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6화 「기억의 가속화」

밤 11시 3분.

준호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이 식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주름살처럼 일어났다. 그는 손을 들어 살펴보다 멈췄다.

손이 보인다.

한 주일 전, 지하에서 올라온 준호의 손은 희미했다. 아버지가 잡으려고 내민 손을 통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제는 어땠더라?

수요일이었나? 목요일?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눈썹이 희미해졌다. 눈동자의 색이 예전처럼 검지 않았다. 회색빛이 들어 있었다.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알림이 떴다. '저장 공간 부족'. 갤러리를 열었다. 사진 폴더가 비어 있었다. 영상 폴더도. 최근 항목, 삭제된 항목, 모두 비어 있었다.

아버지 사진을 찾으려 했다. 아버지가 웃는 사진. 밥을 먹는 사진. 자신이 찍었던 것들.

모두 없었다.

손이 떨렸다. 뭔가 중요한 걸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밤 11시 17분.

박준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29번 남았어."

박준영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랐다. 담담함 아래 뭔가 떨리는 게 있었다.

"넌 이미 일곱 번 내려갔어. 이제 29번만 더 하면 돼."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 넌 지금 뭐 하고 있어? 다른 놈들은 이 정도 되면 벌써 포기해. 하지만 넌..."

박준영이 말을 멈췄다. 전화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넌 계속 내려가지. 왜?"

준호가 입을 열었다. 박준영의 질문이 자신을 향한 질문처럼 들렸다. 왜 계속 내려가는가. 일곱 번이면 충분했다. 아버지의 빚도 없고, 그 다음도 없고, 그 다음도... 왜?

"몇 명을 더 구하면 돼?"

준호가 물었다.

"구한다고? 아직도 그 말을 해?"

박준영의 웃음이 들렸다. 조소였다.

"이미 열 명을 넘게 구했어. 아버지 빚도 없고, 그 다음도 없고, 그 다음도... 왜 자꾸 내려가?"

박준영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마치 자신에게 묻는 것처럼.

"29번 남았어. 생각해봐."

박준영이 끊었다.

밤 11시 28분.

준호는 건설 현장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갔다. 지하 1층, 2층, 5층, 10층, 20층, 30층...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았다.

지하 30층 아래.

터널이 열렸다. 준호는 안으로 들어섰다. 벽면이 빛났다. 채무 기록들이었다. 숫자들. 이름들. 금액들. 전에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리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천장까지. 바닥까지.

준호는 손을 뻗었다.

벽에 손을 닿혔다. 손가락이 투명해졌다.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벽을 통과했다. 숫자들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이름들이 피 속으로 흘렀다.

과거 계약자들의 잔상이 보였다.

그들은 준호와 같은 자세로 벽을 만지고 있었다. 같은 표정으로. 공허한 눈으로. 반복적으로. 끝없이. 한 명이 손을 내렸다 올렸다. 또 한 명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또 한 명.

준호는 그들의 얼굴을 보려 했다. 하지만 얼굴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희미했다. 누군가의 기억이 지워진 사진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걸렸네."

준호가 돌아섰다. 귀신이 서 있었다. 형태를 알 수 없는 것. 때론 사람 같고, 때론 그림자 같고, 때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넌 왜 자꾸 내려와?"

귀신이 물었다.

준호가 대답하려 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누구 때문이었지? 기억이 흐릿했다.

"기억 못 하지?" 귀신이 한 발 다가섰다. "다 지워졌으니까."

"내가..." 준호가 말했다. "뭔가... 지켜야 할 것 같은데..."

"지켜야 할 것?"

귀신이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아니었다. 숨을 내쉬는 소리 같았다.

"처음엔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

귀신이 더 가까워졌다. 준호는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았다. 채무 기록들이 그의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지금 넌 뭘 하고 있니?" 귀신이 물었다. "누가 시켜서? 아니면..."

