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상해 임시정부의 지하 네트워크에서 벗어난 지 사흘 만에, 준호는 경기도 남서쪽의 산골짜기에 발을 디뎠다. 박준열의 영지였다. 표면상 이곳은 낡은 농촌이었다. 띄엄띄엄 흩어진 초가집들, 논밭을 정성스레 돌보는 농민들, 해 질 무렵 연기를 올리는 굴뚝들. 하지만 준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것이었다.

밤이 되자 영지는 변모했다.

산허리에 숨겨진 제철소의 입구가 드러났다. 화로의 불이 시뻘겋게 타올랐고, 광석을 운반하는 노동자들의 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박준열이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것이 조선의 뼈대입니다. 3년 전부터 만들어왔습니다."

박준열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절박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손전등을 들고 제철소 깊숙이로 준호를 이끌었다. 철 냄새와 열기가 교차했다. 노동자들이 그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여기가 핵심입니다. 현재의 로는 월 2톤 정도의 강철을 생산합니다. 일본 수입품보다 품질은 떨어지지만, 가격은 훨씬 싸죠."

박준열이 화로 옆의 낡은 제련 기계를 가리켰다. 그것은 20년 전 기술의 유물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보는 순간,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미래의 상(像)이 밀려왔다.

다른 형태의 화로. 더 높은 온도. 정확한 공기 유입. 불필요한 부분이 제거된 구조. 그리고 그것의 효과—생산량이 6배, 아니 8배까지 증가하는 미래.

준호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준호?"

박준열의 음성이 멀게 들렸다. 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시간 역행 기억이 발동했다. 미래의 강철이 현재로 소환되고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준호의 몸은 타들어갔다. 6개월. 미래의 6개월이 그의 생명에서 깎여나갔다.

마치 누군가 그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고 시간을 움켜쥐는 것처럼.

"의료진을 부르겠습니다."

박준열이 외쳤지만 준호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괜찮습니다. 이건... 기술입니다."

준호가 용지에 펜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설계도가 흘러나왔다. 화로의 구조. 공기 유입의 각도. 온도 조절 장치. 모든 것이 그의 손 끝에서 태어났다. 20분 만에 완성되었다.

박준열은 그 설계도를 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흘 뒤,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박준열의 설계에 따라 화로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준호는 그 과정을 지켜봤다. 노동자들은 거의 쉬지 않고 일했다. 햇빛이 나면 일했고, 어둠이 내려와도 횃불을 들고 일했다. 한 명의 감독이 계속해서 그들을 독촉했다. 임재혁이었다.

임재혁은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얼굴은 까맣고 움푹했다. 폐병의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예리했다. 준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임재혁은 다가왔다.

"당신이 이준호입니까?"

"네."

"제 이름은 임재혁입니다. 이곳 제철소의 감독입니다."

임재혁이 손을 내밀었다. 준호는 그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굵고 굳어 있었다.

"기술 개발 고맙습니다. 이 기술로 조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준호가 말했다. 임재혁은 웃지 않았다.

"당신이 본 미래에 노동자들이 있습니까?"

"무슨 말씀을..."

"당신의 기술이 생산량을 3배 이상 증가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노동 시간도 증가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술이 빨라진다고 해서 사람의 안전도 빨라지는 건 아닙니다."

임재혁이 화로 근처의 노동자들을 가리켰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일부는 손에 화상을 입고 있었다.

"이 일들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도 사람 위에 세워집니다. 사람이 없으면 기술도 없습니다."

준호는 임재혁의 말을 들었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의 미래가 달려 있지 않은가. 몇몇의 상처와 피로가 무엇인가. 그것은 필요한 대가였다.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사흘 뒤, 제철소의 새로운 화로가 불을 뿜었다.

그 순간을 준호는 생생히 기억했다. 박준열이 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새로 제련된 강철이 불에서 나왔다. 그것은 일본 강철과 달랐다. 더 밝았고, 더 단단해 보였다. 조선이 만든 강철이었다.

박준열이 장갑을 끼고 그 강철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준호는 박준열의 얼굴을 봤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박준열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조선의 뼈대가 세워졌다.

그날 밤, 박준열은 준호에게 손을 잡으라고 했다.

"당신이 보여준 미래는 현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만드는 것만 남았습니다."

박준열의 음성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준호도 그 확신에 감염되었다. 조선을 강국으로 만들 수 있다. 기술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능력이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없다.

