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 소실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을 때 준호는 어머니의 얼굴이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장을 봤다. 어제는 뭘 했더라?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그 다음은? 기억이 끝났다. 아니, 끝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치 영화를 보다가 장면이 통째로 잘려나간 것처럼.
관자놀이를 눌렀다. 압박감이 있었지만 통증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려 했다.
불꽃축제. 엄마랑 아빠랑 갔던 기억이 있었다. 정확히는 있었던 것 같았다. 사진에서 본 것 같기도 했고, 실제로 경험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얼굴이 명확하지 않았다. 어두웠다.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노을색으로 바래진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웃던 모습이 있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만 없었던 게 아니라 '웃었다'는 사실이 점점 희석되고 있었다.
침대에서 나와 책상 위의 사진첩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페이지를 넘겼다. 아버지와의 사진들이 나왔다. 준호가 다섯 살 정도일 때 아버지가 안고 있는 사진. 열 살일 때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속 아버지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준호의 기억 속에서는 그 웃음이 지워지고 있었다.
사진첩을 내려놨다. 이건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 뭔가가 의도적으로 그의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다.
저녁 6시. 집에 돌아갔다.
아버지가 밥을 하고 있었다. 냄비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된장국의 냄새였다.
"아버지."
"응, 왔니?"
아버지 이영환은 앞치마를 두르고 국자로 국을 저었다. 그의 얼굴은 여위어 있었다. 최근 몇 주 동안 채무추심꾼들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났는지 표정이 밝아졌었는데, 지금 그 밝음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요즘 이상한데, 괜찮아?"
준호는 멈췄다.
아버지가 국을 떠서 밥에 붓고 있었다. 그의 눈이 준호를 향했다. 걱정스러운 눈이었다.
"괜찮습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 마. 아버지 눈엔 다 보인다. 요즘 넌 뭔가 다르다. 눈빛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고."
"일이 많아서 피곤한 거예요."
"피곤한 정도면 괜찮겠는데, 뭔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버지가 밥그릇을 내밀었다. 준호는 받아서 앉았다. 밥을 먹었다. 된장국의 맛이 혀에 닿았다. 좋은 맛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이 맛을 누가 가르쳐줬는지 기억할 수 없을 날이 올 것 같았다.
"아버지."
"응?"
"요즘 잘 지내세요?"
아버지가 준호를 봤다.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래, 이제 채무추심꾼들도 안 오고, 밤에도 편하게 자네. 다 너 덕분이야. 고맙다, 우리 준호."
준호는 숟가락을 내려놨다. 죄책감이 목을 졸랐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마치 뭔가를 말하려다가 참은 듯했다. 그러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깊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준호, 너... 엄마 이름 기억해?"
준호의 숟가락이 떨어졌다.
"뭐... 뭐라고?"
"엄마 이름. 넌 엄마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요즘 한 달간 단 한 번도."
준호는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름. 그것을 생각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공백. 그것뿐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준호?"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 나..."
준호가 말하려 했지만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름.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목소리.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손이 떨렸다. 밥그릇을 내려놨다. 주방으로 가더니 어딘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을 열고, 닫고, 또 열었다. 마침내 낡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 사람. 이 사람이 누구야?"
아버지가 사진을 준호 앞에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여자가 있었다. 웃고 있는 여자. 그런데 준호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준호가 대답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모르겠다고? 넌... 넌 엄마를..."
아버지가 의자에 앉았다. 사진을 내려놨다. 그의 손이 떨렸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뭐 했어? 넌 뭘 한 거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버지..."
"말해. 넌 뭘 한 거야?"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었다.
저녁 8시. 건설 현장.
박준영은 콘크리트 기둥에 기대 있다가 준호를 봤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지하에 뭔가 있다는 거 알지?"
"뭐?"
"지하에. 30층 아래."
박준영이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이미 여러 사람이 계약했다. 넌 처음 계약한 게 아니야. 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이렇게 계속되는 거야. 다들 똑같은 거다. 빚 때문에 절망하고, 지하로 내려가고, 계약하고."
"그럼 넌?"
박준영이 준호를 봤다.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난 계약 안 했다. 난 이 바닥의 규칙을 배웠어. 빚은 갚는 게 아니라 피하는 거고, 피할 수 없으면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거야. 넌 아직 모르겠지만, 곧 알게 될 거다."
박준영이 담배를 내팽개쳤다. 그는 준호 곁을 지나갔다. 그러다 멈춰 섰다. 준호를 돌아봤다.
"넌 이미 돌아올 수 없다."
박준영의 목소리가 낮고 차가웠다.
"뭐?"
준호가 물었을 때, 자신의 손이 투명해지는 것을 봤다.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팔 전체가 흐릿해졌다.
"뭐... 뭐야?"
준호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빛을 통과했다. 현장의 불빛이 손을 통해 반대편으로 흘러갔다.
"계약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거 알지?"
