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42분,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지은님. 김 과장입니다."
리크루터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지은은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몸을 굳혔다.
"새로운 기회가 생겼거든요. 우리 클라이언트 회사—글로벌 마케팅 에이전시인데, 마케팅 이사 직책을 제안하고 있어요. 당신 이력서를 봤을 때 딱 맞는 포지션이라고."
지은은 답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수도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연봉은 현재보다 40% 인상, 팀 리드 경험도 생기고, 복지도—정말 좋은 조건입니다. 아, 그리고 입사는 한 달 내로 가능하고요."
한 달.
"생각해보겠습니다."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네, 그렇긴 한데요.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건 아니거든요. 월요일까지만 답장 주실 수 있으세요?"
월요일. 4일.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지은은 화장실 칸막이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케팅 이사. 40% 인상. 한 달 내 입사.
그건 자신이 5년간 꿈꾸던 자리였다.
사무실로 돌아오며 지은은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어제 새 회사에서 보낸 채용 공고 인쇄본이 들어 있었다. 마케팅 이사. 자신의 이름이 아직 없는 그 자리.
"지은, 뭐 하니?"
강민준이 옆 자리에서 몸을 굽혔다. 지은은 서랍을 닫았다.
"아무것도."
그런데 왜 말하지 못하는가. 준호에게. 이 기회를 거절하면 다시 없을 것이라는 말을, 월요일까지 결정해야 한다는 말을.
아, 알고 있었다. 준호에게 말하면 준호는 자신을 붙잡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말에 흔들릴 것이었다. 5년을 기다린 기회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오후 5시 정도였다. 회의실에서 준호가 들어온 지은을 보고 손짓했다.
"데이터 리포트 준비됐어?"
"네, 팀장님."
지은은 자료를 펼쳤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고도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였다.
회의가 끝난 후, 지은이 자료를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축하합니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뭘?"
"진급요. 어제 정 이사님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침묵이 흘렀다. 준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어?"
"사무실에서... 들었어요."
지은의 대답은 거짓이었다. 강민준으로부터 들은 것이 아니라, 어제 저녁 준호의 휴대폰 알림음으로 유추한 것이었다. 그 알림음은 정 이사의 전화였고, 준호의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진 후였다.
준호는 지은을 오래 바라보았다.
"넌 뭐 있어?"
"뭐가요?"
"요즘 자꾸 딴짓하는 것 같은데. 뭐 일 있어?"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은의 목소리는 너무 빨랐다. 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눈빛이 변했다. 뭔가를 감지했고, 그것을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였다.
저녁 7시. 사무실은 조용했다. 지은은 강민준과 함께 새로운 고객 세그먼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의 책상에서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뭔가 고민 있으신 것 같은데요?"
강민준이 지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은은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거짓이에요. 선배 얼굴이 자꾸 딴 곳을 봐요."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료 정렬을 더 빠르게 했다. 강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거든 도와드릴 수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 말이 지은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지은은 고개만 끄덕였다.
오후 8시. 준호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켠 지 이미 30분. 하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 이사의 전화 내용이 계속 맴돌았다.
_진급 조건이 바뀌었다. 프로젝트 성공만이 아니라, 차기 리더 양성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야 한다. 한 달에 3번씩 외부 교육._
그러면 이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없다. 지은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
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창밖을 봤다. 밤 8시의 서울은 여전히 밝았다. 그 어딘가에 지은이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
그는 고민했다. 진급 조건이 바뀌었다는 것은 선택지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조건을 받아들이고 진급하거나, 거절하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거나.
하지만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은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은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를 수 없었다.
준호는 회의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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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 사무실에는 지은과 강민준만 남아 있었다. 준호는 어디론가 나가 있었다. 지은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새 회사의 채용 제안서를 꺼냈다. 글로벌 마케팅 에이전시. 마케팅 이사. 한 달 내 입사.
손이 떨렸다. 제안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다 서류가 흩어졌다. 지은은 그것들을 모으며 한숨을 쉬었다.
강민준이 지나가다가 멈췄다.
"선배, 그거 뭐예요?"
지은은 서류를 닫으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냥... 관심사인 회사 자료."
"거짓이에요."
강민준은 옆에 앉았다. 지은은 고개를 숙였다.
"선배, 중요한 결정이면 혼자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말해봐요. 팀장님한테라도."
"팀장님한테는 못 말해요."
"왜요?"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준호에게 이 오퍼를 말하면, 준호는 자신을 붙잡으려 할 것이었다. 아니, 이미 붙잡고 있었다. 그 진급 포기라는 결정으로. 그리고 자신은 그 눈빛 앞에서 무너질 것이었다. 5년 동안 견뎌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었다.
저녁 10시 15분, 지은은 퇴근길에 올랐다. 새 회사의 제안서를 가방 안에 넣은 채로.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지은, 야근할 수 있어?"
준호의 목소리였다.
"뭐... 뭐가 있어서요?"
"중요한 거 있어. 다시 올라와."
지은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전에 손을 집어넣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호의 목소리에는 뭔가 결연한 것이 담겨 있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톤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준호는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정 이사가 방금 전화했어."
준호가 말을 시작했다.
