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저녁 5시 42분, 종로 IT 그룹 로비.
지은과 준호는 이사장실 앞 대기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혜린이 지은의 짐을 챙겨주던 장면은 이미 2시간 전의 일. 이제 남은 것은 최종 확인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별'이었다.
"들어가자."
준호가 일어났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는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다. 이미 결정한 사람의 눈이었다.
지은도 일어섰다. 신발 끈을 다시 묶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손이 할 일을 찾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사장 신기호가 책상 뒤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정 이사가 서 있었다. 조명이 유독 밝았다. 창밖으로는 서울 도시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깜빡거렸다.
"앉아."
이사장이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준호와 지은이 나란히 앉았다. 책상 위의 두 개 폴더가 보였다. 한 개는 'CHO JUNHO - PROMOTION PLAN', 다른 하나는 'JI EUN - SEPARATION AGREEMENT'였다.
"먼저 너부터."
이사장이 준호를 바라봤다. 정 이사가 한 발 물러섰다. 이것도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상사에게 길을 양보하는 척하면서, 실은 준호의 대사를 기록하기 위해 거리를 확보하는 것. 정 이사의 수법이었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 회사를 떠날 거 같습니다."
침묵이 떨어졌다. 정 이사의 얼굴이 경직됐다.
"뭐라고?"
이사장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에 톤이 내려갔다. 확인하는 목소리였다. 아직 믿지 않는 목소리였다.
"3개월 프로젝트를 완료한 후에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
이사장이 책상에 팔을 올렸다. 정 이사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해외 지사장 자리가 좋은 기회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그 자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준호가 지은을 바라봤다. "지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알게 됐습니다. 그건 이 회사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이사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건지 알고 있나? 넌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어. 그런데 이걸 버려? 이 회사에서 너 같은 인재는 드물어. 다시 생각해봐."
"생각했습니다. 여러 번."
"아니야. 넌 아직 젊어서 모르는 거야. 지금 선택이 20년 후 너의 인생을 결정해. 그 책임을 질 수 있겠어?"
정 이사가 끼어들었다.
"조 팀장, 이건 좀 무리한 결정 같은데요. 프로젝트 완료까지는 아직 2주가 남았습니다. 그때까지만 다시 생각해보시죠."
"2주 후에도 같은 결정을 할 겁니다."
"정말?"
"네."
이사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문 쪽으로 가서 서울 야경을 바라봤다. 이것도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침묵으로 압박하는 전술이었다.
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준호가 자신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는 거였다. 그 생각이 자신을 짓눌렀다. 죄책감이 목을 조였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지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준호는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게 사랑인가, 아니면 공모인가. 그 경계가 흐려졌다.
"잠깐만요."
지은이 입을 열었다. 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에는 이미 물음이 가득 차 있었다.
"저는 새 회사로 가겠습니다."
이사장이 돌아섰다.
"뭐?"
"리크루터 김 과장에게 최종 답변을 보내겠습니다. 내일 입사합니다."
정 이사가 웃음을 흘렸다.
"아, 그래서 이렇게 나온 거구나. 너희가 짜고 들어온 거네."
"아닙니다."
지은이 일어섰다. 준호도 일어났다.
"저는 이 결정을 혼자 하는 거예요. 팀장님이 아닌 저 자신을 위해서. 지난 5년간 저는 누군가를 위해 제 진심을 숨겼습니다. 제 가치를 낮춰 왔습니다.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어요.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장이 가만히 지은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조롱의 웃음이었다.
"그래, 그럼 가. 그런데 말이야, 이 업계는 좁아. 너희가 뭘 했는지 다 알려질 거야. 진급을 거절하고, 새로운 기회를 버렸다고. 업계 전체에 소리 없이 너희 이름이 박히는 거야. 그걸 견딜 수 있겠어?"
정 이사가 덧붙였다.
"그래, 우리가 퍼트릴 리는 없겠지만, 이 정도 뉴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고. 너희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지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건 협박이었다.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준호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지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회사의 논리로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는 우리의 논리로 살 겁니다. 그게 뭔지는... 우리가 증명할 테니까요."
이사장이 책상 위의 폴더를 집었다. 프로모션 플랜을 찢으려는 듯한 제스처였다. 하지만 찢지는 않았다. 대신 쓰레기통에 던졌다.
"가."
지은과 준호는 돌아섰다. 발걸음이 길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이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 정도 배팅으로는 부족해. 너희는 이미 떨어지는 돌이야.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문이 닫혔다.
복도는 조용했다.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지은의 다리가 흔들렸다.
"지은."
준호가 팔을 감싸 안았다.
"여기 앉자."
두 사람은 복도의 벤치에 앉았다. 사무실 불빛은 여전히 창밖으로 새어 나왔다. 야근하는 직원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지은은 준호의 팔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무너졌다. 지난 5년간 견뎌낸 침묵이,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며 유지해온 관계가,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지우던 모든 것이.