귀신이 멈췄다. 그 눈이 준호를 봤다. 아니, 그 눈이 준호였다.

"아, 넌 자발적이구나."

준호의 몸이 투명해졌다. 손가락부터. 손. 팔. 얼굴. 자신의 손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팔을 볼 수 없었다.

"다른 애들은 끝내고 싶어 해. 계약을 깨고 싶어 해. 하지만 넌..."

귀신이 손을 내밀었다. 손이 투명한 준호의 가슴에 닿았다.

"넌 계속 내려오고 싶어. 왜일까?"

준호가 입을 열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니까?" 귀신이 물었다. "자신이 왜 이 모든 걸 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니까,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내가..." 준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아. 근데 뭔지 모르겠어. 그래서 계속 와. 뭔가 찾으려고."

귀신이 멈췄다.

"찾는다고?"

"내가 누군지... 기억하기 위해서."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일곱 번을 내려갔다. 일곱 번마다 기억이 더 빠르게 사라졌다. 처음에는 사진이 지워지는 데 며칠이 걸렸다. 이제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희미해졌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계속 내려갔다.

왜?

귀신이 손을 내렸다.

"아니면 넌 이미 나처럼 된 거야."

준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투명했다.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없었다.

밤 11시 59분.

준호가 깨어났다.

욕실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을 봤다. 눈이 회색이었다. 더 이상 검지 않았다. 피부가 반투명했다. 손가락이 비춰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통화 기록을 찾았다. 최근 통화. 아버지. 어제? 언제?

준호가 통화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준호는 그것을 기억하려고 했다.

"아버지."

"준호? 뭐 해?"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려고."

침묵이 흘렀다.

"뭐가 있어? 뭔가 일이 있어?"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목소리를 기억하려고. 하지만 기억이 미끄러졌다. 어제 들었던 목소리와 다른 것 같았다. 아니, 어제 들었던 목소리를 모르겠다. 그게 뭐였더라?

"준호?"

"네, 아버지. 괜찮아요."

준호가 끊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뭔가 더 말하려는 기척이 들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통화는 끝났다.

밤 11시 52분.

휴대폰 화면에 카톡 메시지가 떴다. 박준영이었다.

"새 계약자 생겼어. 5천만 원 빚. 넌 해낼 수 있지?"

준호는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알 수 없었다. 새 계약자? 뭐가 새 계약자야? 그게 무슨 뜻인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손가락이 있었지만 뭘 써야 할지 몰랐다. 박준영의 말에 답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왜 답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메시지를 지웠다.

자정이 되었다.

오후 11시 57분. 아니, 오전 12시 2분. 시간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이나연이 들어섰다. 손에 낡은 책을 들고 있었다. 사진첩이었다.

"오빠."

이나연이 말했다.

"이거 봐."

이나연이 사진첩을 펼쳤다. 낡은 종이. 색이 바래있었다.

"이거 누구야?"

이나연이 가리켰다. 사진 속에 어린 아이가 있었다. 남자아이. 옆에 여자. 젊은 여자. 웃고 있었다.

준호가 사진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자신이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

준호가 말했다.

이나연이 멈췄다.

"뭐라고?"

"모르겠어."

준호가 반복했다.

이나연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같은 아이. 같은 여자. 이번엔 남자도 있었다. 세 명이 함께 있었다. 웃고 있었다. 불꽃이 배경에 터지고 있었다.

"이건?"

이나연이 물었다.

준호가 사진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자신이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도 웃고 있었다. 그 옆의 남자도 웃고 있었다.

누구야?

"오빠?" 이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너, 엄마, 아버지야."

준호가 사진을 봤다. 자신의 얼굴. 자신이 모르는 얼굴들. 사진 속 여자의 눈빛, 남자의 미소—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았다.

"기억 안 나?"

이나연이 물었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기억이? 뭘 기억하라는 건데? 사진은 분명 자신이 맞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가. 그 사람들의 얼굴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나연이 사진첩을 내렸다. 그 눈이 준호를 봤다. 공포로 가득 찬 눈.

