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정각, 준호는 지하 30층 아래에서 떠올랐다.
현실의 공기가 폐에 들어찬 순간, 몸이 흔들렸다. 반투명해진 손가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계단을 올라올 때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어제 기억이 날아간 후 몸은 더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흐릿해진다. 어제 본 아버지인데, 기억 속에선 낯선 사람이 되어 간다.
지상에 올라오자 박준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건설 현장 한쪽, 불빛이 희미한 곳에서. 그의 얼굴엔 무언가 계산된 미소가 떠 있었다.
"어때? 기분 좋지?"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준영은 준호의 침묵을 무시하고 팔을 잡아 끌었다.
"옥상 올라가자."
건물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스틸 프레임만 남은 뼈대를 통해 도시가 보였다. 박준영은 난간에 기대고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도시 전경을 가리켰다. 수천 개의 불빛이 깜빡였다.
"저 빌딩들 봐."
박준영의 음성이 낮았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저 빌딩들, 저 건물들, 저 아파트들. 다 뭐로 지어진 줄 알아?"
준호가 대답하지 않자 박준영이 자신의 질문에 답했다.
"빚이야. 죄다 빚이다. 건설사가 은행에서 빌린 돈, 그 위에 건설 노동자들이 급여를 받으면서 또 빚을 지고, 분양받는 사람들이 대출받으면서 또 빚을 지고. 저 도시 전체가 빚의 산이야."
박준영은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는 손가락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그 빚들이 자동으로 없어지지는 않잖아? 누군가는 그걸 치워야 돼. 누군가는 그 무게를 짊어져야 하고."
연기가 밤바람에 흩어졌다. 박준영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누군가가 바로 너 같은 애들이야."
준호의 목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박준영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자신이 지하에서 하는 게 정확히 그것이었다. 남의 빚을 자신의 몸으로 흡수한다. 그럼 그 빚은 어디로 가는가? 누군가의 채무 장부에서 사라진다. 누군가가 구원받는다. 자신의 기억을 대가로.
"너 알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똑똑한 놈들은 뭐 하는 놈들 같아?"
박준영이 말을 이었다.
"돈을 빌려주는 놈들이야. 은행가, 금융업자, 고리대금업자들. 그놈들은 돈을 만들어내. 아니, 정확하게는 빚을 만들어내지. 그리고 그 빚이 증식해서 사람들을 옭아매는 동안, 그놈들은 이자로 먹고산다. 지옥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거야."
박준영이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 다음 레벨이 뭐냐면, 그 빚을 추심하는 놈들이야. 채무추심꾼들. 그놈들은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옭아맨다. 빚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거야. 폭력으로. 협박으로. 그러면 뭐가 되냐? 사람들이 더 절박해져. 그리고 더 절박해진 사람들이 뭘 하냐?"
박준영이 준호를 바라봤다.
"지하로 내려가. 너처럼."
침묵이 흘렀다. 밤바람이 건설 현장의 철골을 헤집고 지나갔다. 그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그런데 너 같은 애들이 내려가면, 누가 이득을 보냐?"
박준영이 손가락으로 도시를 가리켰다.
"저 위에 있는 놈들이야. 금융업자들, 건설사들, 정부. 그놈들은 공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 알아. 그리고 알면서도 방치한다. 왜냐면 그게 편하거든. 도시의 그림자에서 모든 게 처리되니까."
박준영이 담배를 버렸다. 불이 꺼진 담배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 같은 애들이 있어. 중개인들."
그가 자신의 가슴을 쳤다.
"나 같은 놈들이 저 위와 저 아래를 연결한다. 위에서는 빚을 만들고, 아래에서는 그 빚을 치우는 거지.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수수료를 먹는다. 깔끔한 구조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넌 왜... 이걸 나한테 말해?"
박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넌 아직도 모르나? 넌 이미 그 구조의 일부야. 너도 나처럼 선택한 거야.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박준영이 준호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런데 말이야. 넌 한 명의 아버지만 구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 알아?"
"뭔 말이야?"
"너 다음 주 계약 때, 아버지 빚 말고 다른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줄 수 있다는 거야."
박준영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몇 개의 이름과 채무액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들 다 빚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놈들이야. 아버지들, 어머니들, 자식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자식이 구원받으면 뭘 할 줄 알아?"
