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의 형광등 아래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메스를 놓고 일어섰다. 다섯 시간 반이 넘는 수술을 마친 신체는 무겁지 않았다. 신체 감각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학습되어 버렸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손목이다.
손목의 카운트다운이 59시간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6시간 전만 해도 66시간이었다. 떨어지는 속도가 가파르다. 박수연과의 만남 이후로 가속화된 것 같다.
"이영미 환자, 안정화되었습니다."
강하은의 목소리가 수술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중환자실 모니터다. 심박음은 규칙적이었다. 정상 범위. 하지만 30일. 정확히 30일 후에는 그 선이 급락할 것이다. 이준호는 그 미래를 보았다.
47명.
자신이 수술한 47명의 환자가 모두 정확히 30일 후 사망했다는 통계. 어제 강하은이 제시한 그 수치가 이제 병원 전역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의료윤리위원회. 원장실. 아마도 경찰까지도.
이준호는 수술복을 벗었다. 손을 씻을 때 이미 카운트다운이 떨어져 있었다. 59시간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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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회의실은 침묵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준호가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시선은 피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 그런 종류의 침묵이었다.
최진우 원장이 입을 열었다.
"이준호 교수님.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톤은 공식적이었다. 정해진 대사를 읽어내리는 톤.
"의료윤리위원회의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이준호 교수님의 모든 수술을 중단하겠습니다. 현재 담당 중인 환자들은 다른 의료진에게 인계되며, 과거 20년간의 모든 수술 기록에 대한 전수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최진우는 계속했다.
"이는 환자 안전 보호와 의료 질 향상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입니다. 교수님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테이블 주변에 앉은 의료진들—펠로우 3명, 레지던트 5명, 간호 담당자 2명—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이준호를 보지 않았다.
이준호는 일어났다.
의자를 밀어내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교수님!"
복도에서 민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따라오는 발걸음. 이준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교수님, 제발!"
민준호가 도착했을 때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손목의 카운트다운. 58시간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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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은 조용했다.
이준호는 수술대 옆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의료 장비들의 윙윙거리는 소음만이 귀에 들어왔다. 심전도 기계, 인공호흡기, 혈압 모니터.
문이 열렸다.
강하은이 들어왔다. 수술 후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이준호 앞에 서 있었다.
"교수님..."
이준호는 여전히 아래를 보고 있었다.
"제발 말해주세요."
강하은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다. 20년을 함께 일한 수간호사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다는 것.
"뭔가 이상해요. 당신의 환자들이 모두..."
"넌 왜 나한테서 떠나지 않아?"
이준호가 처음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강하은은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수술실에서 환자의 심박음이 떨어지던 그 순간들에 그의 눈 깊숙이 있던 그것.
"당신도 알 텐데. 나 옆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넌 똑똑하니까."
강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당신을 도와주고 싶으니까요."
이준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강하은은 계속했다.
"당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혼자라는 건 알아요. 그리고..."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 그것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이준호는 강하은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진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미안해."
그것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거의 들리지 않는 음성. 하지만 강하은은 들었다.
이준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강하은은 그대로 서 있다가 조용히 수술실을 나갔다.
손목의 카운트다운. 57시간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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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실의 책장은 의학 서적으로 가득했다. 심장학, 수술학, 해부학. 하지만 그 뒤에는 다른 책들이 숨어 있었다. 동양 고전들.
이준호의 책상 위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얀 봉투에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누가 어떻게 가져다놨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누구의 편지인지.
그는 봉투를 열었다.
*20년 동안 나는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당신이 잠을 이루지 못하길 바랐습니다. 당신이 고통받길 바랐습니다. 당신이 느껴보길 바랐습니다. 우리 남편이 느꼈을 그 공포를. 그 절망을.*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저주 속에서 죽어가는 건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신도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박수연*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편지를 놓고 손목을 봤다. 카운트다운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57시간 12분에서 56시간 45분으로. 분 단위가 아니라 초 단위로 변하고 있었다.
이준호는 박수연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눈물이 흘렀다. 20년 동안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이.
손목을 들었다.
56시간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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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 메스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은색의 광택이 도는 그 악기는 마치 일반적인 메스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이것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메스를 들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메스의 손잡이를 감싸왔다.
"마지막 역행..."
그는 중얼거렸다.
"이번엔 반드시..."
손목의 카운트다운. 55시간 52분.
"...반드시 진실을 마주해야 해."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역행 메스를 들고. 박수연의 편지를 앞에 두고.