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경성에서 소식이 왔다.

남대문 시장의 암시장에서 준호를 찾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동직조기 개발자. 기술자. 미래를 본 남자. 그 이름들이 퍼져나갔다. 경성의 지하 공장들이 준호를 청했다.

한 달 뒤, 준호는 경성으로 돌아갔다.

신문로의 비밀 기술 거래소에서 그는 만났다. 상인들, 기술자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물들. 모두가 준호를 바라봤다. 마치 그가 신인 것처럼.

"자동직조기 설계도를 원합니다. 제가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한 상인이 말했다.

"화학 공장의 기술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비료를 만들고 싶습니다."

다른 상인이 덧붙였다.

준호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이들은 조선의 산업화를 원하고 있었다. 기술이 필요했다. 그리고 준호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한 명의 남자가 준호에게 다가왔다.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부드러웠지만 눈은 날카로웠다. 이정수였다.

"이준호 씨, 저는 경성의 상인 이정수입니다. 당신의 능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정수가 손을 내밀었다. 준호는 그 손을 잡았다. 손의 온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신의 기술입니다. 정확히는, 당신이 보여주는 미래입니다."

이정수가 웃었다. 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준호의 등 뒤에 한기를 남겼다.

"이 기술이 독립군의 손에 들어가면 일본군도 위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손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저 파괴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정수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준호의 눈과 마주쳤다.

"당신은 어느 쪽이 되고 싶습니까? 건설자인가, 파괴자인가?"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정수는 웃음을 그쳤다.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언제든 도움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정수가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경성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 주일 뒤, 준호는 다섯 개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자동직조기, 화학 비료 제조기, 제지 기계, 석탄 채굴 장비, 그리고 금속 가공 장비. 각각의 설계도마다 준호의 생명이 몇 개월씩 깎여나갔다.

어느 날 밤, 서유진이 찾아왔다. 그녀는 준호를 만나자마자 노트북을 펼쳤다.

"당신을 만난 지 한 달이 됩니다."

서유진의 음성은 담담했다.

"당신의 기술로 경성의 다섯 개 지하 공장이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이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임금은 그대로입니다."

준호가 입을 열려 했다.

"당신의 기술로 인해 지난 한 달간 노동자 12명이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3명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서유진이 계속했다.

"당신이 한 말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필요한 대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준호는 서유진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질문이 아니라 고발이 담겨 있었다. 준호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네. 그것이 조선의 미래를 위한 필요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서유진은 노트북에 그 말을 적었다. 그녀의 펜 끝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준호의 가슴에 작은 바늘이 찔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조선의 미래가 더 중요했다.

서유진이 노트북을 닫으며 준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뭔가 결연한 것이 있었다. 마치 그녀가 무언가를 결정한 것처럼.

"당신의 말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증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유진이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도 경성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손에는 여전히 설계도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무게가 갑자기 달라져 보였다. 마치 누군가의 목숨이 그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것처럼.

준호는 눈을 감았다. 미래의 상(像)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엔 다른 장면이었다.

화로의 불이 꺼지고, 공장이 무너지고, 노동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손들. 피투성이 손들이 준호를 향해 뻗어 있었다. 임재혁의 손. 서유진의 손. 박준열의 손. 그리고 알 수 없는 수천의 손들이.

준호는 눈을 떴다. 밤이었다. 경성의 밤은 여전히 깊었다.

이정수의 손을 잡던 순간부터 준호의 몸은 이미 변해 있었다. 악수의 온기가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차가운 감각뿐이었다. 손가락들이 저렸다. 마치 누군가 그의 손목을 천천히 조여오는 것처럼.

"조선의 미래를 위한 필요한 대가."

그 말을 뱉고 나자 준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설계도를 들었을 때의 그 확신은 어디로 갔는가. 임재혁의 경고는 귓가에만 맴돌 뿐 뇌에 도달하지 않았다. 한소영의 손가락 없는 손이 떠올랐다. 그 손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준호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밤이 유난히 길었다.

