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적
김은지의 마지막 말이 뇌수를 뚫고 지나갔다.
'넌 이미 죽었어.'
생존 의회 기록실의 형광등이 준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손에 들린 문서는 아포칼립스 3년 전 배분 우선순위표였다. 빨간 펜으로 그어진 라인. 격리 구역 = 최하위. 그 아래 손글씨로 추가된 메모: '생존 불가능 예상. 자원 배분 제외.'
준호는 문서를 뒤적였다. 수백 장의 페이지. 그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 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름이 없었다. 대신 번호가 있었다. '준호-격리 구역 배치 예정자'. 이미 죽은 것으로 분류된 이름 없는 번호.
'넌 내 빚을 진 게 아니야. 넌 내 연기의 배우일 뿐이야.'
종말의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극이 끝나면 커튼이 내려간다. 그 말은 무엇이었나. 준호는 손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피부에 가느다란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권능을 쓸 때마다 나타나는 자국. 처음에는 손가락 끝에서만 시작됐는데, 이제는 손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계처럼 감싸며,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의료진은 '정상 범위'라고 했다. 거짓말이었을까. 아니면 그들도 모르는 걸까.
준호는 기록실을 빠져나왔다. 엘리트 존의 복도는 은백색의 타일로 깔려 있었다. 아포칼립스 이전의 건축 양식—질서와 통제를 상징하는 공간. 그의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상사 이민철. 아포칼립스 당시 준호의 팀을 이끌던 남자. 그가 엘리트 존의 고위 관료가 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했다. 생존 의회 산하 자원 배분 부서 과장. 지난 3년간 놀라운 속도로 승진했다.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준호는 정보 단말기를 켰다. 엘리트 존의 네트워크는 방어가 약했다. 고위층은 자신들이 감시받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민철의 스케줄이 화면에 떴다. 내일 오전 10시, 생존 의회 본부 집무실. 혼자가 아니라 회의실에 있을 것이다. 준호는 그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하기로 결정했다.
밤은 길었다.
격리 구역과 노동자 존의 경계에서 만난 여자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름은 박서현. 나이는 준호보다 5살 아래로 보였지만, 눈빛은 훨씬 오래되어 있었다. 그녀는 환기 통로를 통해 이동하는 자들의 안내자였다. 격리 구역 출신이었다.
"넌 뭐 하려고 여기 왔어?" 박서현이 물었다. 그녀의 음성은 거칠었다. 마스크를 벗었을 때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영양 부족의 흔적이었다.
"정보."
"엘리트 존 정보?" 박서현이 웃음을 흘렸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니라 코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넌 누구야? 새벽의 횃불?"
새벽의 횃불. 성좌 개입으로부터 인류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독립 각성자 집단의 이름이었다. 준호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접촉하지 않았다.
"다른 것."
"더 위험한 것?" 박서현이 한 발 물러섰다. 그녀의 손이 허리에 있던 것 같은 자리에 갔다. 무기는 없었지만, 움직임은 훈련받은 자의 것이었다. "너 권능자네. 뭐야, 황금의 수호자한테 빌붙은 거야?"
"아니다."
"그럼 심연의 속삭임?" 박서현의 눈이 좁혀졌다. "인류 멸종파? 우릴 죽이러 온 거야?"
준호는 침묵했다. 침묵이 대답이었다. 박서현은 그것을 읽었고, 한 발 더 물러섰다.
그때 준호의 팔이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 없이.
아니, 의지가 있었다. 의지가 있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권능이 반응했다. 박서현의 주변에 시간의 금이 그어졌다. 그녀의 죽음의 시간선이 보였다. 앞으로 50년. 아니, 40년. 그 안에 폭력적 죽음이 있었다. 가능성 3가지. 격리 구역의 방사능. 엘리트 존의 숙청. 그리고—
준호의 손이 박서현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죽음의 시간선을 당기려는 충동. 그 순간 박서현의 몸이 경직됐다. 마치 죽음 자체가 그녀를 옭아매는 것처럼. 그녀의 숨이 얕아졌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박서현의 목소리가 끊어냈다. 공포와 본능이 섞인 음성.
준호의 손이 멈췄다. 그의 팔 전체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음의 권능이 박서현의 모든 가능한 죽음을 동시에 당기려는 욕망.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준호는 처음 알았다. 마치 자신의 뼈를 부러뜨리면서 저항하는 것 같았다.
