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원의 빵
아르카스가 베이커리의 문을 열었을 때, 에이든은 오븐 앞에서 반죽을 치고 있었다. 손가락은 손목까지 투명해졌다. 반죽을 통과하는 기묘한 감각이 있었지만, 더 이상 놀랍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익숙함이 찾아오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이든은 멈췄다. 무엇에 익숙해진다는 것인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에이든."
아르카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의 목소리. 돈도 많고, 사람들도 따르고, 미소도 언제나 완벽했다. 에이든은 반죽에서 손을 빼고 천으로 닦았다. 투명한 손가락이 천을 통과했다.
"찾아오셨군요."
"그렇지. 자네가 계속 이곳에만 있으니 궁금해졌어."
아르카스는 베이커리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낡은 벽돌, 검은 오븐, 밀가루 냄새. 그의 눈은 모든 것을 재산으로 환산하는 듯했다.
"정원의 빵은 신기한 물건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그것을 먹은 사람들이 변한다. 상처가 낫고, 슬픔이 사라지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생각해본 적 있나?"
"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왜 그럴까?"
에이든은 오븐 쪽을 봤다. 밤이 깊어가면서 온기가 더 강해졌다.
"그것이 누군가의 기억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르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 좋은 웃음이었다.
"그 대가 말이지. 그렇지. 자네가 무언가를 주면, 자네는 무언가를 잃는다. 그것이 마법의 법칙이야. 하지만 생각해보게.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얻었나? 죽은 아들을 다시 만났고, 실패한 사업의 추억을 되찾았고, 외로움에서 벗어났어. 그리고 자네는 무엇을 잃었나?"
"제 기억입니다."
"정확히는 자네의 과거야. 자네는 이미 과거 때문에 고통받았으니, 그것을 잃는 것이 정말 손해일까?"
에이든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르카스의 말이 정확히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과거를 잃는 것이 정말 나쁜 일일까. 오히려 그것이 해방이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 불안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했다.
"마을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나? 정원의 빵이 없었다면 진작 무너졌을 거야. 사람들은 그 빵 때문에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 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면? 인근 마을로 팔 수 있다면? 자네의 기억을 잃으면서까지 이걸 하는 건 말이 안 돼. 넌 더 큰 목적을 위해 이걸 해야 해."
아르카스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의 옷에서 좋은 향수 냄새가 났다. 아주 먼 과거의 기억 같은 냄새.
"자네를 도와주고 싶어. 이 정원의 비밀을 지켜내면서도, 동시에 마을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자네가 빵을 구우면, 내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거야. 대신 자네는 정원을 떠나도 된다. 기억을 잃을 필요가 없다. 정원은 계속 움직이고, 자네는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거래야."
"그렇게 되면 정원은?"
"정원은 자네 없이도 움직인다. 이미 마법이 들어와 있지 않나."
에이든의 손이 떨렸다. 투명한 손가락이 더욱 떨려 보였다. 아르카스의 말은 완벽한 논리였다. 그런데 왜 등 뒤에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가. 왜 마음 한구석이 거부하는가.
떠난다는 것.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포기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것 아닐까. 에이든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더듬어 보려 했다. 기억은 없지만, 몸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이 베이커리를. 이 정원을. 그리고 누군가를.
베이커리 문이 열렸다.
카일이 들어왔다. 소년의 얼굴은 창백했다.
"당신은 날 떠나면 안 돼요."
카일의 목소리는 떨렸다. 에이든은 카일을 안아줬다. 소년의 등을 쓸어내렸다. 따뜻했다. 또 하나의 소중한 것. 그런데 이 소중함을 기억할 수 있을까.
"잠깐."
아르카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따뜻함이 없었다.
"저 아이는?"
"카일입니다."
"카일이 정원의 빵을 먹었나?"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에이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르카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는 자네의 기억이 담긴 빵을 먹었다는 뜻이군. 그럼 자네가 떠나가면, 그 아이는 정신이 이상해질 거야. 자네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니까."
"뭐라고요?"
"정원의 빵은 자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다. 그 빵을 먹은 사람은 자네와 연결된다. 만약 자네가 정원을 떠나면, 그 연결이 끊어진다. 아이는 정신이 붕괴할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거야. 마치 자기 안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 같은."
에이든의 팔이 더 강하게 카일을 감쌌다.
"그래서 자네는 떠날 수 없다.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빵을 구우면서, 계속 기억을 잃으면서, 계속 이곳에 머무르는 것뿐이야. 그것이 자네의 숙명이다. 혹은..."
아르카스가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이 차가워졌다.
"혹은?"
"다른 누군가가 자네를 대신하게 하는 거야."
"다른 누군가가?"
