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밤 11시, 지하 30층 아래

밤 11시 13분, 경찰 조사실.

준호는 손목에 수갑을 찬 채 회색 철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마주 앉은 형사는 노트북 화면을 준호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낡은 계약서가 떠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었고, 글씨는 손떨림으로 가득했다.

"이 서류는 1987년에 처음 발견됐습니다."

형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준호는 화면을 바라봤지만, 글씨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눈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눈이 투명해져 빛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형사의 눈치가 보였다.

"이 부지는 '그린힐 타워' 건설 전에 여섯 건설사가 손을 댔습니다. 모두 실패했어요. 공사 중단, 노동자 집단 실종, 원인불명의 자살. 당신이 일하던 건설사는 이 사실을 알고도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준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막혀 있었다. 이미 목도 투명해 가고 있었다.

형사는 계속했다. "박준영이라는 인물을 알고 계세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준영.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박준영은 건설사 회장 김상호와 빚의 생태계 사이의 중개인이었습니다. 채무추심꾼들을 모집하고, 빚에 못 박힌 노동자들을 건설 현장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어요. 그의 휴대폰에서 발견된 거래 기록만 해도 247명입니다. 모두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들입니다."

247명.

그 숫자가 준호의 투명한 몸을 관통했다.

"당신도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

**같은 날 오후 2시, 법정.**

판사실 문이 열렸다. 판사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는 한 장의 종이를 읽고 있었고, 얼굴 표정은 일정했다.

"피고인 김상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합니다."

법정의 기자들이 휴대폰으로 속기를 시작했다. 준호는 방청석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손목에는 여전히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김상호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미소가 아니라 조소였다.

"계약 귀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판사가 계속했다. "건설 과정에서의 노동자 실종과 자살은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결함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본 법정은 초자연적 존재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피고인의 과실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김상호가 일어섰다. 그는 법정을 걸어 나가면서 기자들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는 그저 건설사일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해석은 모두 터무니없는 공상입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준호는 그 장면을 보면서 깨달았다. 이 법정은 아무것도 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 전체가 계약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세운 모든 구조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은행의 대출 시스템, 부동산 시장, 노동 착취의 합법화—모든 것이 한 겹의 종이 위에 서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이것은 정상이다'라는 글씨만 쓰여 있었다.

판사는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준호의 투명한 얼굴을 지나쳤다. 마치 준호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피고인 이준호는 법정 모욕죄로 30일 구류에 처합니다."

---

**같은 날 오후 3시, 감옥 셀.**

감옥 셀은 회색이었다. 벽, 바닥, 천장, 침대, 모두가 같은 톤의 회색이었다.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눈으로.

문이 열렸다. 채무추심꾼 '개'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도 변해 있었다. 왼쪽 눈 주변에 멍이 들어 있었고, 입가에는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봤지? 무죄야. 그 새끼는 무죄고, 넌 30일 구류야."

'개'가 침대 옆에 앉았다. 준호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붙잡혔어. 박준영이 날 넘겼거든. 그 새끼 공모자 명단에 내 이름 박혀 있었어. 하지만 봤지?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이 시스템은 우릴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데 넌 정말 멍청하다, 이준호. 아버지 빚을 대신 갚는다고? 그게 뭐 하는 짓이야. 나도 빚이 있었어. 그래서 난 이쪽 일을 했어. 돈을 받으니까. 하지만 결국 같은 거야."

'개'가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이 변했다. 조롱이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것이 어린 얼굴에 떠올랐다.

"그리고 누나. 너 누나 어디 있는지 알아? 정신병원. 정신과 입원. 넌 누나의 오빠인데, 누나는 오빠가 없는 것처럼 살아. 오빠가 기억에서 지워졌으니까."

준호의 투명한 몸이 떨렸다.

"어제 밤 본 거 있어. 넌 지하에서 뭘 했어? 누가 너한테 강제했어. 계약 귀신이 넌 자발적이라고 했지? 거짓말이야. 넌 아무 선택도 하지 못했어. 계약이 넘어올 때부터 이미 끝난 거야."

'개'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리고 아버지. 너 아버지 어디 있는지 알아? 지하에서 기억을 잃고 있어. 넌 아버지를 구하려고 했는데, 아버지를 잊게 만들었어. 우리 모두가 잊혀 가고 있어. 이게 구원이야? 이게 사랑이야?"

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투명해진 탓도 있지만, 그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개'가 일어섰다. 문 쪽으로 가다 멈췄다.