"내 언니를 죽인 놈들이 있어." 박서현이 갑자기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낮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방사능 때문이라고 했어. 근데 거짓이야. 언니가 죽은 건 자원 배분을 거부했기 때문이야. 위에서 정한 거야. 언니가 감염 의심 진단을 받으니까 배분을 끊었어. 음식도, 의약품도. 그래서 죽었어."
그 말이 준호의 손을 풀었다. 죽음의 권능이 물러났다. 박서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준호가 바라봤다.
박서현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손때가 묻은 종이 사진. 아포칼립스 이전 것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박서현과 비슷한 생김새. 같은 광대뼈. 같은 눈.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준호의 기억이 흔들렸다.
아내 윤지혜의 얼굴. 동료 최준석의 얼굴. 상사 이민철의 얼굴. 그들은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박서현의 언니를 보면서 준호가 본 것은 그들의 얼굴이었다. 자신을 버린 자들의 얼굴.
"그들을 죽이려고 해." 박서현이 계속했다. "개인으로. 시스템으로. 상관없어. 다 죽어야 해."
준호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개인 복수와 시스템 파괴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개인 복수였다. 자신을 버린 자들의 죽음. 그것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성좌의 일이었다. 하지만 박서현의 언니를 본 이상, 그 구분이 무너졌다. 개인과 시스템이 겹쳐 보였다.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박서현이 그것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코웃음. 하지만 그녀도 손을 내밀었다.
손이 맞닿는 순간, 준호의 팔에 검은 선이 진해졌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금이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올라왔다. 선이 움직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시간이 소모되고 있었다. 박서현과의 접촉만으로도. 마치 그녀의 죽음이 준호의 생명을 빨아먹는 것처럼.
그 순간 준호의 신체 전체가 떨렸다. 죽음의 권능이 한 번에 폭발하려는 듯한 충동. 박서현의 모든 죽음의 가능성을 지금 당장 당겨버리고 싶은 욕망. 그녀를 죽이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계산.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억눌렀다. 뼈를 깨물면서.
"함께하자." 박서현이 말했다.
준호는 손가락을 더욱 굳게 쥐었다. 그 순간, 그의 팔뚝에서 검은 선이 빠르게 올라왔다. 팔뚝. 팔뎅이. 어깨.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그의 남은 시간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언제?" 준호가 겨우 물었다.
"내일."
박서현이 손을 놨다. 준호의 팔에 검은 선이 어깨까지 올라와 있었다. 며칠이 소모됐다. 아직 정확히 계산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확실했다. 박서현과의 접촉이 권능을 폭발시키는 메커니즘이 있었다. 그녀의 죽음의 가능성들이 준호의 생명력을 가속도로 소모시키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준호는 생존 의회 본부의 환기 통로에 있었다. 이민철의 집무실까지 직통로였다. 박서현의 정보였다. 그녀는 아르크의 지하 통로에 대해 해박했다. 격리 구역에서 탈출한 자들의 길잡이였기 때문이었다.
신호 차단기를 켰다. 엘리트 존의 감시 카메라가 먹통이 됐다. 30초. 그것이 한계였다.
준호는 집무실 창문을 통해 이민철을 봤다. 남자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변해 있었다. 3년 전보다 훨씬 창백했다. 그리고 두 손이 가늘었다. 권능자의 특징이었다. 생명력을 소모하는 권능을 쓰는 자들의 손.
이민철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준호는 신호 증폭기를 켜 음성을 포착했다. 기술이 아니라 권능이었다. 죽음의 권능은 신호까지 조종했다.
"네, 확인했습니다. 그 준호가 맞습니다. 종말의 시인의 개. 이제 그를 제거해야 합니다."
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지시 기다리겠습니다. 예, 황금의 수호자님."
황금의 수호자. 현 체제 유지를 원하는 성좌. 그리고 이민철은 이미 그 성좌와 거래를 맺었다. 비정상적인 승진의 이유가 명확해졌다. 성좌의 후원. 그리고 그 대가는 준호의 제거였다.
준호가 창문을 깼다. 유리가 산산조각났다. 경보음이 울렸다.
이민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자는 책상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준호의 손이 움직였다.
