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11시 12분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채무추심꾼 '개'의 메시지였다.
**"니가 계약 귀신 거래 한다는 거 알아. 우리도 안다. 근데 넌 왜 우리는 외면해? 내 8천만 원 빚은 어때? 넌 남 빚은 대신 갚으면서 나한테만 발목 잡혀있는 척 하냐고."**
준호의 손이 떨렸다. 곧이어 또 다른 문자가 들어왔다.
**"넌 지금 어디야?"**
**"1시간 뒤에 찾아간다."**
지하 30층 아래로 내려가는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밤 11시부터 자정까지. 1시간. 그 1시간이 현실에서는 1년의 기억을 앗아간다. 준호는 이미 여섯 번을 내려갔다. 현실의 6년이 사라졌다. 얼굴은 반투명해졌고, 어머니의 기억은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이제 남은 건 아버지의 얼굴뿐인데, 그것도 자꾸만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개'였다.
"뭐야."
준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요즘 자주 목이 쉰다. 귀신의 세계에서 채무의 무게를 흡수할 때마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넌 지금 건설 현장에 있지? 난 5분 뒤에 도착한다."
통화는 끊겼다.
준호는 건설 현장 사무실 옆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타일 벽이 차갑게 등을 때렸다. 손목시계를 봤다. 밤 11시 14분. 아직 46분이 남았다. 계약 귀신이 자신을 소환할 때까지. 그 전에 '개'를 피해야 했다.
박준영.
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박준영이 자신의 위치를 '개'에게 넘겼다는 건가. 그럴 리 없다. 박준영은 자신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준호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럼 누가? 박준영은 어떻게 '개'의 손에 들어갔을까.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무거운 신발 밟는 소리. 준호는 숨을 죽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안쪽에서 벽을 헐어내려는 것처럼.
"이 새끼, 화장실 안에 있나?"
'개'의 목소리가 바로 옆 칸막이 너머에서 울렸다.
준호는 즉시 일어나 화장실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2층 높이. 아래는 자갈 포장도로였다. 착지하는 순간 발목에 통증이 흘렀지만, 준호는 멈추지 않고 건설 현장의 철제 담장을 뛰어넘었다.
밤의 도시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목소리,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준호는 그 소음 속으로 몸을 던졌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달렸다. 발목이 아팠다. 얼굴은 투명해졌고, 손가락 끝이 흐릿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꾸만 현실 같지 않게 느껴졌다. 혹시 자신이 이미 죽어 있는 건 아닐까. 귀신의 세계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나머지,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반 정도는 그쪽에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준호는 어느 편의점 앞에서 멈췄다. 형광등 아래서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아니라 연기처럼 보였다. 투명한 연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자꾸만 사라지니까.
그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깜빡거렸고, 시간이 점프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손목시계를 봤다. 11시 18분이었다. 방금 전엔 11시 14분이었는데. 4분이 사라졌다. 준호는 그 4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이 끊겨 있었다. 마치 필름이 끊긴 영화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아버지였다.
"아버지."
"너 지금 어디야? 밤이 이렇게 늦었는데."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밤마다 지하 30층 아래로 내려가 타인의 빚을 신체로 흡수한다는 것을 모른다. 아버지는 자신의 빚이 줄어드는 것만 안다. 신기롭게도, 빚이 줄어드는 속도는 처음과 같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몸으로 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괜찮아. 조금 있으면 들어가."
"그래. 그런데 말이야, 준호. 요즘 너 얼굴이 수척해 보여. 혹시 아파? 병원도 다시 한 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보면 뭔가 이상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물어보지 않는다. 아버지도 자신처럼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알았어. 내일 봐."
통화를 끊고 준호는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밤 11시 28분. 아직 32분이 남았다.
그 때 준호는 '개'를 따라다니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피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아는 게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가 아니었다. 준호의 판단력은 이미 침식되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현재의 순간만 남았다. 왜 이 길을 가는지, 무엇을 찾는지 알 수 없는데도 발은 계속 움직였다.
환각이 시작되었다. 길 위에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앞뒤로 흔들렸다. 방금 본 간판을 또 본다. 같은 거리를 두 번 지나간다. 아니, 한 번인가. 기억할 수 없다.
