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대면
시간이 멈췄다.
준호는 이민철의 목을 누르려던 손을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라 멈춰졌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가야 할 목이 그곳에 없었다. 이민철의 형상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그 사이사이를 무언가가 채웠다.
"재미있는 변수네."
목소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준호의 시야가 흐려졌다. 집무실의 벽이 투명해졌다. 아니, 없어졌다. 벽 너머의 공간이 한 겹 걷혀나가며 다른 세계가 드러났다. 그곳에서 누군가 웃고 있었다. 형체는 없었지만, 웃음소리는 명확했다. 황금으로 빛나는 웃음.
준호의 손이 떨렸다. 떨려서가 아니라 떨리게 되었다.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이민철을 향한 죽음의 권능은 흩어졌다. 마치 물이 모래를 만났을 때처럼.
이민철은 웃음을 멈췄다. 집무실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준호가 한 발 뒤로 물러났을 때, 이민철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공포가 아니라 짜증이었다.
"뭐야. 넌 누구야?"
이민철은 준호를 보지 않고 준호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또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이민철을 건드리지 마."
여성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천천히 돌아섰다. 집무실의 뒤편에 서 있는 형상이 보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여인. 얼굴은 없었다. 대신 황금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성좌다. 또 다른 성좌다.
성좌의 목소리는 차갑고 정확했다.
"이민철은 내 것이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구. 그를 부수려는 시도는 용납하지 않는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성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넌 이미 죽은 자야. 열 살 치 빚을 진 자. 종말의 시인의 빚이 이제 너의 빚이 되었고, 그 빚은 넌 평생 갚을 수 없다."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은지가 말했으니까.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성좌의 입에서 직접 듣는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넌 중요하다. 매우 중요한 변수다. 종말의 시인이 너를 통해 뭔가를 시도하고 있고, 심연의 속삭임도 너의 죽음의 권능을 노리고 있다. 재미있군."
성좌가 웃었다. 황금빛이 더 강해졌다.
준호는 이민철을 다시 봤다. 이민철은 여전히 집무실 한편에 서 있었다.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에 뭔가가 표시되고 있었다. 아, 성좌와의 통신이다. 이민철도 성좌와 연결되어 있다. 이 남자는 종말의 시인의 도구가 아니라 황금의 수호자의 도구였다.
준호가 한 발을 내디딜 때, 이민철이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재밌네. 넌 뭐라고 생각했어? 그냥 넌 나한테 죽을 거고, 난 계속 살 거라고?"
목소리에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그 우월감의 근원은 성좌였다. 성좌의 권능이 그의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아내도, 동료들도, 모두 엘리트 존으로 왔다. 너만 남겨졌지. 그게 누구 잘못이겠니? 넌 약했어. 그래서 버려졌고, 그래서 죽었어. 그런데 지금 뭐하는 거야? 죽은 게 죽은 줄도 모르고?"
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죽음의 권능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검은 금이 손가락 끝에서 맥동했다. 죽음의 권능이 준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가락이 이민철을 향해 펼쳐졌다.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서 팔을 흔드는 것처럼. 저항이 있었다. 거대한 저항이.
"내가 말했지. 이민철은 내 것이다."
성좌의 목소리가 준호의 뇌수를 관통했다. 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팔이 내려갔다. 죽음의 권능은 흩어졌다. 검은 금이 손가락에서 물러났다.
준호는 무릎을 꿇은 채로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도구였다.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여러 성좌들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게임의 말이었다. 이민철을 죽이지 못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다. 자신의 복수 전체가 성좌들의 손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박서현을 구하는 것도, 이민철을 처단하는 것도, 모든 것이 누군가의 시나리오 안에 있었다.
이민철이 웃음을 멈췄다.
"그래, 그렇지. 이게 현실이야. 넌 뭘 할 수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지."
준호는 일어섰다. 천천히. 그의 눈이 회색으로 변했다. 검은 금이 눈 아래를 지나갔다. 팔에만 있던 검은 금이 이제 얼굴까지 올라왔다. 권능 사용 시도의 대가였다. 며칠이 또 깎였을 것이다. 아마 사흘쯤.
"나가."
성좌의 목소리가 울렸다.