"내가 너한테 폐 끼쳤어. 미안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에요."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촉촉했다.
"그런데 왜 새 회사를 포기했어? 그건... 내가 원한 게 아닌데."
"포기한 게 아니에요."
지은이 천천히 준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확신이 아니라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뭐예요?"
"제 선택이니까요."
"뭐가 다른 거야?"
지은이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한 선택인지, 아니면 준호를 위한 또 다른 희생인지. 그 경계가 너무 가까웠다.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지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팀장님 때문에 제 진급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새 회사를 선택하면 우리가 같은 입장이 되니까... 그럼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진짜 제 선택인지는 모르겠어요. 이게 맞는 건지도."
준호가 지은을 끌어안았다. 말 없이. 오래.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은이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함께 알아가는 거야. 이게 맞는 선택인지, 아니면 둘 다 미쳐버린 거인지."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확신의 손잡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손가락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3개월 약속을 깬 건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세요."
"왜?"
"이번엔 우리가 함께 선택한 거니까요."
그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지은도 준호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처음으로 그들은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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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올라가는 길. 두 사람의 발걸음은 서툴렀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이 건물의 옥상은 서울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강남에서 강북까지, 한강을 가로질러 펼쳐진 도시 전체가 보였다. 저녁빛이 한강을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옥상 난간에 기댄 지은과 준호.
바람이 불었다. 지은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준호가 그 머리카락을 손으로 걷어주려다 멈췄다. 손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했다. 지은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는 건데요?"
"모르겠어. 뭐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럼 그냥 있으면 돼요."
준호가 지은 옆에 선 채로 서울 전체를 바라봤다. 수천 개의 불이 켜지고 있었다. 각각의 불 뒤에는 누군가의 선택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결정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틀렸을 거고, 맞았을 거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거였다.
준호가 지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확신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이사장의 협박이 떠올랐지만, 그 협박이 실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옆에 있는 사람의 손 온기였다. 그리고 그 손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적어도 지금은.
"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르겠어."
"뭐?"
"진짜 모르겠어. 내일 뭐 할지도 모르고, 다음달 어디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준호가 지은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게 무섭지 않아."
지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 눈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두려움이 섞인 빛이었다.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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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내려가는 길.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은은 자신의 퇴사 서류를 들고 있었다. 준호도 마찬가지였다. 두 장의 서류. 같은 결정. 다른 이유.
로비에 도착했을 때 혜린이 서 있었다. 손에는 지은의 짐이 들려 있었다.
"다 챙겼어?"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나가면 돼."
혜린이 지은을 안았다. 말 없이. 오래.
"진짜 떠나는 거야?"
"응. 이번엔 내가 선택한 거야."
혜린이 물러나며 지은의 얼굴을 봤다. 5년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두려움도 있고, 희망도 있고, 불안함도 있는. 그렇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표정이었다.
"좋아. 그럼 난 뭘 할까?"
"당신도 나와."
"뭐?"
"이 회사, 정신 없어. 너도 나와."
혜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생각해봐야지. 너한테 폐 끼치고 싶진 않으니까."
"폐 아니에요."
준호가 말했다. 혜린이 준호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5년간 회사에서 본 적 없는 표정. 그 팀장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부드러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지은 친구 고마워요. 이 사람을 지켜줘서."
"당신이 지켜주는 게 낫지 않을까?"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 뒤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강민준이었다.
"팀장님, 지은 이사님. 행복하세요."
지은이 뒤를 돌아봤다.
"당신도 여기서 잘 지내. 이 사람한테 잘 배워."
"네. 감사합니다."
강민준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 뒤에는 축복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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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뒤.
이사장 신기호의 집무실.
정 이사가 두 장의 서류를 올렸다. 같은 날짜. 같은 시간. 준호 팀장과 마케팅팀 평사원 지은.
이사장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네. 동시 퇴직입니다."
이사장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었다. 같은 내용. 같은 서명. 같은 결정.
"이 정도면 좀 심한 거 아니냐? 내가 준호한테 해외 지사장까지 제안했는데."
"네, 이사장님."
"업계에 알려. 이 정도 배신은 대가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알겠습니다."
이사장이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 그것이 가장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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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회사의 새로운 사무실.
창밖으로는 강남역이 보였다. 종로 IT 그룹보다 훨씬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준호와 지은은 처음으로 같은 레벨에서 일할 수 있었다.
지은은 마케팅 전략팀 이사였다.
준호는 경영 전략 자문역이었다.
더 이상 상사와 부하가 아니었다.
첫 프로젝트는 신제품 런칭 캠페인이었다. 종로에서는 상상도 못 할 규모의 자율성이 주어졌다. 지은은 감정 기반 마케팅 전략을 제시했고, 준호는 그것을 데이터로 뒷받침했다. 팀원들은 두 사람의 호흡에 놀라워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일해온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3주 후, 캠페인이 런칭됐다.
