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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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질문은 회의실 복도에서 나왔다.

"5년 전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지은은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의 형광등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준호는 그 표정을 읽으려 했다. 지은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때는 그럴 때였던 것 같아요."

준호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게 무슨 대답이야?"

지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5년 전의 그 밤이 떠올랐다—준호가 자신의 손을 놓으며 "미안해, 지은. 난 지금 너한테 집중할 수 없어"라고 말했던 순간. 그때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울지도 않았다. 단지 끄덕였다. 그리고 떠나보냈다.

"답할 수 없어요."

지은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아니, 안 하는 거야. 큰 차이야."

준호가 말했다. 지은은 돌아섰다. 그의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그대로였다. 그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도 자신을 떠났던 남자. 지은은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업무 얘기를 해요. 제가 고객층 세분화 분석 결과를 내일까지 올릴 테니까."

"지은."

"네?"

"넌 항상 이래. 진심을 말하지 않고 돌아서. 그 습관이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지은은 준호를 마주보지 않은 채로 돌아섰다. 복도를 걸어나갔다. 뒤에서 준호가 뭔가 더 말하려는 기척이 들렸지만, 지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순간, 거울 같은 문에 비친 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마치 누군가를 붙잡으려다가 포기한 사람처럼.

***

집에 돌아온 지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가락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혜린의 목소리는 첫 톤부터 다급했다.

"뭐야, 뭐하고 있었어? 이 시간에 전화?"

"혜린."

"응?"

"...5년 전 일을 말해야 하는 건가?"

휴대폰 너머로 혜린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 방음이 된 듯한 소리가 났다. 아마 화장실로 들어간 것 같았다.

"뭐, 그 팀장이 물었어?"

"응."

"그리고?"

"답을 못 했어."

혜린이 한숨을 쉬었다.

"지은아, 미안하지만 넌 정말 답답해. 왜 말을 안 해?"

"말해봤자 뭐해. 이미 5년이 지났는데."

"그게 이유가 돼? 지은, 들어봐. 넌 항상 이렇더라. 자기 감정을 정리하지 않고 계속 미루다가, 나중에 더 큰 상처가 되는 거야. 이번엔 달라야 돼."

침묵이 흘렀다.

"있어, 없어?"

"있어."

"그럼 말해. 지금 당장."

"...난 그때 자신이 없었어. 준호 오빠가 점점 바빠지고, 나한테 집중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난 그걸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꿈을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래서 떠나보냈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뭐 어?"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자신을 희생하는 게."

혜린의 숨소리가 고요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야?"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은, 생각해봐. 그때 너는 뭘 원했어?"

"...준호 오빠가 자신을 택해주길 원했어."

"그럼 준호는?"

"...모르겠어. 준호 오빠가 뭘 원했는지."

"그래서 물어봐야지. 지금이라도. 그리고 너도 말해. 넌 지금도 자신을 희생하고 있어. 진심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번엔 다르게 해봐. 아직 시간이 있잖아."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천장을 다시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만 들렸다.

***

그 밤, 준호는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불을 끄려던 순간, 책상 위에 놓인 메모장이 눈에 띄었다. 지은이 회의 중에 쓰던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뻗어나갔다.

페이지를 넘겼다.

'고객 세그먼테이션 재정의 필요'

'퍼널 분석 데이터 정제'

'A/B 테스트 설계'

일반적인 업무 메모들이었다. 계속 넘겼다.

그러다 멈췄다.

페이지의 한 구석에 작은 글씨로 뭔가 쓰여 있었다.

'미안해.'

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그것은 자신의 필체였다. 5년 전, 자신이 쓴 글씨였다. 왜 이게 여기에?

다음 줄이 있었다. 역시 자신의 필체였다.

'미안해. 진짜로.'

그리고 그 아래, 다른 필체로 쓰인 한 줄.

'나도.'

준호는 창밖을 내다봤다. 밤의 서울이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여전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처럼. 지은처럼.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가 놨다. 다시 들었다가 놨다. 지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

다음날 아침, 준호는 회의실 앞에서 지은을 기다렸다.

지은이 다가오자, 준호가 먼저 손을 들었다.

"어제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

지은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닙니다. 팀장님이 맞아요."

목소리가 평탄했다. 지은은 준호의 눈을 마주보지 않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준호는 뒤따라 들어갔다.

회의실 테이블에는 강민준이 이미 앉아 있었다. 그는 준호와 지은을 번갈아 봤다. 뭔가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준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먼저 어제 고객층 세분화 분석 결과를 봅시다. 지은이 준비했을 거예요."

지은이 노트북을 켰다. 슬라이드가 띄워졌다. 데이터는 정교했다. 그래프와 차트가 정확하게 정렬되어 있었고, 인사이트는 명확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방향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한 가지 더 필요해. 이 세그먼트별로 구매 의도 데이터도 교차 분석해줄 수 있어?"

"네, 오늘 오후까지 가능합니다."

"고마워."

침묵이 흘렀다. 강민준이 자신의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크리에이티브 콘셉트 3가지를 준비했고, 각각의 장단점을 정리해왔다. 준호가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이 콘셉트들은 좋은데, 우리의 타겟층이 정말 이걸 원하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해. 지은의 데이터와 함께 봐야 의미가 있을 거야."

