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현장의 콘크리트 분진이 햇빛을 갈라놓고 있었다. 준호는 철근을 묶는 손을 멈추고 위층을 바라봤다. 정오가 넘어가고 있었고, 아버지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준호? 나 지금..."
통화는 끊겼다. 준호는 철근 결속용 와이어를 내려놓고 현장 계단을 내려갔다. 등줄기를 타고 불안이 내려왔다.
현장 출입구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멈췄다. 회색 승용차 두 대가 정문을 막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아버지가 서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아버지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채무추심꾼들이었다.
"돈을 못 구하면 딸이라도 팔아야지, 이 양반."
더 큰 덩치의 남자가 웃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회색이었다.
준호가 뛰어갔다. 거리는 30미터. 채무추심꾼들은 준호를 보고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 너도 돈 있냐?"
"아버지!"
준호가 다가갔을 때 추심꾼들은 아버지를 차에 밀어 넣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항하지 않았다. 손을 내저으며 준호에게 무언가를 외쳤지만 엔진음에 묻혔다. 차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준호는 그 자리에 섰다. 숨을 고르지 못했다.
"형, 괜찮아?"
박준영이 나타났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청년이었다. 박준영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버지가..."
"응. 봤어."
박준영이 담배를 피웠다. "그 정도면 이제 심각한 수준이야. 폭리금융이 들어왔다는 건 정상적인 금융에서 못 빌리는 수준이라는 뜻이야. 그럼 이제..."
박준영의 말이 이어졌지만 준호는 듣지 않았다.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을 해야 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 밤, 준호는 지하 공사 구간에 내려갔다. 현재 건설 중인 '그린힐 타워'의 지하는 30층까지 파내려가고 있었다. 준호는 지하 29층의 철근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날 밤은 지하 30층 아래 구간의 안전 점검이 예정되어 있었다.
"30층 아래 뭔가 이상한 게 있다더."
현장 감독이 중얼거렸다. 준호는 그 말을 흘렸다.
지하 30층을 지나 더 내려가는 통로는 폐쇄되어 있었다. 철문이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그 앞에는 '진입 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준호는 현장 감독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쇠사슬을 만져봤다. 오래된 쇠사슬이었다.
호기심과 불안이 섞였다. 준호는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철문 너머는 예상과 달랐다. 콘크리트 터널이 아니라 흙과 돌이 벗겨진 자연 암반이었다. 마치 오래된 광산 같았다. 준호의 손전등 빛이 벽면을 훑었고, 그것이 닿은 곳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종이였다. 아주 낡은 종이.
준호는 손전등 빛으로 더 자세히 봤다. 종이는 암반 틈에 끼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글씨가 있었다. 한글이었지만 현대식이 아니었다. 옛날 글씨였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빼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계약서'
종이는 두 장이었다. 첫 번째 장에는 날짜와 함께 무언가의 조항들이 적혀 있었다. 글씨가 희미했지만 중간중간 단어들은 또렷했다.
'...매달 정해진 시간...' '...채무 소거...' '...기억의 대가...'
두 번째 장에는 서명란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개의 서명이 있었다. 모두 다르지만, 모두 떨리는 손으로 쓰인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준호는 그 자리에 앉았다. 손전등 불빛이 종이 위에서 흔들렸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채무추심꾼들의 웃음이 떠올랐다. 현실로 돌아갈 길 없는 빚의 세계가 떠올랐다.
준호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손이 떨리며 종이에 닿았다.
'이준호'
서명이 완성되는 순간, 세상이 변했다.
손전등 불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아니라 무언가가 빛을 삼켰다. 터널의 벽이 소용돌이쳤다. 준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났다.
형태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이 아니었고, 동물도 아니었다. 그저 어둠이 집중된 형태였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호흡하고 있었다. 준호는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약이 성립했다."
목소리였다. 언어였다. 하지만 귀가 아닌 뇌에 직접 울려 퍼졌다.
"당신은 이제 나의 계약자입니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뭘..."
"매달 밤 11시부터 자정까지, 당신은 나의 세계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당신은 타인의 빚을 신체로 흡수합니다. 그것이 완료되면 현실의 채무는 소거됩니다. 당신의 아버지 이영환의 채무도 포함하여."
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거부하겠습니다. 계약을 거부..."
"이미 성립했습니다. 계약서에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어둠이 준호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의 시각이 반전되었다. 밝고 어두운 것의 개념이 뒤집혔다. 그는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했다.
지하의 세계는 어둠 속에 떠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벽면에는 불빛이 아닌 어떤 종류의 발광체가 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글씨였다. 숫자였다. 이름이었다. 준호는 벽을 바라봤다.