"이 마을에는 자네 외에도 정원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많다. 마리아, 그리고 그 외 수십 명. 그들 중 누군가가 정원의 주인이 되면, 자네는 자유로워진다. 카일도 괜찮고, 마을도 계속 빵을 얻을 수 있고, 자네도 기억을 잃지 않아도 된다."
아르카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확실했다.
"나는 자네를 그 숙명에서 구해주고 싶어. 정원은 누군가의 희생을 원한다. 그게 자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마리아를 설득하면 되는 일이야."
아르카스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명확했다.
"마리아는 죽은 아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 같으니까. 그녀는 당신의 빵으로 아들을 느낀다. 정원의 주인이 된다면, 그 아들을 완전히 되살릴 수 있을 거야. 그런 희망 앞에서 어떤 어머니가 거절할 수 있겠나?"
아르카스가 베이커리 문으로 향했다.
"생각해봐, 에이든. 넌 이미 충분히 잃었어. 더 이상 잃지 말고, 이제는 얻어. 그리고 마리아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도 공정한 일 아닌가?"
그가 떠난 후, 베이커리는 조용해졌다. 카일이 에이든의 옷깃을 부여잡고 있었다.
에이든은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었다. 떠난다는 것.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도주였다. 카일을 남기고, 마리아를 남기고, 이 정원을 남기는 것. 그것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일까. 아니다. 무언가가 자신을 여기에 묶어두고 있다. 기억 속에는 없지만, 가슴이 알고 있는 무언가가.
마리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팔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화상 흔적이었다. 에이든은 그것을 본 기억이 없었지만, 마리아의 움직임에서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상처인지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아들을 못 만나요."
마리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저는 매일 밤 당신이 구운 빵을 먹어요. 그 빵 속에는 제 아들이 있거든요. 죽은 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당신이 없으면..."
마리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에이든은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누구였지? 이 여자는 누구였지? 하지만 에이든은 알았다. 중요한 누군가라는 것을.
"저는 모두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건가요?"
에이든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낯설었다.
"아니야."
루미엘이 나타났다. 은발의 수호자는 아르카스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미엘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자는 정원을 파괴하려는 자야. 넌 그의 거래를 받아들이면 안 돼."
"하지만 마리아가..."
"마리아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 죽은 아들을 다시 만났고, 그 아들과의 기억을 되살렸다. 더 이상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면서까지 그것을 붙들 필요는 없어."
루미엘이 에이든에게 다가섰다.
"넌 왜 자신을 이렇게 버려야만 하니?"
"제가 버리는 게 아니라, 정원이 저를 원하는 거 아닌가요?"
"정원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려고 한다. 자신이 포기한 것을. 그래서 계속 누군가의 슬픔을 담아 빵을 구워. 그 과정에서 자네의 순수함을 원할 뿐이야."
루미엘의 눈이 깊어졌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침묵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밤이 깊어졌다.
에이든의 기억 소실이 급속도로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손가락뿐 아니라 팔이, 어깨가, 얼굴이 투명해졌다. 마치 자신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베이커리의 거울 앞으로 에이든이 갔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윤곽만 남아 있었다. 에이든이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려 했다.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름이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이 자신의 이름인가. 에이든. 그 단어는 무엇인가. 누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가.
그 순간, 베이커리 벽에서 낡은 사진이 떨어졌다.
에이든이 사진을 집어 들었다. 종이는 누렇고, 모서리는 부스러졌다. 사진 속에는 젊은 남자와 한 여성이 함께 웃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분명했다. 그것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여성의 얼굴은 여전히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에이든은 사진을 가슴에 안았다.
누구였지, 이 여자는. 왜 자신은 이 여자를 잊고 있는가. 아니,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그 구분조차 불명확했다. 베이커리의 어둠 속에서 에이든의 손가락이 더욱 투명해졌다. 곧 손 전체가 사라질 것 같았다. 곧 팔도. 곧 얼굴도.
에이든은 사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투명해서 사진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종이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만지는 것도, 느끼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모두가 동시에 증발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에이든이 중얼거렸다. 사진 속의 젊은 남자를 보며 누군가를 호출하려 했다. 그 여자의 이름을. 하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뇌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마치 그 이름을 알던 부분이 이미 지워져 버린 것처럼.
루미엘이 사진을 바라봤다. 은발의 수호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슬픔이었다. 아주 오래되고, 아주 깊은 슬픔이.
"그 사진을 버려."
"뭐라고요?"
"그 사진을 버려, 에이든. 그것을 붙들수록 넌 더 빨리 사라진다."
루미엘이 손을 뻗었다. 사진을 빼앗아 가려는 듯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몸을 날렸다. 사진을 가슴에 꼭 안았다. 투명한 팔로.
"안 돼요. 이건..."
"이건 뭐냐?"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내가... 내가..."
에이든의 목소리가 떨렸다. 언어가 무너지고 있었다.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뇌 어딘가에서 자신의 정체를 설명할 단어들이 하나둘 소멸해 가고 있었다.