SNS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감정적 메시지가 공감을 일으켰고, 데이터 기반의 타겟팅이 정확했다. 첫 주 매출은 예상을 30% 상회했다.
하지만 두 번째 주부터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에서 연락이 끊겼다. 투자자들의 반응이 미지근해졌다. 누군가 종로에서 나온 정보를 흘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생 회사의 신제품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업계 네트워크는 생각보다 빨랐다.
회의실에서 지은이 다음 단계를 제시했다.
"이 캠페인은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데이터가 뒷받침되면 더 강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은 어두웠다. 영업 담당자였다.
"지은 이사님, 그럼 어떤 데이터를 보면 좋을까요?"
지은이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자신의 노트를 보고 있었다. 지은의 의견에 이미 동의했다는 신호였다.
"여기 의견 있나요?"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의 얼굴도 어두웠다.
"내 생각엔 넌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여기서는 제 의견을 말해도 돼요?"
"물론이지. 넌 항상 말해야 해."
지은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 밝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영업 담당자가 지은에게 다가왔다.
"이사님, 혹시 종로에서 나온 거 아닐까요? 거래처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어요."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사장의 협박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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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들었어?"
"네. 거래처가..."
"알아. 나도 투자자한테서 들었어."
지은이 멈췄다.
"이건 제 때문이에요. 제가 새 회사를 선택했으니까..."
"아니야. 이건 우리가 함께 한 선택이야.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야."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손도 떨리고 있었다.
"우리 이거 견딜 수 있을까?"
지은이 물었다.
"모르겠어."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물러나면 더 못 견딜 것 같아."
회의실로 돌아갔다. 팀원들을 모았다. 지은이 입을 열었다.
"거래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캠페인은 여전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요. 이건 우리의 전략이 맞다는 증거예요. 지금이 포기할 때가 아니라 더 강하게 밀어붙일 때예요."
준호가 덧붙였다.
"데이터를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거래처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겠습니다."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 선택의 대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견디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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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가 더 지났다.
새로운 자료를 들고 거래처들을 찾아다녔다. 처음엔 거절했다. 하지만 데이터가 말해주는 것은 명확했다. 이 캠페인은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감정이 데이터로 증명되자, 거래처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의심했다. 하지만 숫자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3주 후, 회의실에서.
지은이 다음 단계를 제시했다.
"감정 기반 캠페인에 필요한 데이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타겟층의 심리 프로필, 두 번째는 감정 반응 지수, 세 번째는 장기 구매 의도 변화입니다."
준호가 노트에 메모했다. 지은의 모든 말을 적었다. 마치 5년 전처럼.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이유였다. 상사로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그리고 그 이상으로서.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영업 담당자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
회의가 끝났다. 팀원들이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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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 좋았어."
"네?"
"넌 항상 이렇게 좋은 의견을 내고 있었어. 종로에서는 왜 말하지 않았어?"
지은이 멈췄다.
"...몰랐어요. 내 의견이 좋은지도 몰랐고, 말해도 되는지도 몰랐고."
"그럼 이제는?"
"이제는 알아요. 내 의견이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그걸 들어준다는 것."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서툰 손잡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확신의 손잡음도 아니었다. 그저 손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3개월 전에 당신이 나한테 한 제안이 뭐였어요?"
"3개월만 남아달라는 거였지."
"그럼 이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준호가 멈췄다. 지은도 멈췄다. 복도 중앙에서. 다른 직원들이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선택의 대가가 얼마나 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은이 먼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이 말하기 전에 제가 말씀드릴게요."
"뭐?"
"우리 계속 해볼까?"
준호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럼 내가 선택하는 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나도 같은 거야. 계속 너를 선택하는 거. 하지만..."
준호도 말을 멈췄다.
"하지만 나도 확신이 없어. 우리가 이거 견딜 수 있을지,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인지. 그냥... 너를 놓고 싶지 않을 뿐이야."
지은이 준호의 손을 더 깊게 잡았다.
"그럼 우리 둘 다 확신 없이 선택하는 거네요."
"응."
"그게 괜찮아요?"
"아무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게 최선인 것 같아."
두 사람은 그렇게 새로운 회사의 복도를 걸어 나갔다.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종로 IT 그룹의 협박도, 3개월이라는 제한된 시간도, 5년간의 침묵도.
남은 건 오직 현재뿐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 속에서 매일 내리는 작은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불확실한 미래뿐이었다.
창밖의 강남역 풍경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저녁 6시 42분. 5년 전 지은이 준호를 떠나보낸 시간과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함께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지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종로 IT 그룹 투자처 담당입니다. 조 팀장님과 지은 이사님에 대해 문의가 들어왔는데..."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준호가 그 변화를 재빨리 감지했다.
"뭐예요?"
지은이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이사장이... 우리 투자처까지 연락했어."
준호의 얼굴도 굳었다. 협박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은이 물었다. 준호는 지은의 손을 더 깊게 잡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준호가 지은을 바라봤다.
"우리가 함께 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