박준영이 준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감사한다고 돈을 줄 거야. 큰 돈을."
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난 그 돈을 받을 수 없어."
"왜?"
"그건... 빚을 파는 거잖아."
박준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다시 부드러워졌다. 더 위험한 부드러움으로.
"넌 뭘 모르고 있네. 넌 이미 팔고 있어. 너의 기억을 팔고 있어. 그 댓가로 너의 아버지를 얻었고. 그럼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박준영이 한 발 물러섰다.
"생각해봐. 넌 어차피 내려가. 매달 내려가야 해. 그럼 누구의 빚을 대신 갚든 상관없잖아. 아버지 빚이 먼저 다 없어지니까 다른 사람들 빚을 갚아. 그럼 그 사람들이 살고, 그들의 가족이 살고, 그리고 넌 돈도 벌어."
박준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넌 왜 기억을 잃으면서까지 아버지만 구해? 다른 아버지들도 있잖아."
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박준영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 다른 아버지들. 다른 가족들. 자신이 내려갈 때마다 누군가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다음 주에 결정해. 내가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까."
박준영이 떠나갔다. 준호는 혼자 남겨진 옥상에서 도시를 봤다. 저 빛들이 정말 빚으로 지어진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뭔가? 그 빛들을 유지하는 어둠의 일부?
다음 주 밤 11시.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시계가 11시를 가리킬 때까지 정확히 3분이 남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박준영이었다.
"결정했어?"
"..."
"박준영이 말한 그 사람... 누구야?"
핸드폰 너머로 박준영의 한숨이 들렸다.
"좋아. 그럼 이번엔 김철수라는 아저씨의 빚을 갚아줄 거야. 빚이 8천만 원. 고리대금업자한테서. 이 아저씨 아들이 대학을 못 가고 있어. 넌 이 아저씨를 구하는 거야."
시계가 11시 정각을 가리켰다.
준호의 몸이 침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니, 침대가 준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중력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래로 떨어진다. 항상 그렇듯이. 지하로. 더 아래로.
이번엔 달랐다.
지하 30층 아래 터널에 도착했을 때, 계약 귀신이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명확한 표정이 있었다. 기대. 아니, 감사.
"넌 왔구나."
귀신의 음성이 울렸다. 마치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부르는 것처럼. 계약서에 적힌 조항들이 벽면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었다. 김철수.
"넌 다르다."
귀신이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마치 동료를 격려하는 손처럼.
"계속해줄 거지?"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벽면의 채무기록들에 손을 얹었다. 8천만 원의 무게가 몸을 관통했다. 고통스럽고도 달콤했다. 누군가를 구하는 고통. 그것이 자신의 목적이 된 것 같았다.
자정이 되자 준호는 현실로 떠올랐다.
박준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설 현장 계단 위에서. 그의 손에는 봉투가 들어 있었다. 검은 봉투. 무거운 봉투.
"잘했어. 진짜 잘했어."
박준영이 봉투를 건넸다. 준호는 그걸 받았다. 손이 떨렸다. 봉투 안에는 현금이 들어 있었다. 많은 돈. 아버지의 빚을 갚은 것보다 훨씬 큰 돈.
준호는 그 돈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뭔가를 팔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이름이 떠올랐다. 채무추심꾼 '개'. 그리고 그 옆에는 수십 개의 미답전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같은 번호에서 온 것이었다.
준호가 전화를 받았다.
"이놈... 어디 있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웠다.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절박했다.
"넌 아버지 빚을 갚았지? 그럼 이제 뭐야? 다른 놈들 빚도 갚아주는 거야?"
채무추심꾼 '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좋아. 그럼 넌 내 빚도 갚아줘야지. 넌 뭐하는 놈인데 다른 놈들은 구해주고 나는 못 구해?"
전화가 끊어졌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박준영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건설 현장에는 준호만 남겨져 있었다. 봉투와 함께. 그리고 그 봉투가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과 함께.
# 4화 「중개인의 제안」
건설 현장 옥상에서 박준영이 준호를 끌고 나왔을 때, 밤하늘 아래 도시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크레인들이 실루엣을 그렸고, 저 멀리 아파트 단지들의 창문들이 일렬로 반짝였다.