준호는 돌아섰다. 집무실의 문이 그 자체로 열렸다. 아니, 열린 게 아니라 준호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흐르는 물이 하수구로 들어가듯이. 준호는 복도에 떨어졌다. 몸이 아파했다.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죽은 몸이 느끼는 환상일 뿐이었다.
준호는 복도의 벽을 짚고 일어섰다. 손에는 휴대폰이 있었다. 언제 꺼낸 건지 모르겠지만. 화면에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박서현이 위험하다. 격리 구역 남쪽 출입구에서 신원 불명 인물들이 그녀를 포위했다. 그 여자를 구하고 싶다면, 내 말을 들어라. 그리고 종말의 시인의 손을 떼어라. —황금의 수호자"
준호의 손이 떨렸다. 이번엔 의지와 관계없이가 아니라 의지 때문이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휴대폰이 거의 부서질 뻔했다.
박서현. 새벽의 횃불. 박준영. 격리 구역 깊숙한 곳에서 만난 그 여자. 저항 조직의 일원. 준호의 유일한 동료.
준호는 뛰기 시작했다. 복도를 빠져나갔다. 엘리트 존의 회색 금속 통로를 뚫고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았다. 계단을 뛰어내렸다. 다리가 무거웠다. 죽음의 권능 사용 시도의 대가로 깎인 며칠이 이제 현실이 되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준호는 중층부에 도착했을 때 멈췄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숨이 고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박서현이. 위험하다. 신원 불명 인물들이. 포위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문자다. 같은 발신자다.
"시간이 없다. 넌 선택해야 한다. 종말의 시인의 편을 들든지, 나의 편을 들든지. 아니면 심연의 속삭임에게 죽든지. 그 여자를 구하고 싶다면, 빨리 선택해라."
준호는 화면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선택할 수 없었다. 아니, 선택지가 없었다. 세 개 모두 죽음이었다. 종말의 시인은 자신을 도구로 봤고, 황금의 수호자는 자신을 게임의 말로 봤다. 심연의 속삭임은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죽었다. 그렇다면 뭘 더 잃을 게 있는가?
준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격리 구역으로 내려가는 길로. 박서현이 있는 곳으로. 어떤 선택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검은 금이 또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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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구역의 남쪽 출입구는 어둠과 소음으로 가득했다. 준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있었다. 박서현이 세 명의 무장 인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옷깃에는 황금의 수호자를 숭배하는 집단의 표장이 박혀 있었다.
준호는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첫 번째 남자의 팔을 잡았다. 검은 금이 손가락 끝에서 맥동했다. 죽음의 권능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남자의 몸이 경직됐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그의 신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남자는 저항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저항은 무의미했다. 준호는 그를 벽으로 내팽개쳤다. 남자의 몸이 철 구조물과 부딪혔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 남자가 칼을 들었다. 준호의 어깨를 노렸다. 박서현이 발로 그의 팔을 걷어냈다. 칼이 땅에 떨어졌다. 준호와 박서현은 눈을 마주쳤다. 말할 시간이 없었다. 박서현은 이미 세 번째 남자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호흡이 맞았다. 오래 함께한 동료들처럼.
세 번째 남자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싸울 의도가 없었다. 두 명이 한 명씩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밀렸다. 그의 뒷모습이 통로로 사라졌다. 준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박서현을 봤다.
"넌 안 다쳤나?"
박서현의 얼굴에 피가 흘렀다.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준호를 재는 듯했다.
"넌?"
"괜찮다."
거짓이었다. 준호의 팔에는 검은 금이 손가락까지 내려와 있었다. 얼굴에도 올라와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박서현이 한 발 물러섰다.
"황금의 수호자가 나를 미끼로 쓴 거야. 넌 알겠지?"
"알아."
"그럼 뭘 하려고?"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통화였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떴다. 준호는 받았다.
"좋은 선택이야. 그 여자를 구했군."
황금의 수호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들렸다. 마치 여러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합창이었다.
"넌 아직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넌 아무것도 선택한 게 아니야. 넌 오직 움직일 뿐이야. 우리가 움직이는 대로."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통화를 끊었다. 박서현이 그를 바라봤다.
"박준영한테 보고해야 돼. 지금 황금의 수호자가 움직이고 있어. 이건 경고다."
박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의문이 있었다. 준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금이 그의 몸을 거의 다 덮어버렸다. 목에도, 턱에도, 이마에도.
"넌 얼마나 남았어?"
준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해봐."
