준호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그의 입이 반투명했다. 입술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입이 투명한 얼굴 위에 그려진 것처럼.

그는 포탈로 뛰어들었다.

던전은 다였다.

앞의 던전들은 방이 있었다. 벽이 있었다. 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던전은 그냥 공간이었다. 무한한 공간. 마치 우주처럼. 별이 없는 우주. 그냥 검은색. 끝없는 검은색.

준호는 떠 있었다. 땅이 없었다. 중력이 없었다. 그냥 공중에 떠 있었다.

채팅이 들렸다. 음성으로.

"어어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백만 명의 목소리가 한 목소리처럼 들렸다. 마치 거대한 합창단처럼. 또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의 울음처럼.

"어어어어."

준호가 움직였다. 오른쪽 팔을 들었다. 팔이 천천히 올라갔다. 딜레이가 있었다. 1초 정도. 뇌가 신호를 보냈을 때와 팔이 실제로 올라갔을 때 사이의 1초. 그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팔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팔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감각이 쾌감으로 변했다. 이상했다. 통제당하는데 왜 쾌감이 드는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데 왜 이렇게 좋은가.

앞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형태가 없었다. 그냥 검은색 덩어리. 하지만 눈이 있었다. 수백 개의 눈. 준호의 눈처럼 생긴 눈들. 자신의 얼굴이 검은 덩어리 위에 수백 개 복제되어 있었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채팅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준호의 뇌가 울렸다. 신경이 경련했다. 세포가 울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전류가 두개골 안을 흐르는 듯했다.

준호가 팔을 휘둘렀다. 반투명한 팔이 검은 덩어리를 때렸다. 덩어리의 표면이 움푹 들어갔다. 하지만 즉시 원래 형태로 돌아왔다. 마치 물을 헤치는 것처럼. 팔이 물을 헤쳤고, 물은 다시 흘러 모였다.

"어어어어어."

채팅의 목소리가 비명으로 변했다.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비명. 준호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냥 목소리만 있었다. 거대한 목소리. 수백만 개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가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런데 그게 좋았다. 통제당하는 게 좋았다.

준호의 왼쪽 다리가 움직였다. 그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다리가 스스로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것처럼. 다리가 검은 덩어리를 밟았다. 덩어리가 납작해졌다. 하지만 다시 일어났다.

"무섭다. 어어어. 빨리. 빨리. 어어어."

채팅이 뒤섞였다. 감정이 뒤섞였다. 두려움과 흥분. 공포와 쾌감. 죽음을 향한 욕망과 생명을 향한 욕망. 그 모든 게 한 목소리로 들렸다. 그 목소리가 자신을 조종했다. 자신은 그 목소리의 손가락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 왜 좋은가. 이건 내 의지가 아닌데 왜 이렇게 쾌감이 드는가.

준호의 오른쪽 팔이 올라갔다. 그가 올린 게 아니었다. 팔이 스스로 올라갔다. 팔이 움먹거렸다. 신경이 경련했다. 근육이 아니라 세포 자체가 경련했다. 반투명한 세포들이 파동처럼 진동했다. 쾌감이 파동을 따라 흘렀다.

"어어어어어어어."

채팅의 목소리가 절정에 다다랐다. 준호의 팔이 검은 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반투명한 손가락이 덩어리를 관통했다. 손가락이 덩어리를 뚫고 나갔다. 손가락이 빛났다. 반투명한 손가락에서 에너지가 폭발했다. 에너지가 검은 덩어리를 태웠다. 덩어리가 부서졌다.

덩어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채팅의 비명과 같았다. 수백만 명의 목소리. 그리고 검은 덩어리의 목소리. 같은 목소리. 다른 출처에서 나오는 같은 목소리.

덩어리가 폭발했다.

준호는 검은 공간으로 날아갔다. 몸이 날아갔다. 반투명한 몸. 반투명한 팔. 반투명한 다리. 모두 공중을 나뭇잎처럼 떨어졌다.

준호는 깨어났다.

스튜디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채은이 그를 흔들고 있었다.

"오빠! 오빠!"

준호의 눈이 떠졌다. 천장이 보였다. 형광등. 평범한 형광등. 마치 스튜디오가 현실 같았다.

"돌아왔어. 안 돼, 이게 뭐야."