권능을 썼다. 이민철의 죽음의 시간을 30초 앞당겼다.
대가는 엄청났다. 준호의 팔이 타올 듯 뜨거워졌다. 팔뚝의 검은 선이 어깨를 넘어 목까지 올라왔다. 며칠이 소모됐다. 강도를 미계산한 채 권능을 썼다. 남은 시간이 5년 11개월로 줄어들었다.
이민철은 책상 아래에서 헐떡거렸다.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음이 30초 당겨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처럼. 마치 죽음 자체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뭐... 뭐야?" 이민철이 목이 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준호? 넌... 죽었는데?"
그 말이 준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자신을 버린 자의 입에서 나온 말. 그 순간 준호는 이민철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상사로서 자신을 이끌던 그 남자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위에 떠 있는 공포. 자신이 무엇을 한 자인지 아는 공포.
준호는 대답하려 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경비원들이 들어왔다. 방어 프로토콜이 작동했다.
준호는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3층. 낙하 거리는 10미터. 신체가 부러질 거리였다. 하지만 죽음의 권능이 그의 낙하 시간을 지연시켰다. 떨어지는 속도가 1/10로 줄어들었다. 마치 물 속에 빠지는 것처럼 천천히.
대가는 다시 소모됐다. 며칠. 남은 시간이 5년 11개월 13일로 줄어들었다.
준호는 땅에 닿았다. 다리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일어섰다. 뒤를 보지 않았다. 박서현이 기다리고 있는 지점으로 향했다.
"뭐 했어?" 박서현이 물었다. 준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도망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비원들이 다 출동했어."
"추적당하고 있어."
박서현이 멈췄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뭐?"
"황금의 수호자가 우릴 찾고 있어. 이민철을 통해."
"그럼 우리도 추적당하는 거야?"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다. 목까지 올라온 검은 선. 그것이 계속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턱. 얼굴.
"뭐야, 그게?" 박서현이 눈을 떴다.
"권능의 대가."
"얼마나 남았어?"
준호는 침묵했다. 계산하는 데만 몇 초가 걸렸다. 아포칼립스 당시의 기억 속에서 이민철의 얼굴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그어진 검은 선을 봤다. 그 선이 얼굴 절반까지 올라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
"5년."
"5년?"
"그 이상 못 산다."
박서현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민? 아니었다. 결의였다. 준호는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자신의 눈빛이기도 했으니까.
"그럼 우리 5년 안에 끝내야겠네." 박서현이 말했다.
"끝낼 게 뭐가 있어?"
"시스템을 죽이는 것. 너 말고 다 같이."
준호가 입을 열려 했다. 그 순간, 그의 폰에 신호가 들어왔다. 종말의 시인의 목소리였다.
'잘했어, 이준호. 첫 번째 연기가 끝났지. 이제 진짜 극이 시작된다. 무대 위의 모든 배우들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춤을 춰. 너의 무릎이 꺾일 때까지.'
음성 메시지가 끝났다.
준호의 팔에 검은 선이 가슴팍까지 내려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생존 의회 본부의 사이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박서현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준호가 먼저 손을 쥐었다.
"도망쳐."
둘은 달렸다. 아르크의 지하 통로로, 격리 구역으로, 어둠으로. 그들의 뒤에서는 황금의 수호자의 경비원들이 따라왔다. 그들의 앞에서는 심연의 속삭임의 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종말의 시인은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극이 이제 시작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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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준호는 박서현의 손을 쥔 채 달렸다. 지하 통로의 습한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뒤쪽에서 경비원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황금의 수호자의 추적망은 아르크 전역에 펼쳐져 있었다.
"좌회전. 여기." 박서현이 외쳤다. 그녀의 손이 준호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좁은 환기 통로였다. 성인의 몸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너비. 뒤에서 경비원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들은 통로 안에서 멈췄다. 숨을 고르기 위해. 준호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팔의 검은 선이 세게 욱신거렸다. 마치 살이 안쪽에서 타오르는 듯했다.
"얼마나 더 남았어?" 박서현이 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만 보였다.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진실이었다. 권능을 쓸 때마다 계산이 어긋났다. 30초를 당기려고 했는데 며칠이 소모되었다. 10미터를 지연시키려고 했는데 또 다른 날들이 사라졌다. 죽음의 권능은 자신의 남은 생명을 정확히 측정하지 않았다. 그저 먹어치웠다.
