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정체
폐가의 벽에 기대 앉은 이준호의 호흡이 끊어졌다가 돌아왔다. 황금빛이 손가락 끝에서 자멸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은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서연이 그의 옆에 앉았을 때, 그녀의 검은 불이 황금빛에 닿았다. 두 불이 만나는 순간 이준호의 눈이 열렸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보다 더 깊은 무언가였다.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 들어."
어린 시절의 자신이 보였다. 궁궐의 어두운 복도에서, 형인 황태자 서준호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거역한다고 했어. 그건 거짓이야."
형이 손을 뻗었다. 어린 준의 뺨을 만지던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되면, 넌 자유로워질 거야. 나는 약속한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왕이 된 것은 형이 아니었다.
이준호의 몸이 경련했다. 호흡이 끊어졌다가 고통스럽게 돌아왔다. 손가락의 황금빛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벽을 태웠다. 바닥을 태웠다. 자신의 팔을 태웠다.
"형은... 형은 죽지 않았어."
이준호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15년 동안 지워져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형이 아니라..."
말이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이준호는 폐가의 벽에 붙어 있는 깨진 거울을 봤기 때문이었다.
거울 속에는 왕이 있었다.
왕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준호가 거울 앞으로 비틀거렸다. 손이 거울을 짚었다. 손가락은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거울이 녹아내렸다. 형태를 잃었다. 액체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왕이었어?"
아니다.
"내가... 왕이 될 수 있었어?"
아니다.
"내가... 왕과 형제야?"
이준호의 무릎이 꺾였다. 폐가의 바닥에 쓰러졌다. 황금빛이 통제 불능으로 폭발했다. 천장의 기와가 부서졌다. 벽이 갈라졌다. 먼지가 소용돌이쳤다.
"내 이름은..."
민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폐가의 입구에 서 있었다. 손에는 낡은 일기장이 들려 있었다. 기억지킴이 조직의 기록물이었다.
"이준호입니다."
민서가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들어왔다. 황금빛의 폭주 속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 또 다른 그림자들이 폐가의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기억지킴이 조직의 일원들이었다.
"당신은 황태자 서준호의 형. 왕실의 진정한 계승자."
이준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심장이 한 번, 두 번, 세 번 뛰었다. 그리고 멈춰 버렸다.
"당신의 아버지, 전왕은 당신을 심문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기억을 지웠습니다."
민서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이 이준호를 마주쳤다.
"왕이 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준호의 가슴에서 황금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손가락에서 나오는 불이 아니었다. 심장에서 나오는 불이었다. 15년간 누르고 있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터져 나왔다.
"형은?"
목이 메었다.
"형은 어디 있어?"
민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하기 전에 서연이 나타났다.
폐가의 다른 쪽 출입구에서. 그녀의 눈은 여전히 검은 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었다.
"형은 이미 죽었어."
서연이 말했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15년 전의 밤, 아버지는 형을 죽였어. 형이 아버지를 거역했다는 혐의로.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
서연이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형은 당신을 보호하려고 했어. 당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 둘 다를 제거하려고 했어. 그래서 형은 자신을 희생했고, 당신은 심문관이 되었고, 나는..."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당신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했어. 형을 지켜달라고."
이준호의 몸이 얼었다.
"나를 지우면, 아버지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당신은 나를 지웠어. 당신은 날 죽은 것처럼 만들었어."
서연이 무릎을 꿇었다. 이준호의 눈높이에 맞춰.
"15년간 나는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어. 왜 내 몸이 아팠는지, 왜 밤마다 악몽을 꿨는지, 왜 당신을 보면 심장이 아팠는지 모르고."
이준호가 손을 뻗었다. 서연의 뺨을 만지려고. 하지만 손가락의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서연의 얼굴 옆의 공기를 태웠다.
"미안해."
목이 쉬었다.
"미안해."
반복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준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민서가 일기장을 펼쳤다. 페이지를 넘겼다. 페이지를 또 넘겼다.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지운 사람들의 기록."
민서가 가리켰다.
