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 11시 53분, 사무실의 불이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지은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3개월 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창밖으로 종로의 야경이 보였다. 빌딩들이 하나둘 불을 껐고, 도시는 서서히 잠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도 여기 있었다.

"지은."

준호의 목소리였다. 회의실 문이 열렸고, 그가 나타났다.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한 잔을 지은에게 건넸다.

"내일 발표 전에 얘기하려던 거 있어."

지은은 커피를 받아들었다. 손이 떨렸다. 준호가 앉으려는 순간, 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새 회사는요?"

준호가 멈췄다. 그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새 회사?"

"리크루터분이 내일 오전 10시까지 답변 달라고 했어요. 연봉 40% 인상, 해외 경험까지 쌓을 수 있는 기회고..." 지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팀장님이 진급을 포기한다고 했으니까, 제가 회사를 떠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준호가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넌 그 회사 가고 싶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은이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솔직해 줄래."

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었다. 지은이 그를 바라봤다. 5년 동안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불안감. 두려움. 그리고 간절함.

"사실..." 지은이 숨을 쉬었다. "전 몰라요. 뭐가 진짜 원하는 건지."

그 말이 나오자,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실제 소리가 아니라 마음속의 소리였다. 5년간 쌓아올린 것들이 한 번에 흔들렸다.

"3개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정확히 3개월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깔끔하게 떠날 수 있을 거고, 과거도 정리되고..."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새 회사는 정말 좋은 기회인데, 팀장님 곁에 있고 싶고, 그런데 또 그게 맞는 건지 몰라서..."

준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지은의 손을 잡았다. 처음이었다. 3개월 동안 한 번도 이렇게 직접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팀장님은요?" 지은이 물었다. 준호를 직시했다. "진급 포기할 거예요? 정말로?"

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모르겠어."

그 대답이 더 무거웠다.

"진급 제안은 정말 좋은 조건이야. 해외 지사장이면, 내 커리어로는 큰 도약이고..." 준호가 지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진급이 아닌 것 같아. 내가 원하는 건..."

그가 지은을 바라봤다.

"넌 것 같아."

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이건 공정하지 않은 선택이에요." 지은이 말했다. "팀장님이 진급을 포기하면, 저는 계속 빚진 기분이 들 거고. 그리고 저도 새 회사를 포기하면..." 지은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저는 또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 아닐까요? 5년 전처럼."

준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새 회사를 포기하고 팀장님과 함께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후회가 우리 사이를 망가뜨리지 않을까요?" 지은이 계속했다. "팀장님은 처음에 진급을 포기한다고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지은."

준호가 일어섰다. 지은도 일어났다. 그들은 거의 같은 높이에서 서 있었다.

"이번엔 달라."

준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5년 전에 내가 선택했어. 내 커리어를 택했고, 너를 떠났어. 그리고 5년을 후회했어. 매일 후회했어. 너를 본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후회 때문이야. 내가 너를 상처 줬다는 게 너무 무거워서."

지은이 숨을 쉬지 못했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선택하는 거야. 그리고..." 준호가 지은의 눈을 바라봤다. "이번엔 넌 선택하는 거야.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넌 뭘 원하는지 생각하고 선택하는 거야."

"팀장님..."

"그래서 내가 물어본 거야. 넌 그 회사 가고 싶어? 정말로?"

지은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면, 내일까지 생각해 봐.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뭘 느꼈는지, 그리고 새 회사를 생각할 때 뭘 느꼈는지. 그다음에 선택해."

준호가 지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선택이야. 넌 진짜 원하는 걸 선택했을 때 옆에 있는 거. 그게 새 회사든, 아니면..."

그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아니면?"

"아니면 나든."

밤 12시 5분, 사무실 문이 열렸다. 혜린이 나타났다.

"아, 너 여기 있네." 혜린이 지은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 시간에 뭐 하는 거야?"

지은이 준호와 눈을 마주쳤다. 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난 먼저 나갈게. 내일 보자."

준호가 나갔다. 혜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은을 바라봤다.

"뭐 있었어?"

"혜린아, 난 뭘 원하는 거 같아?"

혜린이 지은 옆에 앉았다.

"너? 너는..." 혜린이 생각했다. "너는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은 것 같아. 준호가 너를 선택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

"그게 맞나?"