박서현이 준호의 손을 들어올렸다. 검은 선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반짝였다. 그녀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단지 그 선을 따라 손가락을 그었다. 마치 그것이 운명의 표시라도 되는 양.
"언니도 이런 거였을 거야." 박서현이 중얼거렸다. "몸이 서서히 죽어가는 거. 아무도 모르게."
"언니?"
"격리 구역에 남겨진 사람들. 방사능 중독. 의료진은 '진행 중'이라고만 말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안 알려줘. 마지막까지."
박서현이 손을 놨다. 그녀는 통로의 벽에 기댔다. 몸이 작아 보였다. 이 좁은 공간에서는 모두가 작아 보였다.
"넌 왜 이민철을 죽이려고 했어? 정말로?"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자신이 던져야 할 질문이었다. 자신에게.
"나는 알아." 박서현이 계속했다. "언니가 죽은 건 이민철이 아니야. 알겠지? 너도 알겠지?"
"그게..."
"자원 배분 위원회 문서. 넌 봤을 거야. 엘리트 존 우선, 노동자 존 차순, 격리 구역은 마지막.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자원이 없으면 격리 구역은 자동 폐기'라는 항목."
박서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게 누가 정한 거 같아? 이민철? 아니야. 황금의 수호자야. 그리고 그 아래 생존 의회가 있고, 그 아래 넌 있고, 그 아래 나와 언니가 있어. 그 시스템이 언니를 죽인 거야. 아무도 아닌 그 시스템이."
준호는 박서현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럼 뭘 하자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그 시스템을 부수는 거. 처음부터."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목의 검은 선이 맥박에 맞춰 움직였다. 심장이 뛸 때마다 그 선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넌 5년이 남았어. 내가 들은 말로는." 박서현이 말했다. "5년이면 충분해. 시스템을 부수기에."
"하나를 죽이는 데 며칠이 소모되는데, 시스템을 어떻게..."
"혼자 하는 게 아니야. 나도 있고, 새벽의 횃불도 있고, 격리 구역의 사람들도 있어. 그리고 엘리트 존에도 너처럼 뭔가를 잃은 사람들이 있어."
준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그는 받았다.
"이준호." 여자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명확했다. 준호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황금의 수호자의 대리인. "너는 아직도 모르는 게 많네."
"뭘?"
"넌 종말의 시인의 개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넌 우리 모두의 도구야. 모든 성좌의 예정된 극의 한 부분이야. 이민철을 죽이려고 했지? 그건 너의 선택이 아니야. 그건 종말의 시인이 정한 거야. 자원 배분 문서를 본 거? 그것도 보도록 누군가 설정한 거야."
준호의 손이 떨렸다. 박서현이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넌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넌 가장 깊게 묶여 있어. 그리고 지금 네가 하는 모든 선택이 결국 인류의 종말로 이어질 거야. 그게 최종 계획이거든."
음성이 끊겼다.
준호는 폰을 내렸다. 박서현이 그를 바라봤다.
"뭐라고?"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그것도 진실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뭔지, 왜 살고 있는지, 언제부터 죽어 있었는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박서현의 언니의 죽음은 실제였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팔의 검은 선이 이제 가슴팍까지 내려왔다. 심장 바로 위에서 멈춰 있었다. 마치 그곳을 표시하려는 것처럼.
"우리 나가자." 박서현이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여기서 머물수록 위험해."
준호는 그 손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어둠 속으로. 지하 도시의 미로처럼 얽힌 통로들 속으로. 박서현의 손이 그의 손목의 검은 선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격리 구역의 경계였다. 방사능 검사 게이트가 서 있었다. 그 너머는 죽음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영역 속에서만 그들은 안전했다. 황금의 수호자의 추적망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장소.
박서현이 준호의 손을 놨다. 그녀는 게이트의 열쇠 카드를 꺼냈다. 그것도 새벽의 횃불에서 준비한 것이었다.
"들어가자."
게이트가 열렸다. 검사기가 울렸다. 그 음성은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낼 것이었다.