박준영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밤 11시가 되면 넌 저절로 끌려간다. 그리고 매번 뭔가를 잃는다. 처음엔 작은 기억들. 그 다음엔 중요한 것들. 그리고 마지막엔..."
박준영이 준호의 눈을 봤다.
"36번이 한계다. 그 이후로는 넌 더 이상 넌 게 아니야."
박준영이 돌아섰다. 준호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그의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밤 10시 50분.
준호는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자신이 내려가려는 게 아니었다. 밤 11시가 되면 자신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의지와 무관하게.
손가락을 부르르 떨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경직되었다. 밤 11시까지 남은 시간이 10분. 그 10분 동안 준호는 거부를 시도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으려고. 계약을 거부하려고.
하지만 그의 발은 이미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1층, 2층, 3층... 지하 1층, 2층, 3층... 지하 10층, 20층, 30층... 그리고 그 아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둠이 준호를 집어삼켰다.
귀신의 세계. 벽면에는 거대한 채무기록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준호의 피부를 밝혔다. 손이 투명해졌다. 다리도 투명해졌다.
"시작합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 귀신이었다. 그것의 형상은 명확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만 빛났다. 두 개의 노란 눈.
준호가 벽으로 다가갔다. 손을 올렸다. 채무기록을 만졌다.
그 순간.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준호는 뒤를 돌았다. 어둠 속에서 투명한 형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들. 여자들. 모두 같은 노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손을 올리고, 채무기록을 만지고, 비명을 질렀다.
그 형상들 중 하나가 준호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혼이 빠진 눈이었다. 마치 몇십 년을 같은 노동을 반복해 온 것처럼, 모든 것이 지워진 눈이었다.
준호는 손을 내렸다. 채무기록이 준호의 손을 스쳤다. 그 순간 누군가의 절망이 준호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채무가 아니라, 절망이었다. 누군가의 삶 전체가 준호의 신체 안에 밀려 들어왔다.
준호는 비명을 질렀다.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는 1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준호에게는 100시간처럼 느껴졌다.
밤 12시.
준호의 눈이 떠졌다. 자신의 방이었다. 천장이 보였다. 현실로 돌아왔다.
준호는 몸을 일으켜 거울로 갔다. 거울 안의 자신의 얼굴을 봤다. 눈빛이 이상했다. 흐릿했다. 마치 포커스가 맞지 않은 사진 같았다. 눈동자가 탁해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로부터의 문자였다.
'아들, 엄마 생각나? 엄마가 만든 미역국 먹고 싶은데...'
준호의 손이 떨렸다. 엄마. 어머니.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머릿속에는 그 형상이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없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만든 미역국의 맛이 없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화면이 깨졌다.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들이 마치 준호의 기억처럼 갈라져 나갔다.
준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되찾으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둠. 검은 공백. 그것뿐이었다.
'엄마... 엄마가...'
입술이 떨렸다.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름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26년의 기억이 1시간의 노동으로 사라져 버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 괜찮아?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이영환. 준호는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준호는 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눈 주위에 주름이 많았다. 이전엔 몰랐던 주름들이었다.
"아버지."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 했어?"
아버지가 물었다. 준호의 방 안을 들여다봤다. 깨진 휴대폰이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괜찮아."
준호가 대답했다. 거짓이었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를 잃어버렸다. 기억의 형태로가 아니라,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다.
아버지는 준호의 눈을 봤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섰다. 마치 낯선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아버지도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내일은 출근해야 한다."
아버지가 말했다.
"알았어."
준호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구부러져 있었다. 빚의 무게로 인해. 그러나 이제 아버지의 빚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준호가 대신 져줬으니까.
밤 11시가 되기 10분 전.
준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자신은 거기 없었다. 자신의 신체는 이미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둠.
그리고 그 안에서 준호는 또 다른 형상들을 봤다. 이번엔 더 많았다. 투명한 몸들. 모두 같은 노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모두 같은 표정으로. 영혼이 빠진 표정으로.
그 중 한 명이 준호를 봤다. 그 형상의 얼굴에는 준호가 아는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전의 자신. 몇십 번 계약을 반복한 후의 자신의 모습.
준호는 그 형상 곁에 멈춰 섰다. 그 형상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감정이었다. 절망. 그것만이 준호의 뇌에 직접 전달되었다.
준호는 이해했다.
그 형상도 한때는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형상도 한때는 이 거래를 시작했을 때 아버지나 누군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형상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구하려던 이유도,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그저 반복. 영원한 반복.
밤 12시.
준호는 깨어났다. 자신의 방. 천장. 현실.
그러나 이번엔 뭔가 달랐다.
거울을 봤을 때, 준호의 눈은 더 이상 준호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계약자들의 눈이었다. 모두가 같은 눈. 희망이 없는 눈.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반투명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통과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을 켰다. 깨진 화면 너머로 달력이 보였다. 다음 달 계약 날짜까지 남은 시간. 28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봤다. 그 눈 안에는 수십 개의 다른 눈들이 겹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