충청도 영지에 도착한 것은 사흘 뒤였다. 기차역에서 박준열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준호를 마차에 태웠고,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이나 달렸다. 어둠 속에서 들판의 윤곽만 보였다. 여기가 조선이다. 이곳이 미래가 될 곳이다. 준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지의 제철소는 산 언덕 아래, 폐기된 광산 입구에 숨겨져 있었다. 입구에는 '농산물 저장고'라는 목판이 붙어 있었다. 박준열의 실제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하에서 만났을 때는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였는데, 여기서는 남루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을 넘어 보였다. 얼굴에는 독립운동 시절의 고문 자국이 선명했다. 왼쪽 뺨에 일직선으로 그어진 흉터. 그것을 보자 준호의 손가락이 저렸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박준열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여기 이백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조선의 강철을 만드는 데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술은 그들의 노력을 3배로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3배의 위험도 의미합니다. 당신이 설계한 것을 실행하기 전에, 이들을 봐야 합니다."

박준열은 준호를 제철소 안으로 이끌었다.

화로의 열이 먼저 얼굴을 때렸다. 그 다음은 냄새였다. 코를 자극하는 금속 냄새, 탄 나무 냄새, 그리고 무언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사람의 땀냄새였다. 제철소 안은 지옥이었다. 화염이 솟아오르는 화로 앞에서 반나체의 남자들이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등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팔뚝은 근육으로 불룩해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죽음 직전의 사람들처럼.

"저 사람은 석탄 채굴소 감독 임재혁입니다."

박준열이 한 남자를 가리켰다. 준호는 그 남자를 알아봤다. 경성 지하 공장에서 임재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피를 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가에 어두운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피였다.

"저 사람이 당신의 기술을 가장 먼저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박준열이 계속했다.

"그의 아내는 이 제철소에서 부품을 가공합니다. 하루에 열두 시간. 임재혁은 당신의 기술이 도입되면 그 시간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행했습니다."

박준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준호가 입을 열려 했다. 그 순간 임재혁이 준호를 봤다. 두 눈이 마주쳤다. 임재혁의 눈에는 질문이 아니라 고발이 담겨 있었다. 마치 서유진의 눈처럼.

임재혁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준호는 물러섰다.

"당신의 기술로 우리 아내들의 노동 시간이 3배 늘어났습니다."

임재혁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제 아내는 지난 한 달간 하루도 쉬지 못했습니다. 몸이 부으면서 움직이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어제는 작업 중에 기절했습니다. 기술이 빨라진다고 해서 사람의 안전도 빨라지는 건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준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임재혁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칼날 같았다.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기술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임재혁이 돌아섰다. 그는 다시 화로 앞으로 돌아갔다. 망치를 들었다. 그것을 내려치는 순간, 불꽃이 튀어올랐다.

박준열과 준호는 그 장면을 바라봤다. 박준열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있었다. 준호의 얼굴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혼란이었다. 아니, 그것이 혼란이 아니라 무언가를 깨닫고 있었다.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의 설계도를 봅시다."

박준열이 말했다.

제철소 한구석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사무실이었다. 나무 책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촛불이 타고 있었다. 박준열은 준호의 설계도를 펼쳤다. 손으로 그린 도면들이었다. 자동직조기, 화학 비료 제조기, 제지 기계, 석탄 채굴 장비, 금속 가공 장비. 각각의 도면 위에는 준호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것들이 모두 미래에서 온 것입니까?"

박준열이 물었다.

"예. 1950년대의 기술들입니다."

준호가 답했다.

"30년 뒤의 기술이군요. 그 30년 동안 조선은 어떻게 됩니까?"

박준열의 질문이 준호의 가슴을 관통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래가 명확하지 않았다. 시간 역행 기억이 보여주는 것은 기술뿐이었다. 그 기술이 어떤 미래를 만드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기술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옳지 않으면, 그것은 파괴의 도구가 됩니다."

박준열이 설계도를 가리켰다.

"이 기술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입니까?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입니까?"

준호는 대답했다.

"조선을 위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은 추상적입니다. 조선은 사람입니다. 저 제철소의 이백 명, 경성의 지하 공장의 오백 명, 그들이 조선입니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죽음을 담보로 조선의 미래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박준열의 질문에 준호는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제철소의 망치 소리가 들렸다. 쩌앙, 쩌앙, 쩌앙. 끝나지 않는 소리였다.

"일단 설계도를 실행해봅시다."

박준열이 말했다.

"당신의 기술이 정말 옳은지 확인해야 합니다."

3일 뒤, 새로운 제철 설비가 완성되었다. 준호가 설계한 대로였다. 화로의 온도 조절 장치, 공기 주입 시스템, 냉각 장비. 모두 미래의 기술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보며 도취했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 현실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조선도 가능하다.

