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아버지의 의심

아침 햇빛이 창문을 통해 침투했을 때,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 빠진 것을.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니 눈썹이 희미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눈썹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됐다. 손가락을 얼굴에 가져갔을 때 피부 감각이 없었다.

"준호. 밥 먹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렸다. 준호는 옷을 입고 거울 앞을 떠났다.

식탁에 앉자마자 아버지가 준호의 얼굴을 오래 봤다. 밥그릇을 들기 전에. 젓가락을 집기 전에.

"너 정신 차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뭔가 다른 톤이었다. 두려움.

"뭐 하고 있어, 넌. 뭔가 잃어가고 있어. 내가 봐도 알 수 있어."

준호는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뜨거웠다. 아니다, 뜨거운지 찬지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입에 들어갔다. 목을 통해 내려갔다. 신체라는 파이프라인을 거쳐 어딘가로 사라졌다.

"대답해."

"네."

"뭐가 '네'야. 뭔가 있잖아. 눈에 띄는 뭔가가."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놨다. 밥을 덜어 놓고도 젓지 않았다.

준호는 아버지의 얼굴을 봤다. 주름이 늘었나? 아니면 이미 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건가? 기억이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정보는 있는데, 구체적인 형태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보는 이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인 건 알겠는데,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다는 이 모순.

"밥 먹고 나가야지."

준호가 일어섰다. 아버지의 질문을 피했다. 아버지는 준호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한참을 밥그릇을 바라봤다.

---

오후 2시.

아버지가 건설 현장 사무실을 찾아갔다. 현장 소장은 준호를 봤나 싶어 했지만, 아버지는 소장을 무시했다. 준호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박준영을 찾아갔다.

박준영은 도면을 펼쳐 놓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타나자 박준영의 표정이 굳었다. 도면을 접었다.

"박준영이지? 우리 준호 친구?"

"예."

"요즘 준호가 어때 보여? 뭐 이상한 거 없어?"

박준영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눈빛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모르겠는데요."

"진짜?"

"예."

아버지는 박준영의 눈을 더 봤다가 돌아섰다. 박준영은 도면을 다시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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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30분.

아버지가 준호의 학교 친구 둘을 만났다. 카페였다. 준호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준호의 친구들을 찾아냈다. 아버지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재능이었다. 찾아내기.

"요즘 준호가 뭐라고 했어? 학교 온다고?"

"아, 준호 형? 요즘 잘 안 봤어요."

"학교 왔어도 뭔가 멍하고 있어요. 마치 자기 과거를 기억 못 하는 것처럼."

"예? 뭐라고?"

"아, 이거 아니에요. 준호 형한테 '넌 초등학교 때 이거 좋아했잖아'라고 물어봤는데, 준호 형이 '뭐?'라고 하더라고요. 마치 처음 듣는 얘기처럼."

아버지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리듬감 있게. 조급함의 리듬.

"그게 한두 번이야?"

"자꾸 그래요. 요즘 진짜 이상해. 준호 형이 자기 과거를 잊어가는 것 같아."

아버지는 카페를 나왔다. 커피를 남겨 두고.

---

오후 8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준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의 손이 반투명해졌다. 손가락들이 희미했다. 마치 물속에서 손을 떨어뜨렸을 때처럼. 아버지는 준호의 손을 봤다.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준호. 일어나."

준호가 일어났다. 천천히. 관절이 뻣뻣한 것처럼.

"넌 지금 뭘 하고 있어?"

"아무것도."

"거짓말하지 마. 뭔가 숨기고 있지?"

준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 것 같았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악기 같은 목소리. 낯설고 부정확한.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

"그럼 넌 왜 그렇게 되고 있어? 네 손을 봤어. 넌 뭔가... 사라져가고 있어."

아버지가 준호를 안으려고 했다. 팔을 벌렸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밀어냈다. 몸을 굴렸다. 침대 아래로.

아버지의 팔이 공중에서 멈췄다. 아무도 안지 못한 채.

"아버지... 나한테 안 되."

"왜?"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안으면 아버지도 이 세계로 끌려갈 거라는 확신. 근거 없지만 절대적인 확신.

"내가 아버지를 구하려고 한 건데, 지금 아버지를 잃고 있어."

이 문장이 준호의 입에서 나왔을 때, 아버지의 얼굴이 완전히 부서졌다. 상처로 가득 찬 얼굴. 아버지는 침대에 앉았다.

"뭘 한 거야, 준호?"