"모르겠어. 권능을 쓸 때마다 깎여. 정확하지 않아."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준호는 알고 있었다. 이민철을 죽이지 못했을 때 얼마나 깎였는지. 그리고 지금 박서현을 구하기 위해 뛰어내려올 때 얼마나 더 깎였는지. 합계로는 일주일이 넘게 사라졌을 것이다. 남은 시간은 이제 대략 사개월 정도였다.
아니, 더 적을 수도 있었다.
박서현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우린 뭘 해야 하는 거야?"
"시스템을 파괴해야 해."
"뭔 시스템?"
"성좌들이 의존하는 체제. 현 질서 전체."
박서현의 손이 준호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 넌 죽어가고 있어."
준호는 박서현을 봤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있었다. 자신을 미끼로 쓴 황금의 수호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준호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왜 자신을 구했는가. 왜 황금의 수호자의 손아귀에 들어갔는가. 그런 질문이 그녀의 시선에 담겨 있었다.
"내가 너를 끌어들였어. 박준영한테 보고할 때 그 말을 꼭 해야 해."
박서현의 손이 풀렸다.
"그게 뭔 말이야?"
"황금의 수호자가 나를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거. 내가 선택할 때마다 그들의 계획이 진행된다는 거. 그래서 내가 뭘 하든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거."
박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는 계속했다.
"박준영이 나를 격리해야 해. 아니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넌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넌 우리의 동료야. 우린 너를 버리지 않아."
준호의 목이 메었다. 그것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검은 금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물리적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이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책감이었다. 박서현을 끌어들인 죄책감. 황금의 수호자의 미끼가 되게 한 죄책감. 그리고 그 때문에 죽을 수백 명의 죄책감.
"박준영이를 데려와. 내가 직접 말해야 해."
박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통신기를 들었다. 준호는 그 사이에 벽에 기대섰다. 검은 금이 그의 팔을 타고 목까지 올라왔다. 이제 그의 얼굴은 절반이 검은 금으로 덮여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격리 구역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는 길에 박준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의 횃불의 대표.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준호가 접근하자 그는 먼저 입을 열었다.
"황금의 수호자가 움직였어. 엘리트 존 세 곳에서 동시에 권능을 발동했어. 방사능 격리 시설이 두 곳 폭발했고, 하나는 통제 불능 상태야."
"인명 피해는?"
"아직 집계 중이야. 하지만 적어도 수백 명 이상일 거야."
준호의 숨이 멎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수백 명. 그의 선택이 만든 결과였다. 아니,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황금의 수호자가 만든 결과였다. 하지만 준호가 박서현을 구하지 않았다면? 황금의 수호자가 이 정도로 움직였을까? 자신이 그들을 움직이게 한 건 아닐까? 박서현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권능을 썼고, 그 대가로 며칠을 깎였고, 그것이 황금의 수호자의 신호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자신은 도구가 아니라 무기였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칼이었다. 그리고 그 칼이 내려칠 때마다 누군가가 죽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도 움직였다. 자신의 것이 아닌 손처럼. 검은 금이 손가락 끝에서 맥동했다. 그것은 경련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손가락을 조종하려 드는 것처럼.
"그게 뭐야?"
박준영이 준호의 팔을 가리켰다. 검은 금이 손가락까지 가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의도하지 않게. 펼쳐졌다 오므려졌다. 펼쳐졌다 오므려졌다.
준호는 손을 움켜쥐었다. 아무도 조종할 수 없도록. 하지만 손은 계속 떨렸다. 움켜쥔 주먹 안에서 손가락들이 경련했다.
"준호?"
박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아니, 가까이서. 아니, 모르겠다. 시간이 뒤틀렸다. 공간이 뒤틀렸다. 준호의 의식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의 귀에만.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 이민철도 아니고, 황금의 수호자도 아니고, 종말의 시인도 아닌. 완전히 다른 것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속삭임이었다. 깊은 심연에서 올라오는 속삭임이었다.
"안녕, 도구야. 나도 게임에 참가하고 싶어."
속삭임이 준호의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더 이상 경련하지 않았다. 움직였다. 정확하게. 준호의 의도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마치 누군가 그의 팔목에 손을 얹고 움직이는 것처럼. 그것은 심연의 속삭임이 직접 준호의 신체를 조종하고 있었다.
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아무도 그를 누르지 않았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