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의 재생
사무실의 형광등이 자정을 넘겼다. 지은의 모니터에서 나오는 청백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밝혔다. 프로젝트 1차 검수 단계. 준호와 함께 고객 데이터 세트의 마지막 오류를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여기 이상하지 않아?" 준호가 화면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의 손가락 끝이 지은의 시선을 따라갔다.
"음... 2월 구매층의 연령대 분포가 갑자기 튀었네요." 지은이 마우스를 움직여 데이터를 확대했다. 준호는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사무실의 적막함과 그 거리감이 지은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준호가 움직였다. 책상 옆 파일 정리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멈췄다. 노란 폴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 기억나?"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은이 돌아봤다. 준호가 들고 있는 폴더는 낡았다. 모서리가 굽어져 있었고, 라벨에는 손글씨로 '2019 Q4 캠페인 아카이브'라고 쓰여 있었다. 지은의 호흡이 멈췄다.
5년 전. 지은이 준호를 처음 멘토링받던 해였다. 당시 준호는 신입이었지만 이미 전설이던 사람이었다. 퇴근 후까지 남아 함께 캠페인 전략을 짜던 날들. 준호가 "지은, 이 부분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자신의 의견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때.
"네... 기억합니다." 지은의 목소리가 작았다.
준호가 폴더를 펼쳤다. 프린트된 기획서, 손으로 그린 밑그림,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다. 사진 속 지은은 웃고 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이런 식으로 웃지 않았다.
"그때 넌 정말 열정적이었어." 준호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은이 몸을 굳혔다. 준호는 여전히 책상 위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이 창밖의 야경과 겹쳤다. 서울의 불빛이 그의 얼굴 반쪽을 밝혔다.
"팀장님도... 그때랑 달라졌어요." 지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지은의 눈과 만났다.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얇아졌다. 두 사람 모두 호흡을 가다듬지 못했다.
"어떻게 달라졌어?" 준호가 물었다.
지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에는 "더 성공했어요"라는 뜻도 있었고, "더 멀어졌어요"라는 뜻도 있었다. 둘 다 맞는 답이었다.
"데이터 검수 마칠까요?" 지은이 마우스를 다시 집어 들었다. 화면을 보는 척했다.
준호는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폴더를 정리했다. 사진을 다시 집어 들었다가 내려놨다. 그리고 지은 옆에 앉았다. 너무 가깝게.
둘은 새벽 1시까지 일했다.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마우스 클릭음과 키보드 타이핑음만 울렸다. 하지만 그 침묵은 무거웠다. 과거가 현재를 압박하는 무게였다.
"다 끝났다." 준호가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 이걸 정이사한테 보내면 1차는 통과할 거야."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늦게까지 남아줘서."
"약속이니까요." 지은이 말했다. 그 말을 내뱉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자동으로 대답했는지 깨달았다.
준호가 지은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는 "가자. 늦었어"라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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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강민준이 지은을 복도로 불러냈다. 프로젝트 팀의 신입이었던 그는 지은의 좋은 선배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선배, 혹시 팀장님과 뭐... 있었어요?" 강민준이 물었다. 주변을 확인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왜 그래?" 지은이 반문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그냥." 강민준이 한숨을 쉬었다. "보기에 좀 이상해 보여서. 팀장님은 선배를 보는 눈이 다르고, 선배는 팀장님을 보면 항상 뭔가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요."
지은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런데 제일 이상한 건..." 강민준이 계속했다. "선배가 팀장님이 먼저 뭘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거예요."
지은의 눈이 커졌다.
"우리 팀 회의 때마다 그래요. 선배가 의견을 말해도 그다음에 항상 팀장님의 반응을 먼저 확인해요.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어요." 강민준이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 당신을 선택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요."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다. 너무 가까웠다.
"자기 선택을 먼저 하지 않고,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를 바라는 식으로 움직여요. 회사에서도 그래 보이고... 팀장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래 보여요." 강민준이 지은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선배, 당신은 정말 뛰어난 사람인데. 왜 항상 누가 먼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세요?"