그날 오후, 새로운 강철이 만들어졌다.

화로 안에서 금속이 녹아 흘러내렸다. 붉은 색의 액체였다. 마치 피처럼. 그것이 틀에 부어졌고, 식혀졌다. 그리고 나왔다. 강철 봉. 조선에서 만든 강철이었다.

박준열이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 순간 박준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손가락 없는 손으로 강철 봉을 쥐고 있는 박준열의 모습. 준호는 그것을 봤다. 박준열은 울고 있었다. 독립운동 시절의 고문으로 손가락을 잃은 남자가, 강철을 들고 울고 있었다.

"이것입니다."

박준열이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기술로 만든 강철. 일본의 강철이 아닌, 조선의 강철입니다."

박준열은 그 강철 봉을 들어올렸다.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보상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이 순간, 모든 것이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임재혁의 아내가 쓰러졌다. 작업 중에 기절했고, 일어나지 못했다. 고열이 났다.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과로입니다. 몸이 견디지 못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일을 쉬어야 합니다. 최소 한 달은."

한 달. 그것은 불가능했다. 제철소는 계속 가동되어야 했다. 준호의 기술은 계속 실행되어야 했다. 조선의 미래는 멈출 수 없었다.

임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들었다. 가느다란 몸이었다. 마치 새처럼 가볍게. 그를 바라보는 준호의 손가락이 저렸다. 기억 파편화가 시작됐다. 어제의 일이 흐릿해지고, 손끝의 감각이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그의 신체를 천천히 지워가는 것처럼.

그날 밤, 준호는 자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래의 상(像)들이 들렸다. 화로가 터진다. 공장이 무너진다. 손들. 피투성이 손들. 그들이 준호를 향해 뻗어 있다. 임재혁의 손. 그의 아내의 손. 그리고 알 수 없는 수천의 손들이.

준호는 그 손들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손들은 계속 다가왔다.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만지려고 했다. 준호를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만. 제발 그만."

준호가 외쳤다.

"나는 조선을 위해 하는 것인데."

손들이 말했다. 준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들은 것 같았다.

"조선은 우리입니다. 우리를 죽이고 조선을 만드십니까?"

준호는 눈을 떴다. 밤이었다. 영지의 밤은 깊었다. 손이 저렸다. 저린 손가락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밤, 준호는 설계도를 찾았다. 손으로 그린 다섯 장의 도면. 자동직조기, 화학 비료 제조기, 제지 기계, 석탄 채굴 장비, 금속 가공 장비. 그것들을 펼쳐 놓고 준호는 한참을 바라봤다.

손가락 없는 손으로 만들어질 미래. 그것을 위해 몇 명이 죽어야 하는가. 임재혁의 아내처럼 쓰러져야 하는가.

준호의 손이 떨렸다. 펜을 들었다. 설계도 위에 검은 선을 그었다. 한 번, 또 한 번. 자신이 그린 도면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것처럼.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손은 계속 움직였다. 펜은 계속 그었다. 설계도는 검은 자국으로 뒤덮였다.

그러다 준호는 멈췄다. 손이 저려서였다. 너무 저려서 펜을 쥘 수 없었다. 설계도를 들었다. 불 위로 가져갔다. 촛불의 불꽃이 종이에 닿았다. 순간 불이 붙었다. 검은 재로 변했다.

다섯 장의 설계도가 모두 타올랐다.

그 순간, 박준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

박준열이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설계도는 모두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박준열은 그 재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누군가를 잃은 것처럼.

"죄송합니다."

준호가 말했다.

"저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박준열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무언가 깨진 것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서유진이 나타났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영지에 도착했다. 박준열의 사람들은 그녀를 경계했다. 여자가 혼자 왔다는 것도 이상했고, 경성에서 왔다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박준열은 그녀를 들이보라고 했다.

서유진은 준호를 찾았다. 준호는 제철소 입구에서 그녀를 만났다.

"당신을 만난 지 한 달이 됩니다."

서유진이 말했다. 그녀의 노트북은 항상 열려 있었다.

"당신의 기술로 경성의 다섯 개 지하 공장이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이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임금은 그대로입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임재혁이 말했다. 자신의 기억이 말했다.

"당신의 기술로 인해 지난 한 달간 노동자 12명이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3명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영지의 감독 임재혁의 아내입니다."

