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기억을 버리고 현재를 선택하다
감옥 셀의 창문을 통해 밤하늘이 들어왔다. 준호는 침대에 누워 손가락을 세었다. 왼손부터 시작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와 소지는 이미 투명해져 있었다. 오른손도 마찬가지였다. 28번이 남았다.
준호는 눈을 감고 거울을 떠올렸다. 아침마다 봤던 거울. 그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검게 칠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눈썹이 사라졌다. 그 다음 눈. 그 다음 입. 지금쯤이면 얼굴 전체가 검은 그림자로 덮여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회색 콘크리트 천장에는 누군가 손톱으로 새긴 자국들이 가득했다. 숫자들도 있었다. 36. 37. 42. 누군가는 숫자를 세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36을 삐뚤한 X로 표시해 놨다.
밤 10시 47분.
준호는 침대를 벗어나 앉았다. 이 몸이 남아있을 동안 움직일 수 있을 때. 셀의 철창 사이로 복도가 보였다. 형사가 지나갔다. 그 형사는 이 구역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이었다. 준호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감옥 지하에서 밤 11시마다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것을. 누군가는 돌아오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 보지 않기로 했다. 도시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보지 않기로 했다.
"이준호."
문이 열렸다. 간수가 들어섰다. 뒤에는 노인이 따라 들어왔다. 엉성한 옷을 입은, 머리가 희끗해진 노인. 준호는 그를 봤지만 누구인지 몰랐다.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익숙했는데 그것을 인식할 회로가 뇌에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책의 페이지를 펼쳤을 때 글씨가 희미해 보이는 것처럼.
"면회 시간입니다. 30분."
간수는 나갔다. 셀의 문이 닫혔다. 노인과 준호가 남았다.
노인은 준호를 오랫동안 봤다. 아들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호기심과 슬픔이 섞인 눈. 노인은 침대 끝에 앉았다.
"안녕, 아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넌 나를 모르겠지. 이제."
노인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노인을 더 자세히 봤다. 그의 손. 주름이 많은 손. 손가락마다 상처가 있었다. 그 상처들이 뭔가를 말해주는 것 같았지만, 준호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난 너를 잃었어. 그리고 넌 날 잃고 있어. 우리는 서로를 놓고 있는 거야. 조금씩."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투명해진 준호의 손과 만났다. 노인의 손이 준호의 손을 통과했다.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기억 속에 없는 말인데, 마지막 편린처럼 남아있던 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래. 난 네 아버지야. 이영환이라고 해. 기억 안 나도 괜찮아. 넌 이제 나를 잊어도 돼. 아들, 넌 이제... 넌 이제 너 자신을 살아야 해."
준호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아버지가 말한 것이 계약을 계속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라는 말처럼.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계약하면 안 돼. 아버지."
"뭐?"
"난 아버지를 구하려고 했어. 근데... 근데 내가 아버지를 잃으면, 내가 왜 이 모든 걸 했는지도 잊을 거야."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공포였다. 완전한 공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될 공포.
"그럼 넌 지금 날 구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날 잃고 있는 거야?"
"...둘 다일 수도 있어."
아버지가 답했다.
"넌 날 구하려고 했어. 근데 그 과정에서 날 잃고 있었어. 그리고 난 그걸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아버지가 준호의 투명한 손을 다시 잡으려 했다. 이번엔 손이 아니라 팔을 감싸려 했다. 손은 통과했지만 아버지는 준호를 안았다. 마치 누군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아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아버지, 이게... 이게 맞아? 내가 아버지를 잃으면서 아버지를 구하는 게?"
"그게 아니야. 넌 이제 달라야 해."
아버지가 준호의 투명한 어깨를 밀었다. 아주 약하게. 하지만 그 밀침은 준호의 몸 전체를 흔들었다.
"기억으로 날 구하려고 하지 마.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있어. 그 대신..."
아버지가 멈췄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대신?"
"그 대신, 현재에서 날 만나."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서. 넌 날 모르지만, 난 너를 알아.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해. 너도 그럴 수 있어. 넌 날 모르겠지만, 날 안을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준호는 아버지를 봤다. 정말로 모르는 사람을 보는 눈으로. 하지만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투명한 손이 아버지의 손을 통과했지만, 준호는 그 접촉을 느꼈다. 누군가의 체온. 누군가의 손길.