카일이 에이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저씨, 아저씨 손이..."
"알아, 알아."
에이든이 아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투명한 손가락으로. 아이의 머리 감각도 이미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한 겹 한 겹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양파처럼 분해되는 중인 것처럼.
마리아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노인이 함께였다. 토마스였다.
에이든은 눈을 깜박였다. 토마스는 지난밤 마을의 광장에서 쓰러졌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마리아와 함께...
"토마스?"
에이든이 물었다.
"이 분이 자꾸 이곳으로 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정원을 한 번 더 봐야 한다고."
마리아가 말했다. 토마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를 인도하듯.
토마스는 베이커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이 흐릿했다. 죽음이 가까운 눈이었다.
"에이든, 넌 누구냐?"
"뭐... 뭐라고?"
"넌 누구냐고 묻고 있어. 정원이 물어보고 있어. 정원의 주인이 묻고 있어."
토마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정원은 누군가를 원하는 게 아니야. 정원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려고 한다. 자신이 포기한 것을. 그래서 계속 빵을 구워. 누군가의 기억을 담아서. 누군가의 슬픔을 담아서. 그리고 그 누군가는..."
토마스가 에이든의 가슴을 가리켰다.
"넌 그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어. 지금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에이든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투명해진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바람 같았다.
"정원의 주인은 죽지 않았어. 계속 남아 있어. 이 정원에. 이 베이커리에. 그리고 지금 너 안에도."
토마스가 에이든의 가슴을 터치했다. 투명한 가슴을 통과해서 심장까지 닿는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이든의 뇌 어딘가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불타는 베이커리. 그 안에서 누군가를 구하려던 자신. 팔을 뻗어 손을 잡으려 했던 순간. 그리고 손을 놓아버린 순간. 그 여자의 비명. 사진 속의 여자.
그녀의 이름이 떠오른다. 처음 음절이 입술을 맴돈다. 'ㅎ'으로 시작하는 이름. 헬... 헬레...
"헬레나."
에이든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기억의 조각들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헬레나.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정원이 왜 자신을 원했는지. 왜 자신이 투명해져 가는지. 왜 정원의 빵이 계속 구워져야 하는지.
정원은 헬레나를 잃어버린 자신의 슬픔이었다. 정원은 그 슬픔의 구체화였다.
에이든이 무릎을 꿇었다.
"제가... 제가 정원의 주인이에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리아도, 루미엘도, 토마스도, 심지어 카일도. 그 사실을.
"정원은 제 것이 아니라..."
에이든이 손을 펼쳤다. 사진이 떨어졌다. 투명한 손가락이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사진은 베이커리 바닥에 떨어졌다.
"정원은 헬레나의 것이었어요. 제가 잃어버린 그 사람. 정원은 그 사람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 순간, 정원 전체가 흔들렸다.
오후의 햇빛이 베이커리 안으로 쏟아졌다. 밤이 아닌데 햇빛이 들어왔다. 마치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마치 정원이 깨어나기 직전의 신호처럼.
루미엘이 에이든을 붙잡았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넌 이제 선택해야 해."
"뭘... 뭘 선택해요?"
"남을 건지, 아니면 정원을 구할 건지. 헬레나를 되살릴 건지, 아니면 마을 모두를 살릴 건지. 아르카스의 거래를 받을 건지, 아니면 정원과 함께 사라질 건지."
루미엘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처음 들어보는 절박함이었다.
"다 할 수 없어, 에이든. 정원의 법칙은 그렇게 관대하지 않아.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되어야 해. 마리아일 수도, 너일 수도, 아니면 헬레나일 수도 있어. 넌 지금 정원을 떠나 아르카스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정원과 함께 남아 계속 기억을 잃을 수도 있어. 하지만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가 사라져. 정원도, 너도, 그리고 헬레나도."
루미엘이 에이든의 손을 잡았다.
"사진을 버려. 헬레나를 포기해. 그래야 정원이 깨어나고, 마을이 산다."
베이커리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녹색이 보였다. 정원이 깨어나고 있었다. 죽었던 식물들이 소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에이든의 몸이었다.
"아저씨!"
카일이 외쳤다.
"아저씨는 사라지는 거예요?"
에이든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입술이 투명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건 눈뿐이었다. 그 눈 속에는 마리아를 보는 절박함이, 카일을 보는 사랑이, 루미엘을 보는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사진을 보는 그리움이.
떨어진 사진 위로 첫 송이의 물이 떨어졌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이. 그 물이 사진 속의 여자의 얼굴을 적시자, 얼굴의 윤곽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마가 드러났다. 눈이 드러났다. 코가 드러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이 드러났다.
헬레나의 얼굴이 완성되는 순간, 베이커리의 벽이 완전히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