서유진이 노트북을 펼쳤다. 거기에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무명의 노동자들의 이름들이었다.

"당신이 한 말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필요한 대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유진이 펜을 들었다. 그 펜 끝이 종이를 향하고 있었다.

준호는 입을 열었다.

"네. 그것이 조선의 미래를 위한 필요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준호의 말이 나왔을 때, 서유진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는 노트북에 그 말을 적었다. 펜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준호의 가슴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는 계속했다.

"조선이 강해지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법칙입니다."

"역사의 법칙."

서유진이 중얼거렸다.

"그 법칙을 누가 정했습니까? 당신입니까? 아니면 그 법칙 때문에 죽는 사람들입니까?"

서유진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 눈에는 뭔가 결연한 것이 있었다.

"당신의 말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서유진이 천천히 말했다.

"내일 경성 신문에 이 기사가 실릴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과 함께. 당신의 기술로 인한 노동자들의 피해와 함께."

준호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박준열 선생님도 함께 기사에 나올 것입니다. 그의 영지에서 벌어지는 착취와 함께."

서유진이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준호는 생각했다. 서유진도 그의 편이 아닌가? 왜 그녀는 자신의 적처럼 행동하는가?

그 순간 준호의 몸이 떨렸다.

자신이 누구를 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누구를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곧 그것들을 밀어냈다.

조선이 더 중요했다.

그날 밤, 이정수가 영지에 나타났다.

그는 박준열을 찾았다. 박준열의 사무실에서 두 남자는 만났다. 준호는 옆에 서 있었다.

"박준열 선생님, 저는 경성의 상인 이정수입니다."

이정수가 인사했다.

"저는 이준호의 기술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업에도 흥미가 있습니다."

박준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차가웠다.

"이 기술이 올바르게 사용되려면 자본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자본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정수가 계속했다.

"물론, 합리적인 수익 배분을 원합니다만."

박준열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왔습니까?"

"조선을 위해서입니다."

이정수가 대답했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

박준열이 웃었다. 그것은 비통한 웃음이었다.

"조선의 미래는 돈으로 사지 못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조선이 아니라 당신의 부입니다."

박준열이 일어섰다.

"문을 통해 나가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자본이 필요 없습니다."

이정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곧 웃음이 돌아왔다. 그것은 위험한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이정수가 준호를 바라봤다.

"이준호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기술이 박준열 같은 사람의 손에만 머물러야 합니까?"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의 기술을 더 넓은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조선 전역의 사람들이 당신의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정수가 준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은 영웅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조선을 구하는 영웅 말입니다."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영웅. 그것은 준호가 원하던 것이었다. 아니,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재혁의 아내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손들. 피투성이 손들이.

"아닙니다."

준호가 말했다.

"저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조선을 원합니다."

이정수의 얼굴에 무언가 어두운 것이 지나갔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구가 되려는 겁니까? 박준열의 도구 말입니다."

이정수가 돌아섰다.

"당신의 선택을 기억하십시오. 나중에 후회할 것입니다."

이정수가 영지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준열은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박준열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선택이기도 합니다. 이정수 같은 사람들은 조선 전역에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기술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박준열의 손이 떨렸다. 손가락 없는 손이었다.

"한 명의 영웅이 백 명을 살리면, 백 명의 죽음도 책임져야 한다. 당신은 그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준호가 아직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날 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영지의 어두운 밤 속에서.

손에는 여전히 설계도가 들려 있었다. 아니, 그것의 재가 들려 있었다. 자동직조기, 화학 비료 제조기, 제지 기계, 석탄 채굴 장비, 금속 가공 장비. 다섯 개의 미래. 다섯 개의 희망. 그리고 다섯 개의 저주.

준호는 눈을 감았다.

미래의 상(像)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화로가 터진다. 공장이 무너진다. 그리고 손들. 수천의 손들이 화염 속에서 하늘로 향해 뻗어 있다. 그들의 입에서는 비명이 나온다. 하지만 그 비명은 준호에게 닿지 않는다. 준호는 그들 위에 떠 있기 때문이다. 영웅처럼. 신처럼.

그 순간, 타오르는 설계도가 보였다. 검은 재가 하늘로 흩어진다. 그리고 박준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타오르는 설계도를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변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표정 속에는 다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준호는 눈을 떴다.

밤이었다. 경성의 밤도, 영지의 밤도 이제 그의 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밤이었다.

그들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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