"아니지. 진짜 중요한 건..." 혜린이 지은의 손을 잡았다. "너 자신을 선택하는 거야. 너 자신을 진짜로 원하는 것 말이야."

지은이 혜린을 바라봤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혜린이 물었다. "준호가 너를 선택해줄 때까지 기다려? 아니면 너 자신을 선택할 거야?"

그 질문이 지은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었다.

밤 12시 23분,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리크루터 김 과장이었다.

"지은 대리님, 안녕하세요. 미안하지만 내일 오전까지 결정을 내려주셔야 해요. 이 기회 놓치면 다시 없을 거예요."

지은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꼭 답변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지은은 창밖을 바라봤다. 종로는 여전히 밤이었다.

새 회사로 가야 할까? 아니면 준호를 선택해야 할까?

그런데 그건 진짜 질문이 아니었다. 진짜 질문은 다른 것이었다.

너는 뭘 원해?

밤 새우며 고민한 지은은, 아침 7시 30분에 사무실에 들어섰다. 준호가 이미 와 있었다.

"팀장님..."

준호가 지은을 바라봤다.

"내일 최종 회의에서 뭐라고 할 거예요?"

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모르겠어."

그 대답 속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둘 다 아직 답을 정하지 못했다.

아침빛이 회의실 유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은은 준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창밖의 종로 거리가 선명해졌다. 출근길 사람들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근데 팀장님, 혹시..." 지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진급 포기한 거 정말이에요?"

준호가 한숨을 쉬었다.

"어제 정 이사한테 얘기했어. 프로젝트 완료까지 진급은 보류해달라고."

지은이 준호를 바라봤다. 어제 밤 그렇게 단호하던 목소리가, 아침 햇빛 아래서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프로젝트 이후에는?"

"모르겠어. 그때가 되면 봐야지."

준호의 대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지은은 그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지은이 준호의 옆 의자에 앉았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짚고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되면 둘 다 무너지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않을 수도 있지."

"팀장님은 낙관적이네요."

"아니야. 난 그냥..." 준호가 천천히 지은을 바라봤다. "너를 보면서 생각했어. 5년 전에 내가 뭘 얻었나? 팀장 직책? 연봉? 다 가졌어. 근데 행복했어?"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행복하지 않았어. 매일 출근해서 회의 다니고, 보고서 쓰고, 이사장 눈치 보고. 그게 다였어. 그리고 너를 만날 때마다... 너를 본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

"그럼 지금은?"

"지금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제밤은 행복했어. 넌 어제 느낌 기억해?"

지은이 어제 회의실에서의 준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번엔 넌 선택하는 거야.*

"...네."

"그 기분이 뭐라고 생각해?"

지은이 답하지 못했다.

준호가 일어섰다.

"난 회의실 가서 발표 자료 다시 점검할게. 너는 리크루터 답변해야 하지 않아?"

"아직..."

"아직이구나. 좋아. 아직이면 아직인 거고." 준호가 문으로 향했다. "지은, 한 가지만."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 내가 말한 게 조건 같이 들렸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조건 같은 거 없어. 넌 새 회사 가도 돼. 가고 싶으면. 난 그걸 받아들일 수 있어. 근데..."

"근데?"

"근데 제발 진짜 원하는 걸 선택해 줄래.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준호가 문을 열고 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

지은이 혼자 남겨진 회의실에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리크루터 김 과장으로부터 온 카톡이 여전히 읽지 않은 상태로 떠 있었다.

*지은 대리님, 내일 오전 10시까지 결정을 내려주셔야 해요. 이 기회 정말 드물어요.*

지은이 핸드폰을 내려놨다. 오전 10시까지 6시간 40분. 최종 회의는 오전 11시.

혜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너 자신을 선택할 거야?*

지은은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마케팅팀 자리로 향했다. 아직 대부분의 팀원들이 오지 않았다. 혜린만 이미 앉아 있었다.

"어라, 벌써 왔네?" 혜린이 고개를 들었다. "밤을 샜나 봐."

"응. 혜린아, 난 뭘 하고 있는 거야?"

혜린이 의자를 옆으로 밀었다.

"앉아."

지은이 앉았다.

"나 새 회사 오퍼, 정말 가고 싶었어?"

혜린이 한숨을 쉬었다.

