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회의실 문이 열렸다.

이사장의 박수가 울렸다. 정 이사의 미소도 따라왔다. 프로젝트팀 전원이 일어섰고, 준호는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준호, 좋은 결과 내줘서 고마워. 기대 이상이야."

이사장 신기호는 준호의 어깨를 쳤다. 정 이사가 곁에서 덧붙였다.

"전략팀의 역량이 여실히 드러났다. 준호 팀장, 이번 분기 해외 지사장 발령은 확정이야. 축하해."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숨을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지은은 자신의 손가락이 노트북 위에서 펼쳐지지 않음을 알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준호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은을 보지 않았다.

강민준과 혜린이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혜린의 눈이 지은을 스쳤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입 모양을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 이사와 이사장도 나갔다. 준호가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서울의 오후 햇빛이 그의 등을 밝혔다.

지은은 앉아 있었다.

"넌 선택했어?"

준호의 목소리는 창문 너머에서 왔다. 돌아서지 않은 채 물었다.

"네?"

"새 회사. 결정했어?"

지은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준호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창빛에 반쯤 잠겨 있었다.

"해외 지사장 발령을 받으셨어요."

"그래. 3개월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해내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했어. 나는 이미 선택했어."

"뭘요?"

준호가 걸어왔다. 회의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멈췄다.

"너를. 진급도, 해외 지사도 상관없어. 나는 너를 선택할 거야."

지은은 침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들었는지 재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이미 공기 중에 있었고,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문자처럼 남아 있었다.

"왜 그런 말을..."

"넌 뭘 선택할 거야?"

준호는 테이블을 돌아 그녀 옆에 섰다. 지은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자신의 팔 위를 지나갔다.

"팀장님, 그건 불공평한 거예요."

"뭐가?"

"당신이 먼저 다 결정해버리는 거. 나는 항상 당신의 선택 뒤에서 따라가는 거."

지은이 일어섰다. 돌아서서 준호를 봤다. 그의 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5년 전에 당신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걸 받아줬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자신을 희생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은."

"근데 이제 알았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포였어요. 누군가에게 버려질까봐 두려워서 미리 자기를 버린 거였어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는 일도..."

지은이 한 발 물러섰다.

"같은 거 아니에요?"

"뭐?"

"당신이 나를 선택한다고 말하면, 나는 또 당신 때문에 나를 포기하는 거예요. 당신이 해외 가는 대신 나를 택했으니까. 그럼 나는 평생..."

"그래서 뭐? 넌 새 회사 가?"

"아뇨."

지은의 대답은 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선택했으니까가 아니라,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았으니까요."

준호가 한 발 다가섰다.

"뭘 원하는데?"

"회사를 나갈 거예요."

"지금?"

"아뇨. 3개월 프로젝트를 끝낸 후에요. 그리고..."

지은이 준호의 눈을 직접 봤다. 5년 동안 이렇게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감싸지 않으면서.

"당신도 해야 해요."

"뭘?"

"회사를 나가야 해요."

준호의 얼굴이 움직였다. 입 모양이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왜?"

"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선택하는 게 사랑이라면, 나도 당신을 선택해야 해요. 그런데 난 회사를 선택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은이 숨을 쉬었다. 깊게.

"당신도 회사는 선택하지 말아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오후 햇빛이 여전히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회의실 벽의 프로젝트 차트들이 무언의 증거로 남아 있었다.

"우리 둘 다 떠나는 거야?"

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는 지은의 말을 천천히 되씹었다.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다시 벌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초가 흘렀다. 그의 턱이 조였다가 풀렸다.

지은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두려움이 스쳤다. 그 다음 깨달음. 마지막으로 결의.

"좋아."

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선택할게. 너를. 회사 말고 너를."

"당신이 정말 그럴 거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뭐?"

"회사 밖에서. 임원층 밖에서. 당신이 야심을 잃었을 때도 나를 선택할 거 맞는지."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그걸 어떻게 확인할 거야?"

"모르겠어요. 근데 당신도 알고 싶을 거 같아요. 나도."