그 순간이었다.
콕콕콕.
교수실의 문이 두드려졌다.
이준호는 눈을 떴다. 메스를 책상 아래로 내렸다. 편지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유은미 의료윤리위원회 위원장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심각했다.
"이준호 교수님."
유은미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는 당신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공식적이지 않았다.
"20년 전 박민준 사건. 당신에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은미는 계속했다.
"저는 20년 전의 기록을 모두 봤습니다. 당신의 판단 실수가 있었어요. 분명히 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한 장의 종이를 들어올렸다. 노란 메모지였다. 당시 이준호의 상급자가 남긴 기록이었다.
"이것을 봤어요. '판단 실수 있음. 그러나 시술의 기술적 완벽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 결론: 의료 과실 아님. 환자의 기저 질환이 주요 원인.'"
유은미의 눈이 이준호를 관통했다.
"당신은 정말로 그 환자를 죽였나요?"
손목의 카운트다운. 55시간 22분.
"저는 의료 윤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유은미는 한 걸음 다가왔다.
"47명의 환자가 정확히 30일 후 사망했다는 통계. 그건 의료 기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생명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건..."
그녀는 멈췄다.
"...당신도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준호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당신도?"
유은미가 손목을 들었다. 그곳에는 숫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이준호와 같은 것이 있었다. 죽음을 아는 자의 눈빛.
"저는 당신을 막아야 합니다."
유은미는 말했다.
"그 역행을 완성하기 전에. 당신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 전에."
이준호는 역행 메스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것은 일반적인 메스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은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위원장님."
이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막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생명력의 흐름을? 저주의 방향을? 아니면..."
그는 일어섰다.
"...자신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의지를?"
유은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흔들렸다.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나오지 않는 표정.
"저는 이미 선택했습니다."
이준호는 역행 메스를 다시 집었다.
"마지막 역행을."
그 순간, 병원의 스피커가 울렸다.
*"이준호 교수님. 즉시 중환자실로 오십시오. 환자 이영미의 상태가 급변했습니다."*
이준호와 유은미는 서로를 바라봤다.
손목의 카운트다운. 54시간 32분.
그리고 그 순간, 이준호의 무릎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가야겠네요."
그는 말했다.
유은미는 그를 막지 않았다. 대신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이 가면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는 저주는 그런 거니까."
이준호는 그녀의 손을 내려놨다.
"그럼 당신도 알겠네요. 저주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
그는 교수실을 나갔다. 역행 메스를 들고.
유은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목에는 여전히 숫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는 절망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당신의 저주는 풀렸지만, 내 것은 아직이야."
유은미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얼마나 오래 이곳에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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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내려가며 이준호의 호흡이 가빨라졌다. 손목의 카운트다운은 계속 떨어졌다. 54시간 12분. 53시간 58분.
"교수님!"
민준호가 계단 입구에서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환자 이영미가... 심정지 상태입니다. 지금 응급 대응 중이에요."
이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갔다.
"교수님, 지금 당신이 수술실에 들어가면..."
"알아."
이준호가 말했다.
그들은 중환자실 입구에 도착했다. 유리문 너머로 이영미의 침대가 보였다. 모니터들이 불규칙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하은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절박했다.
"교수님, 제발..."
"준비해."
이준호가 말했다.
"수술실을. 지금."
"교수님, 당신은 지금..."
"내가 뭔지 알아?"
이준호가 민준호와 강하은을 동시에 바라봤다. 그의 눈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죽음의 신이라고 불렸어. 20년 동안. 내 손으로 수술한 모든 환자가 30일 후 죽는다는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어. 그것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제 안다. 저주는 없었어. 있었던 것은 내 거짓뿐이야.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과오. 박민준을 죽인 내 판단 실수. 내 거만함이 그를 죽였고, 그 거짓이 내 손을 움직이게 했어."
손목의 카운트다운. 52시간 41분.
"이영미를 살릴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역행으로."
이준호는 역행 메스를 들어올렸다.
"교수님, 그러면 당신이..."
강하은이 말했다.
"알아."
이준호가 대답했다.
"생명력이 90시간을 넘게 소모되면 죽는다는 것. 나는 이미 60시간을 썼어. 남은 건 30시간. 그리고 이번 역행도 30시간을 빨아갈 거야."
그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그래서 이게 마지막이야. 마지막 역행."