지은이 저항하려 했다.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좋겠네요." 강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동정이 아니라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선배는 자기 선택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겠네요."
강민준이 복도를 나갔다. 지은은 그 자리에 남겨졌다. 복도의 벽이 그녀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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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30분. 준호가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에 긴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사장 신기호와의 면담이었다. 지은은 복도 끝에서 그를 봤다. 준호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단단했다. 프로페셔널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 아래로 뭔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준호가 자료를 들고 있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그 손을 재빨리 내려놨다. 그 순간, 지은은 알았다. 진급이 확정되었다. 아니면 조건이 제시되었다. 어쨌든 회사는 준호에게 뭔가를 제시했고, 준호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지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호가 지은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눈이 복도의 중간쯤에서 만났다. 준호가 걸어왔다.
"데이터 정리 됐어?" 준호가 물었다.
"네, 다 됐습니다." 지은이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작은지 들었다.
"그래. 고마워." 준호가 지은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아니다. 그렇게 지나가면 안 된다. 지은이 준호의 팔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가 멈춰 섰다. 돌아봤다. 그의 눈이 지은을 제대로 봤다. 마치 5년 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모두 한 번에 보려는 듯이.
"지은." 그가 이름으로 불렀다. 팀장으로서가 아니라, 예전처럼. "내가 너한테 선택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처음으로."
지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너가 원하는 거 아닌 것 같아." 준호가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난 너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난 너를 모르고 있었나."
그 말을 남긴 채 준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지은은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강민준의 말, 준호의 말, 그리고 3개월이라는 시간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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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지은의 집.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준호에게 보낼 메시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려놨다.
다시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켰다가 껐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맴돌았다. 문자를 입력했다 지웠다. 입력했다 지웠다.
결국 지은의 손가락이 멈춘 곳에는 이런 문자가 있었다.
"내일 야근해도 괜찮습니다."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읽음'으로 바뀌었다. 준호는 읽었지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자신의 손을 봤다. 그 손이 얼마나 자동으로 움직였는지 깨달았다.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손이 어떤 모양인지도. 지은은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자신을 한심해하는 한숨만 새어 나왔다.
지은은 베개에 묻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핸드폰 화면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읽음' 표시는 변하지 않았다. 준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팽개쳤다. 천장을 노려봤다. 밤 11시 23분. 내일 출근까지 정확히 8시간 37분이 남아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었다.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했다. 3주 전만 해도 없었던 것들이었다. 지은은 손가락으로 눈 밑을 눌러봤다. 탄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5년 전 거울은 이 얼굴을 몰랐을 것이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은이 놀라 돌아섰다. 화면에는 '혜린'이 떴다. 밤 11시 30분에 전화를 거는 친구는 혜린뿐이었다.
"뭐해?" 혜린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술 냄새가 풍겼다.
"자려고."
"거짓말하지 마. 너 지금 핸드폰 들었어. 목소리 들려."
지은이 소파에 앉았다. "야근하다 왔어. 피곤해."
"야근? 누구 때문에?"
"일이 많아."
혜린이 한숨을 쉬었다. "너 정말 답답해. 왜 자기 입으로 못 말해? 팀장 때문이잖아."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은아, 들어봐. 너 이러다가 정말 3개월 끝나고 떠나 버릴 거 아니야?" 혜린이 물었다. 술이 취한 말 같았지만, 질문은 예리했다.
"약속이니까."
"약속? 그게 뭐하는 짓이야. 너 자신과의 약속은? 너 자신을 지키는 거 말이야."
지은이 소파의 팔걸이를 집었다. 손가락이 패브릭을 파고들었다.
"강민준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강민준이가?"
"그 친구 너 진짜 걱정하는 것 같아. 넌 모르겠지만, 사람들 다 봤어. 너랑 팀장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거. 눈빛만 봐도 알아."
지은이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혜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은아? 들려?"
"응."
"넌 뭐해? 진짜. 팀장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지은은 준호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내가 너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난 너를 모르고 있었나.'
그 말 속에는 질문이 있었다. 그런데 지은은 질문 대신 도망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업무적인 거."