"2,847명. 모두 당신의 황금빛으로 기억을 잃었습니다. 반역자로 낙인찍혀. 혹은 범죄자로.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준호의 눈이 기록을 훑었다. 이름들. 연도들. 죄목들. 모두 거짓이었다. 모두 왕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민서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죽음, 광기, 자살로 흩어졌습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호흡이 끊어졌다. 황금빛이 폐가의 벽을 태웠다. 천장이 내려앉았다.
"그들을 되돌릴 수 있습니까?"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이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허공의 목소리였다.
민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완전히 소멸할 때, 그들의 기억은 되돌아옵니다."
"어떻게?"
"당신의 자아가 완전히 사라질 때. 그 순간 당신이 지운 모든 기억이 해방됩니다. 마치 쇠사슬이 끊어지듯이. 그것이 기억지킴이 조직이 지켜온 진리입니다."
민서가 일기장을 내려놨다.
"그것이 유일한 속죄입니다."
이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황금빛이 나왔다. 그것은 손가락에서 나오는 불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절규였다.
서연이 그를 안았다. 검은 불로 그를 감싸며.
"내가 결말을 짓겠다."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산산조각 나면서도 명확했다.
"내가 모든 걸 끝내겠다."
그 순간, 궁궐에서 신호가 왔다.
경종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왕이 알았다는 신호였다. 누군가가 왕에게 알렸을 것이다. 남궁파의 현주 남궁현이 궁궐의 암실에서 왕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이준호가 깨어났다고. 기억지킴이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고. 왕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궁궐 전역이 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호위대가 동원되었다. 암살자들이 풀려났다. 왕실의 모든 무기가 작동했다.
그리고 왕의 목소리가 궁궐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이준호를 찾아라.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상관없다. 그리고 그녀도. 그 여인도. 모두 없애버려라."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서연을 데려가."
"당신은?"
서연이 물었다.
"당신은 어디 가는 거야?"
이준호가 폐가를 바라봤다.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천장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속에서 황금빛이 폭발하고 있었다.
"나는 왕을 만나러 가."
이준호가 일어섰다. 손가락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통제 불능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화염이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돌아가서, 나를 지운 자의 기억을 깨워주겠다."
이준호가 폐가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황금빛이 뒤를 따랐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리고 나는 사라질 거야."
서연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준호는 폐가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황금빛만 남아 회랑을 비추며 점점 멀어졌다.
"이준호!"
서연의 목소리가 폐가 전체를 울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민서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가야 합니다. 지금."
"내가 그를 놔둘 리가 없어. 내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민서의 목소리가 차갑고 명확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의 생존. 당신이 증거가 되어 살아남는 것. 그것이 그의 속죄입니다."
서연의 눈이 흔들렸다. 눈물이 아니라, 광기가 흔들렸다. 15년간 쌓인 분노가 손가락 끝까지 밀려올랐다. 검은 불이 폐가의 벽을 태웠다.
"약속해.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기억이 살아있다고. 내가 증인이 되는 동안,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약속합니다."
민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검은 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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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지하 깊은 곳.
심문관실.
이준호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왕실 호위대의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그를 추적했지만, 황금빛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마치 벽처럼. 마치 성처럼.
하지만 이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귀향이었다.
황금빛으로 장식된 벽이 보였다. 그 벽은 15년간 수백 명의 비명을 흡수해 왔다. 그 벽은 거짓의 역사로 칠해져 있었다. 그 벽은 왕의 권력을 증명했다.
이준호는 그 앞에 섰다.
거울을 마주하듯이.
심문관실의 중앙에는 의자가 있었다. 고문의 의자. 기억을 태우기 위한 의자. 이준호는 자신이 그곳에 앉혀 있는 것을 봤다. 15년 전의 자신을 봤다. 황금빛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누군가의 기억을 태우는 자신을 봤다.
그리고 그 옆에서 명령하는 자를 봤다.
왕.
이세준.
그는 이준호의 형이 아니었다. 이준호의 왕이었다.
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준호가 온다는 것을. 남궁파의 현주 남궁현이 궁궐의 암실에서 왕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이준호가 깨어났다고. 기억지킴이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고.