'개'는 남대문 시장 골목에 있었다. 그곳에서 '개'는 한 남자를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서른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얼굴은 멍투성이였다.
"이번 주까지 500만 원. 못 가져오면 손가락 두 개씩 자르는 거야, 알겠어?"
남자는 신음을 내뱉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개'가 주먹을 한 번 더 내려쳤다. 남자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개'는 돌아서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쾌감이 아니라 절망이 담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내장을 짜내고 있는데도 웃음을 유지해야 하는 그런 절망. '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한 행동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준호는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자신의 투명한 손으로 빌딩 벽을 짚으며.
'개'는 계속 움직였다. 다음 목표지는 이면도로의 허름한 주택이었다. 그곳에서 '개'는 노인을 협박했다. 그 다음엔 청년. 그 다음엔 여성.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눈이 죽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들의 영혼을 이미 빼앗아간 것처럼.
밤 11시 35분. 준호는 '개'를 따라 강변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은 노숙자들이 텐트를 친 곳이었다. 준호는 '개'가 그 텐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을 봤다. 금리 계산서를 읽으며. 협박 편지를 던지며.
그 때였다.
"이 돈을 어떻게 갚지."
한 노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밤바람에 실려왔다. 그 노인은 준호에게 보였다. 귀신의 세계에서 본 것과 같은 절망의 형태로. 마치 자신이 이미 죽어 있다는 걸 아는데도 살아가야 하는 그런 표정으로.
'개'는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오씨, 이번 달도 못 갚으셨네. 이제 뭘 팔 거 있어요? 시계? 반지?"
노인은 손을 모으고 있었다.
"제발. 다음 달에. 다음 달에 꼭..."
"다음 달? 오씨, 다음 달엔 이자가 또 붙어 있을 텐데요. 계산해보셨어?"
노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준호의 가슴을 찔렀다.
준호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미 여섯 명의 빚을 대신 갚았다. 여섯 명.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이렇다. 여전히 '개'는 누군가를 때리고 있고, 여전히 누군가는 울고 있다.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구한 것은 아무도 아니었다. 자신이 한 것은 단지 물을 떠내는 것이었다.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물 한 바가지를 떠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이 왜 이 모든 것을 하는지 기억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준호는 비로소 깨달았다. '개'도 같은 배 위에 있었다. 같은 시스템의 일부였다. '개'가 노인을 때리는 이유는 자신의 8천만 원 빚 때문이었다. '개'가 협박하는 이유는 자신이 협박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위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 위에도, 또 그 위에도. 끝이 없는 연쇄. 끝이 없는 절망.
밤 11시 45분.
준호는 강변을 벗어나 도시의 중심으로 향했다. 광장. 고층 빌딩들이 빛을 내뿜고 있는 광장. 준호는 그 광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도시의 모든 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준호는 보았다.
한 남자가 빌딩 옥상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밤하늘 배경으로. 마치 자신이 귀신의 세계에서 본 잔상처럼. 그 남자는 천천히 손을 놓고 있었다.
박준영이었다.
준호는 뛰었다. 도시의 밤을 가르며 뛰었다. 투명한 다리로. 거의 보이지 않는 팔로. 빌딩 로비를 통과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눌렀다. 최상층.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박준영의 얼굴이 자꾸만 자신의 어머니와 겹쳐 보였다. 어머니. 자신이 이미 잊어버린 어머니. 기억에서 사라진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옥상 계단. 준호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옥상에 도착했을 때, 박준영은 이미 손을 놓고 있었다. 준호는 팔을 내뻗었다. 투명한 팔. 그 팔이 박준영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준영은 떨어졌다.
그 순간 준호의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는데도 그 상실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왜 이 모든 것을 하는지 잊었는데도 그 절망이 들어찼다.
그리고 준호는 깨달았다. 박준영은 자신의 첫 번째 계약자였다. 자신이 대신 빚을 갚아주었던 그 사람. 박준영은 살아났어야 했다. 자신이 박준영의 빚을 모두 갚았으니까. 그런데 박준영이 왜 여기 있는가.
준호는 옥상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박준영의 몸이 아스팔트에 부딪혀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몸. 그 옆에는 메모지가 떨어져 있었다. 준호는 그 메모지의 글귀를 읽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살 유서.
