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신규 마케팅 플랫폼 프로젝트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서 지은은 퇴사 서류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A4 용지 세 장. 도장 자리만 남은 문서는 손 위에서 미동했다. 화면 위 시계는 오후 5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3분 후면 정확히 근무 종료 시간이다. 정확히 그때 인사팀에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깔끔한 마무리. 5년간의 번아웃을 끝내는 가장 깨끗한 방법.

책상 위의 개인 물품들은 이미 반을 정리했다. 펜꽂이, 탁상 캘린더, 회사에서 준 승진 기념품들. 이 모든 것이 남겨질 것이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지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은?"

목소리는 뜻밖이었다. 지은은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통로 쪽에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준호였다.

전략팀 팀장 준호. 2년 전까지만 해도 지은의 상사였던 남자. 신입 시절 그녀의 멘토였고, 5년 전에는—

지은의 호흡이 멎었다.

준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멈췄다. 그의 눈이 퇴사 서류를 발견했다. 한 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퇴사하려고?"

음성은 차분했다. 놀람도, 의문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서류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네."

지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 수준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서류를 책상 아래로 내렸다.

준호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지은은 이 남자가 자신의 책상에 앉은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계산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뭉개져 있었다. 2년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니, 5년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3개월만 남아 줄 수 있을까?"

준호의 제안은 갑자기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왔다.

"3개월?"

"신규 마케팅 플랫폼 프로젝트가 있어. 회사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건데, 리더가 필요해. 넌 이 일에 최적이야."

준호는 지은의 눈을 직접 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 옆, 창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저는 이미 결심했습니다."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 결심이 번아웃 때문인 줄 알아.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다를 거야. 넌 여기서 뭔가 다른 걸 경험할 수 있어. 내가 보장한다."

"팀장님이—"

"준호야. 이제는 준호라고 불러도 돼."

지은은 입을 다물었다. 준호는 여전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의 간절함에 가까운 것. 지은은 자신이 그것을 듣지 않은 척하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프로젝트 기간이 정확히 3개월이야. 그 후에 원한다면 떠나면 돼. 난 강요하지 않을 거야."

준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지은을 찌르듯 들어왔다. 그 순간, 지은은 5년 전 그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망에 불타는 표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계산하는 표정.

"생각해 봐. 하루만이라도."

준호는 일어났다. 그가 떠나가며 덧붙였다.

"내일 오전 10시에 회의실 3에서 만나자. 그때 결정해도 돼."

사무실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은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준호. 그 이름을 5년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도 가능한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으면서,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그 남자는 자신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5년 전, 자신을 떠난 남자였다.

지은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왜?"

혜린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직설적이었다.

"그냥... 뭐, 퇴사 얘기."

"어? 뭐해? 이미 결심했잖아. 왜 갑자기?"

지은은 말을 삼켰다. 혜린은 잠시 침묵을 견디다가 다시 물었다.

"뭔가 있어?"

"아니야. 그냥...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해."

"넌 뭘 더 생각해? 너 5년을 번아웃으로 보냈잖아. 지금 떠나는 게 정답이야."

혜린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지은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일 다시 생각해 볼게."

"그래... 뭐 어때. 너 맘이지."

혜린은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지은아, 후회는 하지 마. 뭘 하든."

통화가 끝났다. 사무실은 더욱 고요해졌다. 지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3개월이면 충분할 거야."

하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충분한 시간? 아니면 견딜 수 있는 시간?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

다음 날 아침 10시.

회의실 3의 문을 열자 준호가 이미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노트북과 함께 한 폴더가 놓여 있었다. 회의실의 창문을 통해 서울 종로의 빌딩들이 보였다.

"생각해 봤어?"

준호는 간단히 물었다.

"네."

"그리고?"

지은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그녀의 목은 건조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봐."

지은은 깊게 숨을 쉬었다. 이 조건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준호와의 3개월이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도록, 끝이 명확하도록.

"정확히 3개월 후, 더 이상 미련 없이 떠나겠습니다."

그것이 자신과 준호 사이의 유일한 규칙이 되어야 했다. 시간의 제약. 그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패였다.

준호의 얼굴이 일렁였다. 그것은 순간이었지만, 지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 밑에 그림자가 지나갔다.

"알겠어."

그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 매우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긴장의 신호.

"계약서를 준비했어. 한 번 봐."

준호는 폴더를 밀어 넘겼다. 지은은 그것을 펼쳤다. 계약서였다. 정식 서류였다. 프로젝트 기간, 급여, 보너스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명확하게 쓰여 있었다.

