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 존의 광장
노동자 존의 광장에서 수천 명의 목이 준호를 향했다.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고, 곧 일제히 몸을 날렸다. 폭발음이 아르크의 벽을 울렸다. 검은 금이 준호의 목을 타고 흐르듯 올라갔다.
그 순간, 격리 구역의 벽이 준호의 눈 앞에서 무너졌다.
박서현이 자신을 안으며 방사능에 잠식되고 있었다. 초록색 빛이 그의 피부를 태웠다. 박서현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준호를 봤다. 두려움 없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생명을 양도하는 손으로. 그리고 사라졌다. 권능을 역으로 쐈다는 것의 의미를 준호는 이제 알았다. 자기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죽음을 양도하는 것.
검은 금이 준호의 가슴팍까지 내려왔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세 성좌가 동시에 움직였다. 황금의 수호자는 통제를, 종말의 시인은 극적 절정을, 심연의 속삭임은 절멸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이준호가 있었다.
아르크의 깊은 곳에서 신호가 들어왔다. 엘리트 존. 생존 의회의 최상층 위쪽,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구역이 있었다. 준호는 몸을 날렸다. 새벽의 횃불의 저항군이 통로를 열어줬다. 검은 금이 심장 박동을 방해했다. 한 번 더 권능을 쓰면 끝이다.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내려갔다. 위쪽으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신체가 가벼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죽음의 감각이 익숙해졌다는 뜻이었다. 엘리트 존의 벽은 은백색이었다. 아르크의 최상층도 아닌 다른 곳. 생존 의회의 기록실에서 본 '비밀 구역'이 이곳이었다. 통로의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자동으로 열렸다.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김은지였다. 그녀는 투명한 방탄 유리실 안에 서 있었다. 아르크의 최상층 관료들이 입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준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다만 더 낡았다. 더 지쳐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손이 떨렸다.
"준호?"
목소리가 깨어졌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수 대상으로 기록된 여인이 자신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증오한 얼굴이 그렇게 낡아 있을 리가 없었다.
"너... 넌 왜 왔어?"
김은지가 유리를 손으로 짚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 떨림이 유리를 타고 전달되는 것이 보였다.
"난 널 구하기 위해... 내가..."
말이 끊겼다. 그녀의 눈물이 흘렀다. 준호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서서 그것을 봤다. 3년간 그려온 복수의 장면과 달랐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난 널 버린 게 아니야."
준호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포칼립스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던 건..."
김은지가 유리를 두드렸다. 약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계속 반복됐다.
"넌 이민철이 안 그랬어?"
"네?"
"이민철이는 날 버렸어. 그래서 난..."
"아니야."
김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더 크게 떠졌다.
"이민철이도... 우리도... 우리가 한 건 너를 버린 게 아니라..."
유리실의 한쪽 벽에 화면이 켜졌다. 기록이었다. 아포칼립스 초기의 기록. 격리 구역으로 내려가던 그 날의 기록이었다.
화면 속 준호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방사능 오염 수치가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 의료진은 손을 놨다. 그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김은지였다. 그리고 이민철이었다. 박준영도 있었다. 아포칼립스 이전의 동료들이 모두 있었다.
"이 아이를 위쪽으로 옮길 수 없나?" 김은지의 목소리가 화면에서 들렸다.
"불가능합니다. 오염 수치가..."
"그럼 우리가 내려가자."
"김은지님, 위에서는..."
"위에서 뭐라 하든 난 내려간다."
화면 속 이민철이 움직였다. 그는 손에 보온 용기를 들고 있었다.
"물자를 남겨야 한다. 혹시 모르니까."
박준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준호는 화면을 봤다. 화면 속 동료들이 격리 구역의 깊은 곳에 물자를 남기고 있었다. 의료용 안티바이러스제, 식량, 물. 그리고 종이에 뭔가 적혀 있었다. 화면이 확대됐다.
'우리 준호가 살아남기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 이제 넌 혼자가 아니야.'
준호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물자들이... 날 살렸어."
"그래."
김은지가 유리를 또 짚었다.
"넌 그걸 먹었고, 넌 살았어. 우리가 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널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뭐라고?"
"우리가 널 버렸다는 자책이 우리를 엘리트 존에 묶어놨어. 우리가 살아남은 죄책감이 우리를 살게 했어. 매일 너를 생각했어. 넌 살았냐고. 넌 어디에 있냐고. 넌 왜 우리를 찾지 않냐고."
김은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넌 우리를 미워했니?"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검은 금이 가슴까지 내려온 것이 느껴졌다.
"난 너를 미워한 적이 없어. 난 너를 구하고 싶었어. 그래서 내가 황금의 수호자와 거래했어. 넌 살아남으라고. 넌 도망쳐야 한다고. 그런데..."
김은지가 멈췄다. 그녀의 눈이 준호의 목을 봤다. 검은 금을 봤다.
"그게... 뭐야?"
"남은 시간이야."
준호가 목을 만졌다. 피부가 돌처럼 딱딱했다.
"3년. 아니, 이제 1년도 안 남았어."
"왜? 넌 뭘 했어?"
"복수를."
