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사무실 형광등 아래 노트북 화면은 자정을 넘겼다. 지은의 눈은 스프레드시트 위를 맴돌았지만, 시선은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옆자리 강민준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맞은편 준호는 프로젝트 최종 검수 자료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며 읽고 있었다.
3개월 프로젝트의 마지막 한 주였다.
내주 금요일. 이사장 신기호 앞에서 최종 발표를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약속도, 함께도, 지금 이 밤도.
지은은 자신의 손가락을 멈췄다. 화면 위 데이터 행렬이 흐릿해졌다. 옆 모니터에서는 강민준의 마우스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신입이면서도 이 프로젝트를 위해 밤을 새운 지 이미 5일째였다. 혜린은 어제 밤 '지은아, 넌 왜 남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강한데 자기 자신한테는 약해?'라고 물었다. 지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노트북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그의 피부는 창백했고, 눈 아래 다크서클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넥타이는 탁자 위에 버려져 있었다. 지은은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피폐해 보인 모습.
"팀장님, 피곤하신가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은은 자신의 입이 움직인 것을 신기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3개월간 그녀는 필요한 말만 했다. 업무 보고, 데이터 수치, 일정 조율. 하지만 지금 방금 한 말은 다른 것이었다. 상대의 상태를 묻는 말. 관심의 말.
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지은을 만났다.
"응."
한 글자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준호는 다시 자료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손가락은 멈춰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읽지 않고 있었다. 단지 무언가를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민준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선배, 팀장님,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그는 빠르게 사무실을 나갔다. 남은 것은 지은과 준호뿐이었다. 그리고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음.
준호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지은, 솔직하게 말해 줄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오래 쌓인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넌 나한테서 떠나고 싶어? 아니면 못 떠나는 거야?"
지은의 호흡이 멈췄다. 그녀는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피로 속에서도 그것만은 명확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
지은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말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느 것을 꺼내야 할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뭐야. 대답을 해."
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더 단호했다. 그는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팀장님이 떠나고 싶으면 떠나세요."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는 평탄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 말을 미리 준비해두고, 지은은 그저 그것을 읊조리기만 한 것 같았다.
"나는 약속을 지킬 거예요."
침묵이 떨어졌다. 준호는 지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뭔가가 움직였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지은은 알 수 없었다.
"약속."
준호가 반복했다.
"그게 지금 중요해?"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가 일어섰다. 그는 회의실을 나갔다. 지은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위의 데이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강민준이 돌아왔다. 그는 지은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선배?"
지은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괜찮아."
"그게... 아니잖아요."
강민준이 의자를 끌어당겨 지은 옆에 앉았다. 그는 젊었다. 이제 입사한 지 2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은 나이보다 깊어 보였다.
"선배, 나 봐요."
지은은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팀장님도 힘들어하고, 선배도 힘들어해. 이렇게까지 자기를 억누르면서까지 약속을 지킬 필요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지은의 가슴 안에서 뭔가가 깨졌다. 마치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지금까지 자신이 꼭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흘러내렸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지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진실한 목소리였다.
"5년 전에 준호가 떠날 때, 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어.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거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 그리고 지금도... 이 3개월 동안도..."
그녀는 멈췄다.
"나는 자기 선택을 기다리고만 있었어."
강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지은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지은을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선배, 팀장님이 진급 포기할 정도면 이미 선택한 거 아닐까요?"
강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팀장님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힘들어하는 거고."
지은은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젊은 후배의 목소리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관통했다.
"선배가 선택하면, 팀장님도 움직일 거예요. 그런데 선배가 계속 기다리니까, 팀장님도 기다리는 거 아닐까요?"
강민준이 일어섰다.
"저 집에 갈게요. 선배, 고민해 보세요."
그는 사무실을 나갔다. 지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참 뒤, 혜린은 여전히 밖에서 지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톡이 울렸다. 지은의 메시지였다. '아직 있어? 밖에 나갈래.'
지은은 사무실 앞 편의점 앞에서 혜린을 만났다. 혜린은 캔 커피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너 이러다 쓰러져."
혜린이 한 캔을 건넸다. 지은은 받아들었다. 손이 떨렸다.
"그런데 요즘 소문 들었어? 준호가 최근에 이사장과 만났대."
혜린이 물었다.
"뭐하러?"
"몰라. 근데 뭔가 큰 일이 있을 것 같던데."
혜린이 커피를 마셨다.
"진급이 확정되는 건가?"
지은이 물었다.
"글쎄. 그것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프로젝트나 직책 변동도 있을 수 있고. 어쨌든 뭔가 움직이는 것 같더라."
혜린의 말이 떨어졌다. 지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꼈다. 이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아니, 이것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헤린아, 난 뭐하고 있는 거야?"
"선택을 못 하고 있는 거지."
혜린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친구의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너를 선택해주길 기다리면서."
지은은 캔 커피를 열었다. 탄산음료의 시음음 소리가 밤 거리에 울렸다.
오후 2시 15분, 회의실.
이사장 신기호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정 이사가 있었다. 정 이사는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는 발표 자료를 펼쳐놓고 있었다.
"프로젝트 최종 발표는 내주 금요일 오전 10시입니다."
이사장이 말했다.
