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팀의 시작

회의실 입구에서 지은은 한 발 물러섰다. 준호가 화이트보드 앞에 선 모습이 보였다. 팀장이라는 직함이 그의 어깨를 곧게 펴놓았다. 신입 시절 그가 자신의 멘토였을 때와 달라진 태도. 그런데도 손가락으로 펜을 굴리는 습관은 여전했다. 5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강민준이 회의실로 들어가며 지은을 바라봤다.

"지은 선배, 들어가시죠."

지은은 심호흡을 했다. 3개월이라는 약속이 갑자기 현실처럼 느껴졌다. 회의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준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0.3초.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눈빛이 흔들렸다가 다시 정돈됐다. 팀장 모드로 복귀하는 것을 지은은 명확히 봤다.

"좋아, 다들 앉아. 오늘이 정식 프로젝트 킥오프니까 중요한 날이다."

준호가 마크펜을 집었다. 화이트보드에 프로젝트명을 적었다. 글씨가 각지고 정확했다. 과거처럼.

"3개월 안에 신규 고객층 확보를 위한 마케팅 전략을 완성하는 게 목표다. 데이터 분석이 핵심인데—"

그가 지은을 바라봤다.

"지은이 총괄할 거고, 민준이는 집행 담당. 내가 전체 조율한다. 이해했나?"

"네, 팀장님."

지은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회사 직원의 톤이었다. 그 톤이 준호의 눈가를 미세하게 굳혔다. 하지만 그는 계속했다.

"첫 주에 데이터 수집하고, 둘째 주부터 분석 시작. 주 2회 진행상황 회의. 문제 생기면 바로 보고해. 질문 있어?"

강민준이 손을 들었다. "팀장님, 고객층 정의를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질문."

준호가 다시 화이트보드에 그렸다. 원형 차트. 아래쪽에 한 섹션을 크게 표시했다.

"이게 우리가 공략해야 할 구간이야. 25~40대 직장인 중에서 특히 이직을 고려 중인 사람들. 이들이 우리 서비스를 쓸 가능성이 가장 높아."

지은이 노트를 펼쳤다. 펜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팀장님."

"응?"

준호가 돌아봤다.

"이 구간 정의가 너무 광범위하지 않을까요? 25~40대면 거의 모든 직장인 대상이고, 이직 고려 중이라는 건 주관적인 판단이잖아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강민준이 지은을 봤다.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놀람이 있었다. 첫 발언부터 팀장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선배. 그런데 그게 옳은 지적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준호가 펜을 내렸다. 화이트보드 마커의 검은 색이 그의 손에 남아있었다. 그는 지은을 바라봤다. 진짜 바라봤다.

"너 말이 맞아."

그가 한 발 다가섰다. 회의실 테이블 너머로.

"그런데 지은, 넌 항상 좋은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 뒤에 뭘 원하는지는 절대 말하지 않아. 지금도 마찬가지고. 넌 데이터 정의를 더 좁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우리 분석이 더 정밀해질 거라고?"

지은의 손이 멈췄다. 펜이 종이 위에서 떨렸다.

"그럼 왜 직접 말하지 않아? '팀장님,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왜 항상 질문으로 돌려서 말하는 거야?"

침묵이 흘렀다. 강민준이 어색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건 회의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 같았다. 과거의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순간 같았다.

지은이 펜을 놨다. 주먹을 쥐었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알겠습니다. 구간을 다시 정의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얇았다. 지은은 노트를 닫았다.

"회의 계속하시죠."

준호가 입을 열려다 닫았다. 회의실의 공기가 한층 차가워졌다. 강민준은 화면을 봤고, 지은은 테이블 모서리를 봤다. 준호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회의는 1시간 30분을 더 진행됐다. 지은은 필요한 것들을 메모하고, 숫자를 적고, 때로 강민준의 질문에 짧게 답했다. 하지만 준호를 마주치지 않았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무언가 무너질 것 같았다.

회의실을 나갈 때, 준호가 지은의 팔을 잡았다.

"5분만."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시간이었다. 오후 3시. 모두 자기 자리에 있을 시간.

"혹시... 괜찮아? 함께 일하는 게."

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팀장 톤이 아니었다. 그냥 남자의 목소리였다.