"지은, 넌 내가 뭐라고 말해주길 원하는 거야? '가, 너 꿈을 따라가'? 아니면 '말아, 준호가 있잖아'?"

"...모르겠어."

"그런 건 내가 정해줄 수 없는 거야. 너만 정할 수 있어. 너 스스로."

지은이 혜린의 얼굴을 봤다.

"만약에 내가 준호를 선택한다면? 새 회사를 포기하고?"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또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 같아. 이번엔 준호를 위해. 근데 어제 준호는 그게 아니라고 했어. '이번엔 넌 선택하는 거'라고."

"그럼 선택해."

"뭘요?"

"넌 뭘 원하는데?"

지은이 입을 다물었다. 그 질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깨달았다. 5년간 회사에서 고민한 게 '나가야 하나'였고, 그것도 번아웃 때문이었다. 준호를 다시 만났을 때도 '떠나야 하나'였고, 이제는 '준호를 선택해야 하나'였다. 모두 누군가 때문이었다.

아니다. 준호가 물었다. 어제밤에.

*넌 그 회사 가고 싶어?*

지은이 눈을 감았다.

마케팅 이사. 연봉 40% 인상. 글로벌 마케팅 에이전시. 한 달 내 입사.

그 단어들을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기쁨이 차올랐다. 새로운 도전.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기회. 5년간 갇혀 있던 자신을 벗어날 수 있는 길.

그 다음 죄책감이 밀려왔다. 준호 때문에 이걸 포기하는 건가? 또 다시?

"혜린아, 난 지금 뭐가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새 회사는 좋은 기회 같은데, 준호를 만난 이후로 그것도 희미해진 것 같아."

"그건 준호가 좋으니까 아니야?"

"...네."

혜린이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너가 준호를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지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새 회사를 포기하면?"

지은이 잠시 생각했다. 새 회사를 포기하는 순간, 그 꿈도 함께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준호를 포기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후회였다. 새 회사는 기회였다. 준호는... 준호는 사람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

"...네. 그것도 후회할 것 같아."

"그럼 둘 다 선택할 순 없어?"

"어떻게?"

혜린이 웃었다.

"지은아, 3개월 약속 다시 생각해 봐. 넌 그때 뭐라고 했어?"

"정확히 3개월 후 떠나겠다고."

"그게 전부야?"

지은이 혜린을 바라봤다. 혜린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3개월... 그 안에 뭘 할 수 있을까?"

"넌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어. 준호와 함께. 그리고 나서..."

"나서?"

"나서 새 회사 가. 늦지 않을 거야. 넌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야. 어디 가든 필요할 거야."

지은이 그 말을 씹었다. 혜린의 말이 맞을까? 정말로 둘 다 가능할까?

9시 15분,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리크루터 김 과장이었다.

"지은 대리님, 정말 미안한데 오전 9시 50분까지 최종 답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본사 쪽에서 재촉이 들어와서..."

지은이 숨을 쉬었다. 시간이 더 단축되었다. 35분.

"네, 알겠습니다. 9시 50분까지 답변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지은은 회의실로 향했다. 준호가 이미 거기 있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슬라이드를 보고 있었다.

"팀장님."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우리 3개월 계약, 연장할 수 있나요?"

준호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뭐라고?"

"프로젝트 끝난 후에, 한두 달 더. 그 다음에 내가 새 회사 가도 될까요?"

준호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지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었다. 그의 눈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넌 정말 그 회사 가고 싶어?"

"네. 근데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싶어요. 팀장님과 함께."

준호가 천천히 지은에게 가까워졌다.

"그게 진짜 원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지은은 입을 다물었다. 호흡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 순간이 정말 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선택하는 순간.

"...진짜 원하는 거예요." 지은의 목소리는 낮지만 분명했다. "어제 팀장님이 물었잖아요. 넌 뭘 원하냐고. 난 생각했어요. 밤새 생각했어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뭘?"

"지금 이 순간을 원한다는 걸. 팀장님과 함께 이 프로젝트를 마치는 시간을. 그 다음에 뭘 할지는... 그때 봐도 될 것 같아요."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새 회사는?"

"새 회사도 가고 싶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럼 리크루터한테 뭐라고 할 거야?"

"연장을 부탁해 볼 거예요."