"진급 조건이 바뀌었대. 프로젝트 성공만이 아니라, 차기 리더 양성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야 한다고. 한 달에 3번씩 외부 교육에 나가야 해."
준호는 잠시 멈췄다. 그의 손이 탁자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펼쳐졌다.
"그러면 이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없어. 넌 알겠지? 그래서 난 진급을 포기하기로 했어."
준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밤의 서울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고민했어. 조건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근데 넌 뭔가 숨기고 있잖아. 뭔데?"
지은의 눈이 커졌다.
"모르겠어. 그래서 물어보려고 했어. 근데 먼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준호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이 지은을 직접 바라봤다.
"난 진급을 포기했어. 정 이사한테 말했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래서 진급은 포기하고, 이 프로젝트에 집중하겠다고."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요?"
"왜냐하면 넌 뭔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넌 혼자 결정하려고 하고 있어. 내가 방해할까봐."
침묵이 회의실을 채웠다.
"그런데 난 방해하고 싶어. 정직하게 말해서."
준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5년 동안 난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넌 없는데 자리를 채우려고 했어. 다른 걸로. 직위로, 돈으로, 인정으로. 하지만 모든 게 공허했어."
"팀장님..."
"왜냐하면 넌 없었으니까."
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래서 이제 넌 뭘 원해? 정직하게 말해봐."
지은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가방 안의 제안서가 느껴졌다. 손이 떨렸다. 제안서를 꺼낼까? 아니면 계속 숨길까?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제안서를 꺼냈다. 손가락이 서류의 모서리를 집고 있었다.
"전 받았어요."
지은이 말했다.
"오퍼. 새 회사에서. 이사 직책으로."
준호의 표정이 굳었다.
"언제?"
"오늘 오후. 리크루터 김 과장이 전화했어요. 한 달 내 입사하라고."
지은이 제안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서류가 준호의 앞에서 멈췄다.
"월요일까지 답장을 줘야 해요."
"그럼... 넌 가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모르겠어요."
지은이 대답했다.
"정말로."
준호는 제안서를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마케팅 이사. 글로벌 에이전시. 한 달 내 입사. 모든 조건이 명확했다.
"5년을 기다린 기회네."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넌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팀장님이 진급을 포기하실까봐."
지은이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어요."
"넌 항상 자기 진심을 말하지 않아."
준호가 제안서를 다시 테이블에 놓았다.
"넌 질문으로 질문을 돌려. 그리고 떠난다고 말해. 그런데 떠날 때 우는 얼굴로 떠나. 넌 정말로 떠나고 싶어? 아니면 누군가 나를 붙잡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준호의 말이 지은의 가슴을 관통했다. 강민준이 했던 말과 정확히 같았다.
지은의 손이 떨렸다.
"팀장님이 먼저 떠났어요. 5년 전에."
지은이 말했다.
"저는 붙잡지 않았어요. 팀장님을 따라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신의 꿈을 응원하는 게."
"지은..."
"그래서 저는 혼자였어요. 5년을. 그리고 지금 저한테 기회가 왔어요. 진짜로. 이번엔 제가 떠날 차례예요."
지은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런데 팀장님이 제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는 건 싫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감옥이 될 것 같아요."
준호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의 손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제안서 위에.
"그럼 넌 뭘 원해?"
준호가 물었다.
"정직하게 말해봐. 넌 정말로 뭘 원해?"
지은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회의실의 타임라인을 바라봤다. 9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제 한 달이라는 숫자가 겹쳐 있었다.
"저는... 팀장님이 제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팀장님을 선택하고 싶어요."
지은이 말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뭐가?"
"팀장님이 진급을 받으시고, 저는 새 회사에 가고, 그래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까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은의 눈을 보고 있었다.
"아니면 팀장님이 제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저는 여기 남고, 그래서 계속 팀장님을 볼 수 있을까요?"
지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둘 다 불가능해요. 그래서 저는 선택을 못 하는 거예요."
"넌 선택할 수 있어."
준호가 일어섰다.
"넌 할 수 있어. 너 자신을 위한 선택을."
"그럼 팀장님은요?"
"난 이미 선택했어."
준호가 제안서를 들었다. 다시 한 번 페이지를 넘겼다.
"난 진급을 포기했어. 그건 내 선택이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내가 5년을 낭비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팀장님..."
"그리고 넌 네 선택을 해. 그 회사를 가고 싶으면 가. 여기 남고 싶으면 남아. 하지만 내 때문에 결정하지 마."
준호가 제안서를 다시 테이블에 놓았다. 지은 쪽으로 밀어냈다.
"월요일까지 시간이 있지? 충분히 생각해봐."
준호는 회의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월요일에 답장 받기를 기다릴게."
문이 닫혔다. 지은은 혼자 남겨졌다. 테이블 위에는 새 회사의 제안서가 놓여 있었다.
지은은 제안서를 다시 들었다. 글로벌 마케팅 에이전시. 마케팅 이사. 한 달 내 입사.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리크루터에게 전화할까? 아니면 더 생각해볼까?
회의실의 형광등이 지은의 얼굴을 밝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은은 제안서의 뒷면에 펜을 들었다. 손글씨가 떨리고 있었다.
_월요일까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