박준영은 자신의 빚이 사라진 후에도 죽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구해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박준영에게 준 것은 단지 시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박준영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내가... 구한 게 아무도 아니네."
준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졌다.
옥상에서 내려오는 길. 준호는 시간을 잃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는지, 아니면 계단을 내려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거리를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기억이 끊겨 있었다. 다시 환각이 시작되었다. 박준영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얼굴이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어머니? 아니다. 아버지? 아니다. 자신? 맞다. 박준영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로 변했다. 자신이 떨어지고 있었다.
밤 11시 59분.
준호는 집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여기 왔는지 모른다. 자동으로 끌려온 것 같다. 계약 귀신의 힘이 아니라, 어떤 본능 같은 것에 의해.
집의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낡은 책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
준호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준호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자신의 아들이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너 이거 봤니?"
아버지가 책을 들어 올렸다. 노란색 표지의 일기장. 어린 필체로 적혀 있는 글씨들. 준호는 그것이 자신의 일기장임을 알았지만, 동시에 그 안의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너 이 일기, 중학교 1학년 때 썼잖아."
아버지가 페이지를 넘겼다. 그 안에는 자신의 글이 있었다. 자신이 썼지만 자신이 쓰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글. 그 글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감사가 가득했다.
"'엄마가 날 만들어줘서 감사하고 싶어. 엄마 없으면 난 없을 것 같아. 엄마가 죽으면 난 어떻게 될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엄마한테 이렇게 고마워했는데..."
아버지가 준호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너 엄마 기억해?"
준호의 몸이 얼었다. 어머니. 자신의 어머니. 자신이 누군가를 잊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느낌. 그 공백. 그 끔찍한 공백.
"아버지. 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준호의 투명한 얼굴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뭔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넌 엄마의 병을 대신 받아주는 계약을 했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계약이 뭐예요?"
준호는 본능적으로 부정했다.
"넌 엄마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와 계약을 했어. 엄마의 병을 대신 받아주는 계약.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때부터 넌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어."
아버지가 일기장을 내려놨다.
"넌 귀신의 세계에 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엄마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내가 언제부터 그걸 알았냐면..."
아버지는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넌 첫 번째 계약 이후로 달라졌어. 넌 다른 사람들의 빚도 대신 갚기 시작했어. 나도 모르게. 그리고 난... 그걸 막지 못했어."
아버지가 창문을 바라봤다. 밤 11시 59분. 1분이 남았다.
"넌 지금 몇 번째야?"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계약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일곱 번. 일곱 번째 계약을 하려고 해."
준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준호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눈에 무언가 결연한 것이 떠올랐다.
"박준영이 왜 죽었는지 알아?"
"모르겠어요."
"그 아이는 빚이 없어졌는데도 죽음을 택했어. 넌 그걸 막지 못했지. 왜냐하면 넌 이미 죽어 있기 때문이야."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넌 엄마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고, 그 이후로 넌 계속 죽어가고 있어. 넌 이제 내려가면 안 돼. 일곱 번째 계약을 하면 넌 완전히 사라져. 그럼 난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 그럼 나도 누군가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까. 그래서 또 누군가를 잃어야 할까."
아버지의 말이 준호의 가슴을 찔렀다.
"아버지는..."
"내가 빚을 졌다. 너한테. 엄마를 지키지 못한 빚을. 그 빚을 갚기 위해 넌 계약을 했고, 넌 점점 사라지고 있어. 그리고 난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이번엔 내려가지 마. 제발."
그 때 준호의 팔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눈동자만 남았다. 두 개의 검은 점. 그 안에 누군가를 기억하려는 절망과, 기억할 수 없다는 절망이 함께 떠 있었다.
밤 12시 정각.
귀신의 세계에서 준호를 소환하는 신호가 울렸다.
준호의 몸이 침대로 끌려갔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지만, 준호의 손은 너무 투명해서 잡을 수 없었다. 손을 통과했다. 마치 준호가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준호!"
아버지의 절규가 집 안에 울렸다.
하지만 준호는 이미 지하 30층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일곱 번째 계약. 일곱 번째 기억의 소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구하려던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미 잃어버린 것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은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