'이영환 빚 2억 3천만 원' '박미경 빚 5천만 원' '김철수 빚 8천만 원'
벽면 전체가 채무 기록으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까지, 바닥까지.
"당신의 작업입니다."
귀신의 목소리였다. 준호의 손이 자동으로 벽을 향해 움직였다. 손가락이 글씨에 닿는 순간, 무언가가 준호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빚의 무게였다.
어깨가 내려앉았다. 가슴이 압박당했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동시에 벽의 글씨는 희미해졌다. 한 글자씩 사라졌다. 채무가 소거되고 있었다.
준호는 계속 손을 벽에 댔다. 한 글자씩, 한 이름씩, 한 채무씩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왜곡되어 있었다. 분이 시간처럼 느껴졌다. 준호의 몸은 투명해졌다. 그의 실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준호는 깨어났다.
현장의 암반 터널이었다. 손전등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준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계를 봤다. 밤 12시 01분.
1분이 지나갔다.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은행 앱 알림이었다.
'이영환 계좌 채무 전액 상환 완료'
준호는 그 화면을 바라봤다. 손이 떨렸다. 진짜 떨렸다. 아버지의 채무가 없어졌다. 모두 없어졌다. 2억 3천만 원이 사라졌다.
그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뭐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후 꿈의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준호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한 시였다. 현관을 열었다. 거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준호?"
아버지가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밝았다. 준호는 본 적 없는 밝음이었다.
"빚이 다 없어졌다. 은행에서 전화가 왔어. 다 상환되었대."
아버지가 준호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떨렸다.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준호도 그를 안았다.
그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서 또 무언가가 검게 지워졌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어느 오후의 기억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웃던 날—그 장면이 마치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준호는 아버지를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그 포옹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온기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처럼 느껴졌다.
아침이 밝았을 때, 준호는 소파에서 깨어났다. 아버지는 이미 일어나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준호는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봤다. 가벼워 보였다. 채무 통지서를 들었다 놨다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다 없어졌다니... 정말 다 없어졌어."
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어제 밤의 기억을 되짚어보려 했지만, 핵심이 자꾸 빠졌다. 마치 영상을 재생하는데 중간중간 프레임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손을 머리에 얹었다. 뭔가 있었다. 분명히 있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영이었다.
"야, 너 어제 뭐 했어?"
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일해."
"일? 밤중에 현장에서?" 박준영의 톤이 이상했다. "너 정신 차려. 이상한 짓하다가..."
"뭔데?"
"그곳에 내려가면 안 돼. 다시 내려가면 안 된다고."
박준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박준영의 경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아니, 깨닫고 싶지 않았다.
"뭐 하는 소리야?"
"아니야. 그냥... 조심해. 그곳은... 그냥 절대 내려가지 마."
박준영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마치 누군가 듣고 있을까봐 조심스러운 것처럼.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억이 안 나지만... 내 직감이 말해. 그곳에서 뭔가 일어난다고. 그리고 그 뭔가가 너한테 일어났다고."
통화가 끝났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박준영의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경고였다. 하지만 그 경고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준호에게 밥을 차려냈다. 밥상 위에는 계란말이와 미역국, 그리고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며칠 만에 제대로 밥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먹어. 많이 먹어."
준호는 숟가락을 들었다. 아버지가 건너편에 앉아 자신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이상했다. 감사함? 아니면 다른 무언가? 준호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응?"
"빚이... 어떻게 없어진 거예요?"
아버지의 표정이 흐려졌다. 마치 준호의 질문이 자신의 기억을 건드린 것처럼. 하지만 그 흐림은 순간이었다. 다시 밝아졌다.
"모르겠지. 은행에서 실수했나 봐. 어쨌든 없어진 거 아니야."
거짓말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거짓말이 느껴졌다. 하지만 준호는 추궁하지 않았다. 왜인지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머리가 계속 무거웠다.
준호는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계속 자신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무거웠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아니, 무언가를 잃어가는 것을 감지하는 것처럼.
오후가 되자, 준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장에 놓인 오래된 사진첩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자신도 웃고 있었다.
준호는 그 사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이 기억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기억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그 날의 감정이, 그 날의 온기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건설사 현장 관리자였다.
'오늘 지하 30층 공사 재개. 예정 시간 오후 3시.'
준호는 메시지를 읽었다. 지하 30층. 그 단어가 뭔가를 건드렸다. 어제 밤에... 뭔가 있었다. 하지만 뭐였는지 알 수 없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공사 감독 김 반장이 준호를 불렀다.
"이준호, 어제 야간 근무 때 뭔가 봤냐?"
"뭘요?"