"거짓말. 너 목소리 들어봐. 떨려."
"떨리지 않아."
"떨려. 너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 봤어. 매번 그래. 자기 감정을 인정하지 않아. 그리고 남자한테 물어봐야 할 말을 혼자서 삼키고 있어."
지은이 핸드폰을 내려놨다. 혜린의 목소리가 계속 나왔다.
"지은아! 들려?"
"들려."
"그럼 대답해. 너 팀장 좋아해?"
침묵.
"대답해."
"..."
"이 답답한 년. 좋아하는 거 맞네."
지은이 핸드폰을 들었다. "좋아하는 게 문제가 아니야. 5년 전에 끝난 거야. 3개월 프로젝트는 그냥... 정리하는 거야."
"정리? 넌 지금 정리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있잖아."
"그렇지 않아."
"그렇고말고. 지은아, 넌 항상 그래. 남자가 너를 좋아해도 '아니야, 내가 먼저 안 돼'라고 생각하고, 남자가 떠나가도 '내가 먼저 떠나야지'라고 생각해. 근데 넌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아. 항상 선택받기를 기다려. 그게 너의 문제야."
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강민준의 말과 겹쳤다. '누군가 당신을 선택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요.'
"내일 봐.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진짜."
혜린이 전화를 끊었다.
지은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준호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낼까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을 보낼지 몰랐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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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사무실 복도에서 지은과 준호가 만났다. 지은이 먼저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준호가 지은을 봤다. 그의 눈에는 어제의 흔들림이 없었다. 대신 뭔가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오늘 1차 검수 미팅 있어. 10시. 회의실 3번."
"네, 알겠습니다."
준호가 지나갔다. 지은은 그의 뒷모습을 봤다. 어제 저녁 이사장과의 면담 후 준호가 뭔가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회의실 3번. 지은이 들어갔을 때 준호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민준도 있었다. 강민준이 지은에게 미소를 지었다. 어제의 대화가 그 미소에 담겨 있었다.
"자료 있어?" 준호가 물었다.
지은이 노트북을 켰다. 1차 고객 데이터 분석 자료가 화면에 떴다. 그 자료 속에는 5년 전 캠페인의 데이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준호가 그것을 찾으라고 했었다. '과거 성공 사례와의 비교 분석'이라는 명목으로.
준호가 화면을 봤다. 그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이건... 5년 전 캠페인이네."
"네. 비교 분석을 위해서요."
준호가 자료를 자세히 봤다. 그 데이터 차트 속에는 지은과 준호가 함께 만들었던 전략이 남아 있었다. 당시 신입이었던 준호가 지은을 도와가며 완성했던 프로젝트였다. 그것은 회사 마케팅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캠페인이었다.
"너... 이거 찾느라 시간 많이 썼나?"
"아니요. 데이터베이스에 있었어요."
거짓이었다. 지은은 이 자료를 찾기 위해 어제 밤 2시간을 더 썼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모르고 싶었다.
준호가 자료를 넘겼다. 페이지마다 지은의 필기가 있었다. 분석 메모, 개선 사항, 그리고 과거 노트에서 찾아낸 준호의 조언들.
"이건 너의 필기야?"
"네."
"왜 이렇게 자세하게?"
지은이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준이 옆에서 자료를 봤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 필기가 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준호가 천천히 자료를 내려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창문으로 나갔다. 지은은 그의 뒷모습을 봤다. 준호가 창밖을 봤다. 어깨가 움직였다. 깊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숨은 불안정했다. 무언가 결정하려는 사람의 숨이었다.
준호가 돌아왔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단단했다. 프로페셔널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거 좋은 자료야. 진짜 좋은 자료야." 준호가 말했다. "그런데..."
"네?"
"이걸 너가 혼자 한 거야? 야근하면서?"
"네."
"왜?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지은이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지은."
준호가 다시 불렀다. 이번엔 목소리가 달랐다. 더 낮고, 더 진지했다.
"5년 전 캠페인이 왜 성공했는지 알아? 우리가 왜 성공했는지?"