준호가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계속 나왔다.
"날 버린 너희를 죽이려고 권능을 썼어. 근데 넌 내가 버린 거였어?"
"넌 버린 게 아니야."
김은지가 손을 들었다. 유리가 투명해졌다.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그녀가 나왔다. 준호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넌 보내진 거야.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다시 너를 구하고 싶었어. 근데 못했어. 미안해."
준호는 손을 빼지 않았다. 3년 동안 복수 목록에 올렸던 여인의 손이 따뜻했다.
"종말의 시인이 뭐래?"
"재시작이래. 이 세상의 모든 게 끝나고, 새로운 거를 만드는 거. 너를 통해서."
"날 통해서?"
"넌 죽음의 권능을 가졌으니까. 넌 이 세상을 끝낼 수 있어. 그래서 종말의 시인이 널 선택한 거야. 넌 그의 마지막 작품이야. 그리고..."
김은지가 말을 멈췄다. 아르크 전역에 소리가 울렸다. 방송이었다.
거대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더 깊고, 더 무거운 음성이었다.
"재시작이 시작된다."
준호와 김은지가 고개를 들었다.
"이 세상의 끝을 맞이하자.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자."
그 음성의 끝에서 다른 음성이 겹쳤다. 검은 소리였다. 마치 절벽에서 바람이 울 때의 소리처럼.
"끝이 아니다. 소멸이다."
심연의 속삭임의 목소리였다.
"모든 성좌를 제거하고, 이 세상을 진정한 절멸로 이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자가 바로 너다, 죽음의 권능자여."
준호의 눈이 떠졌다.
"세 가지 계획이 있다."
김은지가 말했다.
"종말의 시인의 재시작. 황금의 수호자의 질서 유지. 그리고 심연의 속삭임의 성좌 제거. 그 셋 다 널 필요로 해. 그리고 셋 다 넌 죽이려고 했어."
"그럼 넌?"
"난 넌 살리고 싶어."
김은지의 손이 더 세게 준호를 잡았다.
"넌 복수를 완성해야 해. 하지만 그게 우리를 죽이는 거면 안 돼. 우리는 너를 구하고 싶었거든. 우리가 그 빚을 갚아야 해. 넌 살아야 해. 우리가 남긴 물자처럼, 우리가 남긴 희망처럼."
아르크의 깊은 곳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성좌들의 전쟁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검은 금이 손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김은지의 손을 놓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1년?"
"1년도 안 돼. 계산해봤어. 넌 권능을 쓸 때마다..."
"매번 죽어간다. 알아."
준호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팔을 들었다. 팔뚝의 검은 금이 손목까지 뻗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검은 실로 그를 꿰매는 중인 것처럼. 하지만 실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 자체였다. 자신의 죽음이 피부 위로 떠오르는 것.
"박서현은?"
"희생했어. 넌 그걸 모르나?"
김은지의 목소리에 절망이 묻어났다.
"그애가 널 안으려고... 권능을 역으로 쐈어. 자기 생명을 너한테 줬어. 그래서 넌 조금 더 살 수 있는 거고."
준호가 눈을 감았다. 박서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에 잡혔던 따뜻함. 그리고 사라짐. 격리 구역의 벽에 박서현이 부딪혔다. 방사능이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 순간 박서현의 눈이 준호를 봤다. 두려움 없이.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생명을 양도하는 손으로.
"넌 누구를 위해 복수하고 있어?"
김은지의 질문이 귀를 찔렀다.
"뭐?"
"처음엔 우릴 위해 살려던 거였어. 그 다음엔 세상을 위해. 그 다음엔 성좌를 위해. 이제는 누구를 위해 죽으려고 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아르크의 벽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리듬이 있었다. 음파 공격이었다. 황금의 수호자의 에너지 통제 능력이 작동 중이라는 뜻이었다.
"나가야 해."
준호가 말했다.
"아직 여기 있으면 안 돼. 김은지, 넌?"
"난 여기서 기록을 지워. 아포칼립스 당시 기록들. 우리가 너를 구하려 했던 증거들. 황금의 수호자가 알면 안 돼. 그들이 알면 내 지위도 끝나고, 다른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
"엘리트 존에 있는 사람들 중에 우릴 도와준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격리 구역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어. 자원을 빼돌려서. 그들도 죽이고 싶어?"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봐. 복수가 뭔지. 정말 그 사람들을 죽이는 게 맞는지. 아니면..."
"아니면 뭐?"
"아니면 우리가 남긴 것들을 지켜내는 게 맞는지."
김은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그 안에는 식량이 들어 있었다. 말린 고기, 곡식, 물. 그리고 한 장의 종이. 준호가 걸어가 종이를 봤다.
"우리 준호가 살아남기를."
글씨가 떨리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필체였다. 각각 다른 손으로 적힌 글씨들이 한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격리 구역에 내려간 마지막 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이 글을 남기는 것이라는 절망감과 함께.
"이민철은 중층 제단 위에 있어."
김은지가 말했다.
"황금의 수호자의 제단 바로 아래. 그놈이 성좌와 거래한 대가야. 우리 둘을 팔아넘겼어. 그래서 넌 살릴 수 있었고, 우리는..."