준호는 천장을 봤다. 천장의 석고 표면들이 보였다.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균열처럼.

---

밤 10시.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준호의 말을 소화하려 했다. 그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준호가 어떤 세계에 발을 들였는지. 아버지의 손이 떨렸다.

"다시 말해 줄래? 정확히."

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아버지... 나는 빚을 졌어. 누군가에게."

"누구에게?"

"모르겠어. 기억이 자꾸 없어져."

아버지는 준호의 반투명한 손을 봤다. 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준호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준호가 다시 물러났다.

"건드리지 마, 아버지. 제발."

아버지는 손을 거두었다. 대신 준호의 눈을 봤다. 눈썹이 거의 사라진 눈. 그 눈 속에 절망이 가득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모르겠어."

"박준영이 알겠지?"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일어섰다. 휴대폰을 집었다.

"어디 가세요?"

"박준영을 만나러."

---

밤 10시 15분.

박준영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아버지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침착함 뒤에는 분노가 아닌 절박함이 있었다.

"지금 만날 수 있어?"

"예, 아저씨."

"어디?"

박준영은 장소를 말했다. 건설 현장 근처의 주차장. 사람이 거의 없는 곳.

---

밤 10시 35분.

아버지와 박준영이 만났을 때, 박준영은 이미 울고 있었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넌 뭘 알아?"

"준호 형이 뭘 하고 있는지요."

"정확히 뭔데?"

박준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지하의 세계. 채무 기록. 귀신. 계약. 모든 것. 아버지는 박준영의 말을 들었다. 그 말들이 황당하고 터무니없지만, 준호의 손가락이 투명해진 것을 본 아버지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준호가 빚을 졌다고?"

"예. 처음엔 작은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런데 자꾸 커졌어요. 그리고 빚을 갚을 때마다 기억이 사라진다고 했어요. 빚이 클수록 더 많은 기억이."

"그럼 누가 이 빚을 만들었어? 누가 준호한테 이런 짓을 한 거야?"

박준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존재의 이름을 모르니까.

아버지는 박준영의 어깨를 잡았다. "내 아들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 게 넌가?"

"아니에요! 아저씨, 저 아니에요!"

"그럼 누가?"

"모르겠어요. 준호 형이 말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박준영을 놓았다. 박준영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거짓은 없었다.

"이 빚을 갚는 방법이 있어?"

"있어요."

"뭐야?"

박준영은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가 준호 형 대신 채무를 지는 거예요. 그럼 준호 형은 빠져나갈 수 있어요."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

"그 누군가가 기억을 잃는 거겠지?"

"예."

"그리고 죽는 거겠지?"

박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도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주차장의 어두운 하늘을 봤다. 도시의 불빛들이 보였다. 그 불빛들이 모두 누군가의 채무 기록이라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준호의 손가락이 투명해진 것은 말이 되었다. 현실이었다.

"내가 대신 져야 하는 거네."

"아저씨?"

"준호의 빚을 내가 대신 져야 한다는 뜻이지."

박준영이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아저씨, 안 돼요. 그럼 아저씨가..."

아버지는 박준영의 손을 풀었다. "내가 이미 채무자인가?"

박준영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답해."

"예... 아저씨도 이미 이 세계에 엮여 있어요."

아버지는 웃음이 나왔다. 쓸쓸한 웃음. "그렇구나. 그럼 내가 남은 빚을 다 갚으면 되겠네."

"아저씨, 그럼..."

"내가 기억을 잃는 대신, 준호가 살아남는 거다. 그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지."

박준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는 휴대폰을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누군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계약자가 나타났군요."

"내 아들 대신 내가 계약하겠어."

"좋습니다. 그럼 당신의 모든 빚과 당신의 아들의 모든 빚을 당신이 지시겠다는 뜻이군요."

"그래."

"서명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기억도, 생명도, 존재도.

"서명하겠어."

펜이 종이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이름이 계약서에 쓰여졌다. 이영환. 그 이름이 채무 기록이 되는 순간.

"계약이 확정되었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박준영은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 희미해 보였다. 마치 준호처럼.

"아저씨..."

"준호한테 말하지 마. 내가 어디 갔는지 묻지 마. 그냥 준호가 살아남았다는 것만 기억해."

아버지는 박준영을 떠났다. 어둠 속으로. 지하로.

---

밤 10시 45분.

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이번엔 자신을 직시했다. 눈이 거의 사라졌다. 눈썹도, 눈썹 아래의 공간도. 얼굴의 중앙이 흐릿해졌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문지르고 있는 중인 것처럼.