지은이 준호를 봤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다.
"넌 내 생각을 완성시켜 줬어. 내가 불완전한 아이디어를 던지면, 넌 그걸 가져가서 더 나은 형태로 돌려줬어. 그게 성공의 이유였어. 둘이 함께 만든 거였어. 넌 절대 혼자가 아니었어."
준호가 자료를 다시 봤다. 그의 눈이 지은의 필기를 따라갔다.
"그런데 이 필기들을 보니까... 넌 지금 혼자야. 이 모든 걸 혼자 짊어지고 있어. 왜?"
지은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너를 선택했다고 했잖아. 그건 너를 혼자 두고 싶다는 뜻이 아니야.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야. 그런데 넌 자꾸 혼자가 되려고만 해."
"팀장님—"
"내일 오후 3시. 종로 3가 스타벅스. 올 수 있어?"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우리 얘기하자. 진짜 얘기. 약속이나 책임이나 이런 거 말고,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겠어?"
"네..."
준호가 일어섰다. 회의실을 나갔다. 강민준도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지은에게 말했다.
"선배. 이번엔 자기 선택을 해보세요. 팀장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선택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강민준이 회의실을 나갔다. 지은은 혼자 남았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5년 전 캠페인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필기가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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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지은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혜린과의 약속 장소였다. 혜린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은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찬 음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리크루터 김 과장이었다.
"지은 님, 안녕하세요. 저 이전에 오퍼 드렸던 리크루터 김입니다. 혹시 결정 나셨나요?"
지은이 심호흡을 했다. 새 회사 오퍼. 그것은 지은이 원했던 것이었다. 3개월 전까지는.
"내일 오후 5시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내일 오후 5시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럼 그때 기다릴게요."
전화가 끊겼다.
혜린이 카페에 들어섰다. 얼굴은 여전히 피곤했다. 어제 술이 깬 것 같았다.
"앉아." 혜린이 지은 앞에 앉았다. "너 뭐 했어? 얼굴이 더 나빠졌네."
"야근 많았어."
"야근? 또 팀장 때문이야?"
지은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지은아, 진심으로 물어볼게. 너 3개월 끝나고 정말 떠날 거야?"
"모르겠어."
혜린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모른다고?"
"팀장님이... 내일 만나자고 했어."
"만나서 뭐 하려고?"
"얘기하려고. 진짜 얘기. 약속이나 책임 말고, 우리가 뭘 원하는지."
혜린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랜만에 보는 진짜 미소였다.
"그래. 그게 맞아. 그게 정상이야. 넌 왜 이제야?"
"몰라. 계속 피해만 다녔어. 강민준이가 말해줄 때까지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어."
"그 친구 좋은 친구네. 그래서 팀장님은 뭐라고 했어?"
"5년 전에 '반드시 돌아올게'라고 약속했대. 그리고 돌아왔대."
혜린의 눈이 흔들렸다. "오빠가?"
"응."
"그럼... 넌?"
지은이 혜린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 알 것 같아."
혜린이 손을 내밀었다.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럼 내일 뭐 할 거야?" 혜린이 물었다.
지은은 그 질문을 생각했다. 내일 오후 3시, 종로 3가 스타벅스. 그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자기 선택을 해보겠다."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결연했다.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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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지은의 집.
침대에 누워 천장을 노렸다. 핸드폰을 집었다. 리크루터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안녕하세요. 제시해주신 오퍼는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더 나은 기회가 생기면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메시지를 전송했다. 곧 답장이 왔다. 아쉬움을 담은 인사였다.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집어 들었다. 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만나요. 그리고...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먼저."
전송을 눌렀다.
화면이 '읽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곧 준호의 메시지가 왔다.
"기다리고 있을게."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내일. 종로 3가 스타벅스. 오후 3시.
그곳에서 무엇이 시작될지, 무엇이 끝날지는 여전히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엔 자신이 먼저 선택할 것이라는 것.
지은은 천장을 봤다. 밤은 길었고, 아침은 빨리 올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였다. 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손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는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