김은지의 목소리가 끊겼다.
"우리는 성좌의 손에 들어갔어. 나랑 너. 그래서 그놈은 죽여. 진짜로. 넌 할 수 있어."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아포칼립스 이후, 엘리트 존에 올라간 사람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심지어 동료를 버리는 것도.
"얼마나 남았어?"
"모르겠어. 계산할 수 없어. 성좌들이 너를 어떻게 쓸 건지 모르니까. 하지만 넌 절대 복수로 끝내면 안 돼. 알았어?"
준호가 상자를 들었다. 무게가 있었다. 가볍지 않았다. 누군가의 목숨이 담겨 있는 무게였다.
"종말의 시인을 봤어?"
"아니."
"그놈이 제단 최상층에 있어. 인류를 위해 무릎을 꿇고 있어. 그래서..."
김은지가 잠깐 멈췄다.
"그래서 뭐?"
"그래서 넌 그놈을 죽일 수도 있고, 그놈의 재시작을 도와줄 수도 있고, 심연의 속삭임 편에 설 수도 있어. 그놈은 넌 자유라고 했어. 넌 누구를 위해서든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넌 아무도 죽이지 마. 제발."
아르크의 천장이 갈라졌다. 거대한 금이 생겼다. 그 금 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지표면의 방사능 빛이었다. 성좌들의 전쟁이 지표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가."
김은지가 밀어냈다.
"그리고 기억해. 우리는 널 미워한 적이 없어. 넌 혼자가 아니야."
준호가 돌아섰다. 엘리트 존의 깊숙한 통로를 내려갔다. 상자를 들고. 검은 금이 목까지 올라온 채로. 한 발 한 발 내려갈 때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노동자 존으로 향하는 길. 그곳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피난하고 있었다. 아르크가 무너지고 있었다. 천장에서 흙과 돌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준호가 광장의 중앙에 섰다.
그 순간, 모든 음성이 동시에 울렸다.
"세 가지 길이 있다."
종말의 시인의 음성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끝을 노래하는 음성이었다. 아름답고도 절망적인 음성.
"첫 번째, 이 세상을 끝내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길. 너는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마지막 작품으로서 완성되고, 그 완성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심연의 속삭임이 겹쳤다. 그것은 절벽 아래에서 올라오는 음성이었다. 차갑고도 절대적인 음성.
"두 번째, 모든 성좌를 제거하는 길. 너는 그 무기가 될 수 있다. 너의 죽음의 권능으로 우리를 모두 소멸시키고, 이 세상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황금의 수호자의 음성이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질서를 지키는 음성이었다. 차분하고도 강압적인 음성.
"세 번째, 현재의 질서를 지키는 길. 너는 그 기둥이 될 수 있다.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을 지탱하고, 그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상자를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세 성좌의 음성이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각각의 제안이 그를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종말의 시인의 제안은 아름다웠다. 이 세상을 끝내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그것은 복수였다.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 박서현이 죽은 이 세상을 끝내는 것.
심연의 속삭임의 제안은 명확했다. 성좌들을 모두 죽이는 것. 그들이 만든 이 지옥을 끝내는 것. 권능으로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자유로워지는 것.
황금의 수호자의 제안은 현실적이었다. 이 세상을 지탱하고 살아남는 것. 영원한 생명. 죽지 않는 것.
하지만 준호는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말의 시인의 재시작은 김은지도 죽인다. 박서현도 죽인다. 격리 구역에서 자신을 위해 물자를 남겼던 모든 사람들을 죽인다.
심연의 속삭임의 절멸도 마찬가지다. 성좌들과 함께 이 세상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을 죽인다.
황금의 수호자의 질서 유지도. 그것은 현재의 지옥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이다. 격리 구역의 고통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준호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상자를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목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위해 남긴 것들.
"아니."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작은 음성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들었다. 세 성좌도 들었다.
"아니?"
세 성좌가 동시에 반응했다. 그들은 준호가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난 넷 중 누도 아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명확했다.
"난 복수를 완성하지 않는다. 난 이 세상을 끝내지 않는다. 난 성좌를 제거하지 않는다. 난 질서를 지키지도 않는다."
"그럼 뭘 할 건가?"
종말의 시인이 묻었다. 그 음성에는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상자를 들어올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그 안의 물자들. 말린 고기, 곡식, 물. 그리고 여러 사람의 필체로 적힌 한 문장.
"난 산다."
준호가 말했다.
"저들을 위해. 격리 구역에서 내게 물자를 남겨준 사람들을 위해. 내 생명을 주고 간 박서현을 위해. 날 구하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난 이 사람들을 이끌고 아르크를 빠져나간다. 너희의 계획 따위 상관없이. 너희가 싸우는 동안 우리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너희가 아닌 우리의 방식으로."
그 순간, 아르크의 모든 제단이 동시에 울렸다. 종말의 시인의 제단, 황금의 수호자의 제단, 심연의 속삭임의 제단. 세 성좌가 동시에 반발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죽음이었고, 파괴였고, 끝이었다. 하지만 준호가 선택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세상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