"오빠, 정말 모르겠어?"

"내가..."

준호가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진 속 아이는 자신이 맞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사진 속 사람들이... 누구예요?"

준호가 물었다.

이나연이 뒤로 물러났다.

"오빠?"

"내가... 누구야?"

준호가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회색 눈. 반투명한 피부.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낯선 누군가가 있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밤 11시 59분 50초.

자정이 임박했다.

준호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발부터. 다리. 허리. 가슴. 목. 얼굴.

이나연이 비명을 질렀다.

"오빠!"

준호는 이나연의 손을 봤다. 그 손이 자신을 붙잡으려 뻗어 있었다. 하지만 준호의 손은 이미 투명했다.

이나연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놔! 놔줘!"

이나연이 소리쳤다.

"오빠, 제발! 다시 돌아와!"

준호는 이나연의 손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팔을 통과하는 그 손가락들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감각이 없었다. 이나연의 목소리도 멀게 들렸다.

"누구세요? 누구예요?"

준호가 물었다.

"나야! 나, 이나연이야!"

이나연이 외쳤다. 눈물이 흘렀다.

"우리 엄마, 아버지 기억 안 나? 우리 함께 살았잖아!"

준호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 엄마? 아버지? 그게 뭐지? 누구지? 사진첩의 그 사람들인가. 하지만 그들의 얼굴도, 목소리도, 감정도 자신과 연결되지 않았다.

"사진 봤잖아. 이 사진들이 우리야. 우리 가족이야!"

이나연이 사진첩을 들었다. 준호의 투명한 손가락에 닿혔다. 사진이 떨어졌다.

준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지하로 향하는 길로.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같았다. 모두가 투명했다. 모두가 기억을 잃었다.

"오빠!"

이나연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소매를 잡았다. 너무 늦었다. 준호는 이미 반투명했다. 이나연의 손은 그의 팔을 통과했다.

"제발... 제발..."

이나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준호는 지하로 끌려가고 있었다. 지하 30층 아래로. 그곳에서는 벽면의 채무 기록들이 더 크게 빛났다. 과거 계약자들의 잔상들이 더 많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준호는 자신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여덟 번째 계약.

준호가 지하 30층 아래의 터널에 닿는 순간, 세상이 움직였다. 아니, 세상이 움직인 게 아니라 준호의 감각이 움직였다. 위아래의 개념이 뒤바뀌었다. 터널이 더 깊어졌다. 벽면이 더 멀어졌다. 채무 기록들이 더 크게 빛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보였다.

투명한 손들. 벽면을 만지고 있는 손들. 채무 기록을 흡수하는 손들.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허한 표정.

준호가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갔다.

"너... 몇 번째야?"

투명한 남자가 돌아봤다. 그 눈에 초점이 없었다.

"몇 번째... 뭐지?"

투명한 남자가 다시 벽면을 만졌다. 채무 기록이 그의 손을 통과했다. 손가락 끝에서 빛이 나왔다. 그 빛은 마치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준호가 물러났다.

저 사람이 자신의 미래야. 자신도 저렇게 될 거야. 계약을 계속하면. 기억을 계속 잃으면. 투명해지면.

그런데 왜 자신은 멈출 수 없는가.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벽면에서 소리가 났다. 목소리였다. 여러 목소리였다. 수십 개, 수백 개의 목소리가 겹쳐서 나오고 있었다.

"누가 나를 구해줄 거야?"

"누가 날 데려갈 거야?"

"왜 날 버렸어?"

"왜 날 잊었어?"

그 목소리들이 준호를 감쌌다. 마치 물처럼. 준호가 숨을 쉬려 했지만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투명한 폐로는 공기를 마실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준호를 잡았다.

계약 귀신이었다. 그 형상은 여전히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준호가 볼 때마다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아니, 준호의 시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왜 계속 와?"