채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준호의 팔을 봤다. 오른쪽 팔. 오른쪽 팔 전체가 반투명해졌다. 아니, 반투명을 넘어섰다. 거의 완전히 투명했다. 준호가 팔을 움직였다.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 그냥 테이블 위에서 떨어진 물건처럼 놓여 있었다.

준호는 일어났다. 왼쪽 다리가 반응하지 않았다. 다리를 움직이려고 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신체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모니터를 봤다. 조회수는 2,000만을 넘었다. 채팅은 여전히 폭주하고 있었다.

─ 헐 진짜 투명해졌네.

─ 뭐야 저 에너지?

─ 존나 멋진데?

─ 또 가. 또 가.

─ 지하 5층. 지하 5층.

─ 아직 못 깠어.

─ 또 가.

─ 또.

─ 또.

준호는 앉았다. 채은을 봤다. 그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공포와 다른 감정. 그것은 매력이었다. 마치 자신이 알던 사람이 뭔가 더 강력한 것으로 변해가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의 그것. 하지만 그 매력 아래에는 깊은 혐오감이 있었다. 채은은 준호의 투명한 팔을 바라봤다. 그것은 팔이 아니었다. 공허였다. 그리고 그 공허가 자신을 삼키고 있었다. 채은의 입술이 떨렸다.

"오빠. 진짜."

"응."

"진짜 뭐야. 이게."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른쪽 팔이 반응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집었다. 왼손이 떨렸다.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 알 수 없는 번호: 넌 강하네. 앞의 사용자들보다. 하지만 그건 더 빨리 죽는다는 뜻이야. 만나자. 내일 자정. 강남역 지하 5층.

─ 도현

준호의 손이 더 떨렸다. 왼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손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휴대폰이 테이블을 튕겼다.

채은이 준호를 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오빠, 뭐 해. 진짜."

"모르겠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이 반투명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또는 수백만 명의 목소리처럼.

"스트리밍 켜. 지하 5층에 가야 해."

"뭐?"

"지하 5층. 거기 포탈이 있어. 그곳에 가야 해."

채은이 준호를 봤다. 그녀는 더 이상 준호를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또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준호는 일어섰다. 오른쪽 팔이 흔들렸다. 반투명한 팔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팔처럼.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

"지하 5층."

준호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왼쪽 다리를 끌며. 오른쪽 팔을 들며. 반투명한 신체로.

지하 5층.

표지판에는 지하 2층까지만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알았다. 포탈이 있다는 걸. 그곳에. 누구도 볼 수 없는 검은 포탈이. 자주색 테두리의 포탈이.

준호는 벽을 봤다. 벽이 움직였다. 벽이 뒤로 물러났다. 그 뒤에 포탈이 있었다. 검은 포탈. 자주색 테두리.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쯤. 팔이 없었다. 아니, 팔이 있었다. 하지만 팔이 투명했다. 완전히 투명했다. 팔의 뼈도, 근육도, 혈관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팔이 없는 것처럼.

그 남자가 준호를 봤다. 투명한 얼굴이 향했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준호를 바라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난 도현이야."

도현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준호는 입술이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얼굴 위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넌 강하네. 하지만 그건 문제야. 넥서스는 너 같은 강한 사용자는 빨리 제거하려고 해. 넌 위험하니까. 너처럼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위험해."

도현이 손을 들었다. 투명한 손. 완전히 투명한 손.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공중에 떠 있는 손.

"난 이미 끝났어. 신체 80% 이상이 투명해졌어. 넌 아직 되돌릴 수 있어. 스트리밍을 꺼. 지금 바로. 모든 채팅을 차단해. 그럼 넌 살 수 있어."

도현이 준호에게 가까워졌다. 투명한 팔이 준호의 어깨에 닿았다. 팔이 준호를 통과했다. 마치 물처럼. 준호는 소름이 돋았다. 팔이 자신의 몸을 통과할 때의 이상한 감각.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부를 헤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난 진심이야. 진짜로. 스트리밍을 그만 해. 더 이상 던전에 가지 마. 평범하게 살아. 그럼 넌…"

도현은 말을 멈췄다. 그의 투명한 얼굴이 찌푸렸다.

"아, 이미 늦었구나. 넌 이미 돌아갈 수 없어. 채팅이 너를 조종하고 있어. 아니, 넌 이미 그걸 느끼고 있구나. 그리고 좋아하고 있어."