강민준이 메모했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다. 전문적이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두 명이 시선을 들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마케팅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회사 전체의 주목을 받는 프로젝트예요. 성공하면 우리 팀의 위상이 달라질 거고, 우리 모두의 커리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강민준의 눈이 반짝였다. 지은은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특히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가 인사 평가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주세요. 우리는 9주 안에 최고의 결과를 내야 합니다."

준호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회의실 벽에 붙은 타임라인을 보자, 지은의 손이 떨렸다. 숨이 얕아졌다. 9주. 정확히 9주가 남아 있었다. 자신이 이 회사를 떠나기로 약속한 시간. 그리고 그 9주 동안 준호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났다. 강민준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준호는 지은이 자료를 정리하는 것을 바라봤다.

"지은."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넌 정말 떠날 거야?"

질문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지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5년 전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의 손을 놓은 후, 처음으로 그것을 후회하는 듯한 표정.

"네. 약속이니까요."

지은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준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마치 그 말이 자신을 찌르는 칼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화면을 봤다. 하지만 그의 눈은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지은이 회의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강민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은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팀장님 표정이 좀 이상한데요. 뭔가 있는 건가 싶어서."

지은이 강민준을 봤다. 그 젊은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프로젝트 잘 진행되고 있고,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혹시..."

강민준이 말을 멈췄다.

"뭐?"

"당신의 표정을 보면,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요."

지은이 멈춰 섰다. 강민준의 말이 혜린의 말과 겹쳤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소리를 했네요."

강민준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미 말한 것은 취소할 수 없었다.

"아니야. 말해줘."

"그냥... 팀장님도 같은 표정이라서요. 마치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지은이 사무실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리크루터 김 과장이었다.

"지은님, 안녕하세요. 제안해드렸던 포지션 관련해서 최종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됐어요. 내일까지 답변을 주실 수 있을까요?"

시간 압박. 현실. 기한.

지은은 말을 잃었다.

"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지은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동시에 몰려오고 있었다. 준호의 절박함. 새 회사의 최후통첩. 자신의 약속. 자신의 진심.

오후 내내 지은은 데이터를 분석했다. 손가락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뇌는 계산했다. 하지만 마음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후 4시, 분석이 완성되었다. 이번에도 완벽했다. 지은은 파일을 준호에게 전송했다.

준호로부터 회신이 왔다.

"좋아. 너무 고마워. 내일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시 회의해보자."

지은은 그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다.

저녁 6시, 퇴근 시간이 되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지은은 자신의 책상을 정리했다. 그때 노트북 옆에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은 포스트잇이었다.

'진심을 말해주세요.'

필체는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한참을 고민 끝에 쓴 것처럼.

지은은 포스트잇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준호가 자신의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거... 내가 붙였어."

준호의 얼굴은 창백했다.

"왜?"

"왜냐하면... 넌 자꾸만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않아. 5년 전부터. 그게 뭐하는 짓인지 알아? 그건 나한테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않는 건... 날 선택하지 않는 거야."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원하는 커리어, 내가 원하는 성공. 그래서 넌 자신을 희생했어. 하지만 난 그걸 원하지 않았어. 난 널 원했어. 그냥 널 원했어."

지은의 입술이 떨렸다. 말을 하려 했지만, 준호가 먼저 돌아섰다.

"이제 진심을 말해줄래? 5년 전에,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가 뭐였어?"

그 질문은 남겨졌다. 회의실의 벽 위에서, 시간표 옆에서, 9주라는 약속 위에서.

지은은 포스트잇을 들었다. 그 위의 글씨를 다시 읽었다.

'진심을 말해주세요.'

손가락이 떨렸다. 눈물이 맺혔다. 아니, 이미 흘러내리고 있었다. 5년을 참았던 것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은은 깨달았다.

자신의 침묵이, 자신의 회피가 준호를 다시 상처 입히고 있다는 것을. 5년 전처럼.

그렇다면 이번엔 달라야 한다. 말해야 한다.

지은이 몸을 돌렸다. 준호를 찾아가려 했다. 포스트잇을 들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리크루터 김 과장'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지은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포스트잇과 휴대폰 사이에서.

결국 지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포스트잇을 움켜쥐고 복도로 나갔다. 준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지은은 회의실로 갔다. 비어있었다. 사무실 곳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옥상 문을 열었다.

밤의 서울이 불빛으로 가득했다.

준호는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준호 오빠."

준호가 돌아섰다.

"5년 전에 내가 떠난 이유는... 내가 너를 잃을까봐 무서웠어. 내가 너의 짐이 될까봐. 그래서 먼저 떠나면 덜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 난 5년 동안 계속 상처받았어. 그리고 너도 상처받았고."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다르게 하고 싶어. 내 진심을 말하고 싶어. 난... 너를 원해. 그냥 널 원해."

준호가 한 발 다가섰다.

"그럼 남아줄래? 9주 후가 아니라, 지금부터. 여기서. 나와 함께."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포스트잇을 건넸다.

준호는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읽었다.

'진심을 말해주세요.'

그 아래, 지은이 새로 쓴 글씨가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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