준호가 손을 얼굴에 가져갔다. 손가락이 뺨을 통과했다. 아니, 정확히는 손가락이 뺨의 반대편으로 나왔다. 피부 저항이 없었다.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뚫고 나왔다.

자신의 팔을 뚫었다.

투명한 신체는 더 이상 물질이 아니었다. 기억이 소실될수록 신체는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귀에는 이상한 울림이 들렸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도 이상했다. 초침이 거꾸로 도는 것 같기도 했다.

거울을 떠났다. 침대 위의 사진첩을 집었다.

첫 페이지. 아이 시절의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불꽃축제를 보는 사진. 준호가 아버지의 어깨에 앉아 있고, 아버지의 얼굴이 불꽃에 물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준호는 그 웃음을 본 것 같은데, 본 것 같지 않았다.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얼굴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사진에 손가락을 대고 그 감촉을 기억하려고 했다. 종이의 질감. 아버지의 미소. 모든 것.

다음 페이지. 초등학교 입학식. 아버지가 새 책가방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 책가방에 준호의 손이 닿아 있었다. 작은 손.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사진 속 손과 현재의 손을 비교했다. 자신의 손은 이미 반투명했다. 엄지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진 속 손은 생생했다.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중학교 졸업식.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아버지의 팔이 준호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 팔의 무게를 준호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 속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 팔의 따뜻함. 그 팔의 무게.

또 다음 페이지.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는 모습. 아버지가 준호의 밥그릇에 반찬을 담아주고 있었다. 그 손길을 준호는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 손길의 부드러움. 그 손길의 사랑.

사진첩의 페이지들이 손가락을 통과했다. 투명한 손가락이. 준호는 사진 속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자리만 남아 있었다. 텅 빈 액자처럼. 액자는 남았지만 그 안의 그림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

준호가 중얼거렸다.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의 침대 옆 탁자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펼쳤다.

"미안해. 이제 내 차례다."

그 문장 아래에는 날짜가 있었다. 오늘. 밤 11시.

그리고 그 아래, 더 작은 글씨로.

"넌 살아남아. 어떻게든. 반드시."

준호는 그 글귀를 몇 번이나 읽었다. 손가락이 종이를 통과할 뻔했다. 종이를 집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집었다. 꼭 집었다.

시계를 봤다. 11시 3분.

아버지가 이미 내려갔다는 뜻이었다.

휴대폰을 집었다. 박준영의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지워지지 않은 기록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지만, 가장 최근의 통화는 아직 남아 있었다. 어제. 박준영이 "아저씨가 저한테 연락했어요"라고 했던 말.

준호는 박준영을 불렀다.

"준호? 이 시간에?"

"아버지는?"

"아버지? 뭐..."

"내 아버지. 이영환. 밤 11시에 지하로 내려갔어. 아버지를 알지?"

통화 너머에서 박준영이 숨을 쉬었다. 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박준영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박준영."

"네?"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모르겠는데요."

"거짓말 하지 마. 아버지한테 뭐라고 했어?"

박준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죄책감이 묻어났다. "아저씨가 먼저 찾아왔어요. 자기 아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아냐고. 자기가 뭘 팔고 있는지 아냐고. 내가... 다 말해줬어요."

"왜?"

"아저씨의 눈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냥 절박했어요. 아들을 구하려는 눈이었어. 나는... 거절할 수 없었어요."

박준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저씨가 자신의 빚을 더 이상 못 봐주겠다고 했어요. 그 대신..."

"그 대신 뭐?"

"그 대신 자기가 직접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아들이 이미 판 것까지 전부 갚겠다고. 그래야 아들이 멈출 거라고."

준호의 반투명한 손이 휴대폰을 집는 힘을 잃었다.

"아저씨는 계약서에 서명했어요. 자기 이름으로. 밤 11시 정각에. 당신 아버지는 이미 채무자가 되셨어요."

박준영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내 때문이야. 내가 말해서. 내가..."

"아버지가 뭘 알았어? 정확히."