지은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괜찮습니다. 전문적으로 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난 너한테 상처를 주려고 한 게 아니야. 회의 중에. 난 그냥..."

"정이사님 기다리시지 않으세요? 회의 후 보고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은이 준호를 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 낡은 기계음.

"지은."

"저는 마케팅팀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은이 탔다. 준호는 타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지은은 그 안에 뭐가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마케팅팀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강민준이 나타났다.

"선배, 커피 마실래요?"

지은은 고개를 들었다. 신입의 얼굴에는 걱정이 있었다.

"괜찮아. 나 괜찮아."

"회의 중에... 팀장님이 좀 심했어요. 근데 선배, 당신 말이 맞았어요. 데이터 정의를 더 좁혀야 하는 게 맞고."

강민준이 옆에 섰다.

"팀장님은 정말 야망이 크네요. 그런 사람이 항상 옳은 건 아닌데."

지은이 강민준을 봤다. 신입의 얼굴에는 순진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그런 눈빛.

"강민준, 팀장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냥... 복잡한 거야."

"네, 선배."

강민준은 더 묻지 않았다.

오후 5시, 마케팅팀 자리.

지은의 선배 혜림이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야, 지은. 너 3개월 계약이라며?"

지은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 그래?"

"전략팀 누군가가 세팅 팀원들한테 말했대. 준호 팀장이 신규 프로젝트 팀을 꾸렸는데 지은이 고객 데이터 분석 담당이래. 3개월 계약이고."

혜림이 의자에 앉았다.

"정말이야? 너 퇴사 안 하고?"

지은이 모니터를 봤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응. 3개월만 더 있기로 했어."

"왜?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아웃 심하다고 했는데."

"프로젝트가 중요한 거라고 해서."

"프로젝트? 아니 정말. 너 준호 팀장한테 뭔가 있어?"

지은이 혜림을 봤다.

"뭐가?"

"몰라, 그냥 느낌. 회사에서 그런 말이 자자한데, 준호 팀장이 지은을 특별히 찾아왔대. 신입 때 지은이 그의 멘토였다고도 하고."

지은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누르고 또 눌렀다.

"그냥 업무야. 혜림."

"그래, 그래. 근데 조심해. 직장에서 과거 일이 나오면 복잡해진단 말이야."

혜림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녀는 지은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5년을 같은 팀에서 보냈으니까.

"알아."

지은은 중얼거렸다.

"2주면 충분할 거야. 정리할 시간이 충분하니까."

그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자신도 몰랐다. 입에서 나온 말일 뿐이었다.

오후 5시 30분, 지은의 휴대폰.

리크루터 김 과장이 전화를 걸었다.

"지은님. 저 김 과장이에요. 어제 말씀한 회사 건 생각해보셨어요?"

"... 아직요."

"이 기회 놓치면 다시 없을 거예요. 진심이에요. 당신 같은 인재는 흔하지 않은데, 우리 회사는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내일까지만 답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내일은 힘들 것 같아요.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프로젝트? 아, 3개월 계약이라고 들었어요. 3개월 후면 되지 않을까요?"

"그 이전에 결정을 해야 하나요?"

"당신 같은 분들은 보통 현재의 상황이 좋으면 떠나지 않아요. 그래서 미리 외부 기회를 확보하는 거죠. 2주 뒤에 답변 주실 수 있을까요?"

지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자꾸만 빠져나가고 있었다. 2주. 정확히 2주.

"2주 뒤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2주. 그 사이에 신중하게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요."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주먹을 쥐었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한강 공원. 밤 9시.

지은의 발은 자동으로 한강 공원 쪽으로 향했다. 5년 전 준호와 자주 가던 곳. 벤치에 앉아 강물을 바라봤다. 강바람이 옷깃을 헤쳤다.

휴대폰이 울렸다. 회사 번호. 준호였다.

지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10초 뒤 문자가 들어왔다.

"내일 아침 9시. 회의실 B에서 팀 미팅. 강민준이도 올 거야."

팀장의 공식 공지였다.

지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강 공원의 벤치에 앉은 채로 생각했다. 준호는 뭘 원하는 걸까. 3개월 계약이라는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놓고도, 자꾸만 그 선을 흐릿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5년 전 준호는 다달랐다. 그때는 모든 게 명확했다. '지은, 미안해. 난 지금 커리어에 집중해야 해. 이건 너 때문이 아니야. 난 정말... 미안해.'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은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 떠나보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준호는 다시 나타났고, 자신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 모순이 지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은은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장을 열었다. 오래전에 쓴 글이 있었다.