"그리고 나도 알았어.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박준영은 김상호한테 조종당하고, 김상호는... 누군가 더 큰 놈한테 조종당해. 우린 다 누군가의 빚 때문에 산다고."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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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5시, 경찰청 수사과.**

형사는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수십 장의 인쇄물이 쌓여 있었다. 건설 현장의 사진, 실종자 명단, 의료 기록, 모두가 한데 모여 있었다.

"우리는 6개월 동안 이 지역에서 특이한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형사가 화면을 켰다. 그래프가 나타났다. 밤 11시부터 자정 사이에 신고와 실종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 데이터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지시가 내려왔어요. 모든 기록을 삭제하라고."

형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도 알 거예요. 이 사회는 자신이 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계약 귀신? 그런 건 없습니다. 지하 30층 아래의 세계? 그런 건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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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6시, 정신병원 병실.**

이나연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병실의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들이 보였다.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의사가 들어섰다.

"이나연 씨, 형 생각은 좀 나아졌어요?"

이나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형이 누구예요?"

의사는 메모를 했다. 단어 하나: 해리성 기억상실증.

이나연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가족의 딸, 아무도 찾지 않는 누군가의 누나. 그리고 이제 자신도 자신을 잊어가고 있었다.

---

**같은 날 밤 11시, 감옥 셀.**

밤이 깊었다. 준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계를 볼 수 없었지만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울렸다. 계약의 울림.

밤 11시.

준호의 몸이 침대에서 떨어졌다. 투명한 손과 발이 공중에서 헤쳤다. 감옥의 벽이 검게 물들었다. 아니, 벽이 사라진 것이었다. 준호는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감옥의 철창도, 경찰의 수갑도, 법정의 판사도, 모두가 사라졌다.

오직 어둠만 남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계약 귀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아직도 내 것이야."

준호의 투명한 손이 무언가를 만졌다. 채무기록이었다. 누군가의 절망이었다. 그것을 만지는 순간, 준호의 기억 속에서 또 다른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아버지와 함께 본 불꽃축제의 불빛도 희미해졌다. 아버지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준호는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계약 귀신의 손이 준호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엔 특별해. 새로운 채무자야."

귀신이 또 다른 기록을 가리켰다. 그것은 이전의 기록들과 달랐다. 숫자가 훨씬 컸다.

2억 5천만 원.

그리고 그 기록 옆에는 이름이 써 있었다.

이영환.

준호의 투명한 손가락이 떨렸다. 그 이름을 알았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심장이 거부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계약 귀신의 손이 그 거부감을 강제로 누르고 있었다.

"이번엔 이 사람의 빚을 흡수해. 대신 대가는 다르다."

"뭐... 뭐야?"

준호의 투명한 입에서 음성이 나왔다. 목소리가 아닌, 공기의 진동일 뿐이었다.

"이 사람은 너와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야. 그의 빚을 흡수하는 것은 그를 이곳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해."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뭔가가 심장을 쓸었다.

"그 대신..."

계약 귀신이 말을 이었다.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가 누구였는지, 왜 중요했는지, 그 모든 것이."

준호의 투명한 손가락이 기록에 닿으려 했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기억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누나의 얼굴이 사라졌다.

병실의 창문이 사라졌다.

도시의 불빛이 사라졌다.

준호는 무엇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남았다.

손가락이 만지는 채무기록. 그것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그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

자정이 되자, 준호는 감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이 준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간수가 셀을 확인했다.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투명했기 때문이었다.

간수는 신고를 올렸다.

"셀 3번에 아무도 없습니다."

경찰청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기록을 삭제하세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준호라는 이름도 기록에서 사라졌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도 없었다.

계약 귀신과 거래를 한 청년도 없었다.

모두가 삭제되었다.

---

**다음날 오후 2시, 법정.**

검사가 서류를 넘겼다.

"피고인 박준영, 건설사 대표 김상호와의 공모 혐의로 기소합니다. 채무추심꾼 '개'와 함께 지하 30층 아래 계약서를 이용해 빚에 못 박힌 노동자들을 의도적으로 모집했습니다."

박준영은 법정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준호가 알던 그 현실적이고 냉철한 박준영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피고인이 건설사 김상호에게 준호를 소개했고, 그 과정에서 김상호는 건설 현장에서의 위험 작업을 의도적으로 준호에게 배정했습니다."

판사가 고개를 들었다.