"지하에서 소리 난 거. 이상한 소리."
준호는 감독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이 마주쳤다. 감독의 얼굴에는 뭔가 아는 사람의 표정이 있었다. 마치 자신도 같은 일을 겪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그 말이 입술을 거부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의지가 그의 입을 움직이는 것처럼.
감독은 한 동안 준호를 바라봤다. 그 다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못 봤으면 됐다."
지하 30층의 공사는 여느 날처럼 진행됐다. 암반을 깨고, 흙을 퍼 올리고, 기둥을 세우고. 준호는 그 모든 작업을 했다. 하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일을 처음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발이 자동으로 나아갔다.
오후 6시쯤, 준호는 잠깐 쉬기 위해 한구석에 앉았다. 물병을 들고 물을 마셨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벽면의 바위틈 사이에, 종이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준호는 일어나 그것을 뽑아냈다. 종이는 낡았다. 매우 낡았다. 마치 수십 년을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종이 위에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한글이었다.
'계약서'
준호의 손이 떨렸다. 뭔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기억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그는 종이를 펼쳤다.
계약서는 이상한 언어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은 명확했다.
'계약자의 서명란'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미 여러 명의 서명이 있었다. 펜으로 적힌 것도 있고, 붓으로 적힌 것도 있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찍은 지문도 있었다. 가장 최근의 서명은 3개월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
준호는 그 이름들을 읽었다. 그들이 모두 아는 이름들이었다. 작년에 현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들.
그의 심장이 빨라졌다. 뭔가 중요한 게 떠올라야 했다. 어제 밤이 떠올라야 했다. 그런데 떠올라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 기억을 깔끔하게 도려낸 것처럼.
준호는 종이를 다시 들었다. 서명란 아래에는 한 줄의 글이 더 있었다.
'36회 계약 시 계약자의 가장 소중한 기억이 완전히 소멸한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준호의 몸이 얼어붙었다. 무언가를 깨달았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무언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의 손에 들린 계약서에서 무언가 따뜻한 감각이 전해졌다. 종이가 데워지고 있었다. 아니, 종이 자체가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지하 30층의 모든 불이 꺼졌다. 캄캄해졌다. 손전등도 깜박거렸다. 그리고 준호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계약서를 들었군요."
계약 귀신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그것을 확실히 알았다. 어제 밤 기억은 없지만, 그 목소리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이건... 뭐예요?"
"당신이 이미 서명한 계약입니다. 다시 서명하시겠습니까?"
"뭐? 내가 이미..."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에 검은 잉크 자국이 있었다. 어제 밤의 일이 떠올라야 했다. 아니, 떠올라야 했다. 하지만 떠올라지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만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다음 계약은 한 달 후입니다."
귀신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불이 켜졌다. 손전등이 다시 빛났다. 준호는 여전히 종이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종이에는 새로운 서명이 하나 더 있었다.
준호의 서명이었다.
준호는 종이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현장을 나왔다. 달리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밤 8시였다. 준호는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창백했다. 마치 며칠을 자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눈빛에서 뭔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안의 무언가를 천천히 지워내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다.
"준호, 밥 먹어?"
준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 너 괜찮아?"
아버지가 준호의 방 문을 열었다. 준호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의 얼굴이 밝다가 순간 흐려졌다.
"뭐 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이 변했다. 뭔가를 감지한 것처럼. 아버지는 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었다.
"준호... 너 눈이 이상한데?"
"네?"
"뭔가... 눈빛이..."
아버지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아들이 누군가 다른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처럼.
준호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그린힐 타워의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지하는 계속 파여지고 있었다.
준호는 달력을 집어 들었다. 한 달 뒤 밤 11시. 그 시간이 이미 표시되어 있었다. 아니, 표시된 게 아니었다. 준호가 표시하지 않았는데도 그곳에 빨간 글씨로 '예약'이라고 적혀 있었다. 휴대폰을 켜자 잠금 화면에도 알림이 떠 있었다.
'다음 계약까지 30일'
그 숫자는 매 초마다 줄어들고 있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했지만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았다. 알림은 계속 떴다.
밤 11시가 되자,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계약 시간입니다'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하지만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준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준호를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낯설어 보였다. 마치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도 누군가 다른 존재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낯선 두려움이 아버지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준호는 아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입술은 자신의 신호를 거부했다. 대신 그의 몸은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준호? 어디 가?"
아버지가 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이 떨렸다.
"나... 잠깐..."
준호가 겨우 말했다. 하지만 그 말도 누군가 다른 목소리로 들렸다.
준호는 현관을 나갔다. 밤거리로 나왔다. 자신의 발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자신의 몸은 그 시간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