'프로젝트 종료일: 3개월 후'

지은은 그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다. 3개월. 그것은 너무 길기도, 너무 짧기도 했다. 준호와 다시 일하기에는 위험하게 길고,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절박하게 짧은 시간이었다.

"이건 회사 공식 계약이야. 너와 나 둘 다를 보호하는 거야."

준호의 말에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정확히 정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계약의 영역이 된다. 둘 다 그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지은은 계약서를 읽었다. 모든 조건이 명확했다. 3개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3개월.

그녀는 펜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펜끝이 서명란에 닿으려는 순간, 5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준호가 자신을 떠나던 날. 그의 말과 표정이 생생했다.

"지은, 미안해. 난 너를 계속 사랑할 수 없어."

그때 그의 눈빛은 어땠던가. 결정적이었다.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지은의 손이 멈춰 있었다. 펜은 공중에 떠 있었다.

"지은?"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맺혔다. 5년 전의 상처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를 떠나보냈던 그 밤의 고통이, 이 순간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하지만 지은은 눈을 떴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펜을 내렸다. 서명을 했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글씨는 명확했다.

준호도 서명을 했다. 그의 서명은 크고 명확했다. 마치 자신의 결정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처럼.

"환영해. 팀에."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 승리감이나 안도감. 그 대신 그것은 거의 슬픔에 가까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슬픔.

지은은 회의실을 나왔다. 책상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휴지통을 지나갔다. 퇴사 서류는 이미 거기 있지 않았다. 누군가 치웠거나, 아니면 지은 자신이 버렸거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메일함에 새 메시지가 떠 있었다.

'[긴급] 신규 마케팅 플랫폼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 초대'

시간: 오늘 오후 2시 장소: 컨퍼런스홀 A

지은은 메일을 읽고 있었다. 그때였다. 뭔가가 자신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지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지은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준호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던 순간, 시선은 사라졌다. 화면 너머의 그림자가 흔들리듯 움직였을 뿐이다.

지은은 다시 메일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멈춰 있었다. 킥오프 미팅까지 4시간. 그 사이에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프로젝트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마케팅팀 동료들에게 자신이 3개월간 부재할 것임을 알리고, 진행 중이던 일들을 인수인계하고.

하지만 지은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준호가 자신을 찾아왔을까. 그것이 자꾸만 맴돌았다. 단순히 자신의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휴대폰을 들었다. 혜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3개월 프로젝트 시작해. 퇴사는 그 다음.'

회신이 곧바로 왔다.

'뭐????? 진심??'

지은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메신저를 닫고 업무용 메일을 다시 열었다. 신규 마케팅 플랫폼 프로젝트 관련 자료가 이미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준호의 전략팀에서 보낸 기본 기획안들이었다.

지은은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엑셀 시트가 펼쳐졌다. 시장 분석, 타겟 고객층, 예상 매출액, 경쟁사 벤치마킹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준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는 항상 이렇게 했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만 시작하려고 했다.

지은은 데이터를 스크롤하며 읽기 시작했다. 마케팅 분석이 필요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소비자 심리 데이터가 더 필요할 것 같았고, 저기서는 계절성 분석을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메모장에 의견들을 적어나갔다.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준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정오를 넘어갔다.

"지은이, 뭐 하냐?"

마케팅팀의 또 다른 평사원 이재현이 지나가다가 멈췄다. 지은은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료 정리 중이야."

"어? 너 퇴사 아니었나?"

지은은 잠시 망설였다. 이 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조금 더 있기로 했어. 프로젝트 하나."

이재현의 표정이 의외라는 듯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은의 퇴사 결심은 팀 전체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팀장도, 인사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지은이 갑자기 남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그럼 내일 얘기할게."

지은은 덧붙였다. 이재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지은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중이 풀려 있었다. 생각은 여전히 준호에게 가 있었다. 자신이 이 프로젝트를 수락한 것이 정말 옳은 결정일까. 아니면 자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일까.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준호의 이름을 검색했다. 회사 인트라넷에서 그의 프로필을 찾았다. 전략팀 팀장, 준호. 사진은 3년 전 것 같았다. 프로필 사진에서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는 자신을 떠나보내고도 멀쩡히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은은 프로필을 닫았다. 시계를 봤다. 1시 45분.