"피고인 박준영,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박준영은 입을 열었다. 목이 떨렸다. 그의 눈은 법정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는... 생존했을 뿐입니다."

그 말은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변명이 아니었다. 박준영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법정의 유죄나 무죄 판결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팔았다는 것. 누군가를 이 지옥으로 보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는 깨달음.

검사가 다시 서류를 넘겼다.

"채무추심꾼 '개'의 유서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빚 때문에 산다'고 했습니다. 피고인도 이 체계의 공모자입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하지만 그 소음 속에서 판사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피고인 박준영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합니다."

박준영의 몸이 흔들렸다. 그것은 판결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자신이 준호를 지하로 보냈다는 깨달음이 비로소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판사가 계속했다.

"단, 건설사 대표 김상호와의 관계에 대한 증거는..."

판사가 멈췄다. 그 멈춤이 길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합니다."

검사가 일어섰다.

"판사님, 김상호 회장은 건설 현장의 모든 사망 사고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지하 30층 아래의 계약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공사를 강행했고—"

판사가 손을 들었다.

"검사님, 당신이 제시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계약 귀신? 지하 30층 아래의 기이한 세계? 이것이 법정에서 인정될 수 있는 증거입니까?"

법정이 웅성거렸다.

"법정은 현실의 사건만 다룹니다. 건설사 측에서 제출한 서류는 모두 합법적입니다. 노동자들의 사망은 산업 재해로 분류되었습니다. 실종은 개인의 가출로 분류되었습니다. 따라서 김상호 회장에 대한 고소장은..."

판사가 망치를 내려쳤다.

"기각합니다."

그 순간, 법정 뒤편의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김상호 회장이었다. 그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그 미소는 확신에 찬 것이었다. 계획이 완벽했다는 확신.

"재판부의 현명한 판결에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저는 단순한 건설사 대표일 뿐입니다. 계약 귀신? 저는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도시를 위해 건물을 지을 뿐입니다. 만약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약함이었을 것입니다.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터졌다. 그의 얼굴이 신문의 1면을 장식할 것이었다. "무죄 판결받은 김상호 회장, 그린힐 타워 완공 박차"라는 제목으로.

박준영은 법정에서 경찰에 이끌려갔다. 그가 법정의 구석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준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박준영의 입술이 움직였다. 음성이 아닌 입 모양으로 뭔가를 전했다.

"미안해."

그것뿐이었다.

---

**같은 날 오후 4시, 경찰청 특수팀 회의실.**

형사들이 모여 있었다. 담당 형사가 화이트보드에 선 하나를 그었다.

"박준영 체포. 김상호는 기각. 이제 이 사건은 종료됩니다."

다른 형사가 물었다.

"그런데 나머지 실종자들은요? 저 건설 현장에서만 6개월간 17명이 실종됐는데?"

담당 형사가 파일을 덮었다.

"상부 지시입니다. 모든 기록을 삭제하세요. 이 지역의 모든 실종 사건을 '개인의 가출'로 분류하세요. 더 이상 수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지시가—"

"그만입니다."

담당 형사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당신도 알 거예요. 이 사회는 자신이 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계약 귀신? 그런 건 없습니다. 지하 30층 아래의 세계? 그런 건 없습니다. 따라서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들도 없습니다."

형사는 파일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파일이 떨어지며 흩어졌다. 수십 개의 실종자 사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젊은 노동자들, 중년의 아버지들, 그들의 가족사진들. 모두 종이조각이 되어 버렸다.

---

**같은 날 오후 7시, 정신병원 병실.**

이나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약 이름: 항정신병약, 항불안제, 수면제.

의사가 들어섰다.

"이나연 씨,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이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족분들은 오지 않으셨나요?"

이나연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희미했다.

"저... 가족이 있나요?"

의사는 메모를 했다. 단어: 해리성 기억상실증, 심화.

"아버지분은 정신병원에 입원하셨고, 오빠분은... 현재 감옥에 계신 상태입니다."

"감옥?"

이나연이 고개를 들었다.

"왜 감옥에요?"

의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나연에게 오빠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오빠라는 개념만 남아 있고, 그 개념에 붙어있는 얼굴이 없었다.

"약을 더 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의사가 간호사에게 신호했다.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들어왔다. 바늘이 이나연의 팔에 꽂혔다. 그 순간, 이나연의 눈빛이 더욱 흐릿해졌다.

