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리 구역의 벽은 검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산소 농도 표시기는 붉은 불을 깜박였고, 준호의 폐는 매 숨마다 타들어갔다. 육십 시간. 의료진은 그렇게 말했다. 육십 시간 안에 방사능 중독이 임계점을 넘는다. 그 후론 신체가 자동으로 붕괴된다. 뼈가 부스러지고, 내장이 액화된다. 죽음이 아니라 용해(dissolution)다.
준호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삼십대로 보였지만, 피부는 칠십대의 주름으로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이 까맣게 괴사되고 있었다. 남자는 준호를 바라봤다.
"물."
한 글자였다. 목이 완전히 헐어서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준호는 자신의 물병을 집어 들었다. 남은 물은 한 모금이었다. 자신도 이 물을 마셔야 했다. 육십 시간을 버티려면.
그런데 왜 버티려고 하는가?
준호는 손을 멈췄다. 위층의 엘리트 존에 있는 그 여자를 만나야 했다. 아내 김은지. 아포칼립스 첫날 자신을 남기고 혼자 올라간 그 여자. 자신이 죽기 전에, 반드시 그 여자의 얼굴을 봐야 했다. 무엇이든 말해야 했다.
그 순간 목소리가 울렸다. 공중에서, 또는 준호의 머릿속에서—구분이 불가능했다.
"계약하겠는가?"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격리 구역의 어둠 속에서 형태 없는 음성만 들렸다.
"나는 종말의 시인이다. 그리고 넌 죽고 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 준호의 심박수는 분당 35회. 정상의 절반도 안 됐다. 손가락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고, 피부의 일부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육십 시간 남은 생명을 팔지 않겠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나의 빚을 넘겨받는 것. 열 살 치 빚을 네 목숨으로 갚는다면, 나는 너에게 칠 년을 주겠다."
준호는 웃음이 나왔다. 삶이 남아 있었다면 웃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육십 시간 안에 용해될 신체 앞에서, 그리고 그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절박함 앞에서, 무엇이 남겨질 것인가?
"칠 년이면 충분한가?"
종말의 시인의 목소리는 극도로 부드러웠다. 마치 배우를 위로하는 연출가처럼.
"충분하다."
준호가 답했다.
그 순간 세계가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세계가 갈라졌다. 준호의 눈앞에 무수한 선이 펼쳐졌다. 각 선은 누군가의 시간을 나타냈다. 탄생, 죽음, 병, 회복. 모든 시간의 선이 준호의 손 안에 있었다.
준호는 바닥의 남자를 봤다. 그 남자의 시간의 선은 가장 가까웠다. 색은 검은색이었다. 죽음의 색. 선은 지금, 이 순간 끝나야 했다.
준호는 손을 움직였다. 선을 한 칸 뒤로 밀었다. 한 시간. 선의 끝이 한 시간 뒤로 밀려났다.
남자의 눈이 떠졌다.
처음으로, 눈빛이 돌아왔다. 죽음에서 풀려난 눈. 남자는 눈물을 흘렸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손가락이 까맣게 괴사된 채로, 남자는 울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순간 준호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한 줄기가 아니었다. 콧구멍에서 흘러나온 피는 입술을 적시고, 턱으로 흘렀다. 동시에 심박수가 급격히 내려갔다. 분당 25회. 육십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십 시간이었다. 열 시간을 한 번의 권능으로 태워버렸다.
하지만 남자는 살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넌 내 빚을 진 게 아니야."
종말의 시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더 명확했다.
"넌 내 연기의 배우일 뿐이야. 극이 끝나면 커튼이 내려간다."
준호는 일어섰다. 몸은 아팠다. 신경이 모두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더 강한 것이 준호를 움직였다.
분노였다.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 김은지. 상사 이민철. 함께 일하던 동료들. 그들은 아포칼립스가 시작되자마자 엘리트 존으로 도망쳤다. 준호만 격리 구역에 남겨졌다. 준호만 죽도록 버려졌다.
