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준호는 발을 멈추고 천장을 바라봤다. 불이 나갔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그 리듬이 자신의 맥박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벽을 짚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은 어두웠다. 침대 옆 작은 책장에 사진첩이 놓여 있었다. 표지는 낡았고, 스티커로 된 "가족 추억"이라는 글씨가 벗겨져 있었다. 준호는 사진첩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첫 페이지. 어린 자신이 아버지 어깨 위에 앉아 있다. 뒤로는 해변이 보인다. 준호는 그 사진을 오래 봤다. 기억을 짜내려고. 모래의 온기, 아버지의 목소리, 자신이 웃던 모습—뭔가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사진은 분명히 여기 있는데,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
다음 페이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웃고 있었고, 자신은 어머니의 옆에 있었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얼굴을 기억해야 했다. 기억해야—
벽시계가 오후 3시 47분을 가리켰다.
준호는 사진첩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 모서리에 거미줄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된 거미줄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기억이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영이었다.
"야, 뭐 해?"
목소리만으로도 준호는 박준영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목소리였다.
"집."
"지금 나올 수 있어? 카페 있잖아, 그린힐 건설사 앞 카페."
준호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옷을 입고 나갔다.
---
카페는 조용했다. 오후 4시의 도시는 그랬다. 사람들이 일하고 있고, 준호만 떠도는 유령처럼 카페에 앉아 있었다.
박준영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
"너 요즘 진짜 이상한데."
박준영이 말했다. 준호는 커피를 집었다.
"다른 방법은 없냐."
"뭐의 다른 방법?"
"계약. 다른 방법으로 벗어날 수 있냐."
박준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이 없는 웃음이었다. 마치 누군가 정해진 대사를 읽으라고 한 것처럼.
"계약 귀신은 절대불변이야."
그 말을 박준영이 누구에게 들었을 때를 준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박준영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된 말이었다.
"계약한 놈은?"
"죽을 때까지 매달 내려간다."
박준영이 커피를 마셨다.
"36번이 한계야. 그 다음은 없어. 그 다음은 진짜로."
준호의 손이 떨렸다. 커피잔을 놨다. 얇은 음악이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연주곡이었다. 감정이 없는 음악.
"그럼 지금까지 몇 번?"
"셋."
준호가 대답했다. 이미 자신이 셀 수 있는 계약은 셋뿐이었다. 그 이상은 기억이 없었다.
"그럼 33번이 남았네."
박준영이 계산했다. 준호는 그 숫자를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33번. 그리고 매번 1년씩. 33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다냐?"
"뭐가?"
"기억. 1시간에 1년씩 사라진다는 게 다냐."
박준영은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연민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냉담함도 있었다.
"너는 뭐라고 생각해?"
"뭐냐고?"
"1시간에 1년씩 사라지는데, 그게 다라고 생각해? 그럼 넌 뭐가 남는 거 같아?"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박준영이 계속했다.
"육체가 투명해진다. 점점. 너 자기 손 봤어?"
준호는 손을 봤다. 팔뚝이 희미했다. 피부가 아닌 뭔가 다른 것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박준영이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그리고는 없어. 그냥 그거야. 계속."
---
밤 8시. 준호는 집에 돌아왔다.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었고,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피부는 창백했다. 그리고 투명했다. 거울 뒤의 벽이 비치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아버지였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거울에서 눈을 떼고,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응."
한 마디만 했다.
"밥 먹어. 라면이 있어."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보고 있었다. 그 아들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아버지와 이렇게 대화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이나 "알겠습니다"처럼. 아버지와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
밤 11시 30분. 준호는 거울 앞에 다시 섰다.
얼굴의 절반이 이미 투명했다. 거울 뒤의 벽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동자도.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집었다. 사진을 켰다. 첫 번째 사진은 어머니였다. 준호는 그 얼굴을 본다고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낯선 여자일 뿐이었다. 그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정보만 있을 뿐.
다음 사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준호는 그 웃음을 기억해야 했다. 기억해야—
방문이 열렸다. 이나연이었다.
"오빠, 엄마 생각 나?"
이나연이 물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당연하지."
거짓이었다. 하지만 이나연은 모를 것이다. 이나연은 오빠를 바라봤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나도 자꾸만 엄마 꿈을 봐. 아직도 생생해."