지은이 회의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준호가 따라왔다. 그들은 나란히 복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지은이 버튼을 눌렀다. 숫자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인사팀으로 가자."

준호가 말했다.

"뭐 하러요?"

"우리 둘 다 그만두겠다고 말할 거야."

"지금?"

"지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임원층 복도에서 이사장과 정 이사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지은과 준호를 보고 멈췄다.

"어?"

정 이사가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이사장의 눈이 준호에서 지은으로 옮겨갔다. 그 눈빛은 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는 이사장을 정면으로 봤다.

"저는 해외 지사장 발령을 거절하겠습니다."

정 이사의 얼굴이 굳었다. 준호의 주먹이 옆구리에서 조였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그것을 더 세게 쥐었다. 몇 초가 흘렀다. 침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를..."

"팀장님."

지은이 준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이사장을 정면으로 봤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선명했다.

"저도 회사를 나가겠습니다."

이사장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이었고, 다음에는 분노가 올라왔다.

"뭐라고?"

"3개월 프로젝트는 완료했습니다. 약속은 지켰어요."

지은이 한 발 물러섰다.

"그래서 이제는 내 인생을 선택할 차례예요."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울렸다. 음향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이사장의 턱이 움직였다. 정 이사는 준호를 노려봤다.

"팀장,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정 이사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본인 판단입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손가락 끝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판단?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키웠는데 판단이라고?"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낮았지만 무거웠다. 30년 경영진 경험이 담긴 그 목소리는, 평사원 지은에게는 압박이었고 준호에게는 낙담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죠? 내일 이사회에 보고되는 거 아십니까?"

지은이 준호를 봤다. 준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턱이 조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유가 있습니다."

준호가 드디어 이사장의 눈을 봤다. 그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 자식이."

정 이사가 한 발 나섰다.

"우리가 너한테 진급 기회를 줬는데, 너는 회사를 팬다고? 그 여직원 때문에?"

그의 눈이 지은을 향했다. 지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시선을 받아냈다.

"아닙니다."

준호가 말했다.

"제 판단입니다."

"판단이라고? 너 경력 끝났다. 알아? 이 정도 배신 행위는 업계 전체에 소문난다. 너는 앞으로 어디도 못 간다."

정 이사의 말이 계속됐다. 그것은 위협이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서울 IT 업계에서 대기업 임원에게 선택받지 못한 직원은, 실제로 어디도 못 간다. 지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준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준호는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요."

"뭐가 웃겨?"

"아뇨. 그냥... 제가 뭘 잃어야 얻는 건지 알았어요."

준호가 지은을 봤다. 그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5년 동안 제가 잃었던 거."

지은이 말을 꺼냈다.

"팀장님, 이건 너무—"

"괜찮습니다."

준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지은을 향한 손이었다.

"이제 정말 선택이에요."

이사장이 한 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무언가가 스쳤다. 분노일 수도, 실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산이었다. 계산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나가."

이사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짓은 두 사람을 향했다.

"이 회사에서 나가."

"네, 알겠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지은은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준호를 봤다. 준호도 지은을 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만났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들의 눈은 같은 색깔로 빛났다.

"사표를 언제까지 내야 하나요?"

준호가 물었다.

"지금."

이사장이 대답했다.

"인사팀에 가서 지금 내려."

"알겠습니다."

준호가 고개를 숙였다. 정 이사는 여전히 준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장은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실망한 경영진의 그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왔다. 문이 열렸다.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차가웠다.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준호가 속삭였다.

"뭐가?"

"넌 이사장한테 직접 사표를 내야 하는데, 내가 먼저 말해버렸어."

"상관없어요."

지은이 말했다.

"이미 결정했으니까."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문이 닫혔다. 숫자들이 내려갔다. 1층. 사무실 층. 인사팀 층.

"너 정말 괜찮아?"

준호가 물었다.

"진급도 없고, 경력도 망쳤고, 앞으로 이 업계에서 일할 수 없어. 다 내 때문이야."

"당신이 나를 선택했으니까요."

지은이 대답했다.