킥오프 미팅까지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은 창백했다. 아래 눈썹 안쪽에 다크써클이 잡혀 있었다. 5년간의 번아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지은은 립밤을 꺼내 입술에 발랐다. 거울을 떠났다.

복도를 걸으며 지은은 깊게 숨을 쉬었다. 킥오프 미팅. 그곳에는 준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략팀의 다른 팀원들도 있을 것이고, 마케팅팀의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지은은 컨퍼런스홀 A의 문 앞에 섰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자 준호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렸다.

"지은이 왔다."

모든 시선이 지은을 향했다. 그 중에서 지은은 준호의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뭔가가 담겨 있었다. 안도감, 아니면 확인의 표정일 수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은입니다."

지은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준호 바로 옆이었다. 너무 가까웠다.

준호는 프로젝트 기획안을 펼쳤다.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고객 데이터 기반의 개인화 마케팅입니다. 기존의 일괄 마케팅에서 벗어나 각 고객 세그먼트별로 맞춤형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죠."

준호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은은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있었지만, 그의 말보다는 목소리에 더 집중했다. 5년 만에 다시 듣는 그 목소리. 그것이 그녀의 가슴을 자꾸만 두드렸다.

옆자리의 강민준이라는 전략팀 신입사원은 준호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경외심으로 가득 찼다. 지은은 순간 자신과 강민준을 비교했다. 강민준의 나이는 아마도 25세 정도일 것 같았다. 지은이 신입이던 때와 비슷한 나이. 그리고 지은이 준호와 만나던 때. 5년의 시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깨달았다.

"이 부분이 지은의 영역입니다."

준호가 갑자기 지은을 언급했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모두가 지은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은은 마케팅팀에서 5년간 데이터 분석을 해왔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 경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준호는 지은을 바라봤다.

"지은, 너 생각은?"

지은의 목이 다시 건조해졌다. 모든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지은은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좋습니다. 그럼 먼저 고객 데이터 마이닝 작업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존 고객 베이스에서 최소 500만 건 이상의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고, 그것을 세그먼트화해야 합니다."

준호는 각 항목 옆에 마감일을 입력했다. 타임라인, 예산, 성과 지표들. 모든 것이 체계적이었다.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회사에는 새로운 수익 축이 생기게 됩니다."

준호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난 것처럼.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에게."

그는 다시 지은을 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은은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미팅이 계속되었다. 강민준이 소개되었다.

"안녕하세요. 저 강민준이라고 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지은 선배님과 함께 일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네, 안녕하세요."

지은이 인사를 하자 강민준은 더욱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순수해 보였다.

"자, 그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합시다."

준호가 미팅을 마무리했다.

"지은, 너 따로 시간 있어?"

미팅이 끝나고 강민준이 나간 후 준호가 물었다. 회의실에는 둘만 남아 있었다.

"네?"

"프로젝트 세부 일정을 논의하고 싶어. 너랑 단둘이."

지은의 심장이 요동쳤다.

"알겠습니다."

"내 사무실로 가자."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은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면서 지은은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준호의 사무실은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직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소리만 들렸다.

"이 3개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네."

"너는 정말 3개월 후에 떠날 거야?"

그 질문에는 단순한 업무 확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지은은 준호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약속했으니까요."

"그래."

준호의 목소리에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 다시 그 슬픔 같은 감정이.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지은은 뭔가를 깨달았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은 다시 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준호는 모니터를 켰다. 프로젝트 일정 문서를 띄웠다.

"이번 프로젝트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데이터 수집과 정제, 두 번째는 세그먼트 분석, 세 번째는 마케팅 시나리오 개발, 마지막은 실행 및 성과 측정이야."

준호는 각 항목 옆에 마감일을 입력했다.

"첫 번째 단계가 가장 중요해. 여기서 데이터의 질이 결정되거든. 너는 이 부분을 총괄해야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는 지은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었다. 마치 5년 동안 놓친 무언가를 되찾으려는 것처럼.

"넌 항상 자기 진심을 말하지 않아."

지은의 숨이 멎었다.

"뭐, 뭘 말씀하시는..."

"프로젝트 진행 중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 말해. 나한테. 이사장한테 아니라 나한테. 알겠어?"

준호의 목소리는 명령조였지만, 그 안에는 뭔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신뢰해달라는 간절함.

"네. 알겠습니다."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준호는 다시 모니터를 봤다.

"오늘 밤 문서를 정리해서 보낼 게. 너는 내일 아침까지 검토하고, 피드백 줄 수 있어?"

"네."

