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협과 선택
격리 구역 깊숙한 곳, 제단 앞에서 박서현을 찾던 준호의 귀에 먼저 들어온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침묵이었다. 그 침묵의 질감이 이상했다. 통풍구를 통해 떨어지는 지하수 소리, 누군가의 숨소리, 그것들마저 멈춘 듯한 침묵.
준호는 제단 입구에 멈췄다. 제단실 내부는 비어 있었다. 거기 있어야 할 박서현이 없었다. 대신 석조 제단 위에 놓인 것은 준호의 휴대단말기였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문자 메시지. 발신자는 '황금의 수호자'.
"격리 구역의 여성 박서현, 현재 엘리트 존 격리실에 수용 중. 생명 유지 시스템 가동 중. 48시간 후 종료될 예정. 이준호, 우리는 거래를 제시한다."
준호의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자 음성 메시지가 재생되었다. 황금의 수호자의 목소리였다. 여성의 음성이었지만 젠더감이 없었다. 마치 성별이 녹아버린 듯한 음성. 제도 그 자체가 말하는 목소리.
"박서현의 생명을 원한다면, 조건을 받아들여라. 종말의 시인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우리에게 보고하라. 그 대상이 어디로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계획하든. 넌 우리의 눈이 되어라. 그러면 박서현은 살아남을 것이다."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거부할 경우, 박서현의 격리실 시스템은 즉시 차단된다. 그녀는 48시간이 아닌 48분 내에 사망할 것이다. 48분. 지금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화면에 타이머가 떴다. 47분 59초. 47분 58초.
준호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가슴이 철판처럼 굳어졌다. 이것이 성좌의 방식이었다. 직접 죽이지 않는다. 선택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모든 경로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자에게는 그것이 자유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준호는 권능을 집중했다. 박서현의 죽음의 시간선을 감지하려 했다. 하지만 감지할 수 없었다. 격리 구역 내에서만 명확한 그의 감지 능력은 엘리트 존까지 미치지 못했다. 박서현은 너무 멀리 있었고, 생명 유지 장치의 인공적 신호가 자연스러운 죽음의 시간선을 방해했다.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준호는 화면에 손가락을 올렸다. 동의 버튼. 손가락이 떨렸다. 이것도 그들이 계획한 것 같았다. 손가락의 떨림마저도.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상이 웃음으로 뒤덮였다.
웃음이었다. 정확하게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웃음 자체가 공기에 물질화되는 것 같았다. 준호의 귀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각 척추뼈를 하나씩 지나가며 울리는 웃음. 세포 수준에서 공명하는 웃음.
"아, 재밌네."
종말의 시인이 나타났다. 제단 위에서, 아니면 제단 옆에서, 아니면 준호의 등 뒤에서. 위치가 불확실했다. 성좌는 공간 속에 있지 않았다. 공간이 성좌 주위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성좌가 공간을 통해 필터링되는 것 같았다.
"황금의 수호자의 개가 된 건가? 아니면 내 배우인 그대로인 건가? 둘 다인가?"
종말의 시인이 손을 펼쳤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선이 피어올랐다. 마치 잉크 방울이 물에 퍼지듯이. 그 검은 선들이 공중에서 글자를 그렸다.
"'타협'. 그것을 넌 선택했어. 나는 너를 '거부'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넌 너무 자존심이 강해서. 하지만 그건 내가 너를 과대평가한 거였어. 넌 그냥 약한 거네. 약한 자들은 항상 타협한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박서현을 보고 싶어?"
종말의 시인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그렸다. 또 다른 글자. 이번엔 그것이 영상이 되었다. 준호 앞의 공기 자체가 화면이 되어 박서현을 비추고 있었다.
격리실. 투명한 강화유리로 된 박스 같은 공간. 박서현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팔에 수액이 꽂혀 있었다. 생명 유지 장치. 호흡 모니터. 심박 수 디스플레이. 박서현의 눈이 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깨어 있어. 자신이 격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고 있어. 벽에 카운트다운이 나타나 있거든. 그녀는 지금 뭘 할까? 울까? 저항할까? 아니야. 그녀는 너를 기다리고 있어. 너를 믿고 있어."
영상이 끊겼다.
"그리고 넌 방금 그녀를 버렸어. 너의 자유를 위해서 말이야. 아니지. 그녀의 생명을 위해서? 아니다. 넌 네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야."
준호가 무릎을 꿇었다. 제단 앞에서. 손가락으로 바닥을 누르자 검은 금이 손등에서 시작되었다. 권능을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멈췄다. 박서현을 건드릴 수 없었다. 감지 범위 밖이었다.
"이제 넌 이중 스파이야. 황금의 수호자를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나를 위해서도 일해야 해. 둘 다를 만족시키면서 자신의 양심도 지켜야 해. 불가능한 요구들을 동시에 하는 거지. 그게 극적이지 않니?"
종말의 시인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귀에 바로 닿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준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널 믿어, 이준호. 넌 할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넌 이미 죽은 자거든. 죽은 자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그 자유로움 속에서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그게 내가 널 선택한 이유야."
목소리가 사라졌다. 제단이 다시 단순한 석조 구조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기의 온도는 여전히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손으로 만진 흔적이 남아 있듯이.