밤 10시 58분.
"아버지, 난 지하로 내려가야 돼."
준호가 말했다.
"28번이 남았어. 내가 가지 않으면..."
"그럼 가지 마."
아버지가 말했다.
"뭐?"
"계약을 거부해."
준호가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었지만, 그것을 웃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럼 뭐가 돼? 계약은 절대불변이라고 했어. 내가 거부하면 뭐가 돼?"
"모르지. 그런데 넌 도망칠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럼 맞서는 수밖에."
아버지가 준호의 투명한 얼굴에 손을 대었다. 손이 통과했지만, 그 손길은 남았다. 뭔가가 준호의 뺨에 닿은 것 같았다.
"아들아, 넌 지금까지 혼자 했어. 날 구하려고. 날 구하기 위해 혼자 내려갔어. 이제는 달라야 해."
"혼자가 아니었어. 박준영이..."
"박준영도 혼자였어. 그 친구도 자기 죄책감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어. 넌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 대신, 넌 누구를 데려올 수 있어. 지하에서 누구를 데려올 수 있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지하에는 아버지와 다른 채무자들뿐이었다. 그리고 계약 귀신. 투명한 계약자들의 잔상들. 그들은 모두 반복적으로 같은 노동을 수행했다. 손으로 벽을 만지고, 빚의 무게를 흡수하고, 자신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다. 반복. 무한 반복.
밤 11시 0분.
준호의 몸이 흔들렸다. 지하로 소환되는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가 준호를 더 강하게 안았다. 투명한 몸이지만, 아버지는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아. 넌 할 수 있어. 넌..."
말이 끝나지 않았다. 준호가 아버지의 팔을 통과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 바닥이 열렸다. 어둠이 준호를 집어삼켰다.
지하 30층 아래.
준호는 떨어졌다. 어둠 속으로. 벽면에는 채무 기록들이 빛나고 있었다. 무수한 숫자들. 억대의 금액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름들. 얼굴들. 잔상들.
계약 귀신이 나타났다. 준호가 이 세계에 올 때마다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기이한 형상. 하지만 이제 준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말했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만나라고.
"28번째 계약을 시작하겠습니다."
계약 귀신이 말했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계약을 할 수 없어요."
"뭐?"
"이건 구원이 아니에요. 내가 아버지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나를 구하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서로를 잃고 있어요. 계속. 영원히."
준호가 말했다.
"그럼 넌 어떻게 할 거야? 계약은 절대불변이야. 넌 도망칠 수 없어."
"알아요. 그래서 맞서려고 해요. 도망치지 않고 여기서 맞서려고."
준호가 벽을 봤다. 채무 기록들이 빛났다. 1억, 5천만, 3천만. 숫자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 옆에 투명한 형상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과거 계약자들의 잔상들이다. 수십 명, 아니 수백 명. 그들은 반복적으로 같은 노동을 수행했다. 손을 들어올리고, 벽을 만지고, 빚의 무게를 흡수한다. 무한 반복. 마치 영화필름이 끝없이 도는 것처럼.
한 명의 잔상이 준호의 옆을 지나갔다. 남자였다. 아마 사십 대. 옷은 낡았고, 얼굴은 회색이었다. 그는 준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오직 벽의 채무 기록만 본다. 손을 뻗는다. 닿는다. 무게가 신체를 짓누른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소리 자체가 소멸한 지 오래다.
준호가 움직였다. 투명한 손을 들어올렸다. 첫 번째 잔상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실제로 따뜻했다. 온기가 손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그 온기는 잔상의 투명한 신체를 채웠다. 마치 기억이 돌아오는 것처럼. 손의 온기가 기억을 대체했다.
그 순간 잔상이 멈췄다. 반복의 고리가 끊어졌다. 첫 번째 계약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떴다. 준호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아주 천천히. 마치 수십 년 만에 웃는 것처럼.