"아저씨가 자신도 빚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당신 아버지도 이미 이 세계의 채무자였어요. 당신이 계약을 거듭할 때마다, 당신 아버지의 빚도 늘어나고 있었어요. 아저씨는 그걸 깨달은 거예요. 자신도 이미 이 세계에 엮여 있다는 걸."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저씨가 말했어요. 자신이 이미 채무자라면, 차라리 아들 대신 남은 계약을 끝내겠다고. 아들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게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박준영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통화가 끊겼다. 준호가 끊은 건 아니었다. 손가락이 투명해지면서 휴대폰을 더 이상 잡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집의 불을 켰다. 거실의 소파가 보였다. 그 위에 놓인 사진첩을 다시 집었다.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겼다. 투명한 손가락이 종이를 통과할 뻔했지만, 준호는 집중했다. 기억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아버지의 목소리를.

아버지의 손길을.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고 있었다.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자신의 머리 속에는 그것들이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또는 아예 사라진 것인데, 사라졌다는 사실까지 잊고 있었다.

준호는 사진첩을 가슴에 안았다. 투명한 팔로. 종이를 통과할 것 같은 팔로. 하지만 안았다. 이것만은 놓지 않으려고.

시계를 봤다. 11시 47분.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하 30층 아래에서 누군가의 빚을 지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채무 기록이 되어 벽면에 박혀 있을까.

준호는 창문을 열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보였다. 박준영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모든 빛이 빚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도시의 모든 건물, 모든 집, 모든 생명이 누군가의 채무 기록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은?

준호는 자신의 팔을 봤다. 이제 팔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팔이 도시의 빛을 투과했다. 자신도 이 도시의 빛의 일부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넌 살아남아.' 그 문장이 준호의 투명한 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무게였다.

시계가 11시 59분을 가리켰다.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사진첩을 가슴에 안은 채. 자동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끌려가는 것처럼.

자정.

준호의 몸이 침대에서 떨어졌다. 반투명한 신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장을 통과했다. 아파트를 통과했다. 도시를 통과했다. 중력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청각이 왜곡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방향이 뒤틀렸다. 모든 감각이 박탈되고 있었다.

지하로.

30층 아래로.

어둠으로.

준호는 내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봤다.

아버지가 있었다. 채무 기록들 사이에 갇혀 있었다. 아버지의 형체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채무 기록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가 이미 이 세계에 완전히 편입되었다는 표시처럼.

"아버지!"

준호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투명했다. 어둠 속에서 울림이 없었다.

아버지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준호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준호를 통과했다. 준호는 이미 투명했으니까.

"아버지! 나야! 준호야!"

"그 목소리..."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누구... 누구세요?"

준호의 목이 메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잊었다. 아니, 아직 잊지 않았다. 하지만 곧 잊을 것이었다. 계약을 거듭할 때마다. 기억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아버지... 미안해..."

"누... 누구야?"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채무 기록이 아버지의 입을 가렸다. 이미 아버지는 절반쯤 채무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귀신이 나타났다. 준호의 옆에서. 아니,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데 준호가 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28번째 계약을 시작하겠습니까?"

귀신이 물었다.

"거절하겠습니까?"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없었으니까. 또는 있어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또는 이미 그 둘이 같은 상태였으니까.

"거절할 수 없습니다. 계약이니까요."

귀신이 웃었다.

"새로운 채무자는..."

귀신의 손가락이 어둠 속의 채무 기록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멈췄다.

"1억 8천만 원의 유명 배우 이수진."

준호의 투명한 눈이 떠졌다.

이수진.

그 이름이 어디서 들렸는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지워진 기억 속에는 분명 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던 또 다른 누군가처럼.

그 사람도 누군가를 구하려다 여기 온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 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사진첩을 가슴에서 떼어냈다. 투명한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겼다.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췄다.

빈 페이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 하지만 그 위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

"준호에게. 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이 빚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넌가. 나는 모르지만, 넌 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넌 할 수 있다. 약속해. 살아남겠다고. 이수진을 찾아. 그 이름을 기억해. 그게 시작이야."

준호는 그 글귀를 읽었다. 투명해진 눈으로. 거의 사라진 시력으로. 하지만 읽었다.

이수진.

그 이름이 아버지의 글씨로 쓰여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귀신이 선언했다.

채무 기록이 준호를 감쌌다. 아버지의 형체가 더 희미해졌다. 이제 아버지는 단순한 숫자가 되고 있었다. 금액이 되고 있었다. 기억이 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기억이.

"아버지!"

준호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투명했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도.

귀신도.

자신도.

아니, 한 명이 더 있었다.

이수진이라는 새로운 채무자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것도 자신처럼 투명한 눈으로. 그것도 자신처럼 누군가를 구하려다 여기 온 눈으로.

그리고 그 눈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뭔가 있었다. 인식. 기억.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

마치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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