수술실의 불이 켜졌다. 강하은이 준비를 시작했다. 이영미는 여전히 심정지 상태였다. 모니터들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손을 씻었다. 물이 손목을 흘러내렸다. 손목의 카운트다운. 52시간 3분. 51시간 56분. 51시간 42분.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준비됐어?"
강하은이 물었다.
"응."
이준호가 대답했다.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민준호가 들어왔다.
"교수님, 저도..."
"안 돼."
이준호가 말했다.
"이것은 내 것이야. 내 거짓을 마주하는 것. 내 과오를 인정하는 것. 넌 여기서 이영미를 봐줘. 모니터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준호는 역행 메스를 들었다.
"시작해."
강하은이 손을 움직였다. 이영미의 가슴에 패드를 대었다. 모니터에서 심전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선. 절박한 신호.
그 순간, 이준호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무의식 상태에 빠졌다.
역행 공간으로.
---
어둠이었다.
박민준이 서 있었다. 20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슴에 수술 상처가 선명했다. 그 상처는 이준호가 냈다.
"너 왜 자꾸 돌아와?"
박민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넌 날 죽였잖아."
이준호는 손에 역행 메스를 들고 있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았어. 그게 저주야. 네 거짓이 저주야."
"아니야."
이준호가 말했다. 처음으로 이 공간에서 진실을 말했다.
"내가 너를 죽였어. 판단 실수가 아니야. 내 거만함이 너를 죽였어. 네 기저 질환을 과소평가했어. 내 기술을 과신했어. 그리고 두려움에 떨리는 내 손을 감추려고 거짓으로 덮었어."
박민준의 형상이 흔들렸다.
"내 상급자는 내 기술을 믿었어. 내 판단을 믿었어. 하지만 나는 그 신뢰를 배반했어. 너를 살릴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나를 지배했고, 나는 그 두려움을 거짓으로 덮었어. 의료 과실이 아니라고. 환자의 기저 질환이라고. 내 책임이 아니라고."
이준호는 역행 메스를 들었다.
"하지만 내 손이 알고 있었어. 내가 뭘 했는지. 그래서 이 저주가 시작됐어. 내가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 진실이."
박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슴이 열렸다. 수술실처럼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이준호는 역행 메스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수술을 시작했다.
메스가 박민준의 가슴을 가르자, 시간이 역행했다. 20년 전 그 수술실로. 젊은 이준호가 서 있었다. 손에는 일반적인 메스가 들려 있었다. 박민준은 수술대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
"판단 실수가 아니야."
현재의 이준호가 과거의 자신에게 말했다.
"넌 알고 있었어. 이 환자는 기저 질환이 심해. 하지만 넌 두려웠어. 그래서 넌 자신의 기술을 의심했어. 그리고 그 의심이 너의 손을 흔들었어."
과거의 이준호는 메스를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 멈춰."
현재의 이준호가 말했다.
"이 환자를 살릴 수 없다고 인정해. 그리고 너의 두려움을 마주해. 그것이 저주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야."
과거의 이준호는 메스를 내려놨다. 손이 계속 떨렸다.
"미안해. 박민준. 미안해."
그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박민준의 형상이 흔들렸다. 그의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진정한 눈빛으로.
"넌..."
박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정말 미안한 거야?"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박민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도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원한의 톤이 아니었다.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20년 동안 나는 너를 원망했어. 그 원망이 나를 이곳에 묶어뒀어. 너도 마찬가지였지. 거짓이 너를 이곳에 묶어뒀어."
박민준은 이준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 넌 진실을 말했어. 너의 거짓을 마주했어. 그리고 미안하다고 했어. 진심으로."
이준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너를 살릴 수 없어서 미안해. 내 거만함 때문에 너를 잃어서 미안해."
박민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원한의 미소가 아니었다. 해방의 미소였다.
"그럼 이제 우린 자유야."
박민준의 가슴의 상처가 사라졌다. 그의 형상이 밝아졌다. 고통이 벗겨지고 있었다.
"고마워. 이준호. 마침내 나를 놓아줘서."
박민준의 형상이 빛이 되어 흩어졌다. 그 빛은 따뜻했다. 용서의 빛이었다.
---
수술실에서.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모니터에서 심전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규칙적인 선. 정상적인 신호.
이영미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강하은과 민준호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고음이 멈춰 있었다. 신호는 안정적이었다.
"교수님..."
강하은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살아 있었다.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을 들었다. 손목을 봤다.
카운트다운이 없었다.
0시간 0분.
손목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주가..."
민준호가 중얼거렸다.
"풀렸어요."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었다. 다른 감정이었다.