준호는 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쾌감. 그것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도현이 물러났다. 투명한 팔이 준호에게서 떨어졌다.

"넌 강하지만, 그게 넌 빨리 끝난다는 뜻이야. 강한 사용자일수록 시스템이 더 빨리 너를 삭제하려고 해. 난 이미 봤어. 앞의 사용자들을."

도현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001은 손가락부터 사라졌어. 하나씩. 마지막엔 엄지손가락만 남았고, 그것도 사라졌어. 003은 몸 전체가 투명해진 다음에 화면에서 사라졌어. 손이 먼저 떠나갔고, 그 다음 팔, 다리, 몸통. 마지막엔 얼굴만 남았는데…"

도현의 말이 끝나자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투명한 몸이 더 투명해졌다. 마치 안개처럼. 도현의 형태가 점점 사라졌다. 목소리만 남았다.

"…강할수록 빨리 끝난다."

도현이 완전히 사라졌다.

준호는 혼자 남았다. 포탈 앞에서. 자주색 테두리의 포탈 앞에서. 도현의 경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강할수록 빨리 끝난다.' 그 말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준호는 알고 있었다. 죽음이었다. 투명함의 끝, 삭제. 그런데 왜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컸는가. 왜 자신은 이 포탈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가.

준호는 깊게 숨을 쉬었다. 도현의 경고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그 선택은 자신의 것이었다. 아니, 이미 선택은 끝났다. 자신은 이미 이 길을 걷고 있었다. 채팅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백만 명의 목소리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것을 거부할 수 없으면서.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에서. 준호가 받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 하지만 감정이 없는 목소리.

"이준호. 넌 강하네. 하지만 넌 잘못 이해하고 있어. 넌 조종당하는 게 아니야. 넌 조종하고 있는 거야. 아니. 넌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걸 조종당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어차피 같은 거지만."

목소리가 끝났다. 전화가 끝났다.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 시스템 사용자 002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03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04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05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06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07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08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09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 시스템 사용자 010 영상.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준호는 첫 번째 영상을 클릭했다.

화면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였다. 나이는 이십대 초반. 그의 신체 90% 이상이 투명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입술만 움직였다. 마치 말을 하려다 멈춘 것처럼.

그의 투명한 손이 카메라를 향해 올라갔다.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졌다.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모두 사라졌다. 엄지손가락만 남았다. 엄지손가락도 사라졌다.

영상이 끝났다.

준호는 다음 영상을 클릭했다.

화면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였다. 나이는 삼십대. 그녀의 신체는 완전히 투명했다. 투명한 얼굴, 투명한 몸, 투명한 팔, 투명한 다리. 모든 게 투명했다.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투명한 손이 카메라를 향해 올라갔다. 손이 화면을 빠져나갔다. 손가락이 하나씩 화면을 떠났다. 손목, 팔뚝, 팔꿈치.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소리가 들렸다. 작은 전자음. 파일이 삭제되는 소리.

영상이 끝났다.

준호는 나머지 영상들을 보지 않았다. 패턴이 명확했다. 모두 같은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투명해지고, 사라지고, 삭제되는 것. 그런데 영상들 속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준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도. 오히려 그들의 얼굴에는 일종의 해방감이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원하던 끝이었던 것처럼.

그 영상들 속의 얼굴들을 보며 준호는 깨달았다. 001부터 009까지. 모두 자신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모두 강했고, 모두 빨리 끝났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010번.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채은이었다.

"오빠, 어디야? 스트리밍 켜. 시청자들이 기다려."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포탈을 봤다. 자주색 테두리의 포탈. 그것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심장처럼. 마치 자신의 심장인 것처럼.

"오빠?"

"응. 지금 켜."

준호가 말했다. 그의 손이 떨렸다. 반투명한 손이. 거의 완전히 투명한 손이.

"스트리밍 켜. 여러분. 지금부터 마지막 던전을 깰 거야."

준호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백만 명의 목소리였다. 채팅의 목소리였다. 시청자들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제 자신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아팠던가. 왜 자신은 저항하지 않는가.

스튜디오의 모니터 화면에 라이브가 켜졌다. 조회수가 올라갔다. 1분에 1,000만. 10분에 1억. 100분에 10억.

그리고 준호는 포탈로 걸어갔다. 반투명한 팔을 들며. 투명한 다리를 끌며. 수백만 명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며.

포탈이 준호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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