이나연이 말했다. 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밤 중.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계산했다. 33번. 매달 1시간씩. 내려가고 올라오고. 33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만약 자신이 더 빨리 내려간다면? 만약 다른 사람들의 빚도 대신 갚는다면?
그러면 아버지를 완전히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자신이 아버지를 잊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준호는 휴대폰을 집었다. 박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의 빚도 대신 갚을 수 있냐?"
답장은 금방 왔다.
"그래. 그렇게 계속하는 거야. 계속."
그 다음 문장에 웃음 이모지가 세 개 붙어 있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천장을 다시 봤다. 형광등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그 리듬에 맞춰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밤 11시 59분. 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1분이 남았다. 자정이 되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아니다. 아직 두 번째 계약이 끝난 지 1달이 지나지 않았다. 아직 내려갈 차례가 아니다.
하지만 준호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방을 나갔다. 거실을 지나 베란다로 나갔다. 아파트 난간에 기대고 선다.
도시가 보였다. 불빛들이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지하 30층 아래에서는 누군가 계속 일하고 있을 것이다. 빚을 짊어지고. 기억을 버리고.
자정이 되었다.
준호의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다. 가벼워졌다. 투명해졌다. 그리고 아래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지하로. 더 아래로.
자신이 계약한 것이 아버지의 빚뿐만 아니라는 것을, 준호는 이제 알기 시작했다. 자신이 계약한 것은 영원한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계속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 거래의 악순환
밤 11시 59분. 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1분이 남았다. 자정이 되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아니다. 아직 두 번째 계약이 끝난 지 1달이 지나지 않았다. 아직 내려갈 차례가 아니다.
하지만 준호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방을 나갔다. 거실을 지나 베란다로 나갔다. 아파트 난간에 기대고 선다.
도시가 보였다. 불빛들이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지하 30층 아래에서는 누군가 계속 일하고 있을 것이다. 빚을 짊어지고. 기억을 버리고.
자정이 되었다.
준호의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다. 가벼워졌다. 투명해졌다. 그리고 아래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지하로. 더 아래로.
---
**3화 「거래의 악순환」**
아침. 준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본다. 형광등의 불이 점멸한다. 깜빡. 깜빡. 자신의 눈깜박임처럼 규칙적이다. 어제 밤이 정말 있었나? 자신이 정말 내려갔나?
손가락을 들었다. 투명했다. 손가락이 아닌 벽이 보였다. 그렇다. 내려갔다. 그리고 올라왔다.
세 번째다.
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아니면 가벼운 건가?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거울로 가야 했다.
욕실의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의 절반이 이미 투명했다. 거울 뒤의 타일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동자도.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누굴 보고 있는 건가? 준호는 손을 들어 거울 위의 얼굴을 만져봤다. 손이 차갑지 않았다. 차갑다는 감각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었다. 사진 앨범을 켰다.
첫 번째 사진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웃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서. 아마 생일이었나? 준호는 그 얼굴을 본다고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낯선 여자일 뿐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 하지만 그것은 정보일 뿐이었다. 정보는 기억이 아니다.
다음 사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준호는 그 웃음을 기억해야 했다. 기억해야—
방문이 열렸다.
이나연이었다. 여동생의 얼굴이 떴다 사라졌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오빠, 엄마 생각 나?"
이나연이 물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당연하지."
거짓이었다. 하지만 이나연은 모를 것이다. 아니다. 이나연은 뭔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다르다. 오빠를 보는 눈이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나도 자꾸만 엄마 꿈을 봐. 아직도 생생해. 엄마가 나 머리 해주던 느낌도 있고."
이나연이 말했다. 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 앉았다. 이나연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자매 아닌 형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자신이 뭔가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엇을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오빠가 엄마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
이나연이 말했다. 그리고 나갔다.
---
오후 2시. 준호는 아파트를 나갔다.
편의점에 들어갔다. 진열대를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나왔다. 문구점에 들어갔다. 연필을 봤다. 지우개를 봤다. 기억이 지워지는 것처럼 지우개가 종이를 지운다. 준호는 지우개를 집었다가 내려놨다.
골목을 돌아다녔다. 이 골목을 언제 지나갔나? 모르겠다. 그런데 낯익다. 아버지와 함께 지나간 적이 있나? 준호는 이 길을 걸으며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기억 자체가 지워져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영이었다.
"지금 뭐 해?"
박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돌아다니고 있어."
"좋아. 만나자. 카페. 너 아는 그 카페."