"이영미는?"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강하은이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생명력이 회복되고 있어요. 마치... 마치 누군가 그녀를 다시 살린 것처럼."
이준호는 모니터를 봤다. 47명의 환자 이름이 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심전도가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30일 사망이라는 저주는 사라졌다. 대신 그곳에는 회복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강하은이 이영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호흡이 돌아오고 있었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생명의 신호.
"눈이..."
민준호가 중얼거렸다.
"눈이 떠지고 있어요."
이영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하지만 분명히 떠있는 눈. 살아있는 눈.
"이영미."
강하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들리니? 우린 여기 있어."
이영미의 입이 움직였다. 음성이 나왔다. 약했지만 분명했다.
"...여기가..."
"병원이야. 중환자실. 넌 심정지였는데 다시 돌아왔어."
강하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넌 살았어. 살아났어."
간호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생체 신호를 확인하고, 기록을 갱신하고, 의사에게 보고했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 회복 궤도에 올라있었다.
47명의 환자 모두가.
역행의 범위는 시간을 역행시킨다. 죽음으로 정해진 미래를 되돌린다. 47명의 환자가 동시에 살아나는 것은 그 역행의 효과가 이준호의 손에서 나온 모든 저주를 거슬렀다는 뜻이었다.
"이제 끝이야."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강하은이 그의 손을 잡았다.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주도. 카운트다운도.
"교수님..."
강하은이 말했다.
"당신이 뭐였어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영미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천천히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생명이 돌아오고 있었다.
---
의료윤리위원회 회의실에서.
유은미는 의료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47명의 환자 기록. 그들 모두는 이제 다시 살아 있었다.
기록은 변했다.
30일 사망이라는 통계는 사라졌다. 대신 그곳에는 회복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모두가 회복되었다는 기록.
유은미는 손목을 들었다. 여전히 숫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에는 옅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벗겨진 듯한 자국. 시간의 흔적.
"저주는 풀렸군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것은..."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불빛. 그 불빛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저주와 싸우고 있을까.
"당신의 저주는 풀렸지만, 내 것은 아직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가 있었다. 절망도 아니고 희망도 아닌. 다른 감정. 인내의 감정.
---
복도에서.
이준호는 민준호를 만났다.
"교수님."
민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뭐였어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민준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계속 배워. 의료 기술도. 그리고 환자를 대하는 마음도."
"네."
민준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준호가 말했다.
"절대 거짓으로 진실을 덮지 마. 그게 가장 큰 저주야."
민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깊은 이해가 있었다.
---
수술실을 나온 이준호는 병원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서울의 아침이 펼쳐져 있었다. 20년 만의 아침. 새로운 아침.
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카운트다운도. 저주도.
오직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준호는 깊게 숨을 쉬었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따뜻했다. 20년 동안 느껴본 적 없는 그 따뜻함. 피부 위로 전해지는 햇빛의 온기가 실재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해방감 속에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47명의 환자를 살렸다. 박민준의 저주를 풀었다. 자신의 거짓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 대가는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력. 모두 소모되었다. 손목의 카운트다운은 0이 되었다.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생명이 끝나는 시간. 자신이 살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살아있다. 지금 이 순간은 살아있다.
바람이 불었다. 옥상의 바람. 그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차갑고 신선했다. 살아 있는 자가 느끼는 감각. 그가 20년 동안 잃어버렸던 감각.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다. 아침의 새소리. 규칙적이고 생명력 있는 울음. 그 소리가 이제 그의 귀에 닿았다. 저주 속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
이준호는 손을 펼쳤다. 손목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고마워. 박민준."
그는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미안해."
바람이 그의 목소리를 실어 날렸다.
하지만 그 미안함은 박민준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47명의 환자들에게. 강하은에게. 민준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20년 동안 거짓으로 살아온 자신에게.
이준호는 옥상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도시의 불빛들이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그 불빛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저주와 싸우고 있을까. 자신의 거짓과 싸우고 있을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유은미 위원장이 그 불빛들 중 하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이영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완전히. 명확하게.
강하은의 손이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넌 살았어."
강하은이 다시 말했다.
"살아났어."
이영미의 입이 움직였다. 음성이 나왔다.
"...내가...?"
"응. 넌 죽지 않았어. 누군가 너를 다시 살렸어."
이영미의 눈이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천장의 불빛. 모니터의 신호음. 간호사들의 움직임. 모든 것이 생명의 신호였다.
그녀는 살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