손가락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벗겨지고, 그 아래로 검은 금이 올라왔다. 마치 깨진 도자기의 금처럼. 생명이 새어나가는 자국이었다.
"그들도 죽을 거야."
준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미 죽음의 세계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자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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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구역을 떠나는 길은 지하 통로였다. 준호는 의료진을 피해 비상 출입구를 찾았다. 손가락의 검은 금이 손목까지 올라왔다. 매 순간 시간이 소모되고 있었다.
아르크의 구조는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하층의 격리 구역에서 중층의 노동자 존, 그리고 최상층의 엘리트 존. 준호가 가야 할 곳은 최상층이었다.
비상 통로의 사다리를 올랐다. 물이 떨어지고, 곰팡이 냄새가 진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가 맑아졌다. 노동자 존의 경계 근처였다. 경비원들이 보였다. 몸에 무기를 찬 각성자들. 하지만 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한 경비원이 준호를 봤다.
"거기서 멈춰. 격리 구역 주민이냐?"
준호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의 검은 금이 드러났다. 경비원의 얼굴이 굳었다. 방사능 중독의 신호였다.
"들어가면 안 된다. 오염 위험이 있다."
그 순간 경비원의 시간의 선이 준호 눈에 보였다. 얇은 검은 선. 죽음이 육 개월 뒤에 다가와 있었다. 심장병이었다. 의료 기록으로는 드러나지 않았겠지만, 시간의 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준호는 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냥 지나갔다.
"이봐, 위험하다니까!"
경비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준호는 계단을 계속 올랐다.
노동자 존은 붐볐다. 사람들이 물자를 나르고, 일거리를 찾았다. 아르크의 심장이 뛰는 곳이었다. 준호는 군중 속으로 섞여 들었다.
엘리트 존으로 가는 통로 입구가 보였다. 생존 의회의 관료들이 지나가는 길. 준호는 한 관료를 따라 들어갔다. 보안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 순간 준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빛이었다.
엘리트 존의 불빛은 따뜻했다. 백열등이 아니라 진짜 전기 불빛이었다. 노동자 존의 형광등과는 비교도 안 됐다. 사람들의 옷도 깨끗했고, 얼굴도 살이 올라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준호는 한 여성을 봤다.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 그 얼굴은 준호가 잘 알고 있었다.
김은지였다.
예전의 직장 동료. 아포칼립스 이전엔 같은 팀에서 일하던 사람. 아포칼립스가 터지자마자 가장 빨리 엘리트 존으로 올라온 사람이기도 했다.
준호는 다가갔다.
"은지."
여성이 돌아봤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준호?"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넌... 어떻게..."
"격리 구역에서 올라왔다."
"그건 불가능해. 격리 구역에서 올라오면 오염된 거야. 넌 아직도..."
김은지는 준호의 손을 봤다. 검은 금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말 올라온 거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공포였다. 하지만 그 아래 더 깊은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아닌 다른 것. 준호는 읽으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근데 넌..."
"살아 있지."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사람들을 찾을 거야. 날 버린 사람들."
김은지의 몸이 경직되었다.
"뭐... 뭐라고?"
"모두 찾을 거야. 그리고 죽음을 앞당길 거야. 아포칼립스 당시 날 버린 모든 사람들."
준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무서웠다. 감정이 없는 음성은 실행의지를 의미했다.
"나중에."
준호가 돌아섰다.
그 말 뒤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남겨져 있었다. 김은지의 얼굴에 떠오른 두려움. 죄책감의 그림자. 그리고 무엇인가 더. 그것은 마치 자신이 준호를 죽인 것 같은 절망이었다.
손목의 검은 금이 팔뚝까지 올라왔다. 시간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오십 시간.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생존 의회 건물로 향했다. 엘리트 존의 중심부에 있는 그곳. 이민철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아포칼립스 당시 준호의 상사. 준호를 가장 먼저 버린 사람.