준호와 박서현은 격리 구역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달라졌다. 방사능이 뒤섞인 공기. 피부에 닿는 순간 따끔거리는 듯한 감각. 준호는 숨을 얕게 쉬었다. 그의 팔의 검은 선이 가슴팍에서 맥박에 맞춰 떨렸다.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십 명. 모두 방사능 중독의 검은 선을 몸에 가지고 있었다. 팔뚝, 목, 얼굴. 어떤 이는 선이 이미 심장까지 내려와 있었다. 준호와 같은 죽음의 표식.
그들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았다.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눈빛. 하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절망이 아니라 다른 것. 분노. 아니, 더 강한 것.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의지.
"새벽의 횃불의 대표가 기다리고 있어." 박서현이 말했다. "그분이랑 얘기해야 할 게 많아. 그리고 계획을 짜야 해. 우리의 5년을 어떻게 쓸지."
준호가 따라갔다. 격리 구역의 깊숙한 곳으로. 지표면에 가까운 곳으로. 방사능이 가장 심한 곳. 그곳으로 들어가면서 준호는 자신의 팔의 검은 선이 더욱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곳이 자신의 진짜 무덤이라도 되는 양.
대기 중의 입자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죽음 자체가 공기처럼 떠다니는 곳. 준호는 숨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들이마셔야 했다. 이미 자신의 몸은 이 공기의 일부였으니까.
그곳의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오십을 넘어 보였다. 그의 몸은 준호의 것처럼 검은 선으로 덮여 있었다. 팔, 목, 얼굴. 선이 거의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마 몇 주. 며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준호인가?" 남자가 물었다.
"맞습니다."
"나는 박준영이야. 새벽의 횃불의 대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박서현이 너에 대해 말해줬어. 종말의 시인의 개. 죽음의 권능. 그리고 5년."
준호는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검은 선이 진해졌다. 박준영의 손가락이 준호의 팔에 닿는 것만으로도. 마치 죽음이 전염되는 것처럼. 두 죽음이 만나는 순간.
"우리도 5년 정도가 남았어. 대부분의 격리 구역 주민들이." 박준영이 말했다. "그 5년 안에 뭘 할 거야?"
"모르겠습니다."
"좋아. 정직한 대답이야. 그럼 이렇게 해. 우리랑 함께 배워. 뭘 하는지. 왜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박준영이 준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거야. 그 선택이 모든 걸 바꿀 수 있어. 세상을 바꾸든, 끝내든."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박준영의 손을 쥐었다.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죽음의 연대. 죽음을 공유한 자들 사이의 유대. 그리고 그 유대 속에서만 가능한 저항.
박서현이 준호의 옆에 섰다. 그녀의 손도 박준영의 손 위에 얹혔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두 같은 검은 선을 가진 자들. 죽음으로 연결된 자들.
그 순간, 준호의 폰에 다시 신호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종말의 시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톤이었다.
'이준호. 넌 이제 올바른 무대 위에 섰어. 더 이상 혼자가 아니지. 하지만 기억해. 극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어. 넌 그 끝을 피할 수 없어. 오직 어떻게 죽을 것인가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야.'
음성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야. 넌 이미 죽음을 선택했어. 지금 이 순간. 그들과 함께 손을 잡는 순간, 넌 이미 다른 극본을 쓰기 시작했어. 내가 정한 극본을 벗어났어. 아니면... 더 깊이 빨려 들어갔거나.'
음성이 끊겼다.
준호는 폰을 내렸다. 박서현이 그를 바라봤다. 박준영도 그를 바라봤다. 격리 구역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라봤다.
"뭐라고?" 박서현이 물었다.
"모르겠어." 준호가 다시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몰랐다. 그의 선택이 성좌의 계획을 벗어났는지, 아니면 더 깊이 빨려 들어갔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의 손이 박준영의 손 위에 있다는 것. 박서현의 손이 그의 손 위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 모두가 같은 죽음의 표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고 그 죽음이 무엇을 남길 것인가.
준호의 팔의 검은 선이 가슴팍에서 맥박에 맞춰 떨렸다. 5년.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5년 안에, 그들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시스템을 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에 균열을 낼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이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박준영이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가락이 준호의 검은 선 위에 얹혔다. 마치 그것이 형제의 표식인 양.
"우리는 죽은 자들의 전쟁을 할 거야.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게."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서 있었다. 격리 구역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죽음의 영역에서. 모두 같은 검은 선을 가진 채로.
극은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