"3개월. 정확히 3개월 후엔 여기 없어. 이건 약속이야. 자신과의 약속."

글씨가 울었다. 펜을 누르다 보니 종이가 뚫렸었나 보다.

지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일어섰다. 혜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 지금 가."

"뭐 했어? 왜 안 온 거야?"

"생각 좀 했어. 지금 간다."

혜림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혜림은 거실에서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뭐 했냐고 물었잖아. 한강?"

지은이 소파에 앉았다.

"응."

"준호 때문이야?"

"... 몰라."

"뭐가 몰라. 너 얼굴 봐봐. 준호 때문이지. 아, 진짜."

혜림이 와인을 따라 건넸다.

"그래. 맞아. 근데 난 뭘 해야 해? 3개월이 남았어. 3개월을 어떻게 버티고 나갈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뭐?"

"그리고 그 사람이 날 또 상처 줄까봐."

혜림이 지은의 손을 잡았다.

"너 알아? 너 지금 이미 상처받고 있어. 5년 동안 받은 상처를 또 받으려고 하는 거야."

"그건 내 탓이야. 내가 약한 거야."

"아니야. 그건 준호가 너한테 뭘 남겼냐는 거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남겨두고 가면, 그건 약함이 아니야. 그건... 상처야."

지은이 와인을 마셨다. 목을 지나가는 것이 뜨거웠다.

다음날 아침 9시.

회의실 B의 조명이 밝혔다. 오래된 테이블, 낡은 의자들. 마케팅팀이 쓰던 회의실이었다.

지은이 먼저 도착했다. 8시 45분. 강민준이 나타났다.

"아, 지은 선배님. 먼저 오셨네요."

"응. 너도 일찍 온 거네."

"팀장님 스타일이 그래요. 항상 일찍 와 있으시고, 일찍 시작하시고."

강민준이 자리에 앉았다.

"강민준."

"네?"

"팀장님 어떻게 생각해?"

강민준이 웃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일은 진짜 잘하고, 팀원들도 챙기고. 요즘 이런 팀장 드문데."

지은이 강민준을 봤다. 그는 진심으로 준호를 존경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 좋은 팀장이네."

지은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8시 58분. 준호가 들어왔다.

"좋아. 다 왔네."

준호는 마치 어제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자료를 꺼냈다. 프로젝트 타임라인, 각 팀원의 역할, 예상 일정. 모든 게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고객 데이터 분석이야. 지은이가 총괄할 거고, 강민준이는 디지털 마케팅 전략을 맡을 거야. 우리는 3개월 안에 회사 신규 상품 출시 캠페인을 완성해야 해. 난 이걸 우리 팀의 첫 번째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우리 팀.' 그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은에게는 그 말이 자꾸만 걸렸다.

"지은, 고객 데이터 분석 첫 번째 리포트는 언제쯤 나올 수 있어?"

준호가 물었다. 팀장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전문적이고, 어제의 그 절박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2주 안에 초안을 드리겠습니다."

지은이 답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답변이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것은 약속이었다. 그리고 약속에는 대가가 따랐다. 2주 안에 리포트를 완성하려면, 그 사이 리크루터의 제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시간이 겹쳐 있었다.

"좋아. 그럼 강민준이는?"

"3주 안에 디지털 전략안을 제시하겠습니다."

"완벽해. 그럼 우리는 4주차부터 통합 리뷰를 시작하고, 5~8주차에 수정·보완을 거쳐, 9주차에 최종안을 이사장님한테 보고할 거야."

준호가 타임라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혹시 질문 있어?"

준호가 두 사람을 봤다. 그의 눈은 지은을 향했다가 금방 다른 곳으로 향했다.

"없습니다."

지은이 말했다.

"그럼 일단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아. 오늘부터 시작하자. 우리 팀, 화이팅."

준호가 손을 모았다. 강민준이 따라 손을 모았다. 지은도 손을 모아야 했다.

세 손이 위에서 만났다.

그 순간, 지은은 느꼈다. 준호의 손이 자신의 손을 살짝 눌렀다. 지은은 손을 빼냈다.