귀신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벽면의 여러 목소리와 겹쳐 있었다.

"모르겠어요."

준호가 대답했다.

"내가 왜 계속 오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계약자들은 거부해."

귀신이 말했다.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강제로 끌려오지. 하지만 넌... 넌 자발적이야. 자기 발로 걸어와."

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자발적이라는 말이 자신을 찔렀다.

"넌 누군가를 구하고 싶었어."

귀신이 계속했다.

"그 누군가를 위해 내려왔어. 매달 밤 11시. 너는 왔어. 그런데..."

귀신이 준호의 얼굴을 들었다. 그 손가락이 준호의 이마를 만졌다.

"그런데 지금 넌 뭘 구하고 있어?"

준호가 대답할 수 없었다. 벽면의 채무 기록들이 더 가까워졌다. 수백 개, 수천 개의 이름들. 수백 개, 수천 개의 금액들. 그것들이 모두 준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넌 잊었어. 그 누군가를. 그리고 지금 넌 자신도 잊고 있어."

귀신의 목소리가 벽면의 목소리와 완전히 겹쳤다.

"넌 누가 되고 싶어? 계속 내려오는 건 뭘 위해서야? 아무도 안 남았는데?"

준호가 벽면에 손을 얹었다. 채무 기록이 그의 손을 통과했다. 손가락 끝에서 빛이 나왔다. 그 빛이 준호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어깨로. 가슴으로. 목으로. 자신의 몸이 기록들을 흡수하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왔을 때, 준호는 자신의 집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정오 12시 정각.

거울 속의 얼굴은 이미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없었다. 아니, 눈이 있었는데 그 안에 색이 없었다. 두 개의 구멍. 그 안에는 채무 기록들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준호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반투명했다. 아니, 손가락이 투명했다. 손가락이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알림이 떴다.

「저장 공간 가득 참. 일부 파일이 자동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준호가 휴대폰을 켰다. 갤러리를 열었다.

아버지의 사진이 없었다. 모두 삭제되었다. 어머니의 사진도. 어린 시절의 사진도. 모두 검게 지워졌다.

대신 그곳에는 다른 사진들이 있었다. 준호가 본 적 없는 사진들. 낯선 사람들의 사진들.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허한 표정.

준호가 화면을 내렸다.

카톡이 떠 있었다. 박준영이었다.

"준호. 괜찮아?"

메시지 아래에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다.

"새 계약자가 생겼어. 이번엔 1억 2천만 원. 근데..."

박준영의 메시지가 계속됐다.

"너 정말 괜찮아? 뭔가 이상한데. 어제 이나연이가 전화했어. 넌 엄마 기억을 못 한다고? 뭐 하는 거야?"

박준영의 목소리가 메시지에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담담하지 않았다. 불안했다. 그 불안감은 죄책감으로 변해 있었다.

준호가 답장을 쓰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손가락이 없었다.

그 순간 현관에서 소리가 났다.

"오빠!"

이나연의 목소리였다. 비명처럼.

준호가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거울 속의 얼굴도 따라 돌았다. 그 얼굴은 이미 준호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빠, 괜찮아? 어제 이상했어. 엄마 기억 안 난다고..."

이나연이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멈췄다.

"오... 오빠?"

이나연이 준호를 봤다. 그 눈이 공포로 떨렸다.

"왜 그래? 왜 그런 표정..."

이나연이 말을 마치지 못했다. 준호가 천천히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누구야?"

준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이미 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 아니야. 난 이나연이야. 너의 여동생이야."

이나연이 뒤로 물러났다.

"기억 안 나?"

"기억?"

준호가 반복했다.

"뭐를 기억해야 해?"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밤 11시 59분 50초.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발로 걸어서.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부엌에서 지하실로. 지하실에서 건설 현장으로.

준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알고 있었다.

지하 30층 아래로 향하는 길을.

36번째 계약이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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