"그럼 난 당신을 선택합니다. 그 대가가 뭐든."

"그것도 사랑이야?"

"네."

지은이 준호를 봤다.

"5년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알았어요.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선택하되 자기도 함께 선택하는 거예요."

준호가 지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럼 우리 뭐 할 거야? 지금부터."

"모르겠어요."

지은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게 무섭지 않아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사무실 로비가 보였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누구도 이 두 사람이 방금 경력을 버렸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준호와 지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인사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 인사팀 사무실이 있었다. 지은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팀장님."

지은이 말했다.

"뭐?"

"우리가 정말 이 일을 하고 있는 거 맞아요?"

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지은의 손을 잡은 채 계속 걸었다.

"응."

"지금 정말 사표를 내고 있는 거 맞아?"

"그래."

"그럼 우리 뭐가 될 거예요?"

준호가 발을 멈췄다. 지은도 멈췄다. 그는 지은을 봤다.

"모르겠어.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한 번 시작하는 거 같아. 그때는 너는 신입 마케터고 나는 너의 멘토였어. 이제는..."

"그냥 우리가 되는 거 아닐까?"

지은이 말했다.

"팀장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고, 그냥... 우리."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5년 동안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 야심이 없는, 계산이 없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인사팀 사무실 문을 밀었다.

그 안에는 HR 매니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고 눈을 떴다.

"어? 팀장님 뵙기 드뭔데."

"사표 내러 왔어."

준호가 말했다.

"뭐? 지금?"

"지금."

"이... 이사장님 허락 받으신 거예요?"

"방금 받았어."

준호가 지은을 봤다.

"둘 다."

HR 매니저가 화면을 켰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표 양식이 나타났다.

"날짜는 언제로?"

"오늘."

"정말요?"

HR 매니저가 준호를 다시 봤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지은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프린터 음이 울렸다. 사표 용지가 나왔다. 준호가 펜을 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서명을 완성했다. 지은이 펜을 받았다. 그것도 완성했다.

HR 매니저가 두 매의 사표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럼... 퇴직금은?"

"빨리 처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HR 매니저가 서류를 정리했다. 그 순간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리크루터 김 과장'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새 회사의 오퍼 담당자였다.

지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뭐 했어?"

준호가 물었다.

"새 회사 오퍼 거절 전화예요."

지은이 말했다.

"지금은 받을 수 없어."

"나중에 연락해?"

"네. 내일쯤."

지은이 준호를 봤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정해진 후에."

두 사람이 인사팀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평온했다. 아무도 두 사람이 방금 떠나간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마케팅팀 평사원 지은도, 전략팀 팀장 준호도.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지은이 준호에게 물었다.

"이제 뭐 해요?"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근데 한 가지는 확실해."

"뭐?"

"넌 혼자가 아니야."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정말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타고 내려갔다.

그 순간, 옥상 계단에서 발걸음이 들렸다.

혜린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지은의 짐을 들고 있었다. 지은의 데스크 물품들이었다. 지은이 미리 연락해둔 것이었다.

"어? 넌 왜?"

지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물었다.

"당신 표정 봤거든. 오늘 나갈 거라는 거."

혜린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내가 맞았어?"

지은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혜린을 안았다.

"고마워."

"뭐가? 난 뭐도 안 했는데."

"있어줘서."

준호가 혜린을 봤다. 혜린도 준호를 봤다.

"당신이 또 상처 주면 진짜 못 봐."

혜린이 말했다.

"안 그럴 거예요."

준호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선택한 사람이니까."

로비 출입구로 나갔다. 종로 IT 그룹의 자동문이 열렸다. 서울의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오후 5시 42분. 퇴근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은도, 준호도, 혜린도 그 흐름에 섞였다.

"이제 정말 우리 뭐 할 거야?"

혜린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지은이 대답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무섭지 않아요."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서울의 저녁 하늘이 그들 위에 펼쳐져 있었다.

3개월의 약속은 깨졌다.

새로운 약속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함께한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그들도 알 수 없었다. 뒤에서 정 이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지은과 준호의 이름이 업계 소문에 오르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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