"그리고 모레는 전략팀 전체 회의가 있어. 그때 너도 참석해야 하고, 기본 계획을 제시해야 해. 괜찮겠지?"

"네, 괜찮습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나가도 돼."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은."

그녀는 멈췄다.

"응?"

"3개월이라는 기간이 너한테 충분해?"

지은은 돌아섰다. 준호는 의자에 앉아 지은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뭔가 절박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업무 확인이 아니었다.

지은의 목이 메였다. 펜을 들려던 손가락이 멈춰 있었다.

"충분해? 3개월이?"

준호의 질문이 반복되었다. 그 질문 속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다. 자신과의 시간이 충분한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가. 자신과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5년 전이 떠올랐다. 준호가 자신을 떠나던 날.

"지은, 미안해. 난 너를 계속 사랑할 수 없어."

그때 그의 눈빛은 어땠던가. 결정적이었다.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 표정은 지금도 생생했다. 그 말은 지금도 가슴을 찔렀다.

"3개월이면 충분합니다."

지은은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프로젝트를 완료하기에? 마음을 정리하기에? 아니면 준호를 다시 용서하기에?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불안해 보였다.

"그럼 내일 봐."

"네. 안녕히 계세요."

지은은 사무실을 나왔다. 문을 닫으면서 그녀는 뒤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준호가 자신을 따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선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지은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호흡은 얕아져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혜린의 전화였다.

"뭐야. 왜 연락 안 해? 지금 뭐 하냐?"

혜린의 목소리는 조급했다.

"아, 미팅이 끝났어."

"그래서? 퇴사하는 건지 남는 건지 뭐가 뭔지 좀 명확하게 해 줄래?"

지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1층 로비였다.

"내일 얘기할게. 지금은 좀 복잡해."

"복잡하네. 너 정신 차려. 뭔가 하면 안 되는 짓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런데 뭔가 이상해. 넌 뭔가 이상해."

지은은 입을 다물었다. 혜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이상했다.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내일 봐. 이따 전화 못 할 것 같아."

"뭐, 뭐 하는 건데?"

"프로젝트 자료 검토."

"지금 이 시간에?"

"응."

지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혜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진짜... 너 조심해."

통화가 끝났다.

지은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남았다.

그리고 밤 9시까지 남아서 준호가 보내온 프로젝트 문서를 검토했다.

데이터 수집 방법론, 마케팅 세그먼트 기준, 성과 지표 설정. 모든 것이 체계적이었고, 전문적이었다. 하지만 지은은 빈틈을 찾아냈다.

고객 행동 데이터의 시계열 분석이 부족했다. 계절성을 고려한 수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신규 고객 데이터와 기존 고객 데이터의 가중치 설정도 더 정교해져야 했다.

지은은 메모를 남겼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이것은 업무였다. 자신의 영역이었다. 여기서는 자신이 준호보다 우월했다. 여기서는 자신이 준호를 가르칠 수 있었다.

밤 11시, 지은은 피드백 메일을 작성했다.

제목: [프로젝트] 기본 계획 검토 완료 - 피드백 첨부

메일을 보내는 순간,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검토 다 했어?"

"네. 지금 메일 보냈습니다."

"고마워. 지금 봤어."

지은은 자신의 메일을 다시 읽고 있었다. 자신의 피드백이 객관적이고 전문적이었다.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다.

"좋은 의견들이네."

준호의 말에 지은은 뭔가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목소리였다.

침묵이 흘렀다.

"지은."

"네?"

"내일 아침 8시에 만날 수 있어?"

"네?"

"내가 너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수정본을 만들고 싶어. 그리고 너한테 직접 설명하고 싶어. 너의 생각을 더 들으면서."

지은의 심장이 또다시 요동쳤다. 내일 아침 8시. 그것은 공식적인 업무 시간 전이었다. 준호가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내겠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8시."

"고마워."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지은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3개월. 그 시간이 갑자기 엄청나게 길어 보였다. 동시에 엄청나게 짧아 보였다.

자신은 이 3개월을 견딜 수 있을까. 준호와 일하면서, 준호를 매일 마주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지은은 가방을 챙겼다. 사무실을 나왔다.

밤의 서울 종로는 차들로 가득 찼다. 건물들의 불빛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지은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 길을 걸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3개월 후, 자신은 정말로 이 회사를 떠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의 마음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준호를 다시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깊은 상처를 안고 떠날까.

지은은 지하철에 탔다.

전광판에 시간이 나타났다.

23:47

3개월의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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