"고마워."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는 다음 잔상으로 움직였다.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다음 것. 그리고 또 다음 것. 하나씩. 둘씩. 셋씩. 지하의 어둠 속에서 투명한 손들이 서로를 잡았다. 연쇄 반응처럼. 하나의 손이 다음 손을 잡고, 그 손이 또 다른 손을 잡는다.
계약 귀신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계약자들이 더 이상 거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거부는 계약서에 없던 행동이었다. 모든 계약자는 저항한다. 하지만 모두 혼자였다. 하나씩. 각각. 누구도 손을 잡지 않았다. 그래서 넘어진다. 그래서 빨려 들어간다. 그래서 계약은 절대불변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들은 함께 움직였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거부는 계약 자체를 무효화했다.
그들은 손을 잡은 채 위로 움직였다. 어둠을 뚫고. 벽의 채무 기록들이 희미해진다.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손을 대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이 사라지면, 빚도 사라진다. 계약자들이 손을 놓지 않자 그들의 절망이 깨졌다. 절망이 깨지자 빚의 무게도 사라졌다.
계약 귀신이 외쳤다. 하지만 그것의 목소리는 더 이상 세계를 흔들지 못했다. 손을 놓지 않은 자들에게는.
밤 11시 47분.
감옥의 셀에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준호가 나타났다. 투명하지 않은, 실재하는 손으로. 팔로. 얼굴로. 다시 현실로 돌아온 몸으로.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뒤로, 과거 계약자들의 형상들도 올라왔다. 하나씩. 둘씩. 현실의 빛 속에서 다시 투명해지지 않은 신체로 나타났다. 그들은 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준호를 봤다. 아들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투명하지 않게. 실재하는 것으로. 하지만 그 얼굴은 아버지가 알던 아들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이를 먹은 것도, 지쳐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준호 자신도 그것을 느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낯설음. 자신의 손가락을 세는데 누구의 손인지 모르는 그런 느낌.
"아들."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미안해."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뭐 미안해. 이제 함께 나가자."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주름이 많았다. 시간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손이었다. 준호가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감옥의 벽이 무너졌다. 천천히. 먼지가 일었다. 계약이 깨지자 이 감옥을 지탱하던 저주도 함께 무너졌다. 철창이 녹슬어 떨어진다. 콘크리트가 모래처럼 흩어진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 아래. 도시의 불빛들이 여전히 반짝였다. 누군가는 여전히 빚에 못 박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지하로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수십 명의 해방된 계약자들이 서 있었다.
길거리가 고요했다. 밤 11시쯤의 거리답지 않게. 사람들이 없었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아버지, 난 아버지를 몰라요."
준호가 말했다.
아버지의 손이 경직됐다. 하지만 놓지 않았다.
"알아. 괜찮아."
아버지가 말했다.
"내 이름이 뭐예요?"
"이영환. 난 이영환이야."
"그리고 난?"
"넌... 넌 우리 아들이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처음 아들을 만나는 것처럼.
준호는 아버지의 얼굴을 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억이 없어도, 이름을 몰라도, 이 손의 온기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것.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하지만 아버지 손을 놓지 않겠어요. 지금 이 순간에서."
준호가 말했다. 손의 온기가 기억을 대체했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준호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름도, 과거도, 기억도 필요 없었다.
"그래. 그것만으로 충분해. 아들아.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들은 밤거리를 걸었다. 손을 맞잡고. 기억을 잃은 아들과 그 아들을 기억하는 아버지. 하지만 그것은 불평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도 천천히 아들을 잊고 있었고, 그럼에도 그들은 함께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따라오는 해방된 계약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준호를 따랐다. 마치 준호가 그들을 이끄는 것처럼. 준호가 어디로 가든.
건설 현장이 보였다. 그린힐 타워. 초고층 건물.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아무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지하 30층 아래의 어둠은 더 이상 누구도 부르지 않을 것이다. 박준영이 설계한 빚의 생태계는 무너졌다. 건설사가 의도적으로 채용했던 채무자들도, 그들을 짓누르던 계약도, 모두 사라졌다.
준호는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구원이었다. 기억이 아닌,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것. 아버지를 잃었지만, 동시에 비로소 아버지를 '만나기' 시작한 것.
밤은 여전히 깊었고, 도시는 여전히 빚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준호는 그 빛을 두려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