왕이 현관에 나타났다. 호위대를 거느리고. 검을 들고. 그 얼굴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 뒤에는 절망이 아니라 광기가 숨어 있었다. 왕이 두려워한다. 그것은 궁궐 역사상 처음이었다. 하지만 왕은 여전히 왕이었다.
"넌... 넌 누구냐?"
왕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명령조였다.
"넌 이준이다. 이준. 그것이 넌 거다."
"아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15년 전의 목소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 깊고, 더 차갑고, 더 명확한 목소리로.
"나는 이준호다. 서준호의 형. 왕실의 진정한 후계자. 그리고 나는 지금 깨어났다."
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이준호를 바라봤다. 마치 유령을 보듯이. 마치 자신의 죄를 보듯이. 그 순간, 왕은 이준호의 눈에서 무언가를 봤다. 15년간 심문관실에서 자신을 봤던 그 눈에서. 공포였다. 자신의 공포였다.
"내가 지웠다. 내가 모두 지웠다."
왕이 소리쳤다.
"넌 없다. 넌 없어야 한다!"
이준호의 손이 들어올려졌다.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방의 기억을 지우는 황금빛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기억을 해방하는 황금빛이었다.
그 순간, 심문관실의 벽에 금이 갔다. 천장이 흔들렸다. 바닥이 갈라졌다. 15년간 억눌려 있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황금빛이 심문관실을 가득 채웠다. 그 빛은 벽을 태웠다. 기록을 태웠다. 거짓을 태웠다.
그리고 그 빛이 궁궐 전체로 퍼져나갔다.
왕이 비명을 질렀다.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코에서 피가 흘렀다. 기억이 아니라, 진실이 그의 뇌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가 누구를 죽였는지. 그가 왜 이 모든 거짓을 만들어야 했는지. 왕의 비명은 음정을 잃고 짐승의 울음으로 변했다.
호위대가 이준호를 향해 칼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준호의 황금빛이 궁궐 전체를 관통했다. 심문관실의 벽이 무너졌다. 회랑이 흔들렸다. 왕의 침실까지 황금빛이 도달했다.
그곳에서 왕비 이화는 무릎을 꿇었다. 15년간 자신이 저질렀던 죄들이 떠올랐다. 왕의 명령으로 죽인 자들의 얼굴들. 기억을 지운 무고한 사람들의 울음소리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궁궐 전역에서 비명이 울렸다. 호위대의 기억이 깨어났다. 암살자들의 죄가 돌아왔다. 왕실의 모든 비밀이 한순간에 노출되었다.
2,847명의 지워진 기억이 동시에 해방되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이름이 되살아나고, 광인이 된 자들의 정신이 복원되고, 자살을 선택했던 자들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궁궐 전역의 모든 사람들이 그 기억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왕의 거짓이 폭로되는 순간, 그들의 기억 또한 해방되는 것이었다.
이준호의 황금빛은 더 이상 개별적인 기억을 태우는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실 전체의 거짓을 녹이는,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이었다.
그 빛 속에서 이준호는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자아가 서서히 소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이었다. 15년간 억눌려 있던 모든 것이 빛이 되어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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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빠져나온 서연은 숨을 고르며 검은 불을 응시했다.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검은 불을. 그것은 황금빛의 상대편에 있는 불이었다. 이준호의 황금빛이 기억을 해방하는 불이라면, 서연의 검은 불은 그것을 증명하는 불이었다. 둘은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완성될 수 없는.
그 검은 불 속에서 이준호의 황금빛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정말 사라질까?"
서연이 중얼거렸다.
민서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당신이 기억하는 동안, 그 사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서연의 눈이 떠졌다. 민서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있었다. 기억지킴이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정한 감정이 묻어났다.
이 순간, 궁궐에서 마지막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종말의 음향이.
서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만 걸어갔다. 검은 불을 들고. 증거가 되어.
그리고 이준호의 황금빛은 궁궐의 하늘을 가득 채우며, 천천히, 매우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그것은 서연의 검은 불 속에 남아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고 있었다.