"저 빌딩들 봐."
박준영이 난간에 기댔다. 손가락으로 도시 전경을 그렸다.
"저기 있는 건 뭘까? 돈? 아니야. 빚이야. 저 건물들 다 빚으로 지어진 거야. 건설 자금도 빚, 분양자들의 대출금도 빚. 그리고 그 빚들을 없애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냐?"
준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박준영은 그런 준호를 옆에서 봤다.
"넌 그걸 이미 알고 있지. 넌 이미 그 일을 하고 있으니까."
바람이 옥상을 스쳤다. 준호의 옷깃이 펄럭였다. 반투명해진 그의 팔이 불빛에 투과되었다.
"넌 왜 그러는 줄 알아?"
박준영이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은 조명에 의해 반쯤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너 같은 놈들이 없으면, 이 도시 전체가 붕괴한다는 거 몰라? 빚이 안 사라지면 사람들이 미쳐. 자살하고, 범죄 저지르고, 가족이 파괴되고. 그런데 누군가가 그 빚을 대신 떨어지니까 사회가 유지되는 거야. 이 도시가 계속 돌아가는 거고."
준호가 박준영을 봤다.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돈이 흐르는 거야. 빚을 지우는 과정에서. 폭리금융업자들이 있고, 채무 추심꾼들이 있고, 그 사이에서 중개인들이 있어. 내 같은 놈들 말이야."
박준영이 옥상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준호도 따라갔다.
"폭리금융업자가 빈곤층에게 돈을 빌려줘. 이자는 하늘을 찌른다. 그 사람이 돈을 못 갚으면, 채무 추심꾼들이 나타나. 폭력, 협박, 모든 수단을 다 써. 빚이 점점 불어난다. 원금의 두 배, 세 배가 되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미친다. 죽는다. 실종된다."
박준영이 멈췄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빚을 갚아주면? 모든 게 깨끗해진다. 채무자도 살아나고, 채권자도 돈을 받고, 그 사이에 있는 우리들도 수익을 얻는 거야. Win-win-win이야. 완벽한 시스템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게 뭔 소리냐니? 너 이미 알고 있잖아. 너 지하에서 뭐하는데? 남의 빚을 대신 갚잖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잃고 있고."
박준영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반투명한 피부를 통해 혈관이 보였다.
"이미 몇 번을 내려갔어? 세 번? 넌 이미 3년의 기억을 잃었어. 어머니의 얼굴도 잊었지. 그런데도 계속 내려갈 거야. 왜냐하면 아버지의 빚이 남아 있으니까."
"그건..."
"너 아버지 기억 잃기 전에 다른 방법 찾아야 하지 않냐?"
박준영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마치 친구를 걱정하는 목소리처럼.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너는 계속 내려가면 되는데, 대신 다른 사람들의 빚도 대신 갚아줄 수 있어. 그 사람들 가족들이 감사할 거고, 그들이 나한테 돈을 주는 거야. 그럼 넌 아버지 빚도 다 없애고, 추가 수입도 생긴다고. 돈이 생기면 다른 채무자들을 찾아서 그들을 도와줄 수도 있어. 선순환이지."
준호는 박준영을 봤다. 박준영의 얼굴은 정말 그럴 듯했다. 마치 자신의 친구를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하지만 그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돈을 보고 있었다. 시스템을 보고 있었다.
"생각해봐. 넌 이미 죽어가고 있어. 기억을 잃으면서 천천히 죽어가는 거야. 그런데 그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거면? 그건 의미 있는 죽음 아닌가?"
박준영이 옥상을 떠났다.
준호는 혼자 남겨진 옥상에서 도시를 봤다. 저 빛들이 정말 빚으로 지어진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뭔가? 그 빛들을 유지하는 어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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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밤 11시.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시계가 11시를 가리킬 때까지 정확히 3분이 남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박준영이었다.
"결정했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준영이 말한 그 사람... 누구야?"
침묵이 흘렀다. 박준영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이번엔 김철수라는 아저씨의 빚을 갚아줄 거야. 빚이 8천만 원. 고리대금업자한테서. 이 아저씨 아들이 대학을 못 가고 있어. 넌 이 아저씨를 구하는 거야."
시계가 11시 정각을 가리켰다.