병실의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아파트들, 사무실들, 거리의 가로등들. 모두 누군가의 빚으로 이루어진 불빛들이었다. 하지만 이나연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또는 본다 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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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밤 11시, 감옥 셀.**

준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계를 볼 수 없었지만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울렸다. 계약의 울림. 그것은 육체를 넘어 영혼 자체를 흔드는 울림이었다.

13분 남았다.

준호는 손가락을 세어봤다. 투명한 손가락들. 하나, 둘, 셋... 열 손가락이 아니었다. 어떤 손가락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 빈 공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기억이었을까? 아니면 존재 자체였을까?

감옥 셀의 벽에 숫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수감자들이 남긴 낙서들. 그 중 하나가 준호의 눈에 들어왔다.

"36번이 되면 끝난다."

그것은 누가 남긴 글일까? 준호처럼 계약을 한 누군가였을까?

준호는 자신이 몇 번 내려갔는지 세어봤다. 첫 번째... 두 번째... 하지만 정확한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 계약 귀신이 그것들을 집어갔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남은 것이 많지 않다는 것.

밤 11시.

준호의 몸이 침대에서 떨어졌다. 투명한 몸이 공중에서 헤쳤다. 감옥의 벽이 검게 물들었다. 철창도, 경찰도, 법정도, 모두가 사라졌다.

오직 어둠만 남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계약 귀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아직도 내 것이야."

귀신의 손이 준호의 가슴을 관통했다.

"28번이 남았어. 그리고..."

귀신이 멈췄다. 준호의 투명한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더 이상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동공도 없었다. 그저 공허한 공간만 있었다.

"...넌 자발적이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준호의 손이 벽을 만졌다. 벽이 아니었다. 채무기록이었다. 누군가의 절망이었다.

그것을 만지는 순간, 준호의 마지막 남은 기억이 흔들렸다.

누나의 얼굴. 병실의 창문. 도시의 불빛.

그 이미지들이 천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준호는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계약 귀신의 손이 준호의 손목을 잡았다. 준호의 심장이 거부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울부짖으며 저항했다. 하지만 귀신의 손이 더 강했다. 그 거부감을 강제로 누르고, 준호의 손을 기록 위에 올렸다.

"이번엔 특별해. 새로운 채무자야."

귀신이 또 다른 기록을 가리켰다. 그것은 이전의 기록들과 달랐다. 숫자가 훨씬 컸다.

2억 5천만 원.

그리고 그 기록 옆에는 이름이 써 있었다.

이영환.

준호의 투명한 손가락이 떨렸다. 그 이름을 알았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이름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누구인지, 그 이름이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이번엔 이 사람의 빚을 흡수해. 대신 대가는 다르다."

"뭐... 뭐야?"

준호의 투명한 입에서 음성이 나왔다. 목소리가 아닌, 공기의 진동일 뿐이었다.

"이 사람은 너와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야. 그의 빚을 흡수하는 것은 그를 이곳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해."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뭔가가 심장을 쓸었다.

"그 대신..."

계약 귀신이 말을 이었다.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가 누구였는지, 왜 중요했는지, 그 모든 것이."

준호의 투명한 손가락이 기록에 닿으려 했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기억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누나의 얼굴이 사라졌다.

병실의 창문이 사라졌다.

도시의 불빛이 사라졌다.

준호는 무엇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남았다.

손가락이 만지는 채무기록. 그것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그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

자정이 되자, 준호는 감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이 준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간수가 셀을 확인했다.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투명했기 때문이었다.

간수는 신고를 올렸다.

"셀 3번에 아무도 없습니다."

경찰청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기록을 삭제하세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준호라는 이름도 기록에서 사라졌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도 없었다.

계약 귀신과 거래를 한 청년도 없었다.

모두가 삭제되었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그린힐 타워의 건설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하 30층 아래에서는, 계약 귀신이 새로운 계약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누가 내려올까?

계약서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펜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새로운 기록이 벽에 추가되었다.

이름: 알 수 없음.

채무: 2억 5천만 원.

상태: 진행 중.

그 옆에는 또 다른 기록이 있었다.

이름: 알 수 없음.

채무: 1억 8천만 원.

상태: 진행 중.

그리고 또 다른 것.

또 다른 것.

또 다른 것.

채무기록들이 벽을 뒤덮었다.

숫자들이 빛났다.

그리고 그 사이를 누군가의 투명한 손이 헤치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왜 여기 있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내려올 것이었다.

밤 11시가 될 때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지하로 소환될 것이었다.

그리고 계약 귀신은 계속 말할 것이었다.

"넌 자발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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