회의가 끝나고 강민준은 먼저 나갔다. 준호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팀장님."

지은이 말했다.

준호가 돌아봤다.

"어제 로비에서 하신 말씀... 우린 그냥 다른 길을 가기로 한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지은이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넌 항상 자기 진심을 말하지 않아."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 뭐?"

"너는 지금도 자기 진심을 말하지 않고 있어. 어제도, 지금도. 그 말은 거짓이야."

"아니에요."

"맞아. 거짓이야. 너는 5년 전부터 지금까지 날 보면서 뭔가 느낀 거 맞지? 적어도 어제 로비에서는."

지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준호는 계속 말했다.

"나도 알아. 너는 나한테 뭔가 있어. 근데 넌 그걸 말하지 않아. 왜?"

"왜냐면... 왜냐면 팀장님이 원하는 게 그게 아니니까요."

"뭘 모르고 그래?"

"5년 전이잖아요. 팀장님은 날 떠났어요. 자신의 커리어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뭐예요? 또 떠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가 커졌다.

"누가 그래?"

"회사 소문이에요. 진급 제안 받으셨잖아요."

"그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야. 이사장님이 정해놨어."

준호가 말했다.

"그래도 결국 팀장님이 선택해야 하는 거잖아요. 진급을 택할지, 아니면..."

지은이 말을 끝내지 않았다. 그 끝은 너무 명확했다. 아니면 자신을 택할지.

준호가 한 발 다가섰다. 회의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주 안에 리포트를 제출한다고 했지?"

"네."

"그 사이에 뭔가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외부 회사 제안 말이야."

지은이 준호를 봤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준호는 항상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사가 나한테 말했어. 지은이가 좋은 기회를 받았다고. 축하해야 한다고."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 축하해. 넌 그 회사 가야 해. 여기보다 나을 거야. 난... 난 너한테 줄 게 없으니까."

"팀장님..."

"지은, 넌 5년을 여기서 낭비했어. 평사원으로. 난 그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 너를 불렀어. 너한테 기회를 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게 전부야. 난 너를 붙잡을 수 없어. 붙잡으면 안 돼."

준호의 말에는 절망감이 묻어났다. 자신의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그것. 진급이라는 선택지 앞에서, 지은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2주 안에 리포트 제출해. 그 다음엔 너는 자유야. 어디든 가. 더 좋은 곳으로."

지은이 준호를 붙잡으려 했다.

"잠깐만요. 팀장님, 저는..."

준호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회의실 B에서 우리가 한 약속. 그건 3개월이 아니라 2주야. 그 정도면 충분해. 그 다음엔 넌 자유야."

준호가 나갔다. 회의실에는 지은만 남았다.

지은은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주먹을 쥐었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2주. 2주 안에 모든 게 끝난다는 뜻이었다. 프로젝트도, 약속도, 그리고 준호와의 모든 것도.

저녁 6시 30분, 회사 로비.

지은이 건물을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은."

준호였다. 정장 차림. 하지만 넥타이가 풀려 있었고, 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더 피곤해 보였다.

지은의 발이 멈췄다. 등을 준호에게 향한 채로.

"2주 동안 정말 열심히 해 줄래? 그럼 충분해."

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지은은 돌아섰다. 준호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그의 눈빛에는 무언가 절박한 것이 있었다. 5년이 지났어도, 그 눈빛은 여전히 그를 흔들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그 시선을 견디기로 했다.

"네. 팀장님."

"그리고... 그리고 2주 후에 뭔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거, 알아줄래?"

준호가 한 발 다가섰다.

"뭐가요?"

"모르겠어. 난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2주는... 2주는 뭔가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너한테도, 나한테도."

지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준호의 말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뭔가 있었다. 약속의 균열. 3개월이라는 경계선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

"팀장님..."

"지은, 2주만. 2주만 나한테 시간을 줄래?"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지은은 손을 빼지 않았다.

"네. 팀장님."

그것이 지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것도 거짓이었지만.

회전문을 밀고 나갔을 때, 서울의 저녁 거리가 펼쳐졌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은도 그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건물 안에 남아 있었다.

2주. 2주 안에 모든 게 끝난다. 혹은 시작된다.

지은은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장의 오래된 글을 지웠다. 새로운 글을 썼다.

"2주. 정확히 2주 후엔 뭐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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