경비원들이 준호를 막아섰다.
"이곳은 출입 제한 구역입니다."
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경비원의 시간의 선을 봤다. 삼십 년. 아직 멀었다. 그렇다면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경비원 뒤로 보이는 건물의 입구에는 준호가 찾던 인영이 있었다. 이민철의 시간의 선. 검은색이었다.
준호의 손이 움직였다.
엄청난 통증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권능의 범위를 확대했다. 건물 전체의 시간 흐름을 감지했다.
코에서 피가 흘렀다. 입에서도.
하지만 준호는 웃음을 지었다.
오십 시간이 아니라 사십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민철의 시간은 이제 준호의 손 안에 있었다.
"당신은 칠 년을 받았다. 어떻게 쓸 것인가?"
종말의 시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해져 있다. 모두를 죽이고, 그 다음에 자신도 죽는 것. 극의 막이 내려간다."
준호가 중얼거렸다.
"좋은 극이군."
종말의 시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 속에서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의 도구인지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고, 시간은 이미 흐르고 있었다.
경비원들이 준호를 제압하려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동작은 느렸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준호의 감각은 이미 다른 차원에 있었다. 죽음의 선율을 듣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 경비원의 심장 박동이 한 박자 밀렸다. 그 사나이는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죽음은 이미 그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놔둬."
이민철의 목소리가 건물 안에서 울려 나왔다. 현관의 자동문이 열렸다. 검은 정장의 남자가 나타났다. 준호의 기억 속 상사. 아포칼립스 당시 가장 먼저 위로 올라간 사람.
"준호? 정말로?"
이민철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놀라움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나?"
준호가 물었다.
"격리 구역에서 올라오는 건 불가능해. 방사능 오염이... 넌 어떻게..."
"거래했다."
준호가 한 발 더 다가갔다. 이민철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누구와?"
"성좌들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나? 신이라고 불러도 될 존재들이. 그들이 우리를 택했고, 우리는 그들의 도구가 되었다."
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 끓어오르는 게 있었다. 마그마처럼.
"칠 년을 받았다. 그 안에 할 일이 있다."
이민철의 눈이 흔들렸다. 정신을 차린 경비원들이 다시 움직이려 했다.
준호는 손을 올렸다.
그들의 시간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역방향으로 흘렀다. 경비원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죽음과 생명의 경계선에서 떨고 있었다.
"넌 내 상사였어."
준호가 이민철에게 말했다.
"아포칼립스 첫날, 난 널 찾아갔다. 살려달라고 했다. 우리 팀은 격리 구역으로 내려갈 거라고 했다. 그런데 넌 뭐라고 했지?"
이민철의 입술이 떨렸다.
"준호, 제발..."
"'미안하지만 자리가 없다'고 했어."
준호의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그 순간 이민철의 신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폐가 수축했다. 뇌신경이 동시다발로 고장 났다. 죽음의 시간이 현재로 압축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이민철이 외쳤다.
"내가 널 버린 게 아니야! 그건 결정이 아니었어! 위에서 정한 거야! 난 그냥..."
"실행했지."
준호가 자른다.
한 마디는 칼날처럼 이민철의 항변을 끊었다. 이민철의 신체가 더욱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마지막 숨을 쉬려 했지만, 준호의 권능이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의 시간을 앞당기는 것. 그것이 죽음의 권능이었다.
이민철이 쓰러졌다. 가슴이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눈은 열린 채로 고정되었다. 죽음은 이미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경비원들의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였다. 살아 있다는 것의 고마움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준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트 존의 건축은 정교했다. 아래층의 노동자 존이나 격리 구역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대리석 바닥, 백열등 조명, 순환되는 공기. 여기서는 죽음이 먼 이야기였다.
생존 의회의 기록실로 향했다.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종말의 시인의 권능으로 인한 감지. 그 방에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기록이 있다는 것을.