"모든 팀은 그때 최종 결과물을 제출할 것. 팀장 준호, 그리고 김지은 대리. 이해했나?"
"예, 이사장님."
준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정 이사가 준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약속 같은 것이었다. 내주 금요일 발표 후, 준호의 진급이 확정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3개월의 약속의 끝이 명확해졌다. 내주 금요일 오전 10시. 그 이후로는 무엇이 남을까?
새벽, 회의실.
강민준은 이미 집에 간 지 오래였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지은은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고, 준호는 옆자리에 서 있었다.
"지은, 나와."
그것이 전부였다. 준호는 회의실로 향했다. 지은은 천천히 따라갔다.
회의실의 불이 켜졌다. 준호는 테이블 한쪽에 기대 앉았다.
"3개월 계약을 연장할 수 있을까?"
지은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녀의 눈은 준호를 바라봤고, 입은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리고 또 다시 열렸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눈물이었다.
준호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대답을 해, 지은."
지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연장할 수 있을까?"
준호가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절박했다.
"팀장님..."
지은이 겨우 말을 시작했다.
"준호야."
준호가 가로막았다.
"지금은 팀장님이 아니라, 그냥... 준호로 불러 줄 수 있을까?"
지은은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명확했다. 5년 동안 그녀가 피해왔던 얼굴. 5년 동안 자신의 가슴 어딘가에 박혀 있던 얼굴.
"준호..."
"응."
"난 새 회사에..."
"알아.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어."
준호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은 쪽으로 몇 발 다가갔다.
"넌 5년 전에도 그렇더라. 대답 대신 침묵만 했어. 그 침묵 때문에 내가 얼마나..."
그는 말을 멈췄다. 깊게 숨을 쉬었다.
"이번엔 다르고 싶어. 넌 정말로 떠나고 싶은 거야? 아니면..."
"아니면?"
지은이 물었다.
"아니면 나 때문에 남고 싶은 거야?"
회의실이 침묵으로 찼다. 지은의 심장이 아팠다. 그것은 물리적인 통증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통증.
"둘 다 아니에요."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뭐야?"
"난... 선택을 못 한 거예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자기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게."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빨개져 있었다.
"근데 준호,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무능함이었어."
"지은..."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난 항상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고만 있어요. 준호가 떠나갈 때도, 다시 돌아올 때도, 이 프로젝트 기간 동안도."
지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그걸 견디기 위해 '약속'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3개월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그 다음에 새로 시작할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어요."
"그럼 새 회사로 가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그의 얼굴은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지은이 대답했다.
"정말 모르겠어요, 준호. 난 지금 뭐가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어요."
준호는 회의실 창밖을 봤다. 종로의 야경이 보였다.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내일 아침 10시가 오면 3개월의 약속은 끝날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준호가 말했다.
"뭐가?"
"네가 선택을 못 하는 것도, 헷갈리는 것도. 그래도 괜찮아."
준호는 다시 지은을 봤다.
"왜냐하면 난 이미 선택했으니까."
지은이 준호를 봤다.
"내일 오전 10시, 프로젝트 최종 발표가 있어. 그 발표 후에, 난 이사장님께 사직서를 낼 거야."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진급은 포기하고, 회사도 나갈 거야."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왜냐하면 넌 항상 나한테서 떠나려고만 해. 5년 전에도, 지금도. 그런데 난 이번엔 다르고 싶어. 이번엔 내가 먼저 가려고 해. 너를 따라가려고."
지은의 눈이 또 다시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슬픔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이었다.
"준호..."
"정 이사도 알고 있어. 이사장님도 알고 있어. 내 진급이 내주 금요일 발표 후에 확정되는 거. 그 이후에 나가는 건 상관없다고 했어."
준호가 말을 이었다.
"근데 난 그걸 하고 싶지 않아. 너와 함께 새로 시작하고 싶어. 그게 무엇이 되든, 어디가 되든."
지은은 준호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그리고 무섭기도 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한 사람의 눈처럼.
"약속을 깨는 거예요?"
지은이 물었다.
"응. 깨는 거야. 3개월의 약속을."
준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난... 내일 발표 후에 대답하겠습니다."
지은이 천천히 말했다.
회의실이 침묵으로 가득했다. 지은의 눈빛이 준호를 향했다. 그것은 두려움도, 거절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준호는 그 눈빛을 읽으려 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지은이 천천히 준호의 손을 더 깊게 쥐었다. 그 압력만으로도 모든 말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회의실의 불이 나갔다.
지은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노트북 화면에는 여전히 데이터 분석 파일이 떠 있었다. 그녀는 화면을 닫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리크루터 김 과장의 번호를 찾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메시지를 썼다.
'죄송합니다만, 내일 아침 10시 이후에 최종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상황상 더 필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지은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것이 선택이었다. 아직 완전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더 기다릴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것은 준호를 향한 신호였다. 내일 이후의 모든 것을 열어두겠다는 신호.
한참 뒤, 혜린에게서 카톡이 왔다. '자, 이제 집에 가.'
지은은 노트북을 집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노트북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백라이트가 꺼졌다. 그 순간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과 결정이 함께 담긴,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 된 표정이었다.
내일 아침, 프로젝트 최종 발표가 있다.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