9시 47분, 지은은 핸드폰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에 리크루터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지은 대리님, 9시 50분까지 최종 결정 부탁드립니다.*

지은이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춰 있다가, 천천히 글자를 입력했다.

*과장님, 고려해 주신 좋은 기회 정말 감사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서, 프로젝트 종료 후에 입사할 수 있도록 조율해 주실 수 있을까요? 늦으면 한두 달 정도 후가 될 것 같습니다.*

지은은 전송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화면이 흔들렸다.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게 바뀐다. 새 회사라는 확실한 미래가 불확실해진다. 준호라는 선택이 확실해진다.

지은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전송했다.

답장이 바로 왔다.

*죄송하지만 입사 일정은 조율이 어렵습니다. 한 달 내 입사가 원칙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은이 화면을 내려놨다. 준호가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팀장님."

"응."

"새 회사는 안 돼요. 한 달 내 입사해야 해요."

준호가 한 발 물러섰다.

"그럼?"

지은이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을 고르려 했지만 실패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새 회사. 아니면 준호.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진짜 선택은 다른 것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뭘 원하는 사람인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잃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을 먼저 선택하는 사람인지.

지은이 눈을 떴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 속에서 불안감이 역력했다. 마치 자신이 내릴 결정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될 것처럼.

"새 회사를 포기할 거 같아요."

"왜?"

"왜냐면..." 지은이 말을 더듬었다. 눈물이 맺혔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새 회사가 아니라... 팀장님과 이 프로젝트를 끝내는 거 같아요."

준호가 지은에게 다가섰다. 그의 얼굴이 창 너머 아침 햇빛에 비쳤다.

"정말이야?"

"네. 근데 팀장님, 이게 또 누군가를 위한 선택은 아닐까요?"

"넌 어떻게 생각해?"

지은은 그 질문을 마주했다. 어제 밤, 준호가 던진 같은 질문. 그리고 밤새 자신과 싸우며 찾은 답.

"...지금은 이게 맞는 것 같아요. 이게 내 선택이에요."

준호가 지은의 얼굴 가까이 가서 말했다.

"그럼 그게 정답이야. 넌 선택했어.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넌 선택했어."

회의실 벽시계가 10시를 가리켰다.

지은이 리크루터에게 최종 메시지를 보냈다.

*과장님, 죄송하지만 이번 기회는 사양하겠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완료하는 것을 우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소중한 기회 주셨는데 양해 부탁드립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감정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해방감인가, 아니면 상실감인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 순간 준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사장 신기호였다.

"준호, 지금 가능해? 내 사무실로."

준호가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 이사장님. 지금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준호가 말했다.

"난 이사장님 만나고 와야 해."

"팀장님, 뭐라고 하실 거예요?"

준호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의 뒷모습이 창 너머 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모르겠어. 그때 봐."

준호가 나갔다. 지은이 혼자 남겨진 회의실에서, 창밖의 종로를 바라봤다. 10시 30분. 최종 발표는 11시.

불안감이 밀려왔다. 손가락이 떨렸다. 준호가 이사장을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걸까?

혜린이 나타났다.

"지은아, 뭐 해?"

"혜린아, 난 새 회사 포기했어."

혜린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새 회사 포기하고, 프로젝트 완료할 때까지 남기로 했어."

혜린이 지은 옆에 앉았다.

"이번엔 달라. 이번엔 넌 선택했어.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은이 혜린을 바라봤다.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10시 58분, 준호가 돌아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아니, 그보다 더 복잡한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결정한 사람의 표정. 하지만 그것이 좋은 결정인지 나쁜 결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팀장님?"

"이사장님이... 내 진급을 확정했어."

지은이 숨을 쉬지 못했다.

"그리고..."

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마치 뭔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는 듯.

"넌 이사장님 만나야 해. 지금."

지은이 일어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사장이 자신을 만나라고? 왜?

"왜요? 뭐 때문에?"

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근데 이사장님이 너한테 뭐라고 할지는... 난 모르겠어."

그 말 속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마치 뭔가 잘못될 수 있다는 암시처럼.

지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불길한 예감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지은이 천천히 일어섰다. 복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는 길에 직원들이 지나쳤다. 모두 자신의 일에 바쁜 얼굴이었다. 아무도 지은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은의 시선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은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장실이 있는 20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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