문을 열었다.
기록실의 책장들이 준호를 맞이했다. 수천 권의 서류와 데이터. 그 안에는 아포칼립스 이후 생존자들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준호는 한 폴더를 집어 들었다.
'배분 우선순위 결정 문서 - 아포칼립스 3일차'
손이 떨렸다. 이 문서 안에 있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를 결정한 기준.
그리고 그 기준에서 준호의 이름은 없었다.
"격리 구역으로 내려갈 자: 직급 5 이하, 기술 가치 낮음, 부양 가족..."
준호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아니, 검은 금이 눈까지 올라왔다. 피부 표면에 금이 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권능이 폭주하려 했다.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건물의 조명이 깜박였다. 시간의 흐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시간의 선이 준호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
여성의 목소리였다.
준호가 돌아봤다.
그곳에는 김은지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준호가 아래층에서 본 것과 달랐다. 더 이상 공포나 죄책감이 아니었다.
결연함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김은지가 말했다.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하지만 넌 혼자선 못 해."
그녀가 한 발 다가갔다. 준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손가락도 검은 금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금은 팔뚝까지 올라가 있었다.
"왜냐하면 넌 이미 죽었거든."
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뭐라고?"
"격리 구역에 내려가던 날. 아포칼립스 3일차. 넌 이미 거기서 죽었어. 방사능 오염으로."
김은지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슬펐다.
"그 다음부터 넌..."
그녀가 준호의 손을 잡았다. 검은 금이 그들의 손을 타고 흘렀다.
"...성좌의 연기였어. 우리 모두가."
준호의 손에 들린 문서가 떨어졌다. 종말의 시인의 말이 다시 울려 났다.
*'넌 내 연기의 배우일 뿐이야. 극이 끝나면 커튼이 내려간다.'*
그 말의 무게가 이제 준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신의 신체를 들여다봤다. 검은 금이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간의 감지가 왜곡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였다. 자신이 격리 구역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너도... 죽었나?"
준호가 물었다.
김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검은 금이 더욱 빠르게 목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죽었어. 그리고 성좌들은 우리를 움직이고 있어. 넌 복수의 배우이고, 난..."
그녀가 준호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에는 결연함과 슬픔이 함께 있었다.
"...그 복수를 멈춰야 할 배우야. 박서현과 함께."
그 순간, 건물 전체가 울렸다.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침입자 감지. 침입자 감지."
기계음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준호나 김은지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벽의 화면에 나타난 것은 다른 존재들이었다. 노동자 존에서 올라오는 무리. 그들의 손가락도 검은 금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박서현. 새벽의 횃불이라 불리는 그. 그의 시간의 선은 준호의 것과 같은 검은색이었다.
그가 건물의 벽을 부수며 진입했다. 손에 들린 것은 검은 금으로 이루어진 무기. 성좌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박서현이 움직이고 있어."
김은지가 중얼거렸다.
"새벽의 횃불 세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녀가 다시 준호를 봤다.
"황금의 수호자도. 심연의 속삭임도. 모든 성좌들이 이 아르크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어."
준호의 시간의 선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게 아니라 갈라지고 있었다. 여러 개의 선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다. 각각의 선은 다른 성좌의 권능을 나타냈다. 그들의 싸움이 아르크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준호가 물었다.
김은지는 준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그녀의 검은 금이 준호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극을 끝내야 해. 너와 나, 그리고 박서현. 우리 셋이 함께."
"어떻게?"
"성좌들의 연기를 멈추는 방법은 하나야. 배우들이 무대를 떠나는 것. 우리가 죽음을 거부하고, 살아남는 것."
김은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그게 가능한가?"
"모르겠어. 하지만 시도해야 해. 이 극이 끝나기 전에."
건물 밖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박서현의 세력이 생존 의회의 방어선을 뚫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준호는 김은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극을 끝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