준호가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다.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타이머가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이제 37분 22초. 37분 21초. 타협을 선택한 이후로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박서현을 살리려면 황금의 수호자의 감시자가 되어야 했다. 종말의 시인을 배신하고, 그 대가로 박서현의 생명을 얻는 거였다. 하지만 종말의 시인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계획한 위에서 준호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거부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박서현을 죽게 놔두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하지만 준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격리 구역을 나가기로 결정했다. 엘리트 존으로 가야 했다. 박서현을 만나야 했다. 아니, 박서현을 만날 수 없었다. 격리실 안에 있으니까. 하지만 가야 했다.
격리 구역의 지하 통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서 준호는 박준영을 찾았다. 새벽의 횃불 대표는 격리 구역의 가장 깊은 곳, 통풍구 아래서 대기 중이었다.
"황금의 수호자가 박서현을 잡았다."
준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없었다. 아니, 감정이 너무 많아서 모두 상쇄되어 평탄해진 것 같았다.
박준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몇 시간?"
"37분 정도."
"거래했나?"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자체로 대답이었다.
박준영이 손을 들었다. 통신기를 꺼냈다. "새벽의 횃불, 전원 준비. 엘리트 존 격리실 침투 작전을 개시한다."
"불가능하다."
준호가 말했다. "황금의 수호자의 영역이다. 우리가 들어가면 박서현도 죽는다."
박준영은 통신기를 내렸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작전 취소. 모두 대기 위치로 복귀하라."
침묵이 흘렀다. 박준영은 준호의 눈을 들여다봤다. 말할 것이 없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하 통로를 통해 올라가는 길. 준호는 엘리트 존의 경계에 도달했다. 검문소. 경비병들. 하지만 그들은 준호를 막지 않았다. 마치 그가 이미 통과했어야 했던 자인 듯이.
황금의 수호자의 영향력이었다.
엘리트 존의 중심부로 향했다. 생존 의회 건물. 격리실은 그 지하에 있었다. 생명 유지 장치들이 줄지어 있는 공간. 박서현은 그 중 하나 안에 있었다.
격리실 앞에서 멈췄다. 투명한 유리. 그 안에 박서현이 보였다. 눈을 떴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벽에 표시되어 있었다.
25분 43초.
유리를 두드렸다. 박서현의 눈이 움직였다. 준호를 발견했다. 손이 움직였다. 유리를 누르려 했다. 하지만 팔에 꽂힌 수액이 움직임을 제약했다. 얼굴만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격리실의 방음이 완벽했다.
"왜 왔어?"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손을 올렸다. 유리에 댔다. 권능을 집중했다. 격리실의 강화장치를 무시하고 박서현의 죽음의 시간선을 감지하려 했다. 손가락에서 검은 금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는 실처럼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박서현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왜 자꾸 나를 위해 희생하려고 해?"
준호는 손을 떼지 않았다. 권능을 밀어붙였다. 격리실의 시스템 코드를 읽으려 했다. 생명 유지 장치의 주기, 산소 공급 시스템, 응급 차단 메커니즘. 모든 데이터가 죽음의 시간선으로 변환되었다. 그것을 역으로 추적하면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금이 팔 전체를 덮었다. 세포가 단위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팔뚝의 피부가 검은색으로 변했다. 신경이 타들어가는 느낌. 뼈가 부러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박서현이 손을 들었다. 수액줄이 팔에서 빠져나왔다. 피가 흘렀다. 그녀는 준호의 손 맞은편에 손을 올렸다.
준호의 권능이 시스템 코드를 관통했다. 격리실의 잠금장치가 울렸다. 기계음. 전자음. 그리고 침묵.
유리 문이 열렸다.
박서현이 나왔다. 팔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그녀는 준호를 안았다. 무너지는 몸을 안았다.
"우리는 함께여야 해."
그녀가 말했다.
준호는 팔을 올려 그녀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금이 손가락까지 올라와 있었다. 신체의 붕괴가 목까지 도달했다. 목구멍에서 피가 올라왔다.
"살아. 제발 살아."
박서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이었다. 박서현이 두려워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었다.
준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니었다. 비명이었다. 아니, 더 이상 비명도 아니었다. 단지 음성대에서 짜내는 절규. 검은 금이 목을 지나 뇌로 향하고 있었다.
아르크의 알람이 울렸다. 낮은 음역의 사이렌. 건물 전체를 흔드는 진동. 생명 유지 장치들의 비상음.
준호의 휴대단말기가 울렸다. 문자. 발신자는 '황금의 수호자'.
"전쟁이 시작된다."
그 다음 문자. 발신자는 '심연의 속삭임'.
단어 하나만. 글자 아닌 기호. 마치 언어 이전의 신호처럼. 준호의 뇌를 관통하는 울음소리. 동물의 울음이 아니라 세포 수준의 거부감. 생물학적 혐오. 그것이 글자로 변환되었을 때 나타난 것은:
"죽어라."
박서현이 준호를 더 안았다. 검은 피가 그녀의 옷에 묻었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 제발 살아."
격리실 너머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엘리트 존의 조명이 꺼지는 장면. 정전. 아니면 의도적 차단. 생존 의회 건물이 흔들렸다. 폭발인가. 아니면 성좌의 직접 개입인가.
건물의 바닥이 갈라졌다. 지하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제단의 형태. 아니면 더 큰 것. 성좌의 직접적 개입. 아르크의 기초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황금의 수호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건물 전체를 통해.
"전쟁이 시작된다."
준호는 박서현을 안았다. 팔이 움직였다. 신체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성좌들의 게임이 완전히 가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