준호의 몸이 침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니, 침대가 준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중력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래로 떨어진다. 항상 그렇듯이. 지하로. 더 아래로. 더더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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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30층 아래 터널에 도착했을 때, 계약 귀신이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달랐다.
귀신의 얼굴에는 명확한 표정이 있었다. 기대. 아니, 감사.
"넌 왔구나."
귀신의 음성이 울렸다. 마치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부르는 것처럼. 계약서에 적힌 조항들이 벽면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었다. 김철수.
"다른 사람이네."
귀신이 계약서를 내렸다. 벽면의 글자들이 재정렬되었다. 준호의 이름 아래, 또 다른 이름들이 늘어섰다. 처음 계약한 아버지 이영환. 그리고 새로 추가된 김철수.
"넌 다르다."
귀신이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마치 동료를 격려하는 손처럼. 혹은 수십 년을 함께한 동지를 맞이하는 손처럼.
"계속해줄 거지?"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벽면의 채무기록들에 손을 얹었다.
8천만 원의 무게가 몸을 관통했다. 고통스럽고도 달콤했다. 마치 누군가를 구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착각 속에서 준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갔다.
채무기록들이 손가락에서 녹아내렸다. 마치 초초한 초콜릿처럼. 그리고 그것이 녹아내릴 때마다, 준호의 기억도 함께 녹아내렸다. 이번엔 무엇이 사라지는가? 밥을 먹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와 나눈 대화들?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누군가를 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자정이 되자 준호는 현실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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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설 현장 계단 위에서. 그의 손에는 봉투가 들어 있었다. 검은 봉투. 무거운 봉투.
"잘했어. 진짜 잘했어."
박준영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마치 자신이 직접 일을 해낸 사람처럼. 그런데 그건 거짓이었다. 일을 한 것은 준호였다. 준호가 자신의 기억을 팔아서 일을 한 것이었다.
박준영이 봉투를 건넸다.
준호는 그걸 받았다. 손이 떨렸다. 봉투 안에는 현금이 들어 있었다. 많은 돈. 아버지의 빚을 갚은 것보다 훨씬 큰 돈. 그 돈은 김철수의 가족이 준 것이었다. 자신들의 아버지의 빚을 갚아준 대가로.
그런데 그들은 뭘까?
준호가 그 돈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손가락이 봉투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뭔가를 팔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이름이 떠올랐다. 채무추심꾼 '개'. 그리고 그 옆에는 수십 개의 미답전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같은 번호에서 온 것이었다. 3시간 사이에. 4시간 사이에. 5시간 사이에.
준호가 전화를 받았다.
"이놈... 어디 있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웠다.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절박했다. 그 절박함 속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넌 아버지 빚을 갚았지? 그럼 이제 뭐야? 다른 놈들 빚도 갚아주는 거야?"
채무추심꾼 '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마치 광기 어린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좋아. 그럼 넌 내 빚도 갚아줘야지. 넌 뭐하는 놈인데 다른 놈들은 구해주고 나는 못 구해?"
전화기 너머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넌 내 앞에 나타났었지. 건설 현장에서. 그때 넌 도망쳤어. 하지만 나도 알아. 넌 뭘 하는 놈인지. 넌 지하에 가는 놈이지. 지하에서 뭔가를 하는 놈이지."
'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내 빚도 갚아줄 테니까. 내일 밤 11시. 건설 현장 지하 30층. 넌 거기 와. 알겠냐?"
준호는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개'가 먼저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아버지 찾아가도 되냐? 요즘 나이 드신 분들은 외로워하시더라고. 나랑 좀 얘기 나눌까?"
전화가 끊어졌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박준영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건설 현장에는 준호만 남겨져 있었다. 봉투와 함께. 그리고 '개'의 목소리와 함께.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그 순간, 아버지가 누군지 다시 한 번 생각나는 그 순간과 함께.
준호는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현금이 흩어졌다. 빌딩 불빛 아래에서 지폐들이 반짝였다. 그것들이 정말 돈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등가물일까?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준호. 넌 지금 어디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걱정스러웠다.
"아버지."
준호가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침묵이 흘렀다. 오래된 침묵. 마치 수십 년을 기다려온 침묵처럼.
"알아. 너는 나를 구하고 있어."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너를 잃고 있어. 그걸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