박준영이 주소를 보냈다. 준호는 그 카페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 거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자신이 알았을 것이다.
---
카페에서 박준영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준호가 들어가자 박준영이 손을 들어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준호가 앉았다.
"요즘 어때?"
박준영이 물었다.
"그냥... 괜찮아."
"괜찮아? 너 얼굴이 반투명한데 괜찮아?"
박준영은 웃었다. 그것은 조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본 것에 대한 확인일 뿐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냐?"
준호가 물었다.
박준영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없어."
박준영이 말했다.
"계약 귀신은 절대불변이야. 계약한 놈은 죽을 때까지 매달 내려가야 한다. 그게 계약이야. 계약이라는 건 그런 거야. 한번 서명하면 끝이야. 아무도 못 빠져나와."
"그럼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다른 사람들도 너처럼 내려가지. 36번까지. 그리고 36번 이후로는 돌아올 수 없어."
박준영이 말했다.
"그들은 어디로?"
준호가 물었다.
박준영은 준호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웃음을 멈췄다.
"그건... 모르겠어. 아무도 그들을 본 적이 없거든."
---
밤.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계산했다. 33번. 매달 1시간씩. 내려가고 올라오고. 33번.
아버지의 빚은 이미 모두 갚았다. 그런데 왜 자신은 계속 내려가야 하는가?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나? 준호는 계약서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아니다. 있었다. 아버지 빚의 액수. 36회 계약. 가장 소중한 기억의 소멸.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만약 자신이 더 빨리 내려간다면? 만약 다른 사람들의 빚도 대신 갚는다면?
그러면 아버지를 완전히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자신이 아버지를 잊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준호는 휴대폰을 집었다. 박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의 빚도 대신 갚을 수 있냐?"
답장은 금방 왔다.
"그래. 그렇게 계속하는 거야. 계속."
그 다음 문장에 웃음 이모지가 세 개 붙어 있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천장을 다시 봤다. 형광등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그 리듬에 맞춰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
밤 11시.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준호. 밥 먹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조용히 방을 본다. 형광등 아래 침대 위의 아들. 그 아들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아버지는 방을 나갔다.
준호는 다시 누웠다. 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아직 30분이 남았다.
---
밤 11시 50분. 준호는 거울 앞에 다시 섰다.
얼굴의 절반이 이미 투명했다. 거울 뒤의 벽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동자도.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는 거울을 주먹으로 쳤다.
거울이 깨졌다. 균열이 들어갔다. 그 균열 속에서 여러 개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들이. 깨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들.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하는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의 투명한 얼굴을 보지 못하게.
"괜찮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괜찮아? 넌 요즘 자꾸만 멍해 있어. 뭐 하는 거야?"
아버지가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방을 나갔다.
---
밤 11시 59분. 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1분이 남았다. 자정이 되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아니다. 아직 세 번째 계약이 끝난 지 1달이 지나지 않았다. 아직 내려갈 차례가 아니다.
하지만 준호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방을 나갔다.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나갔다. 신발을 신었다.
"어디 가?"
이나연이 거실에서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빠!"
이나연이 불렀지만 준호는 이미 문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1층. 지하 2층. 계속 내려갔다.
건설 현장으로 가야 했다. 그곳의 지하 30층 아래로.
---
건설 현장은 밤이었다. 경비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 준호는 담장을 넘었다. 아니다. 담장을 통과했다. 자신의 몸이 투명했으니까.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1층. 2층. 계속.
10층. 15층. 20층. 25층.
30층.
그리고 그 아래.
지하 30층 아래의 터널. 그곳에서 계약 귀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아닌데."
계약 귀신이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내가 원해요."
준호가 말했다.
"왜?"
"다른 사람들의 빚도 갚고 싶어요."
계약 귀신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그래. 그렇게 계속하는 거야. 계속."
계약 귀신이 손을 들었다.
준호의 몸이 끌려갔다. 아래로. 더 아래로.
자신이 계약한 것이 아버지의 빚뿐만 아니라는 것을, 준호는 이제 알기 시작했다. 자신이 계약한 것은 영원한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계속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벽면의 채무기록들이 준호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빚이 아니었다. 누군가 모를 남의 빚이었다. 그리고 그 빚을 흡수하는 순간, 준호의 또 다른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이 모든 것을 하는지에 대한 기억.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기억.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
모두가 검게 지워졌다.
그리고 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계약 귀신처럼. 슬픈 웃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